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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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흔히 "한 편의 소설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실재하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하며, 때로는 더 잔인하고, 소설가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버젓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입니다. 그것은 소설가도 역시 작가인 동시에 인간의 선의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이 인간의 보편성을 뛰어넘어 어둠의 저편까지 들여다보기에는 그 끔찍함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는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적당히 순화하고 윤색하여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에서 조금쯤 엇나간 정도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향해 관성처럼 되돌아오곤 합니다.

 

"많은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를 중간업체에게 빼앗기는 현실에 분노했지만 그 분노를 압도하는 게 있었죠. 어차피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체념, 행여 인터뷰 사실이 밝혀져 일자리마저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 원청과 용역·파견업체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는 거대하고 교묘한 착취 구조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계약 해지'라는 말로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악랄한 구조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원천 차단하고 있고요."  (p.5 '머리말' 중에서)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이 반년 넘게 취재해 온 기획 기사를 책으로 엮어 출간한 <중간착취의 지옥도>는 노동자들이 업체로부터 임금을 빼앗기는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노동자 100명을 인터뷰한 기록, 1부 '합법적인 착취, 용역'과 이들이 떼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추적한 2부 '떼인 돈이 흘러가는 곳', 파견법의 제정으로 진화하고 있는 노동 착취를 다룬 3부 '진화하는 착취, '지옥도'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간접고용 세계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내보려 국회, 고용노동부, 지방자치단체를 찾아갔던 기록과 중간착취를 막을 법과 제도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4부 '법을 바꾸는 여정'으로 구성된 르포 형식의 책입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울분이 치솟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인터뷰이들의 태도는 오히려 담담하기만 합니다. 인터뷰 내용을 조작했거나 순치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는 내재화된 체념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인터뷰 역시 어쩌다 있는 하나의 이벤트처럼 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고, 지금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일말의 희망이 보일 때에나 하는 것이지 간접고용이 공고화된 체계 속에서, 게다가 코로나 시국의 장기화와 플랫폼 기업의 성장으로 인해 나날이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려는 의지는 차츰 희미해지게 마련일지도 모릅니다. 당연하게도 말입니다.

 

"이런 중간착취를 알아차리고도 뗀씨와 동료들은 공장과 파견 업체 측에 바로 항의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었다가 그나마 하는 일마저 그만둬야 하는, 보복성 해고가 무서워서였다.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공장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월급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뗀씨를 비롯한 이주노동자 전원은 해고당했다. 일감이 없다는 핑계로 이들을 내보내면서도 '우리는 파견업체에 제대로 된 임금을 보냈으니 책임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p.221)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구의역 김군 사건이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 씨의 사례는 그 현상과 결과만을 보도한 단발성 기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도, 갈수록 교묘해지는 용역업체의 중간착취 사례도, 그리고 파견 근로자에 대한 원청 업체의 부당한 대우도 결국 그 원인을 파고들어 보면 기업의 이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까닭에 입법을 통한 제재에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제력이나 정보력의 차원에서 노동자측이 사측을 결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이익 측면에서 용역업체를 통한 노동자의 수급이 비용도 절약되고 책임 소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데, 해고도 쉽지 않고, 임금도 높은 정규직을 고용하여 굳이 자신들의 이익을 감쇄시킬 이유는 없겠지요.

 

"국회와 정부가 23년간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에 등 돌린 탓에 근로기준법은 아직도 1958년 제정 당시, 과거의 노동 시장에 머물러 있다. 용역업체도 파견업체도 없던 그때, 간접고용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당시의 법은 당연히 오늘날 실재하는 346만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를 한 명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낡은 법을 도대체 언제까지 방치하려는 걸까."  (p.252)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죽음은 마치 일상처럼 가볍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만 울림으로만 존재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거북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변해가는 까닭에, 변화에 목마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애끓는 심정으로 국회로 국회로 꾸역꾸역 모여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미약하고, 기업을 대표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크기만 합니다. 길게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향한 자발적인 발걸음은 오늘도 끊이지 않고, 다만 오늘의 노동자가 내일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은 처서도 지난 올해의 가을장마처럼 서글프기만 합니다. 비가 내리려는지 오늘도 하늘은 끄물끄물 어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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