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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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만약 우리나라 작가에 의해 씌어졌더라면 특정 종교단체에 의한 고발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구속이나 적어도 벌금형을 면키 어려웠을 테고 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비상식적인 집착이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상식의 틀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하는 것이 아닌, 나(또는 내가 속한 조직) 아니면 적으로 간주되는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민주적인(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호전적이기도 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영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한때 주일 아침 미사가 끝난 어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것이 곧 영성체를 할 때 신부님으로부터 건네받는 밀떡과 포도주를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신분증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커다란(?) 의미를 담은 행사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 장면은 과거의 어느 한때(자신이 세례를 받았던)를 떠올리게 하겠지만 이제 막 교리 교육을 받기 시작한 예비신자에게는 부러움과 선망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어물쩡 다수의 편(전 세계 인구 71억 3천만 명 중 23억 5천사백만 명)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예비신자 과정을 철저히 받지 못한 탓인지 신의 존재를 확실히 믿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신을 믿지 않았을 때, 당신이 틀리다면 영원한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옳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죽어서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버트런드 러셀의 답변 또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신이여, 증거가 불충분했습니다.  증거가요."  하느님은 과연 믿는 척하는 파스칼과 적어도 자신에게는 솔직했던 러셀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초자연적 지성으로서의 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우주를 창조했다는 신 가설에 대하여 역사적 사례와 과학적 논증을 통하여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사실이지 나는 이 책의 처음 몇 장을 넘겨 보았을 때 이 책이 어떻게 출간될 수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로 인한 폐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신권정치화 된 초강대국 미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또는 전 세계 자본을 좌지우지하는 유대자본의 위력을 생각할 때 감히 이 양대 권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학자가 나타나리라고는 믿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과학에 의해 밝혀질 먼 훗날의 이야기이거나 공상 과학소설에서만 등장할 이야기쯤으로 생각했었다.

 

종교란 필연적으로 세속적 이해관계와 결부될 수밖에 없고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종교는 더더구나 세속화 될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자본이 없는 종교는 한낱 미신에 불과할 뿐이고 언젠가는 소리도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시장을 지냈던 한 정치인은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 발언을 한 정치인의 믿음과는 별개로 종교란 본디 세력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권력화 된 종교는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나약함을 강조하고, 인간성을 불신하고, 죽음에 대해 과도한 공포를 심어줌으로써 종교는 끝없이 성장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카니즘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편에 서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종교를 배신할 수 없다.  그것이 집단적 광기의 일종이라고 판명된다 할지라도.

 

"분명히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는 종교가 주는 위로 때문이 아니라 교육에 따른 무의식적인 수용, 그리고 대안(믿지 않음)에 대한 인식 부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를 창조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틀림없이 그렇다.  그들은 그저 다윈의 놀라운 대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같잖은 신화에도 같은 말이 적용될 것이다."    (p.588 '문고판 서문'중에서)

 

동물행동학뿐만 아니라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발생학 등 과학 전분야를 두루 섭렵한 진화생물학자인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석좌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고 있는 저자의 명성에 걸맞게 이 책은 다분히 도발적이면서도 인류가 형성한 광대한 지식의 총체를 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비록 이 책을 모두 읽었고, 많은 부분에서 동감하고 있지만 내 지식이 저자의 수준에서 한참 떨어지기 때문에 반대도, 찬성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제대로 된 비판은 정보나 지식의 비대칭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곰곰이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은 지능이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적이거나 어떤 '신앙'을 지닐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이다.

 

자연현상의 하나인 '죽음'에 공포의 그림자를 덧씌움으로써 종교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교묘한 술수나, 증명할 수도 없는 어떤 심판론으로 무신론자를 겁박하는 행위는 종교인의 시각에서도 불편하다.  나는 정말 신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이 곧 믿는 척했던 나의 신앙이 올바른 선택을 통한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출발점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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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순서혁명 - 소리 없는 살인자, 고혈압.고혈당.고지혈증 잡는
가지야마 시즈오, 이마이 사에코 지음, 이소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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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가끔 엉뚱한 말이나 행동으로 나와 아내를 놀라게 하곤 한다.  그맘때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도 그때는 그랬었나? 하고 뒤돌아 보게 되지만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거의 없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부모님이나 형, 누나로부터 이따금 전해 듣는 얘기로 비교하자면 나와 아들은 붕어빵처럼 닮은 구석이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들의 일상을 아내로부터 전해 들을 때마다 늘 새롭다.  그러나 다만 한가지, 주말부부로 떨어져 살다 보니 아들의 커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없는 현실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 아내는 같은 반의 엄마들 모임에 참석하였었다.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였던 듯한데 혹시나 우리가 모르는 아들의 모습을 다른 엄마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 들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또는 두려움)을 안고 참석했었나 보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의외의 말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그 얘기를 내게 전화로 들려 주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아들과 우연히 짝꿍이 된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평소에 편식이 심한 아이였었나 보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은 어느 날 그 여학생에게 기어코 한 마디 충고 아닌 충고를 했었겠다.  그렇게 가려 먹으면 안 된다고.  그 말을 들은 여학생은 분한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기는 했지만, 그 학생의 엄마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세세히 털어놓았었나 보다.  마음 같아서는 내 아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는 것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자신의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지적을 받았다고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텐데 같은 나이의 친구로부터 들었으니...

 

그러나 나는 이 책 <식사 순서 혁명>을 읽고 부모로서의 책임이 무겁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친구의 잘못을 함부로 지적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적절한 충고의 기술을 익혔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굳게 믿고 나는 아들에게조차 그것을 고집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밥(빵), 반찬, 국을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으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방법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이 국, 반찬, 밥을 골고루 먹는 것을 당연시하고, 밥 혹은 반찬만 몰아 먹는 것을 잘못된 식습관으로 여긴다.  이런 식사 지도는 성장기 어린이의 편식 습관을 바로잡는데는 좋을지 모르나 고혈압.고혈당.고지혈증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p.113)

 

이 책은 '소리없는 살인자'로 불리는 현대인의 고질병-고혈압.고혈당.고지혈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먹는 순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비록 지금은 그 질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도 식사 순서를 바꾸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식사 순서 요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까다로운 식이요법이나 운동을 처방받은 환자들이 식단은 그대로 둔 채 단지 먹는 순서만 바꾸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지야마 내과 클리닉의 원장인 가지야마 시즈오와 오사카부립대학 지역보건학회 종합재활치료 교수로 재직 중인 이마이 사에코는 식사 순서 요법을 고안하여 환자들의 치료에 상당한 효과를 보았으며,  그 후 <식사 순서 요법>은 일본의 각 언론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식사 순서 요법'은 먼저 채소를 먹고, 그 다음으로 단백질 반찬, 마지막으로 밥이나 빵과 같은 탄수화물을 먹는 방법을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인슐린이 제어되고, 혈당 상승과 중성지방 상승이 억제되며,  결과적으로 3고(高) 증상이 치료된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식사 순서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 실천 방법은 무엇인지, 식사 순서 요법을 통하여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의 경험담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실용서는 현재 그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가 아니고서는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평생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잘못된 정보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다고 느꼈던 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식이요법과는 달리 매우 간단하다는 것이다.  일단 병에 걸린 사람이라면 완치가 될 때까지 지속적인 관리가 필수적인데 대부분은 방법상의 까다로움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식사 순서 요법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식사 순서 요법의 원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원칙 ① 무조건 채소부터 먹는다.
원칙 ② 채소 다음은 단백질 반찬을 먹는다.
원칙 ③ 밥은 마지막에 먹는다.
원칙 ④ 5분 이상 꼭꼭 씹으며 천천히 먹는다.

 

책에서는 이 식사 순서 요법과 함께 병행하면 좋을 간단한 운동과 각 음식의 효능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아들에게 잘못된 상식을 주입했던 것처럼 부모의 무지는 자식의 건강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나이가 들어서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모는 자식을 부양하는 것과 함께 자식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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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에디트 피아프 외 지음, 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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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연인들을 만날 때마다 되똥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없는 사랑은 오직 탐욕과 질투만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 나의 아날로그식 감성이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속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을 실어 나르는 까닭이다.  한번 굳어진 습관은 변화된 환경을 거부하며 제 행동에 대한 합리화의 표찰을 끝없이 만들어낸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오래 전 연인들은 편지를 쓰고 하염없이 답장을 기다리며 마음을 조렸었다.  가슴 가득한 그리움을 기다림의 세월 속에 켜켜이 쌓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나는 그렇게 옛 방식으로 사랑을 배웠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은 가끔 노래로 달래곤 했다.  노래가 없는 청춘을 생각할 수 있을까마는 그 시절의 청춘들에게 노래는 곧 세월을 견디는 위안이자, 사랑의 완성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였다.  하여, 내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면 추억보다 노래가 먼저 흘러나오곤 한다.  저마다의 추억은 노래의 선율을 따라 제각각 흐른다.  조금 더 어린 시절에 들었던 대중가요와 중,고등학교 시절의 팝송과 사랑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샹송과 삶의 무게를 깨닫는 시절의 트로트와...

 

샹송을 처음 알게 된(알았다기보다는 처음 듣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불문학과에 재학중이었던 아내는 유명한 샹송 가수의 노래들을 테이프에 담아 듣곤 했었다.  내가 이브 몽땅, 에디트 피아프, 아다모, 멜라니 사프카, 나나 무스꾸리 등 생소한 이름들을 노래와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내를 만난 덕분이었다.  그때 들었던 샹송은 내 청춘의 강렬한 지문(指紋)이었다.  나는 지금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떨려오곤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를 읽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마르셀 세르당이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에디트는 오열했다.  그녀는 2년 동안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었던 남자의 죽음에 몹시 죄책감을 느꼈다.  이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에 가눌 길 없는 큰 충격을 받은 피아프는 함께 따라죽을 생각을 하기도 했고, 영혼의 교신을 통해 사랑의 부활을 얻으려고 영매술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에디트는 마르셀을 위하여 노래하기로 결심한다.  '사랑의 찬가'는 죽은 뒤에도 영원히 그와 함께 하겠다는 절실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옮긴이의 글'중에서)

 

이 책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여자가수로 꼽히는 에디트 피아프와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그녀의 연인 마르셀 세르당이 여섯 달 동안 주고받았던 사랑의 편지를 모아 엮은 것이다.  마르셀 세르당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생애 마지막 여섯 달 동안 두 연인이 함께 나누었던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한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두 사람 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마르셀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에디트는 세상에 물들지 않은 마르셀의 순수하고 착한 심성애 반했다고 한다.

 

"나는 결코 너에게 어울릴 만큼 충분히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야.  너의 영혼은 너무도 아름다우니까.  나는 너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을 미워할 거야.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던 나이지만 말이야.  나는 네가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거야.  만일 언젠가 너에게 근심이 생긴다면 나는 너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그것을 나눌 거야.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p.104-105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중에서)

 

에디트 피아프는 다른 연인들처럼 마르셀의 옷을 골라주고, 그의 스케줄에 맞춰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고, 마르셀의 아들을 위해 손수 놀이옷을 만드는 등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마르셀이 뉴욕에 있던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파리와 뉴욕 사이의 하늘 어드메쯤에서 멈추었다.

 

에디트와 마르셀의 짧고 애절했던 러브스토리는 벌써 반세기를 넘어버린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L' hymne l' amour)'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슬픈 이야기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결코 순탄치 않았던 그녀의 한평생이 가슴 한켠을 아릿하게 적시는 까닭은 그녀의 순수한 열정이 이 순간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삼복의 무더위 속에서도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의 감동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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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녀자 - 나 만큼 우리를 사랑한 멋진 여자들의 따뜻한 인생 이야기 17
고미숙 외 지음, 우석훈 해제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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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신을 섬기는 그 종교들은 말 그대로 가부장적이므로(하늘은 전지전능한 아버지다) 해당 지역의 여성들은 하늘의 신과 그 지상의 남성 대리자들에게 2000년 동안 멸시를 받아왔다.'는 미국 작가 고어 바이댈의 말로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유교라고는 털끝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서양도 이럴진대 온 몸으로 유교주의를 겪어온 우리나라의 여성들이야 말해 무었할까.  그나마 기독교가 늦게 들어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유교도, 기독교도 유입되기 전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비이성적인 성차별은 받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비록 남자이기는 하지만 '배운 여자라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말 그대로의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비아냥이 섞인 안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을 더 많이 보아왔다.  그 말 속에는 '그래. 너 잘났다'는 식의 비꼼과 아니꼬운 속내가 배어있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냉소의 이면에는 권력구조의 비열함이 숨어있다고 보여진다.  처음으로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것에 급급하겠지만, 대대손손 내려온 권력을 향유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회현상쯤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러나 그들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차별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 간의 '연대'이다.  그러므로 소위 권력을 득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연대만 막으면 되는 셈이다.  멀지 않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이 땅에 상식과 정의와 연대가 뿌리내리길 희망했던 그들에게, 이름을 기억해 주고, 친구를 만들어 주고,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만들어 주려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직업인으로 사회인으로 제 맡은바 몫을 해내려 애쓰고 있는 언니, 친구, 동생 17인의 이야기를 모았다.  하는 일과 생각하는 것, 지향점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자신이 배우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다."    (p.6  '들어가는 글'중에서)

 

그렇다.  이 책에는 17인의 여성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어쩌면 남성인 나와는 어떤 연관도 없을 듯한 이 책을 굳이 읽고 리뷰를 쓰고자 한 데에는 어떤 계획이나 구상도 없었다.  아주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뿐이다.  MBC [피디수첩]의 프로듀서였던 김보슬, 배우 김여진, 무료 치과 진료를 하는 이웃린치과 홍수연, 인권활동가 류은숙, '한경희 생활 과학' 대표 한경희, 고전 평론가 고미숙 등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여성들이 등장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과 생각에 나도 모르게 리뷰를 쓰게 되었을 뿐이다. 

 

"다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살 거다.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이 내게 '그러지 마라'고 협박해도 소용없다.  나는 내 맘대로 살 거다.  내 인생이다.  한 번 사는 내 인생이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인생들과 교류하고, 구경하고, 같이 놀고, 배우며 그렇게 살 거다.  그래서 나는 배우는, 배우, 여자, 사람이다."    (p.43-44  '김여진'편에서) 

 

인간을 사랑하고, 보듬고, 아파하는 방법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따로 있을까.  여성의 취업률이 젊은 증에서는 남자와 대등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그닥 부족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밥을 굶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불만에 가득한 자와 미소를 띠는 자로 양분되어 삐그덕 댄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어쩌면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 진정성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가식과 눈가림이 판을 치고 있다는 얘기다.  그 가면을 벗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순전히 우리 사회 구성원의 '앎과 실천'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나는 노동자들이 물적 토대를 확보하면 당연히 삶의 비전을 위한 고매한 지성을 탐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차별과 억압을 벗어나면 자유롭고 당당한 사랑의 주체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오판이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공부하지 않고,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인간 욕망'에 시달리고 있다.  부자건 노동자건 여성이건 남성이건 삶의 가치는 오직 자본의 증식이고, 그걸 투여하는 욕망의 대상은 오로지 가족이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꿈꾸던 세상인가?"    (p.263  고전평론가 '고미숙'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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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8-07 09: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여성만으로 쓰여진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왠지 흥미롭네요^^
우석훈 해재가 특히요~~ ㅎㅎ

꼼쥐 2013-08-08 12:35   좋아요 0 | URL
촛불집회 이후에 엮은 책인 듯해요. MB시절의 촛불집회로 인해 우리 세대는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석훈도 아마 그 점에 착안하여 이 책을 생각했겠지요.

Char 2013-08-07 10: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꼼쥐님 ^^
댓글 남겨주신 것 보고 저도 와보았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보듬고, 아파하는 방법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따로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마음이 참 좋았어요. 이렇게 다른 이의 후기를 읽고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는 건가봐요. 고맙습니다. :)

꼼쥐 2013-08-08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왠지 다른 사람의 리뷰를 꼼꼼히 읽는 편인지라 비록 형편없는 제 글도 이렇게 꼼꼼히 읽어주는 분이 반갑더군요. 비록 어떤 비판의 글을 댓글로 남길지라도 누군가의 글을 꼼꼼히 읽고, 그 뜻을 파악한 후에 남긴 것이라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 싶어요. 제가 오히려 고맙습니다. ^^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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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초등학교 친구 중에 괴짜로 소문난 친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덩치가 좋았던 친구는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유도 선수가 되었다.  그것도 무제한급 선수로.  친구는 고1인가 고2의 여름방학에 친구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체력 훈련을 하겠다며 산으로 들어갔었다.  친구들은 다들 그러려니 했다.  운동선수이니 체력훈련이 필요할 테고, 체력훈련 하면 뭐니뭐니 해도 산악훈련이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되어서 만난 친구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분위기가 친구를 감싸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던 나는 한동안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고향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에 내려가 풍수지리를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선수로서 유도를 계속하거나 적어도 은퇴한 후 유도 코치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풍수지리 강사라니...  그 친구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한의원을 운영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한자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셨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탓인지 친구는 다른 과목에 비해 한문 실력은 늘 좋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도를 하던 친구가 풍수지리 강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쓴『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사주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업으로 그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그저 관심으로만 그칠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시도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공부를 해볼 요량으로 <주역>을 집어 들었다가 채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미련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이라는 가정 속에서 지루하게 시간만 보냈을 뿐 실행에 옮길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부터의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그 기회마저 밀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는 사주니, 운명이니 하는 처음의 호기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했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    (p.31)

 

이 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사주명리학이 왜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는지, 또는 왜 '신비주의'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탐구하며 기초적인 사주명리학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힐링'과 '치유'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는 요즘,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사람들은 넘쳐나고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까닭을 우리의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과 행 사이의 간극이 질병과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    (p257)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말했다.  "나 이외에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료해줄 사람이 없다.  행복을 나 자신이 만드는 것과 같이 불행도 나 자신이 만들 뿐이요, 또 치료도 나 자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나 자신의 구원자인 나는 그럼에도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고 철학자 니체가 지적했듯이.

 

근대성 비판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결국 사주명리학만 버린 것이 아니라 이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아픈 것이라고.  나 자신으로 향하는 길은 사주명리학이며, 그 지도를 들고 내 자신에게로 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향 친구를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는 마음 속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던 '언젠가'를 '지금 바로'로 바꾸어 놓았다.  저자 고미숙으로 인해 나는 사주명리학 관련 서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음에 읽을 책도 준비해 두었다.  이러다 혹시 철학관을 내는 건 아닐까?  선무당이 사람 잡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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