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서양화가를 뽑으라면 단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순위로 뽑히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서양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들어본 서양 화가의 이름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그가 남긴 편지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설령 이전에 그의 그림을 단 한 점도 본 적 없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그의 영혼에 먼저 반하고 말 것이다.

 

고흐의 그림 또한 인기 있는 작품이 한둘이 아니어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유독 그가 그린 '자화상'에 눈길이 가곤 한다. 나와 같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은 사실 몇 점 되지도 않지만 반 고흐는 자신의 초상화를 적어도 36장을 그렸다고 한다. 그 자화상 중 18점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는데, 고흐가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그린 이유는 주로 모델료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직접적인 또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내면에 살아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고 싶은 욕망, 그것은 어쩌면 모든 예술가의 가장 기본적인 소재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자신의 창작열을 일깨우는 예술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화가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글을 쓰는 시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비는 종이었다'고 씀으로써 스스로를 종의 자식으로 단정하는 서정주의 자화상,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로 끝을 맺는 윤동주의 자화상,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고 운을 떼는 노천명의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한하운의 자화상, '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라고 외치는 고은의 자화상, 고흐를 흉내내어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정희성의 자화상, '나 요즘 창녀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며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문정희의 자화상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술가는 매번 자신의 언어로 '나'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실패한 언어일 뿐, 마침내 성공한 언어일 수는 없다. 삶도 그렇거니와 예술은 결국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 꼭대기로 큰 바위를 굴러 올리는 '시지프스의 비극'인 셈이다. '내가 지금 소모해버리고 있는 이 순간은 내가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다.'라고 말했던 니체의 명언처럼 우리의 권태로운 삶은 예술과 맞닿아 있다.

 

어디 예술가뿐이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들을 우리는 끝도 없이 마주한다.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구질구질하고 추레한 듯한 내 일상의 낱낱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말하다 보면 '나'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궁극에 이르게 된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최후의 모순.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신의 역할에 따라 이유도 없이 도매금으로 매겨지는 자신의 모습을 진실인 양 믿으며 사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신분으로서의 정체성은 비록 허울뿐인 실체에 가깝지만 뭐, 그런들 어떤가. '애비는 종이었다'고 외칠지도 모르는 이 시대의 '흙수저'들이 a4 용지 한 장에 가지런하게 적어 내려가는 슬픈 현장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섭씨 36.5도는 오늘의 기온인 동시에 이 시대의 체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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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05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예요 . 저도 초판본을 가지고있는데 아직도 가끔 들여다봐요. 테오에게 늘 소식을 전하던 고흐의 마음이 읽혀서요!^^

꼼쥐 2016-08-11 15:03   좋아요 1 | URL
고흐는 정말 어떤 문학가보다 더 뛰어난 글솜씨와 어느 철학자보다 더 뛰어난 사고력을 갖고 있는 듯하지요? 저는 그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테오에 대한 고흐의 마음이나 테오가 형 고흐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지요.

[그장소] 2016-08-11 21: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영혼이 예민한 건지 감도가 높은 주파수처럼 ..그런부분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