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매번 작품마다 같은 소재,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줄기차게 써대느니 작품의 질적 편차가 크더라도 온다 리쿠처럼 SF, 하이틴류, 크라임(추리)소설 같은 다양한 쟝르의 글을 쓰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카테고리가 형성되면 그 카테고리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카테고리에 도전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자신의 카테고리에 만족한 채 평생 같은 범주의 글쓰기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범주안에서 위대한 소설가라는 소리도 듣는다는 것을 어렴풋히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제 약수터길을 오르다가 문득 다양한 쟝르를 오가며 글쓰기의 실험을 하는 작가는 진정 온다 리쿠뿐이단 말이냐! 라고 생각하던 찰나, 글쓰기에 미친 작가가 온다 리쿠뿐만 아니라 공포 소설의 제왕 킹도 떡 버티고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었다. 우리에게 공포소설의 제왕으로 알려진 킹이 사실은 그의 공포소설은 엄청난 다작 중 새발의 피일뿐이고  그 또한 여러 쟝르의 소설을 오가며 자신의 글쓰기를 실험하는 작가였다는 사실 말이다.   

혹시 당신은 리처드 바크먼(Richard Bachman)이라는 이름의 작가를 알고 있는가.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서 해안경비대에서 4년을 근무한 후 10년 동안 상선을 탔고, 뉴햄프셔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낮에는 낙농장을 보살피고 밤에는 글을 썼다. 그는 일찍이 뇌종양을 수술에 의해 제거한 적이 있었지만 1985년 2월에 가명암(假名癌)이라는 희귀한 질병에 걸려 죽어 버렸다. 그는 생전에 다섯 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들은 『분노Rage』,『죽음의 행진The Long Walk』,『로드워크Roadwork』,『러닝맨The Running Man』,그리고 『여위어라Thinner』이다. (그의 또다른 작품 『통제자들The Regulators』은 미망인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사후에 발표되었다.)
그의 평범한 삶과 역시나 별로 특별하지 않은 소설 제목들로만 본다면 그는 말 그대로 그리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이다. 하지만 후일 우연치 않은 기회를 통해 리처드 바크먼의 어마어마한 비밀이 밝혀진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대형서점의 아르바이트생이면서 작가였던 스티브 브라운(Steve Brown) 은 바크먼의 소설 『여위어라Thinner』를 읽다가, 그 책이 어느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이거나 그의 글을 완벽하게 흉내낸 글이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는 국회도서관에 가서 바크먼의 책에 관련된 자료들을 뒤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바크먼의 책 네 권이 그 유명한 작가의 삶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헌정되었으며, 저작권도 같은 에이전트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국회 도서관 직원의 도움까지 얻어 바크먼의 책 한 권의 저작권 서류에서 그 유명한 작가의 서명을 찾아내고야 만다. 평소 그를 좋아하고 존경한 스티브는 자신이 찾아낸 서류들을 카피해 첨부하고, 자신이 알아낸 사실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띄운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원한다면 그 비밀에 대해 입을 다물겠다는 내용이었다.
2주 후, 그는 스피커를 통해 자신에게 전화가 왔다는 방송을 듣고는 무심코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에서는 이내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스티브 브라운입니까? 나는 스티븐 킹입니다." 
리처드 바크먼은 바로 스티븐 킹이 상상 속에서 지어낸 가상의 작가 이름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로맹 가리의 또 다른 이름 에밀 아자르를 기억하는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이 청년과 스티븐 킹은 그로부터 사흘 밤 내내 인터뷰를 하게 되고, 그 청년은 스티븐 킹의 허락을 얻어 모든 자료들을 정리해서 <워싱턴포스트>지를 통해 공개적으로 이 비밀을 널리 밝히게 된다.  
죠리퐁의 독수공방 블로그에서 일부발췌


 

위키피디아에서 리처드 바크를 검색하면,  왜 스티븐 킹이  자신의 또 다른 alter ego 섀도우작가들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가 나와 있다. 킹의 작가 초년 시절, 당시의 출판 시장의 일반적인 시각은 한 작가의 작품은 일년에 한편씩 출판해 내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6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우는 그에게  젊은 시절 일년에 한편은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러한 시장분위기는 참을 수 없는 금욕을 요구한 것이 마찬가지였던 듯.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출판하고 싶어 했기에 다른 필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크만이란 또 다른 필명을 얻어 Signet 출판사에서 저 위에 언급한 다섯 권의 책들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바크맨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다섯 작품 모두 공포소설이 아니다.  이때 그가 관심있는 주제는 공포라기 보다는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저항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롱웍>은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게임>으로 1994년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 100명의 아이들이  롱워크 대회에 참가한다. 긴 레이스 도중 걷는 것을 포기할 수 없으며 만약 포기한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 레이스 도중 세번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네번째 규칙을 어길 경우도 사살, 결국 한명의 아이만이 살아 남는다는 이야기인데, 전체주의 사회의 불합리성, 무저항, 강제와 강요 그리고 순종 같은 소재는 그가 젊은 시절에 겪었던 혁명적이며 반항적인 60년대의 미국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연결시킬 수 있으며 그가 왜 백인이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정치적 신념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러닝맨>은 80년대 나온 영화중 가장 기억할 만한 영화였는데, 사실 나는 그 때만 해도 <러닝맨>을 떠올릴때면 아놀드 슈왈츠제너거를 떠올렸지 스티브 킹을 떠 올리지 않았다. 이 작품은 영화만 봐서 정확히 원작과 일치 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정은 <롱웍>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살아남기 위해 주인공의 사투, 긴장감과 긴박감을 소름끼칠 정도로 잘 전달되는데, 원작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킹의 다작중에서 아주 일부분을 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존해 있는 동안 그의 많이 작품들이 잊혀지고 묻혀있으며 우리는 아주 극히 몇 몇 작품만을 통해 그의 면모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수라 백작의 두 얼굴 중 특히나 한 쪽의 얼굴을.  

아,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작 다양한 쟝르를 오가면 활동하는 작가들에 대한 소개에 있지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양한 쟝르를 넘나드는 가운데에서도 작가의 문체는 작가 고유의 DNA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리처드 바크만이 킹의 다른 필명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스티브 브라운이 <신너>라는 작품을 읽다가 유명 작가의 글을 완벽하게 흉내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바크만이 킹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는데, 위키피디아에서  살펴보면 스티브 브라운은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였다고 써 있다. 아무리 다양한 쟝르를 넘나드는 활극을 보여도 작가 자신의 문체는 숨길 수 없다는 말이다. 이건 개인의 DNA가 타인과 다른 심지어 부모와 다른 개별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처럼 자신만의 고유 코드인 것처럼 작가 고유의 글쓰기도 그런 자신만의 독특한, 결코 타인이 흉내낼 수 없는 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모습을 숨긴 채 그림자로 글을 쓴다고 해도 다른 독자들은 그 작가임을 알아 챌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모습으로 바뀐다고 해도 본질은 속일 수 없는 법이라고 할까나.

덧1: 죠리퐁님의 허락없이 저 글 가지고 왔는데 만약에 내리라고 한다면 내릴께요. 올 초봄에 죠리퐁님이 제가 알라딘 중고샵에 내 놓은 책들을 대량으로 구입하신 적이 있어 아는 체 좀 했습니다. 혹 <전작주의 꿈> 쓰신 분이 아니시냐고?! 사실 제가 죠리퐁님의 킹의 저 글을 읽고 <롱워크> 원서를 한 4개월 걸려서 읽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글을 안 쓰시냐고 주제넘게 문자 보내적이 있는데, 며칠 전에서야 그 분의 블로그를 찾았네요. 07년 이후로는 포스팅을 하지 않은 채 있지만 이 분이 그 전에는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찾아서 읽은 것이라서 현재 네이버블로그만이라도 감지덕지합니다.  http://blog.naver.com/book_b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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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가로서 긴 길을 걷다보면
    from ilovebooks 2016-01-22 09:26 
    혹시 당신은 리처드 바크먼(Richard Bachman)이라는 이름의 작가를 알고 있는가.그는 뉴욕에서 태어나서 해안경비대에서 4년을 근무한 후 10년 동안 상선을 탔고, 뉴햄프셔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낮에는 낙농장을 보살피고 밤에는 글을 썼다. 그는 일찍이 뇌종양을 수술에 의해 제거한 적이 있었지만 1985년 2월에 가명암(假名癌)이라는 희귀한 질병에 걸려 죽어 버렸다. 그는 생전에 다섯 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들은 『분노Rage』,『죽
 
 
blanca 2010-05-17 17:22   좋아요 0 | URL
아, 너무 흥미로워요. 그는 정말 킹왕짱인가봐요^^;; 잘 읽고 갑니다.

기억의집 2010-05-18 12:03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킹이 다채로운 글을 쓴 거 같아요.
킹도 미국내 평론가들한테는 제대로 대우를 못 받으니
여기나 거기나 지 잘난 맛에 사는 평론가들이 많나봐요.

알케 2010-05-17 19:20   좋아요 0 | URL
공감...작가들의 문체는 DNA...핑거프린트 맞지요.

펩시냐 코크냐 구분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저도 눈을 감고 누군가 낭송해주는

문장을 들으면 그 중에서 이문구 선생의 문장과 그의 에피고넨처럼 보이는

김종광과 한창훈의 문장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

이문구선생..초기 이문열...지금보다 조금 더 젊은 시절의 고종석...소설가 김연수의

문장들 속에는 말 그대로 그들의 DNA가 보이지요.

좋은 작가들과 노력하나 가 닿지 못하는 평범한 작가들의 차이.

기억의집 2010-05-18 12:09   좋아요 0 | URL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체는 숨길 수 없는 거 같아요. 저는 사실 이 글을 쓴 이유가 다른 분들 염두해서 쓴 것인데..저도 이런 경험이 있거든요. 알라딘에서 활동했던 서재인데 글을 잘 쓰신 분이 있었어요. 아, 진짜 끝내주게 쓰셨는데....활동을 접어서 너무나 아쉬워요. 나중에 그 분이 누군지 알게 된 것이 바로 문체였어요. 바로 그 분만의 독특한, 숨길 수 없는 문체. 번역에도 드러나더라구요^^ 하핫.

stella.K 2010-05-18 10:49   좋아요 0 | URL
새롭게 알았네요.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이었다니!
주체할 수 없는 창작욕 때문에. 참 부러운 DNA입니다.
흥미로운 페이퍼였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기억의집 2010-05-18 12:0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안녕하세요.
그러게요. 남들은 책 한권 내는 것도 버겁다는 작가들이 천지인데
킹은 불타오르는 상상력이 넘쳐 나다니, 부럽기 그지 없어요.
게다가 부자잖아요. 하루키처럼 바람끼도 없고...^^

akardo 2010-05-18 12:15   좋아요 0 | URL
스티븐 킹 놀라운 작가였군요. 예전에 읽었던 단편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말예요. 그렇게 많이 쓰면서도 그만의 문체와 실력이 함께 있다는 건 상당히 부러운 일입니다. 그만큼 노력도 했겠지만요.
그나저나 하루키는 바람끼도 있었군요. 으하하.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기억의집 2010-05-18 12:29   좋아요 0 | URL
아카도님...없다고 썼는데.... 잘 못 읽으신 거 같아요^^
하루키와 킹은 둘 다 착실한 가정 생활로 유명하잖아요.
돈도 많고 가정도 착실하고 둘 다 음악 좋아하고
하루키는 재즈, 킹은 메탈음악!

akardo 2010-05-18 12:47   좋아요 0 | URL
엇. 그렇군요. 오오......오해해서 하루키에게 미안해졌어요. 혐오하는 인종 중 하나가 바람 피우는 거 정당화하는 유부남인데 아니라니 다행입니다.^^;;음악는 저는 막귀라서 아무 거나 듣죠. 음악에 조예 있는 사람들 보면 부러워져요.

2010-05-18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9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10-05-26 10:34   좋아요 0 | URL
스탠바이미는 영화로만 봤어요. 이번에 책으로 출간되었나봐요. 스티브 킹 작품들은 대부분은 아니지만 읽는도중 섬뜻해서 자기전에 읽으면 꿈자리가 흉흉해져서 한동안 안읽었어요. 공포소설을 즐겨 쓰는거에 비해서 참 가정적이고 좋은 남편,아버지라는게 ㅎㅎ 특이해요.
아들도 작가로 데뷔했는데 스티븐이 많은 조언을 해줬다고 아들이 인터뷰에서 아버지 자랑을 늘어놓더군요.

기억의집 2010-05-26 13:3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글은 무섭게 쓰면서도 사생활은 안정되어 있는 게 되게 신기해요.
제 생각에는 킹은 여자나 로맨스에 관심이 없는 거 같아요.
저는 미국소설 읽으면 성적인 텐스가 너무 많아서 어떨 땐 불편해요.
반면에 킹은 그런 거 하나 없어서 너무 편하게 읽어요.
다른 여자에 관심 없는 킹, 그 부인은 얼마나 좋을까요?!
참, 그리고 저 킹의 아들인 힐의 작품도 읽었어요. 괜찮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