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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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단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도 물론 가까이하지 않는다. 예컨대 공정, 정의, 자유, 객관적, 상식, 용서 등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이상적인 낱말들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반성 대신에 구체성도 없는 과대망상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어떤 이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분별한 믿음을 표출하도록 유도한다. 그(또는 그녀)가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증거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그(또는 그녀)가 마치 정의의 화신인 양 인간 양심의 정수인 양 대우하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처사가 선거판이나 특정인의 강연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하여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일상 다반사에서 늘 있는 일이다.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감정적'이고 사적인 글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줄거리가 없는 서평일 것이다. 이 글이 일반적인 형식의 해제인지 추천사인지 독후감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고통에 대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고통에 대한 고통이란, 침묵과 망각 외에는 고통에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용서'는 이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어야 한다."  (p.50)


정희진 작가의 저서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인 글의 모음이다. 그래서 더 깊이 읽게 되는 책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적이며 완벽한 객관에 이른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제되는 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게 개별적인 타인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지루해하거나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세 번째 책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정희진 개인의 생각들을 쏟아낸 책이며 그래서 더 값지고 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 실린 27편의 글은 모두 정희진의 생각일 뿐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나 창작을 적당히 모방하거나 답습한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정희진의 덕후가 탄생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 글은 <대지의 딸>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다. 독서 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독후감은 개인의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다."  (p.220)


작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이라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필자이자, 고통과 몸, 권력과 지식, 젠더와 관계 등 논쟁적인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리영희의 저서 <대화>에 대한 서평에서는 리영희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남자라는 사회적 우월성을 배제한 채 행복한 근대인으로서의 리영희, 권력의 주조 방식을 넘어서는 지성과 인식의 소유자,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에 어느 정도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준 인물로서 존경의 마음을 내비친다.


"결국 나는 이 분열에 대해 쓴다. 모든 의미는 차이의 산물이며, 앎은 경계를 인식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진리'가 내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만용을 주었다. 텍스트와의 대화는 독자와 저자 간 갈등의 의미를 정치화함으로써 텍스트를 소통 가능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mapping)이다."  (p.176)


나는 자신이 하는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강조하고 입만 벌리면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는 어느 정치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어느 당은 당원 전체가 그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전해 듣곤 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낱말들을 나열하는 그의 연설 자체가 사기인 것처럼 당원들 모두가 그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도 사기에 가깝다. 로봇이 아닌 이상,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로봇처럼 일괄적인 대오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선전하는 정당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괴멸한 것처럼 말이다. 정희진의 글이 이 시대에 귀하게 읽히는 까닭은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와 언론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과거로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너와 다르고 너의 생각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탐구하는 것, 사회적 결합과 연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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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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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체감하지 못하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영혼도 제압당한 상태로 글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는 일은 현실에서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다. 타자에 의한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나 좌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글맛 혹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완성된 형태의 글의 영역을 체험하는 느낌은 특별하거나 다소 생경하다. 누군가가 글을 통하여 세태에 찌든 나의 영혼을 순간적으로 정화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런 특별한 체험은 내가 원한다고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글을 쓴 직후에는 정신적으로 고양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는 글을 쓰는 데서 오는 기쁨보다는 책을 읽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교훈이나 감동은 물론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해 신선한 충격이나 새로운 경험을 덤으로 체험하게 된다. ‘말’과 ‘시’와 ‘삶’과 ‘여성’이라는 각 부의 제목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핵심 키워드를 부의 제목으로 선정하여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간다. 독자들은 어쩌면 서문에서 밝힌 작가의 도발적인 문장에 움칫 놀라 본문을 읽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지도 모르겠다.


"선한 것을 믿고 싶지만 대체로 불신하기를 좋아하며 아름다움보다 추함에 끌리곤 한다. 가능태를 따져보는 것을 습관처럼 내재하고 있지만 쉽게 감동하기도 쉽게 차가워지기도 한다. 불안 때문에 수다스러워지고 수치심에 입을 다물곤 한다. 산문을 쓰기로 한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과거를 곱씹지만 현재만 알고 싶다. 엉망진창이지만 꽤나 성실한 사람의 성실하고 엉망인 삶에 관한 글. 읽으면 좋고 안 읽으면 더 좋다. 보세요. 나의 우울을."  (P.5 '들어가며')


1부 '말'에서 작가는 N번방과 문단내 성폭력 문제를 짚고 있다. 며칠 전에도 성추행 당사자였던 고은 시인이 침묵을 깨고 다시 작품 활동을 개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최영미 시인에 의해 밝혀진 그의 추악한 실체가 5년 전의 일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보란 듯 문단에 복귀한 것이다. 백은선 시인 역시 우리 문단에서 성희롱과 추문의 대상이 되는 여성 작가들에 대해 쓰고 있다.


2부 '시'에서 시인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가 어떻게 위안을 주는 존재였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소망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안팎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소망을 쟁취해야 한다고 응원과 지지의 말을 건넨다. 3부 '삷'에서 시인은 코로나19 시대의 반복되는 일상과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온갖 공포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사랑의 힘이 시를 쓰게 하고, 시를 쓰는 데서 사랑이 온다는 믿음.


"말과 글은 이만큼이나 멀고 아득하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내면에서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사람이 내밀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때와 그것을 마침내 글로 쓸 수 있게 될 때의 순간을 절대로 쉽게 예상하거나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p.197)


4부 '여성'에서 시인은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들, 개인에게 분열증을 야기하는 한국 사회, 기후위기를 조장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론하며 이와 같은 문제적인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여성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여성 서사에도 '성녀' 혹은 '악녀' 프레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점이 존재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 스스로 함께 실천하며 단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이니까 멋지게 굿바이를 날리며 퇴장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아직 할말이 더 있는데 못한 것 같고 갑자기 너무 아쉽고 그렇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궁핍해지지 않는 이상 절대 다시는 산문집을 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 또 다짐한다. 산문을 쓰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느낌인 것 같다(내가 임금이란 소리는 아니고)."  (p.271~p.272)


세상에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무수히 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는 책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이따금 취미 삼아 글을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곤 한다.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내내 피하고 외면했던 것이 하나 있다. 성장 과정에서 시인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하는 점. 그럼에도 일부러 피했던 까닭은 성장과정이 적당히 힘들었던 사람은 그걸 자랑할 수 있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으로부터 동질감이나 동료 의식을 느끼기보다 먼저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본능이리라.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 그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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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봄날의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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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자. 슬픔에도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내보이는 적극적인 슬픔과 꺽꺽 울음을 안으로만 삼키는 소극적인 슬픔이 있는 것처럼 슬픔이란 이런 것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슬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주변의 분위기와 주변을 맴도는 어떤 느낌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주르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슬픔,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하자. 미야모토 테루의 에세이 <생의 실루엣>을 읽고 있노라면 과거의 어떤 슬픈 기억을 통과한 현재의 암묵적인 슬픔이 마치 창호지에 물감이 번지듯 밑바닥부터 축축하게 젖어온다. 그럴 때 한 권의 책은 내 기억 속에서 슬픔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온갖 슬픈 기억 속에서 암묵적인 슬픔만 쏙쏙 뽑아내는 필터의 역할을 하는 듯도 하다.


"그나저나 내가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얻은 수많은 보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는 그것을 하나하나 궤적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거산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몸소 깨달았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p.87)


스물다섯 살 때 발작이 덮쳐온 뒤 9년이 지나서야 진단을 받고, 신경안정제가 자신의 상비약이 된 지 30년이나 되었다는 작가는 1년에 두 번씩 10년에 걸쳐 발행해 온 <소유>라는 잡지에 글을 연재하였고,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을 소재로 이 이상 쓰면 창작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철할 수 있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책에는 평생 안 보고 살던 이복형을 만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온 이야기, 어릴 적 입양되었던 동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장성한 후 지진으로 죽었다는 소식, 공황장애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일이 몹시도 힘들던 시절 서점의 어느 문예지를 보고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 불가리아 여행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자신들을 국경 밖으로 태워다 줄 차를 무작정 기다렸던 일, 어린 시절 터널 연립주택에서 시체를 발견했던 사건 등 작가는 자기 안에 있던 작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 터널 연립주택 시절로부터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고를 지키지 않고 어슬렁거리던 때가 있어서 확실히 변변한 일은 없었지, 하며 부끄러운 생각에 잠긴다. 세상에는 70억 명의 인간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 있다는 뜻이다. 터널 연립주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왠지 숙연한 기분이 든다."  (p.178)


책을 번역한 이수지 번역가는 '담백한 문체로 일상의 파문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고 썼다. '인간도 식물도 곤충도 모두 생명이며, 돌멩이 하나조차 생명으로 보일 수 있다.'고 믿는 작가는 '바람에서도 대기에서도 비에서도 구름에서도 생명의 모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명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사실 미야모토 테루의 <생의 실루엣>을 적게 잡아도 두어 번은 읽은 듯하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주변을 감싸는 모든 사물의 물성과 그것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세상의 원리들이 무엇 하나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 이것이 지금만큼 요구되는 시대는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방향을 향해 구체적으로 움직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따위와는 상관없이 인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107)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 순간에도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며,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나 존재한다는 걸 믿기로 하자. 삶의 연대는,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는 우리가 믿는 암묵적인 슬픔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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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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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의 특징은 읽는 내내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좀체 손에서 책을 내려놓기 어렵다는 데 있다. 소설의 구성도, 스토리의 전개도, 심지어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까지도 모두 인공의 냄새가 폴폴 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뻔한 결말이거나 뻔한 스토리일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의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단 책을 펼친 독자라면 결코 쉽게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덫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 인과의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채 습관처럼 또다시 일본 소설을 손에 잡는다.


"터키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텔레비전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형광등도 커튼도 현관 매트도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p.5)


오가와 이토의 소설 <달팽이 식당>은 그렇게 시작된다.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던 날 밤, 열다섯 살에 집을 나온 주인공 린코가 그동안 애인과 함께 세를 얻어 살던 집의 모든 물건이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것은 가전제품이나 살림살이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애인과 동업으로 음식점을 열겠다는 희망으로 한 푼 두 푼 모았던 창업자금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하면서 집 안 벽장에 알뜰히 보관해 두었던 창업자금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할머니가 물려준 겨된장 항아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린코는 그때 이후 정신적 충격에서 오는 일종의 히스테리 증상 탓인지 말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린코는 결국 겨된장 항아리만 안고 집을 뛰져 나왔던 과거처럼 심야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있는 시골의 집으로 향한다. 애인에게 차이고 빈손으로 돌아온 린코를 어머니는 크게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고로 쓰던 공간에 식당을 개업하겠다는 린코의 계획을 적극 지원하고 돕는다. 물론 이와 같은 도움은 모두 린코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하는 것이었다. 창고의 물건을 비우고 식당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애쓰는 린코를 위해 린코와도 친분이 있는 마을 주민 구마 씨로 하여금 도와주도록 부탁하였음은 물론 창업 자금도 선뜻 내주었던 것이다. 린코의 어머니 루리코의 엄마였던 할머니로부터 요리의 기초를 배웠던 린코는 요리라면 언제든 자신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달팽이 식당의 이미지가 거의 굳어졌다. 달팽이 식당은 손님을 하루에 한 팀만 받는 조금 색다른 식당이다. 전날까지 손님과 면접 혹은 팩스나 메일로 대화를 주고받아 무엇이 먹고 싶다든가, 가족 구성이라든가, 장래의 꿈이라든가, 예산 등을 상세하게 조사한다. 나는 그 결과에 따라 그날의 메뉴를 생각한다."  (p.66)


입소문이 좋게 난 달팽이 식당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엄마 루리코와의 관계는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잃고 필담으로 나눌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환경 탓이기도 했지만 아빠 얼굴도 모른 채 엄마와 함께 성장했던 린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루리코가 자신의 친엄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자신의 엄마가 운영하는 술집 아무르의 단골손님 중 한 명이 자신의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등으로 린코와 루리코 사이의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소설은 그렇게 막바지로 향하고 독신으로 지냈던 엄마의 비밀이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벗겨지게 되는데...


"내게 요리란 '기도' 그 자체다. 엄마와 슈이치 씨와의 영원한 사랑을 비는 기도이고, 몸을 바친 엘메스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고, 그리고 요리를 만드는 행복을 베풀어준 요리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이기도 했다."  (p.212)


린코가 의심하였던 엄마에 대한 비밀은 루리코가 세상을 떠난 후 뻐꾸기시계 밑에서 발견된 엄마의 편지를 통하여 모두 밝혀진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내 가슴속에 넣어놓고 열쇠로 꼭꼭 잠가두자. 아무에게도 도둑맞지 않도록. 공기에 닿아 색이 바래지 않도록. 비바람을 맞아 흐트러지지 않도록."  (p.218)


언젠가 읽었던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떠올리게 하는 오가와 이토의 소설 <달팽이 식당>은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의 소설에서 단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고 동화 같은 잔상들이 몇몇 이미지로 남는다. 책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가독성과 비슷비슷한 스토리로 독자들을 홀리는 중독성은 일본 소설이 갖는 매력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어, 이 책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하면서도 여전히 그 비슷한 이야기를 소설로 다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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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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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일이었으니 꽤나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강원도의 한 암자를 그곳에 계신 스님과 함께 올랐던 적이 있다. '그게 뭔 큰일이라고?' 하며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암자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위치해 있던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었고, 길게 이어진 철조망 사이에 난 엉성한 출입문조차 평시에는 늘 잠겨 있었다. 암자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그 길을 사람들은 적잖이 궁금해하면서도 출입문에 붙은 경고문구 때문인지 감히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스님과 함께 출입문을 통과하여 두어 시간의 산행 끝에 암자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산 정상에서 내가 느꼈던 첫 느낌은 내가 문명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들렸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너무도 조용하다는 건 아마도 인간이 내는 백색 소음이나 평소 우리가 들리는 줄도 모른 채 간과하며 지냈던 온갖 문영의 소리, 예컨대 차소리, 앰프 소리, 특정할 수 없는 온갖 기계음 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너무나 잘 적응이 되어온 탓에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선별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술을 아주 이른 나이부터 습득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말 아무 소리도 없는 정적 상태는 고요하기보다는 고요함이 시끄럽게 설치고 잇는 상태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백색소음이 있는 것이 어떨까.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는 백색소음이 있어야 마음이 더 안정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색소음이 있어야 집중이 더 잘되고, 잠도 더 잘 온다는 사람들도 있다."  (p.41)


김영민 교수의 산문집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었던 것은 지난달 중순께였다. 2년 전쯤에 읽었던 저자의 다른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여전히 긍정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읽게 된 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다 할 리뷰를 쓰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10.29 참사의 여파가 가슴 한켠을 차갑게 파고들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산다는 것은 허방을 짚듯 허망한 일이지만 이태원의 뒷골목에서 아프게 스러졌던 젊은 영혼들이 그와 같은 삶의 진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끝내 안타까워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상기시킨다."  (p.30)


1 '허무의 물결 속에서', 2 '부, 명예, 미모의 행방', 3 '시간 속의 필멸자', 4 '오래 살아 신선이 된다는 것', 5 '하루하루의 나날들', 6 '관점의 문제', 7 '허무와 정치', 8 '인생을 즐긴다는 것'의 총 8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생의 허무와 그것을 딛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저자 나름의 철학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저자의 숨은 의도가 엿보이는 문장들이 등장하곤 한다. 주제에서 벗어난 듯한 이러한 문장들을 통하여 독자들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책의 문장들을 꼼꼼히 훑으며 시간을 소일하게 된다.


"그러면 누가 미숙한 정치가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 막대한 화재가 치밀한 악의를 가진 성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선의를 가진 유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직업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줄 것인가의 문제는 결정할 수 있다."  (p.228~p.229)


최근에 우리나라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흔히 듣는 말은 '정치가 실종됐다'는 것.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줬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선택을 한 대가는 참으로 혹독하다. 여와 야의 대치는 물론 남과 북의 극한 대치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최대치로 높아졌고, 이를 반영하듯 해외 투자자들은 서둘러 자금을 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환율은 치솟고, 수입 물가가 오르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본격적인 경기침체 상황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준 대가 치고는 너무 혹독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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