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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내 인생의 의미있는 사물들] 이란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내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사물들은 뭐가 있는가 떠올려보았다. 그닥 물건이라는 것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끝에 찾아낸 것은 어린 시절 읽고 또 읽었던 한 권의 책과 성인이 된 후에 엄마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아마도 지금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일지도 모른 어린 시절의 한 권의 책과(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책 읽는 여자를 동경하게 되었고, 은연중에 나도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었던 것 같다.), 스무살이 넘도록 떨쳐내지 못했던 나만의 트라우마를 한웅큼의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게 해준 내 어머니의 편지 한 통. 그것이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물의 전부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물들에 대해 한 편의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내내 나에게 영향을 끼쳤을 그 사물들에 대해 얼마만큼의 사유를 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이 책의 각 에세이들은 저자들이 자신에게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떠올렸던 생각과 유사한 느낌의 글도 있고, 또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 저자 본인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사물이 아니라 어떤 사유를 위한 실마리가 되어주었던 사물에 대한 이야기, 의 글도 있다.
어떤 글은 마음을 건드리는 잔잔한 에세이로 다가왔고, 또 어떤 글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런 생소한 이야기들은 내가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읽어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한 가지 사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사유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어떤 사물에 대해 우리가 사유를 하기 시작할 때 그 사물은 전혀 다른 의미로 그 사유를 시작한 사람에게 다가온다. 또는 어떤 사물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사유를 시작할 때, 그 사물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단순한 물건으로서가 아닌 생각의 재료로서의 사물, 내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우리는 흔히 사물을 실용적인 것이나 아름다운 것, 필수품이나 헛된 사치품으로 여긴다. 반면 사물을 정서적인 삶의 동반자라든가 상념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제로 생각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의미 있는 사물이라는 개념은 이런 두 개의 낯선 접근법을 합한 것으로, 우리와 사물 사이에서 생각과 느낌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물들을 통해 어떤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사물들을 사랑한다.
대개의 사물은 저자의 인생에 들어오게 된 특정한 순간과 환경으로 인해 강한 흡인력을 지니게 된다.
의미 있는 사물을 통해 우리는 현실 안에서 철학을 접하게 된다.
첼로: 나는 그 어떤 이유보다도 집중하고 명상하고 안정을 얻기 위해 지금도 첼로를 연주한다. 첼로는 아직까지도 내게 복잡성을 가늠하는 척도, 한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터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로 남아있다. 첼로 연주는 아직까지도 내가 최선을 다하는 일,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첼로는 나와 가장 가까워서 내가 아무와도 공유하지 않는 사물이자, 나를 처음 음악의 세계로 이끈 힘과 감정들로 다시금 다가가기 위해 의지하는 매개체이다.
자료보관소: 큐레이터와 함께했던 그날, 나는 처음으로 실제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 전환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를 고양시킨 르코르뷔지에의 실제 도면과 디지털 도면을 통해 큐레이터가 어찌 그리 단시간에 머릿속에서 자료보관소의 정서를 잊을 수 있는지,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는 소중함을 어찌 그리 쉽게 디지털의 힘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매듭: 매듭 실험실을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어쩌면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매듭을 만들면서 나는 연속과 분리, 결합과 이탈에 대해 의도적으로 사고하는 데 있어 평범한 사물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배웠다. 또 흥미로운 사물 하나로 수학에 대한 직관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5학년 때는 수학적인 과제에 그렇게 적극적이었던 한 소녀가 훗날 전형적인 수학 공포증에 굴복하고 만 현실을 목격하고 나니, 교육학 전반에서 다양한 학습 방식을 권장해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별: 여름날 저녁이면 나는 ‘옆터’에 가서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내 눈은 춤추듯 이 별 저 별 사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 관심을 끈 것은 별들이 아니었다. 별들 사이에, 별들 주위에, 별들 너머에 있는 공간이었다. 일고여덟 살 어린 나이부터 나는 우주라는 공간에 대해 수많은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밤하늘의 별들이 내게 영감을 주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자극했듯이, 나 역시 사람들이 무언가에 사로잡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새로운 사물을 만들고 싶다.
키보드: 만약 음악을 듣지 못하거나 연주할 수 없다면 인생에 더 이상 낙이 없을 것이다. 나는 키보드에 놓인 손가락들을 통해 언어나 음악과 연관된 사물에 다가가는 방식을 제일 좋아한다.
전문작가로서 그리고 먼 길을 걸어온 피아노 연주자로서, 키보드가 없었더라도 내가 세운 목표를 얼마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업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면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더욱이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온종일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 놓고 글을 쓰거나 연주하기를 마음속 깊이 원하고, 즐기고, 심지어 사랑한다는 것을.
불사조 슈퍼히어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며칠 동안 나를 만화책으로 이끈 감정은 향수였다. 향수, 그것을 가리켜 누군가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고픈 애절한 바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지금 나의 열망을 과거와 연결해주는 유토피아 판타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만화책이란 집으로 돌아가는 연휴에 엄마가 만들어준 남부식 야채 요리처럼 위로를 주는 대상이었다.
삶의 어느 순간부터인가, 성인으로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음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별의 상처와 상처의 회복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남은 사진들: 화재가 난 집을 복구하면서 나는 오랜 교훈을 새삼 실감했다. 모든 종이가 남길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특히 사진은 우리 다음 세대의 가족을 위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후손들이 가문의 과거를 보다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증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밀대: 밀가루 묻은 손으로 밀대를 잡고 질감과 무게를 느끼면서, 나는 이 밀대를 통해 탄생한 수백 개가 넘는 파이와 쿠키를 생각한다. 밀대는 나를 과거로 되돌리는 동시에 미래에 기억될 추억을 끊임없이 남겨준다. 이제 밀대는 시간을 초월한 사물이다.
기억을 깨우는 사물의 힘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서는 치유의 마법을 발휘한다. 우리는 사물을 창조하고 다시 그 사물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다락방의 그림: 예술의 목적은 ‘의미있는 사물’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일시적일지언정 상대에게 자신의 주체가 되어줄 것을, 작품의 의미를 창조하는 주체가 되어줄 것을 간구한다.
여행가방: 가방은 내게 할머니를 되돌려주었다.
노란 우비: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를 자주 보호해준 건 비오는 날 학교에 갈 때마다 비에 젖지 않게 해주는, 눈이 부시도록 밝고 노란 우비였다.
우비 덕분에 나는 바깥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했지만, 그로 인해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없었다.
어렸을 적 내 우비처럼 과학과 예술을 통해 자연의 질서에 몰입하는 동시에 자연의 혼돈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수첩: 잃어버린 내 수첩은 외부의 정보 기관, 다시 말하면 세포 대신 종이로 이루어진 내 뇌의 일부였다.
노트북: 그러므로 내가 컴퓨터에 특이한 열정을 품게 된 계기도 실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어려서 우연히 기계를 통해 낭만적인 경험을 했던 나는 컴퓨터를 볼 때마다 사랑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멜버른 열차: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기관차는 내게 더 넓은 세상을 뜻하는 움직이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가는 급행열차를 보면 저 반대편의 세상이 떠오른다. 열차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린다.
신디사이저; 나는 천천히 신디사이저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고독으로부터 벗어났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학교로 돌아갈 준비도 했다. 과거에 홀로 신디사이저와 보낸 시간은 나에게 있어 통과의례와 같았다.
토끼 인형 머레이: 마지막으로 머레이는 나 자신에 대해 알려준 선생님이다. 머레이를 보면서 내가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얼마나 쉽게 허무는지 깨닫는다. 우리가 뜨거운 감정을 미리 안전하게 경험하고 사회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무대는 다름 아닌 상상력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월드북 백과사전: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는 나의 번역자이자 귀감이었고 또한 등불이었다.
나는 월드북처럼, 환자에 대한 나의 애정을 말하지 않는다. 내 도움을 구하러 온 이를 잠잠하게 했던 경험들의 이미지와 단어를 찾아 월드북처럼 조용히, 의미있게 다가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실패할 때-내 영혼의 책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팔찌: 나는 여성 선조들과 동맹자의 기운을 느끼고 싶을 때, 오래된 나바호 족의 커프팔찌를 찾는다.
이 팔찌는 이걸 만든 사람의 정신, 그리고 불, 물 땅, 하늘이라는 요소들을 기리는 익명의 기념물이다.
우리가 이렇게 팔찌를 교환한 것은 서로의 아름다운 장신구가 탐났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충심의 표현이자, 공통점을 지닌 세 여성의 교차점에 형태와 실체를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