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 며칠 새벽 운동을 나서는 내 발길 앞에는 희거나 다정했을 달빛이 환하게 드리웠었다. 몇십 년 만의 슈퍼문이라는 얘기를 TV에서 얼핏 들었던 그 달빛이었다. 동행하는 달빛은 나무 그림자에 가려 어른어른 이상한 무늬를 만들었다가 때로는 한낮처럼 환하게 밝았다가 했다.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세상의 모든 어둠을 다 몰아낼 수는 없다고 달빛은 나무 그림자에 한 자 한 자 새겨넣는 듯했다. 희거나 다정했던 그 달빛이.

 

"달이 유난히 커다랗게 떠오른 밤, 커튼으로 창들을 가리지 않으면 아파트 구석구석으로 달빛이 스며든다. 그녀는 서성거린다. 생각에 잠긴 거대한 흰 얼굴에서 스며나오는 빛, 거대한 캄캄한 두 눈에서 배어나오는 어둠 속을" (p.69)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은 영면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애초에 희거나 밝았을 원형질의 어떤 것들은 무자비한 시간의 속성 앞에 때론 더럽혀지고 처음에 가졌던 물성이 사라지기도 한다. 영면하거나 사라져간 어떤 것. 작가는 그것에 대해 쓰고 있다. 문학이란 결국 존재하는 어떤 것을 존재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다. 존재하는 어떤 대상은 형태나 질감이나 색채나 향기 등 물체로서 갖는 본연의 물성을 잃는 대신 시간의 영속성을 획득한다.

 

책의 화자인 '나'는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언니에 대해 회상한다. '나'를 깊은 사색의 어떤 지점으로 이끄는 것은 주로 '흰 것'들이지만 작가에게 '흰'의 의미는 삶과 죽음의 경계, 죽은 언니와 나와의 화해쯤으로 읽힌다.

 

작가는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젖, 초, 성에, 서리, 각설탕, 흰 돌, 흰 뼈,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흰나비, 쌀과 밥, 수의, 소복, 연기, 아랫니,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은하수, 백목련, 당의정, 빙하, ... 모든 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명 치마의 마지막 밑단이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연기로 지은 저 옷을 날개옷처럼 걸쳐주기를. 말 대신 우리 침묵이 저 연기 속으로 스미고 있으니, 쓴 약처럼, 쓴 차처럼 그걸 마셔주기를." (p.125)

 

작가의 사유는 이내 끈적한 슬픔으로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지만, 마침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슬픔을 딛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의지가 두 손 가득 모아지는 걸 보면 우리가 어떤 매개물을 통하여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소통할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p.11)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마음의 보편적인 정서를 한 자 한 자 그녀가 대신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지금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에 적확한 단어와 문장들을 찾아내어 내 앞에 글로 써서 보여준다는 상상.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작가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고통과 씨름하며 긴 시간을 건너왔을지...

 

하늘이 어둑신하다. 가당치도 않은 일을 바득바득 우기고 떼를 쓰는 철부지 어린애의 투정을 받아주듯 어른들도 이따금 자신의 투정을 받아줄 누군가 한 명쯤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이성적인 설득이 아니라 무한정 받아주고 웃는 낯으로 어르고 달래줄 그 누군가가. 주말이면 어깨에 내려앉는 일주일의 피로가 먼지처럼 달라붙는다. 그나마 한강 작가의 이 소설(때로는 시처럼 읽히지만)이 위로라면 위로가 되었다.긍정의 한 모금을 입에 넘기는 듯 나는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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