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을 겪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것은 '죽음이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성장기에 있는 십대의 관점에서는 40대 이후의 어른들은 도대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사나 하는 회의감이 팽배할 테고, 20,30대의 혈기 왕성한 시절에는 자신에게는 영원히 60대 이후의 노년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하며, 막상 그 모든 시기를 흘려보내고 나면, 죽음이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언뜻언뜻 되새기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바이러스의 창궐로 건강하던 사람들조차 하릴없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나는 이 시대의 비극을 끊임없는 장례 행렬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시집 <빛그물>을 발표했던 최정례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투병 생활을 하던 시인은 진통제 1mg이 너무나 무거웠다고 고백했었다. 그런가 하면 침뜸의 명인으로 알려진 구당(灸堂) 김남수 옹도 세상을 떠났다.
(중략) 그동안 사느라 애썼다,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 이런, 이런, 냄비 뚜껑 굴러떨어지는 소리, 아무래도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 사느라 애쓰더니 죽는 게 더 힘들구나, 언제나 놓여날까, 복부에, 폐에, 콩팥에, 줄줄이 줄들을 매달고, 항암주사에, 방사선에, 반은 죽은 몸뚱이에게, 이제 아프지 않게 될 거라고 어떻게 감히, 냄비는 무지막지 반짝이며 싱크대 앞을 환히 밝히는데, 이 냄비로 무슨 공갈 우거지탕을 끓여보겠다고, 어쨌든 마음의 준비를 하라니까, 가서 장례 절차도 의논하고, 수목장은 어떠니, 딸이라고 영정 사진 못 들 거 없다, 말이라도 보태면서, 오락가락하는 귀에 대고서, 그런데 두 팔이 욱신거리도록 번쩍이는 이 냄비는 도대체 왜 무슨 용도로 반짝여야 하는 것이냐. (시 '냄비는 왜' 중에서)
한인 교포들이 많이 사는 LA만 하더라도 '1분마다 10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6분에 1명씩 코로나로 사망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따뜻했던 날씨가 돌변하여 바람이 불고 쌀쌀해진 주말의 오후, 죽음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음을 문득 떠올렸던 오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지 않아도 하루의 시간이 새삼 소중해지는 이유이다. 삶은 1mg의 진통제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 고통의 나날인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계속되는 한 '잠깐 멈춤'을 요구할 수가 없다. 팬데믹이 멈출 때까지 몇 달이고 동면에 들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