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삶 -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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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는 언제나 연휴 동안 읽을 책을 고르느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책과 떨어지면 나도 모르게 유아기적 분리불안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연휴가 길어질수록 연휴 동안 읽을 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에 비례하여 목록 선정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선천적 선택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처럼 갈팡질팡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종국에는 선물 보따리보다 책보따리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문학의 (전부는 아니고) 대부분은 즐거움을 위해 가볍게 읽도록 되어 있다. 느긋하게 앉아서 어떤 의미에서 "재미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문학을 본래 용도대로 쓰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비평도 순전히 허사가 되고 만다. 어떤 물건이든 본래 용도대로 쓰지 않고는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p.133)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인 C.S. 루이스는 그의 저작 <나니아 연대기>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저명한 영문학자로서 엄청난 독서가로도 유명하다. 게다가 그는 읽은 책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빼어난 기억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의 작가는 독서가 몸에 배어 있었고 또한 깊이 몰입해서 읽었다고 한다.

 

"루이스에게 독서란 고결한 소명이자 끝없는 만족의 출처였다. 손에 책만 들었다 하면 그가 취미로 책을 읽는지, 책읽기가 직업인지 구별이 불가능했고, 글을 쓸 때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p.11 '엮은이의 글'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독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조언들로 인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때로는 나의 잘못된 독서 행태에 대한 작가의 따끔한 일침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예컨대 친구인 아서 그리브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가는 '단언하는데, 모든 좋은 책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다시 읽어야 하네.'라고 썼는데 나는 아무리 좋은 책도 좀처럼 다시 읽는 법이 없으니 가슴이 뜨끔할 수밖에. 게다가 나는 좋은 책을 구별할 줄 아는 좋은 안목의 소유자도 아닌 까닭에 작가의 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힌다.

 

"그러나 단어를 죽이는 가장 큰 원인은 대다수 사람이 그 단어로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찬반을 표현하려는 욕심이 단연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는 점점 묘사에서 멀어져 평가에 가까워진다. 한동안은 그 평가에 왜 좋거나 나쁜지가 아직 살짝 암시되어 있지만, 결국은 순전히 평가만 남는다. "좋다"나 "나쁘다"의 무익한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p.87)

 

대선이 가까울수록 우리의 말과 글도 거칠어지고 결국에는 이와 같은 무익한 동의어가 되고 만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예측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오늘처럼 맑고 깨끗한 하늘을, 구름 사이로 퍼져나오는 쨍한 가을 햇살을 우리의 관심 뒷전으로 돌린 채 서로가 서로에게 악담과 저주의 말만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삶은 그저 아와 피아의 끝없는 대결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인 양 여겨지는 것이다.

 

"좋은 신발은 신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신발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독서는 시력이나 조명이나 인쇄 상태나 맞춤법 따위를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가능해진다."  (p.173)

 

주말을 낀, 조금은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2천 명을 넘나드는 시국에 가족 모임 역시 취소되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마음에 드는 한 권의 책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갈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데 쓸데없이 연휴만 길게 주어지면 그것 또한 난감한 상황이었을 텐데 말이다.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주말의 오후, 사람들은 서둘러 짐을 싸고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아이들의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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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구매대행으로 평생 돈벌기 - n잡러시대 부캐로 방구석에서 투잡하기
이준열.기대원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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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씁쓸한 풍경은 소득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름도 알 수 없는 옆집의 누구와 비교만 하지 않는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전과 다름없이 평화로운 날들을 보낼 수 있겠지만 인간의 욕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콕 집어 밝힐 수 없는 옆집 누군가의 소득이 마치 불로소득처럼 여겨지는 순간, 내게로 올 택배가 옆집 누군가에게 잘못 배달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의 불면증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내게 배달되었어야 마땅한 돈다발이, 혹은 금거북이 얼굴도 모르는 옆집의 누군가에게 배달되었으니 속이 뒤틀리고 밤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 나간 금거북을 무작정 손 놓고 기다린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직성이 풀릴 것이니 나는 결국 'n잡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n잡이란 다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영어 'job'의 합성어로, 본래의 직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n개의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n잡은 요즘 젊은 직장인들의 화두인 파이어족(조기 은퇴족), 디지털 노마드, 부캐 등의 키워드와 맞물려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듯합니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이준열·기대원이 쓴 <해외구매대행으로 평생 돈 벌기>를 읽었던 건 어쩌면 코로나 시대의 소득 양극화에 따른 부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말하자면 욕심이 만들어 낸 가상의 돈다발 혹은 꿈속에서나 보았음직한 금빛 영롱한 금거북이에 대한 지나친 애착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다른 이유도 하나 있기는 하다. 얼마 전 모 제약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해외에서 오메가3 제품을 수입하여 팔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 친구의 말이 귀에 솔깃했었다. 싸고 좋은 제품을 수입하여 소위 대박을 치면 돈방석에 앉는 건 시간문제라는 게 요지였다. 나는 마치 옆집에 잘못 배송된 금거북이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처음 해외구매대행 사업을 하는 초보자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이 싸고 좋은 제품을 찾아서 쇼핑몰에 올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보는 제품들이 예쁜 데다 저렴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제품 팔면 100% 팔리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제품을 한국에 소싱한다 해도 판매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먼저 좋은 제품을 찾고 한국에 판매하는 것은 경험이 쌓인 후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p.38)


그렇다. 나는 해외구매대행의 ABC도 모르는 완전 초보라는 사실을 책을 읽는 내내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 다행인 것은 책을 쓴 두 명의 저자가 나와 같은 초보자들을 위해 매우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Chapter 1 해외 구매대행이란?, Chapter 2 직구하는 방법 및 배송대행지 가입하기, Chapter 3 누구나 쉽게 따라 하는 준비절차, Chapter 4 마진을 높여주는 제품 수익구조 분석작업, Chapter 5 제품 이미지 및 동영상 구해오기(프로그램 정보), Chapter 6 잘 팔리는 상품 찾기, Chapter 7스마트스토어에 제품 등록-직접 따라 하기, Chapter 8 광고 및 간단한 마케팅 방법, Chapter 9 판매 후 제품 전달 과정, Chapter 10 제품 전달 후 CS 처리 방법, Chapter 11 그 외 마케팅 기법 및 다른 사업으로의 확장의 11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책을 펼치는 순간 저자의 꼼꼼함에 놀라게 된다.


세계 최대 이커머스 업체인 아마존이 국내에 진출하여 아마존의 해외상품을 국내에서 쇼핑하는 것처럼 이용할 수 있게 된 마당에 해외 구매대행이 뭔 돈이 될까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팔고자 하는 상품이 수도 없이 많고, 그 많은 상품 중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흙 속의 진주도 있게 마련, 결국 잃어버린(혹은 잘못 배송되었다고 생각하는) 금거북이를 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끊임없는 공부와 열정뿐이라는 걸 책을 읽은 나의 소감으로 가름하고자 한다.


"해외구매대행의 가장 큰 단점은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것입니다. 판매량이 늘어남에 따라 투입되는 시간이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업의 경우 시스템을 갖추는 단계가 지나 구축이 된다면 판매량 혹은 매출액이 늘어남에 따라 투입되어야 하는 시간이 매출이 별로 생기지 않을 때와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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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황경신 지음, 김원 사진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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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차곡차곡 쌓이는 특별하지 않은 주말 오후. 삶을 재촉하는 잰걸음의 속도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것인지 가을의 초입에 설 때마다 나는 한 해의 끝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갈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럴 때는 늘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괜한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게 됩니다. 푸른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채 가을의 고독과 쓸쓸함과 삶의 허무를 한껏 받아들이는 까닭에 애상 과잉의 상태에 빠져버리는 듯합니다.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슬픔에 취한 느낌이지요. 한 계절이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내 마음에도 계절이 있어

바람 불면 쓸쓸한 잎을 떨어뜨리고

작은 오솔길 따라 걸어간

오래전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하지

단단한 공처럼 차가운 공기

여린 호흡을 얼어붙게 하는 한밤의 서리

그리워도 그리워도 여름은 지나갔으니

이제 침묵 같은 기다림만 남았는 (p.165 '여름은 지나갔으니' 중에서)

 

고독이 구석구석 먼지처럼 쌓이는 숙소의 휑한 공간에서 나는 황경신 작가의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를 읽었습니다. 빈 공간으로 꾸역꾸역 어둠이 밀려들고, 농밀한 침묵이 처진 어깨를 더욱 짓누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독을 통해 그리움을 배우고, 이별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것처럼 작가 역시 그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처럼 아름다운 글들을 자연스레 쓸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대라는 허공에 편지를 쓰듯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는 일이 수천, 수만 번 반복되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작가처럼 순한 글 한 편쯤 쓸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렇게 대책 없는 희망을 안고 특정할 수 없는 날을 기약합니다.

 

이 경우에

세월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굳은살이 박히고 툭, 툭 갈라진

거칠고 무심한 세월로는 막을 수 없다

둑을 무너뜨리고 바다로 달려가는

세찬 물줄기처럼 치명적인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메마르고 단단한 그 무엇에

마음을 묶인 채 살아가야 하는

 

당신과 나의 경우에는

(p.257 '당신과 나의 경우에는')

 

김원 작가가 찍은 사진 몇 장을 황경신 작가에게 후보로 건네면 그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 황경신 작가가 글을 입혔다는 뒷얘기 때문인지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글과 사진의 끈끈한 인연에 눈길이 가곤 합니다. 우리가 보는 풍경에도 영혼이 있다는 걸 말하려는 듯 작가는 한 컷의 사진에 영혼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우러진 글과 사진이 마음 저 밑바닥으로 녹아들 때, 나는 마치 멈추어진 시간 속으로 혹은 농밀한 침묵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이 글에 서둘러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나는 가을의 적막 속으로, 겨울의 침묵 속으로, 봄의 무심함 속으로, 또다른 여름의 난폭함 속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 또한 지나갈 것이며, 더불어, 당연하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미셸 슈나이더의 말을 빌자면, '무언가가 완성되면서 사라지는' 순간이고 삶이고 영원이다."  (p.272~p.273 '에필로그' 중에서)

 

시나브로 가을입니다. 나는 다시 허둥대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고, 야속한 시간들은 서둘러 끝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의 삶에는 나도 모르는 매듭이 있고, 총체적인 결말이 존재하며, 누군가에게 주는 일말의 감동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역시 그런 아주 작은 의미들로 순간순간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황경신 작가가 쓴 '영혼시' 역시 그런 순간들의 기록이기에 나는 작게나마 감동하고, 때론 하늘을 우러르고 먼 산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 가을의 기억은 그렇게 화석처럼 굳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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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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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흔히 "한 편의 소설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실재하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하며, 때로는 더 잔인하고, 소설가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버젓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입니다. 그것은 소설가도 역시 작가인 동시에 인간의 선의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이 인간의 보편성을 뛰어넘어 어둠의 저편까지 들여다보기에는 그 끔찍함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는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적당히 순화하고 윤색하여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에서 조금쯤 엇나간 정도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향해 관성처럼 되돌아오곤 합니다.

 

"많은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를 중간업체에게 빼앗기는 현실에 분노했지만 그 분노를 압도하는 게 있었죠. 어차피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체념, 행여 인터뷰 사실이 밝혀져 일자리마저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 원청과 용역·파견업체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는 거대하고 교묘한 착취 구조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계약 해지'라는 말로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악랄한 구조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원천 차단하고 있고요."  (p.5 '머리말' 중에서)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이 반년 넘게 취재해 온 기획 기사를 책으로 엮어 출간한 <중간착취의 지옥도>는 노동자들이 업체로부터 임금을 빼앗기는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노동자 100명을 인터뷰한 기록, 1부 '합법적인 착취, 용역'과 이들이 떼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추적한 2부 '떼인 돈이 흘러가는 곳', 파견법의 제정으로 진화하고 있는 노동 착취를 다룬 3부 '진화하는 착취, '지옥도'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간접고용 세계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내보려 국회, 고용노동부, 지방자치단체를 찾아갔던 기록과 중간착취를 막을 법과 제도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4부 '법을 바꾸는 여정'으로 구성된 르포 형식의 책입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울분이 치솟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인터뷰이들의 태도는 오히려 담담하기만 합니다. 인터뷰 내용을 조작했거나 순치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는 내재화된 체념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인터뷰 역시 어쩌다 있는 하나의 이벤트처럼 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고, 지금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일말의 희망이 보일 때에나 하는 것이지 간접고용이 공고화된 체계 속에서, 게다가 코로나 시국의 장기화와 플랫폼 기업의 성장으로 인해 나날이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려는 의지는 차츰 희미해지게 마련일지도 모릅니다. 당연하게도 말입니다.

 

"이런 중간착취를 알아차리고도 뗀씨와 동료들은 공장과 파견 업체 측에 바로 항의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었다가 그나마 하는 일마저 그만둬야 하는, 보복성 해고가 무서워서였다.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공장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월급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뗀씨를 비롯한 이주노동자 전원은 해고당했다. 일감이 없다는 핑계로 이들을 내보내면서도 '우리는 파견업체에 제대로 된 임금을 보냈으니 책임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p.221)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구의역 김군 사건이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 씨의 사례는 그 현상과 결과만을 보도한 단발성 기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도, 갈수록 교묘해지는 용역업체의 중간착취 사례도, 그리고 파견 근로자에 대한 원청 업체의 부당한 대우도 결국 그 원인을 파고들어 보면 기업의 이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까닭에 입법을 통한 제재에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제력이나 정보력의 차원에서 노동자측이 사측을 결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이익 측면에서 용역업체를 통한 노동자의 수급이 비용도 절약되고 책임 소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데, 해고도 쉽지 않고, 임금도 높은 정규직을 고용하여 굳이 자신들의 이익을 감쇄시킬 이유는 없겠지요.

 

"국회와 정부가 23년간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에 등 돌린 탓에 근로기준법은 아직도 1958년 제정 당시, 과거의 노동 시장에 머물러 있다. 용역업체도 파견업체도 없던 그때, 간접고용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당시의 법은 당연히 오늘날 실재하는 346만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를 한 명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낡은 법을 도대체 언제까지 방치하려는 걸까."  (p.252)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죽음은 마치 일상처럼 가볍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만 울림으로만 존재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거북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변해가는 까닭에, 변화에 목마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애끓는 심정으로 국회로 국회로 꾸역꾸역 모여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미약하고, 기업을 대표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크기만 합니다. 길게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향한 자발적인 발걸음은 오늘도 끊이지 않고, 다만 오늘의 노동자가 내일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은 처서도 지난 올해의 가을장마처럼 서글프기만 합니다. 비가 내리려는지 오늘도 하늘은 끄물끄물 어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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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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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의욕이 앞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기다림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면 대개는 자신의 의지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맛보게 된다. 예컨대 투자자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의욕이, 학생은 뛰어난 성적을 얻겠다는 의욕이, 스포츠인이라면 자신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반드시 우승을 거머쥐겠다는 의욕이 앞선 까닭에 다른 제반 사항을 고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이는 곧 부상이나 과로, 투자 실패와 같은 좋지 않은 결과와 직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자신이 추구하던 문학 스타일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거나, 꾸준히 추구하던 성향의 작품에서 대작을 쓰고야 말겠다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전보다 못한 작품을 선보이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국내에서는 익숙지 않은 고딕 호러 장르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는 강화길 작가의 신작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고 들었던 생각이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한 이 책은 6·25 전쟁의 비극적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의 인천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생활하던 네 사람의 심령 체험을 이야기의 주된 테마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액자 소설 형식을 취하는 까닭에 프롤로그와 1부에서는 강화길 작가를 연상시키는 화자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가인 '나'는 <니꼴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쓰려고 할 때마다 악의에 찬 목소리의 방해를 받았으며, 그 목소리는 '나'가 모언가를 성취하려 할 때마다, 소중한 누군가와 관계를 진전시키려 할 때마다 저주를 퍼붓는 등 자신 역시 악령에 씌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삶에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점차 악의에 전염되고, 보란 듯이 더 깊은 악의로 점철된 소설을 써내 저주를 짓뭉개주겠다고 결심한다. '나'는 <니꼴라 유치원>의 풍경이 인천에 실존했던 대불호텔과 비슷하다는 엄마 친구 아들의 말을 듣고 1호선에 몸을 싣는데...

 

"그래서 나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족 안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말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소설을 쓰겠다며 진을 흔드는 일은 그만둬야겠다 싶었다. 그래,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다 의미 없는 일이야. 그런데 그 순간, 진이 뭔가를 결심했다는 듯 다부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인천에 오기 전에 나를 휘감았던 바로 그 감정. 그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  (p.70)

 

소설의 2부에서는 이제 1955년 인천의 대불호텔이 배경이다. 더불어 이야기의 화자도 '나'(지영현)로 바뀐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 병사들의 군복을 담당하던 '나'의 부모는 폭격으로 사망하고, 홀로 살아남은 '나'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당숙모에게 의탁한다. 그렇게 가까스로 성장한 '나'는 돈을 벌어 당숙모에게 갖다 바치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호텔 3층을 임차하여 숙박업소로 운영한 뒤 수익금으로 건물 주인에게 임차료를 내고 있는 고연주에게 고용된 몸으로, 손님 한 명을 호텔로 데려올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는 호객꾼이다. 호텔에는 영어에 능통하고 장사 수완이 있는 고연주와 중식당에서 일하며 부엌방에 얹혀사는 화교 뢰이한이 있다. 어느 날, 한 미국인이 대불호텔에 장기 투숙하게 되자 고연주는 '나'에게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고, 당숙모와의 갈등도 갈등이지만 고연주를 동경하던 '나'는 제안을 수락함과 동시에 짐을 옮겨 그녀와 호텔에서 함께 거주하며 호텔 일을 본격적으로 거들기 시작한다. 그 미국인의 이름은 '셜리 잭슨'으로 귀신 들린 집 이야기를 쓰기 위해 흉가를 찾아온 소설가이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다 쓰러져가는 호텔을 임차하여 능숙하게 운영하는 고연주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에게 귀신이 들러붙었다 둥, 드센 팔자라는 둥 이상한 소문과 억측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셜리 잭슨을 더 오래 붙들어두기 위해 대불호텔에서의 자신이 겪은 공포 체험을 들려주며 환심을 사려 애쓴다. 연주와 셜리 잭슨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잡다한 일은 언제나 '나'의 몫으로 남게 되고 연주에 대한 '나'의 불만은 점점 깊어만 간다. 한편 대불호텔에서 거주하는 셜리와 고연주, 심지어 화교 뢰이한까지 유령의 소행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환각에 시달리며 그 건물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나'에게만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대불호텔에 자리 잡고 싶어하는 '나' 지영현에게는...

 

"당신들은 모두 웃고 싶어해요. 행복하기를 원해요. 하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요. 믿을 생각이 없어요. 믿으면 배신당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니까요. 그게 당신들의 삶이었으니까요. 아, 그건 나의 삶이기도 해요. 네, 그래요. 왜 이토록 어려울까요. 불안함으로만 가득할까요.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 우리에게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울까요. 우리에게 사랑이란 덧없는 기억이고, 불행은 오래 남는 이야기죠."  (p.207)

 

소외감을 느끼던 '나'(지영현)는 결국 함께 지내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터뜨린다. 광기에 휩싸인 대불호텔의 악의 속에서 사람들에게 내재된 원한이 분출된다. 좌익과 우익 간의 증오, 화교에 대한 미움, 젊은 여성을 향한 알 수 없는 적개심 등 쌓인 분노가 더 이상 누를 수 없는 악의로 터져 나온 것이다. 소설의 뒷이야기는 이제 3부로 이어진다.

 

"그들의 목소리가 호텔에 둥둥 울린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로 가득했던 커다란 홀. 뜨거운 닭 국물과 향긋한 고수 냄새로 가득했던 오래된 벽돌 건물. 그들의 대답이 피아노 음처럼 건물 안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어디선가 또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시간, 역사,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아 건물 자체가 된 모든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이야기를 상상하는 사람의 목소리."  (p.298)

 

극한의 공포와 오싹한 느낌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약간의 실망감으로 이 책을 덮을 수도 있겠다. 사람들에게 고딕 호러 장르는 여전히 낯선 어떤 것이며, 셜리 잭슨과 에밀리 브론테, 장화 홍련 등 우리 귀에도 익숙한 이름들의 차용은 왠지 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우리는 언제나 소설을 구성하는 익숙한 테마와 플롯, 가상이지만 각각의 인물에 걸맞은 적당한 이름들을 상상하며 책을 읽는 까닭에 우리의 상상을 뒤집는 새로운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소설에 대한 흥미와 가독력을 조금씩 잃게 된다. 작가라는 직업이 자신의 창의력과 욕구에 반할지라도 독자의 수요와 관심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작품만 쓰는 것은 아니겠지만, 강화길 작가도 언젠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고딕 호러 소설의 장르와 대중의 관심이 한 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리라고 믿는다. 안방극장을 차지하는 드라마는 언제나 막장 드라마가 최고라고 확고하게 믿는 당신의 기대가 언젠가 깨지고야 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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