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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 낮의 이별과 밤의 사랑 혹은 그림이 숨겨둔 33개의 이야기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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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마치 그림에 조예가 깊거나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림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고,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한다.  다만, 한때 친했던 친구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친구는 나와는 사뭇 달랐고, 조금 특별했고,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으며, 세상의 편견과 오해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다.

 

대학 시절, 그 친구가 다녔던 대학의 캠퍼스 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그 친구는 옷을 모두 벗은 채 그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  단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친구는 그 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친구도 그 대학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는 듯했다.  갑작스레 결혼을 했고,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예정에도 없던 아이가 태어났다.  삶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아주 가끔씩 보았던 친구의 모습은 볼 때마다 여위어갔다.

 

제 멋대로 자란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으로도 그의 야윈 얼굴과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깊이 패인 주름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가 살던 도시의 번화가 한 귀퉁이에 작은 화실을 내고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그림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띄엄띄엄 얼굴을 비치던 친구는 그때마다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심하게 취하곤 했다.  형편이 어려웠던 친구는 그가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여 단독주택 반지하로 거처를 옮겼다.  집들이를 한다기에 겨우겨우 찾아갔던 그의 집.  그때 나는 빛도 잘 들지 않는 그의 집에 집들이 선물이라며 창문에 롤스크린을 달아주었다.  친구라고는 달랑 나 혼자였던 그날의 집들이에서 그의 아내는 구운 고등어와 김치 몇 가지를 올린 밥상을 내오며 그냥 가겠다는 나를 한사코 붙잡았었다.

 

IMF 금융 위기는 그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상과 한걸음 떨어져 살던 그 친구에게 'IMF'는 멀리 비껴가는 한 줄기 바람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렇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결혼을 했고, 한동안 바쁘게 지냈고, 가까운 곳에 살던 친구들 몇몇만을 줄기차게 만났을 뿐이고, 그렇게 잊고 지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내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즈음, 우연히 방문했던 또 다른 친구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그 친구에 대한 소식은 한동안 나를 얼어붙게 했다.

 

살아서는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반지하의 단칸 셋방에서 그 친구는 끝내 목을 맨 채로 세상릉 떠났고, 그렇게 그는 빛도 잘 들지 않던 그 방을 스스로 벗어났다고 했다.  아이 둘과 아내를 남겨둔 채.  그 방에서 마지막으로 그렸다는 자화상을 나는 끝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친구로 인해 가끔씩 찾던 갤러리도 발길을 끊었다.

 

황경신 작가의 <눈을 감으면>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 친구를 생각했었다.  화가에게 그림은  숨겨진 삶의 이야기이며, 어쩌면 그것은 지나온 세월의 종지부이자 새로운 삶의 출발점일 터였다.  황경신은 그 아픈 상처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들려주려 한다.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와츠가 그린 <희망>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프롤로그를 대신하여')  이어 펠릭스 발로통의 <옷장을 뒤지는 여자>와 그녀가 선택한 다른 7점의 작품에서 보았던 이별 이야기, 앙리 팡탱라투르의 <밤>을 비롯한 8점의 작품에서는 슬픔을, 장-밥티스트 그뢰즈의 <깨진 거울>과 다른 11점의 작푼에서는 성장을, 그리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음악 수업>과 다른 7점의 작품에서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인의 <자화상>과 <화색, 비움>을 배치하여 에필로그를 대신하고 있다.

 

나는 책의 첫장부터 마음을 잡지 못하고 서성였다.  밤이면 내 숙소에서 들리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마치 레퀴엠처럼 여겨지게 했던 이 얇은 한 권의 책이, '이별'부터 시작하던 감정의 이입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비가역성이 나를 슬프게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즉각적으로 '슬픔'을 떠올리게 했던 건, 그 시절의 운명이 나에게 혹독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희망의 뿌리는 슬픔이며 슬픔에서 벗어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희망은 슬픔 그 자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유를 따져보자 막막해졌다.  논리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p.5)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이목구비가 없이 실루엣의 형체만 그린 이인의 <자화상>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친구를 만나지 못했던, 어둠에 묻힌 몇 해가 이인의 어두운 자화상 속에서 아픈 색깔로 채색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자화상> 속에 빗줄기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 당신을 본 적이 있다.  새벽이었다.  난폭한 꿈에서 밀려나온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다.  지하 세계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라온 것 같은 회색빛 안개가 낯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습기를 잔뜩 품은 바람이 불어와 내 뺨과 머리카락이 금세 축축해졌다.  당신은 골목 모퉁이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림자의 형체였다."    (p.22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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