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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이 하야오 지음, 고은진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인이 앓고 있는 대부분의 병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서, 누군가와 함께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통로가 막혀있다는 데서 오는 '마음의 병'이 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하게 됩니다. 나만이 겪은 특별한
경험이 어떤 보편성 속에 뭉뚱그려 합쳐짐으로써 나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로 변질되고 이 사회에서 '나'란 존재는 사회를 이루는 보통의 인간일
뿐인 듯 느껴지는 것이죠.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인간, 누구 하나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는 느낌은 왠지 서글퍼지는군요.
우리가 흔히 '인간 소외'라고 하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은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개성의 상실이란 것도
그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감는 새>를 읽어보셨는지요. 그 책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죽어서
이 세상을 뜨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온다 간다 한마디 말도 없이 말입니다. 어쩌면 작가가 이 책을 발표했던
1990년대 중반의 일본 사회에서 소설 속 주인공이 겪었던 그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 먼 나라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계에서 보아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결혼 연령도 매년 늦어지고 있지만, 어렵게 결혼에
성공한 커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는 건수가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처럼 어제까지만 해도 잘 있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죠. 정말이지 소설처럼 말입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을 대표하는 분석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의 대담집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는 여느 대담집보다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틀간에 걸쳐 진행된 두 사람의 진지한 대화는 특정한 주제를 미리 정하지 않고 시도된 까닭인지 시종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대화가 오갑니다. 개성과 보편성, 개인적 삶과 사회 참여, 소설의 본질, 일본 사회 속의 폭력성, 결혼 생활 등등에 이르기까지 현대를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와 내면에 잠재한 고뇌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습니다. 이 대담이 성사될 당시 하루키는 그의 소설 <태엽감는 새>를 막 출간했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그 당시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으로 전 일본이 집단적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상태였고 말이죠.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것으로서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하다. 현대는 그런 이야기를 일반인에게도 통하는
것으로서 제시할 수 없다는 어려운 점이 있다. 각자는 각자의 책임하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우리 두 사람은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래도 각자의 개성에 의한 차이를 반영해 가면서 마음껏 대화를 계속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대화에서 얻은 점이
많았다." (p.151)
이 대담이 성사되었던 1995년 당시의 일본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많은 면에서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전 국민이
슬픔 속에 빠져 있는 것도, 높은 실업률로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가는 것도,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든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하는
것도 다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 이미지를 배경으로 <태엽감는 새>가 탄생했다면, 그 소설을 탈고한 작가와 독자의 입장에서 그 소설을
읽은 심리학자의 대담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작금의 우리 현실을 이해하게 하는 좋은 책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괴로워하기 위해서 결혼한다"라는 가와이 선생님의 정의는 매우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면 모두 난처해지지만 말입니다. 저 자신은 결혼하고 나서 오랫동안 막연하게 결혼 생활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서로 메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벌써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지만),조금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은 오히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마구 들추어내는 - 큰소리로 말하거나 말을 안 하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 과정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p.70)
두 지성인의 대화 치고는 너무 솔직한가요? 나는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작가의 어떤 치기(稚氣)나 장난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작가는 때로
그의 수필에서 농담으로 일관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길게 이어지는 대화는 시종 진지하고 솔직했습니다.
그런 진지함이 독자들에게 강한 압박이나 어떤 부담감을 안겨 주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도록 했죠. 이따금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공감하기도 했구요.
"현대의 일반적 풍조는 무라카미 씨가 쓴 것과는 완전히 반대여서, "가능한 한 빠른 대응, 많은 정보의
획득, 대량 생산"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이 인간의 영혼에 상처를 주고, 우리는 그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일반적
풍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을 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심리요법가의 일과 작가의 일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p.103)
사는 게 순전히 장난 같고, 가치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때로 삶 앞에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내내 농담만 주고받다 헤어지는 커플은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는 없는 것처럼 늘 농담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삶은 남는 게 없습니다.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노동절, 누군가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그 특별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그런 사람 곁에서 하루쯤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