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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ㅣ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평점 :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단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도 물론 가까이하지 않는다. 예컨대 공정, 정의, 자유, 객관적, 상식, 용서 등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이상적인 낱말들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반성 대신에 구체성도 없는 과대망상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어떤 이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분별한 믿음을 표출하도록 유도한다. 그(또는 그녀)가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증거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그(또는 그녀)가 마치 정의의 화신인 양 인간 양심의 정수인 양 대우하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처사가 선거판이나 특정인의 강연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하여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일상 다반사에서 늘 있는 일이다.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감정적'이고 사적인 글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줄거리가 없는 서평일 것이다. 이 글이 일반적인 형식의 해제인지 추천사인지 독후감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고통에 대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고통에 대한 고통이란, 침묵과 망각 외에는 고통에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용서'는 이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어야 한다." (p.50)
정희진 작가의 저서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인 글의 모음이다. 그래서 더 깊이 읽게 되는 책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적이며 완벽한 객관에 이른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제되는 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게 개별적인 타인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지루해하거나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세 번째 책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정희진 개인의 생각들을 쏟아낸 책이며 그래서 더 값지고 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 실린 27편의 글은 모두 정희진의 생각일 뿐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나 창작을 적당히 모방하거나 답습한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정희진의 덕후가 탄생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 글은 <대지의 딸>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다. 독서 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독후감은 개인의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다." (p.220)
작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이라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필자이자, 고통과 몸, 권력과 지식, 젠더와 관계 등 논쟁적인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리영희의 저서 <대화>에 대한 서평에서는 리영희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남자라는 사회적 우월성을 배제한 채 행복한 근대인으로서의 리영희, 권력의 주조 방식을 넘어서는 지성과 인식의 소유자,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에 어느 정도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준 인물로서 존경의 마음을 내비친다.
"결국 나는 이 분열에 대해 쓴다. 모든 의미는 차이의 산물이며, 앎은 경계를 인식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진리'가 내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만용을 주었다. 텍스트와의 대화는 독자와 저자 간 갈등의 의미를 정치화함으로써 텍스트를 소통 가능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mapping)이다." (p.176)
나는 자신이 하는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강조하고 입만 벌리면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는 어느 정치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어느 당은 당원 전체가 그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전해 듣곤 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낱말들을 나열하는 그의 연설 자체가 사기인 것처럼 당원들 모두가 그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도 사기에 가깝다. 로봇이 아닌 이상,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로봇처럼 일괄적인 대오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선전하는 정당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괴멸한 것처럼 말이다. 정희진의 글이 이 시대에 귀하게 읽히는 까닭은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와 언론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과거로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너와 다르고 너의 생각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탐구하는 것, 사회적 결합과 연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