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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익숙함에서 멀어질수록 소설은 극과 극의 평가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주 좋았다거나 최악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말로 집약된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가 그랬고,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낯섦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이겨내고 대한민국의 중견작가로 성장했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는 이들과 비교하여 상당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세상에 내보인 그녀의 첫소설이 비록 낯설고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지금 유행하는 소설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오직 자신만의
색깔을 고집하며 소설을 쓰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고집스럽게도 말이다. 파격적인 소설로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대다수
작가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색깔을 잃고 그들과 동화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그녀는 분명 특이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이나 구성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어쩌면
낯섦에 대한 이질감이 아니라 동일성에 대한 놀람으로 읽힌다. 예컨대 거울을 자주 보지 않던 사람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읽는 소설은 대개 현실을 어느 정도 미화하고, 가지런히 정돈하고, 적당히 가지치기를 하여 실제 우리가 사는 모습에서 상당히
순화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찌질한 모습 그대로,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그 느낌 그대로를 기록한다. 그것은
불편함이다. 객관화한 '나'를 대하는 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돈경숙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낡아서 너덜너덜 해어진 면 속옷 아래 비좁게 들어앉은
것이 보였다. 축 처진 아랫배의 살덩어리와 거기에 반해서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고 탄력있어 보이는 불그스름한 허벅지가 속치마 아래로 언뜻언뜻했다.
그녀의 종아리는 그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짧고 가느다래서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p.8)
그렇게 시작된 소설은 줄곧 가난과 빈곤, 탐욕과 일탈의 그렇고 그런 모습을 비춘다. 어둠과 불안이 잠식된 존재의 구차하지만 질긴 삶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이 책에서 ‘빈곤’을 주제로 한 무려 17개의 길고 짧은 에피소드를 연작소설의 형태로 이어붙이고 있다. 그것은 마치 크기와 색깔, 또는 질감이 다른 종이와 헝겁, 상표 등을 종이에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미술의 한 기법처럼 비중이 다른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에 묶여 가난에 대한 콜라쥬를 형성하는 듯하다.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간 관계에 있어 이렇다할 연관성이 없이 독립되어 보이지만, 부암동 허름한 골목길의 스키야키 식당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인물들이 가난에
찌든 채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엔 유식한 밥버러지(마), 허울 좋은 지식인(백두연, 음명애, 우균,
김요환), 돈을 절대가치로 삼는 가엾은 영혼(돈경숙, 표현정), 의식 없이 매일매일을 소비하는 아이들(세원, 털 모델)이 있다.
"죄는 부모자식 됨에서 근원 되는 것이죠. 남자가 여자의 자궁을 피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욕망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이상을 구현할 수 없는 이유도 그런 욕망 아닙니까."
(p.61)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성도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빈곤에 대한 보고서’를 위해 다양한 인간군상을
취재하는 성도는 가난에 대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소설 속에서 마치 한 편의 논문을 쓰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것은 비록 작가
자신이 독자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의도된 대목이었다고 할지라도 절정을 향해 치달아야 할 소설의 끝부분에 메마르고 탁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선명한 주장이 드러나는 산문 성격의 글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갑자기 의욕저하를 일으키도록 한다.
"곧 가난의 성격은 더도 덜도 아닌 굶주림의 성격입니다. 설사 끼니를 거를 정도가 아니라 해도 역시
가난은 굶주림인 것입니다. 나에게는 긍정적 의미의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단순한 불편과 수치를 넘어선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정서적으로 지배합니다. 인간과 그 아들과 그 아들을. 그러므로 굶주린 가난의 기억밖에 가지고 잇지 않은 사람들은, 부유하던 시절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입에 빵을 처넣어주어도 역시 게걸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나, 나는 지금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도저히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습니다." (p.199 ~
p.200)
우리가 아는 빈곤은 타인과 비교됨으로써 상대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한번 그 늪에 빠지게 되면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난은 물질적 결핍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핍'과 그것에 뒷덜미를 잡힌 채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체념은 차라리
자신에 대한 방임에 가깝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극복되어질 수 없는, 제 몸뚱아리를 가난의 벽에 스스로 내던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임을 말하고 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일요일 한낮에 느긋이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