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는 작가 고유의 DNA
혹시 당신은 리처드 바크먼(Richard Bachman)이라는 이름의 작가를 알고 있는가.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서 해안경비대에서 4년을 근무한 후 10년 동안 상선을 탔고, 뉴햄프셔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낮에는 낙농장을 보살피고 밤에는 글을 썼다. 그는 일찍이 뇌종양을 수술에 의해 제거한 적이 있었지만 1985년 2월에 가명암(假名癌)이라는 희귀한 질병에 걸려 죽어 버렸다. 그는 생전에 다섯 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들은 『분노Rage』,『죽음의 행진The Long Walk』,『로드워크Roadwork』,『러닝맨The Running Man』,그리고 『여위어라Thinner』이다. (그의 또다른 작품 『통제자들The Regulators』은 미망인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사후에 발표되었다.)
그의 평범한 삶과 역시나 별로 특별하지 않은 소설 제목들로만 본다면 그는 말 그대로 그리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이다. 하지만 후일 우연치 않은 기회를 통해 리처드 바크먼의 어마어마한 비밀이 밝혀진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대형서점의 아르바이트생이면서 작가였던 스티브 브라운(Steve Brown) 은 바크먼의 소설 『여위어라Thinner』를 읽다가, 그 책이 어느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이거나 그의 글을 완벽하게 흉내낸 글이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는 국회도서관에 가서 바크먼의 책에 관련된 자료들을 뒤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바크먼의 책 네 권이 그 유명한 작가의 삶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헌정되었으며, 저작권도 같은 에이전트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국회 도서관 직원의 도움까지 얻어 바크먼의 책 한 권의 저작권 서류에서 그 유명한 작가의 서명을 찾아내고야 만다. 평소 그를 좋아하고 존경한 스티브는 자신이 찾아낸 서류들을 카피해 첨부하고, 자신이 알아낸 사실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띄운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원한다면 그 비밀에 대해 입을 다물겠다는 내용이었다.
2주 후, 그는 스피커를 통해 자신에게 전화가 왔다는 방송을 듣고는 무심코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에서는 이내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스티브 브라운입니까? 나는 스티븐 킹입니다."
리처드 바크먼은 바로 스티븐 킹이 상상 속에서 지어낸 가상의 작가 이름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로맹 가리의 또 다른 이름 에밀 아자르를 기억하는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이 청년과 스티븐 킹은 그로부터 사흘 밤 내내 인터뷰를 하게 되고, 그 청년은 스티븐 킹의 허락을 얻어 모든 자료들을 정리해서 <워싱턴포스트>지를 통해 공개적으로 이 비밀을 널리 밝히게 된다.
죠리퐁의 독수공방 블로그에서 일부발췌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여러 쟝르의 책을 좋아하는 나지만, 여자치고 나의 독서 취향이 기이하고 독특하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깨달았다. 즐겨 읽은 스티븐 킹이나 레미트르, 기리노 나쓰오같은 아주 하드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선호하고 열광하는 독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미스터리나 범죄물 혹은 공포물을 좋아하는 독자는 마이너리티속의 마이너리티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는 소설들을 지인에게 권하면, 뭐 이런 책을 권하느냐고 핀잔 비스무리한 농담을 건네는 것이 농이 아닌 그들의 진심이었다는 것도 미련하게도 요즘에야 깨달았는데, 사람이 참 취향이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범죄물 미드만 골라보고 킹이나 나쓰오나 레미트로나 미야베 미유키(미유키는 하드하면서 소프트해서)의 작품이 기다려지니 말이다. 하아, 이렇게 쓰니 내가 무슨 범죄형 인간으로 분류되겠다 싶다.
킹은 젊은 시절때부터 선호해서 여전히 나이 든 지금까지도(그나 나나 나이 드는 건 마찬가지) 꾸준히 읽고 있는데, 몇달 전에 나온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 읽으면서 실망스러워, 그도 나이 드니 어쩔 수 없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 힘이 없었다. 미드 범죄물 짜집기 한 느낌도 나고, 킹의 40년 넘는 문학 계보를 모르고,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는 젊은 독자들이라면 킹을 그저그런 작가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길 정도로.
젊은 시절의 킹의 필력은 공포작가답게 공포스러울 정도로 대단했다. 심지어 나는 그의 작품 데스퍼레이션을 읽다 심리적인 공포에 짓눌려 2권 중간에서 그만두어야 할 정도였다. 결말이 얼마 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읽다가는 내가 죽겠구나 싶어 읽기를 그만두었다. 그 때가 1998년인가. 그 후에는 킹의 소설을 안 읽다 2000년대 중반에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을 읽으면서 다시 킹의 작품을 꾸준히 읽고 있다. 사실 톰 고든도 이천년 이전에 비하면 공포스럽기보다 무난한 작품으로 평가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킹의 작품은 2000년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데(아니면 그의 교통사고 전후로), 이천년 이후에는 잇, 애완동물 공동묘지나 샤이닝을 쓴 공포작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다.
지난 달인가, 재출간된 롱워크는 우리 나라에서 1994년에 완전한 게임이란 이름으로 츨간되었던 작품이었는데, 킹이 한 때 리처드 바크만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던 때에 냈던 작품이었다. 80년대 초중반에 출간된 저 위에 인용구에 나온 네 작품은 그 이전의 공포소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데, 통제 국가나 체제에 대한 저항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는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최고로 꼽는 작품이 샤이닝인데, 고립된 인간이 광기화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 광기의 대상이 아버지란 것, 레슬러 피들러 평가대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의식을 심층적으로 탐구했다고 평가한 것처럼, 롱워크는 통제국가에서 성인식이라고 해야하나 워킹 라인을 벗어나면 총살된다는 설정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맨 또한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극한 게임이라는 점을 상기해 주길 바란다.
레슬리 피들러 하니깐, 생각나는데, 킹의 작품이 캐리로 시작해서 출간되는 작품마다 헐리웃에서그에게 많은 돈을 갖다 주었지만, 여전히 그는 미국내 문단에서는 싸구려 하위문학 작품 대접받을 때(킹이 어린 시절부터 열광적인 비급 하위 영화 관람자이자 독서가임), 킹의 작품을 재조명한 평론가가 바로 포스트모던니즘의 선구자인 레슬리 피들러였다. 레슬리 피들러의 포스트 모던니즘이 고급문학과 저급 문학이라는 것을 다 해체시키는 작업이라, 그의 입맛에 맞는 작가가 킹이 아닐까 싶다만은. 여하튼 레슬리 피들러의 킹의 재조명이후, 그의 미국 문단에서 지위는 그 후 승승자구해서 지금은 올킬이라고 해야하나.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읽는데, 하루키가 어느 날 받은 우편물에 스티븐 킹이라는 발송인을 보고 놀라, 혹 작가 스티븐 킹!!! 그러나 작가 스티븐 킹이 아니라 카페트 사라는 카탈로그의 동명이인이었다고 실망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세계적인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작가인 하루키조차 킹인줄 알고 놀랄 정도면 그의 문학적 지위는 이제 무소불위구나 싶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에게 세계 최고의 작가라는 무소불위의 지위를 준 것은 평론에 대한 재조명보다 끊임없는 창작 활동에 대한 댓가이다. 비록 젊은 시절에 비해 필력은 떨어졌고 상상력도 예전 같지 않지만 이십대부터 현재 67세까지 끊임없이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스티븐 킹이 작가로 걸어오고 있는 롱워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