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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도 네팔에서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만 이처럼 큰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나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예컨대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하는 구태의연한 장탄식이 아니라 인류가 오랜 시간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이나 믿음, 또는 진리가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한 지진에 의해 우리의 지지기반이 진동을 하는 것처럼 그로 인해 우리의 지적 기반도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밟고 지나다니는 길은 절대 꺼질 리가 없다는 믿음,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언제까지나 부서져내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내 곁을 지키는 가족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믿음 등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믿음 체계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 인류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우리네 삶도 획기적으로 바뀐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통틀어 인간의 생활은 그닥 변한 게 없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똑같을 뿐이지요. 지진이나 화산 등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자연재해를 한번씩 겪을 때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동안 진리인 양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순간에도 기댈 수 없는 가변적인 것들일 뿐이고 세상의 모든 일들 또한 온통 우연의 결합체인 양 믿게 합니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그의 인터뷰 모음집 <글쓰기를 말하다>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견해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병에 걸리고, 죽고, 사랑합니다. 고통을 받고, 슬픔을 겪습니다. 화도 냅니다. 고대 로마든 오늘날의 미국이든 인간의 삶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나는 통신기술이나 라디오, 휴대폰, 비행기, 지금의 컴퓨터 기술 등으로 인간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p.298)
폴 오스터의 인터뷰 모음집 <글쓰기를 말하다>는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독자라면 글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적어도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 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의 인생관, 그의 철학,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견해, 자신이 쓴 여러 작품과 관여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 등 작가는 인터뷰어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질문에 대해 인터뷰이의 입장에서 답변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작가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던 어린 시절, 작가로서 출발하기 위한 경제적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배를 탔던 시절, 번역일과 시인으로 살았던 위기의 순간 등 오스터가 25년 동안 여러 잡지와 한 인터뷰에는 그의 문학관과 창작 과정, 작업 방식 등 글쓰기에 관련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사도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그 인터뷰에서 당신은 글쓰기를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며, 스스로를 일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p.224~p.225)
위에 인용한 인터뷰어의 질문만 보더라도 작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작가로 유명한 폴 오스터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오렌지 주스 한 잔, 홍차 한 잔을 마시며 45분간 뉴욕타임스를 읽고는 집 인근 작업실로 가서 6시간 정도 글을 쓰고 특별한 가족 행사가 없는 한 일요일에도 글쓰기를 계속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쉼 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서인지 작가는 누구에게도 글쓰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신중하게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거의 없습니다.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엄청난 고독의 경지를 사랑하는 취향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작가들이 조금씩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처입은 영혼의 소유자, 글쓰기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거든요." (p.399)
작가는 요즘에도 여전히 모눈종이 공책에 글을 쓰고, 더는 손 볼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고쳐 쓰고, 마지막에는 타자기로 원고를 정리한다고 합니다. 그는 "펜은 (컴퓨터 키보드보다) 훨씬 더 원시적인 도구"라면서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공책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기분이 든다. 내게 글쓰기란 늘 그런 손맛을 느끼는 일이며 육체적인 경험"이라고 소개하면서 글쓰기를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가 우리를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작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의 산물이 아닌 운명적인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