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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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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결집체라고 늘 생각해 왔다.  다만 우리가 각각의 사건에 대한 연결고리와 패턴을 알지 못하기에 우연처럼 보일 뿐이라고.  어쩌면 자연계의 순환보다 더 엄정한 법칙이 삶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시대와 공간의 한 조각으로서 개개인의 역사도 이 엄정한 법칙에 의해 작동되고, 좋든 싫든 운명의 테두리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것과 같은), 신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라고 믿는 완전한 허구의 세계에서 진행되어 왔고, 또 그렇게 진행될 것이라는 약간의 확신을 갖게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마치 패배적 숙명론자, 또는 신의 섭리만 맹신하고 자신의 운명까지도 신에게 맡기는 꼭두각시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어느 정도 살고 나면 순서가 뒤바뀌어 뒤죽박죽이 된 자신의 삶, 그 지난 시절의 퍼즐조각을 원인과 결과에 따라 제법 순서에 맞게 꿰맞출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추적하다 보면 (만일 존재한다면)전생(前生)의 퍼즐조각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나의 이런 생각을 토마스 하디가 들었다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테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잡문집>을 읽었다.  단행본으로 발표하지 않았던 에세이, 여러 책들의 서문.해설, 그리고 질문과 그 대답, 각종 인사말, 짧은 픽션에 이르기까지의 잡다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니 신작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겠다.  소설가란 거짓의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거나 미화하여 글로 쓰는 사람들이니 죄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지만, 작가가 이 책에서 밝혔던 자신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나의 생각과 일정 부분 서로 통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물론 작가는 절대로 인정하기 싫겠지만 말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만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내가 소설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학교 때 결혼해서 줄곧 일을 하며 생활에 쫓기다보니 글씨를 쓰는 일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빚을 내어 작은 가게를 하며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별다른 야심도 없었고 즐거움이라면 매일같이 음악을 듣고 짬짬이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뿐이었습니다.  나의 아내와 고양이는 느긋하고 조용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소설을 쓰기로 했습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써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문구점으로 가서 만년필과 원고지를 사왔습니다(그때까지 만년필도 없었습니다).  밤늦게 일을 끝내고 혼자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같은 것)을 썼습니다."   (P.446)

 

대체로 산문을 위주로 쓰는 사람들은 본질(또는 핵심)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부풀려서 독자의 의식을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풍경화를 위주로 그리는 화가는 번번이 그 본질을 놓친다.  주변의 잡다한 것에 현혹되어 핵심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작가의 의무는 시를 쓰는 데 있다고 본다.  문학에 있어 군더더기를 모두 제거하고 핵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시작(詩作)이다.  한 작가의 시를 읽지 않고는 그 작가의 됨됨이나 가치관, 지적 깊이를 평하기 어렵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비록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세상에 자신을 알몸으로 내보이고자 작정한 글쟁이라면 시를 써야 한다.

 

하루키는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잡문집>에서 그의 시를 단 한 편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쉽다.  수사(修辭)나 장문의 글에 물린 독자를 위해서라도 그리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평생을 풍경화만 그리던 화가가 어느 날 비구상의 작품을 갤러리에 걸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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