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부모혁명 - 부모와 아이가 행복해지는 대한민국 가정 희망 프로젝트 핀란드 교육 시리즈 3
박재원.구해진 지음 / 비아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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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주어진 것이 없어도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우리세대의 어린시절보다 더 많은 물질과 조건을 갖춘 지금의 우리 아이들의 현실은 참 고달프다. 부모가 아이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학용품을 챙겨주고 학원과 학습지를 알아보고 친구들 관계까지 거들어주면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학원에, 과외에, 학습지에, 방과 후 수업에, 온갖 박물관과 실습장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연극과 뮤지컬에, 엄마의 감시까지 이어지면 아이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숙제도, 공부도, 실습도, 생활도 엄마들과 선생들의 지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심지어 놀이와 오락, 봉사활동의 경우에도 엄마들이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가 많다. "너희들은 공부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도 제법 많은 학부모들이 하는 편인데 과연 아이들의 인생이 '공부'만 해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끔 저녁에 동기들, 후배들을 만나면 남자들의 경우 아이들의 성적 이외에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여자들의 경우 아이들이 학원에 제대로 갔는지, 숙제는 했는지 감시하느라 바쁘다. 대체적인 관심은 아이들의 성적이고 상급학교 진학이다. 아빠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직장생활, 사업으로 고단하고 정치,경제,사회 이야기에 관심을 쏟고 그나마 엄마들이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아빠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아빠들은 무관심, 엄마들은 초관심이다. 무관심도 문제고 초관심도 문제일텐데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까 걱정이다.
 
공부 스트레스가 만연한 아이들의 현실. 자살을 한 번쯤 생각한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현실. 실제로 무수한 아이들이 자살하는 한국의 현실. 왕따와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공론화되는 현실. 사교육이 공교육보다 넘쳐남에도 전반적인 아이들의 성장은 지체되는 현실. 어린 아이들까지 성적순으로 줄세우는 현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육당국과 학교가 문제일까? 당연히 1차적인 책임은 교육당국과 학교에 있다. 한 달 전에 읽었던 저자의 <핀란드 교실혁명>은 교육당국이 아이들을 위해 해야할 일과 교육당국과 관계없이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대해 말해주었다. 교육당국 뿐 아니라 행정부와 정치권, 언론, 학계 모두가 공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부모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0대의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진실한 대화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그 부모의 착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자살하거나 학교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의 부모는 "왜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었나?"라고 의아해할 수 밖에 없다.
 
OECD 57개국 중 한국 아이들의 학력은 최고 수준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수치를 노골적으로 자랑하며 부모들을 자극한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대한민국 학부모의 대단한 교육열'을 부러워했다는 보도로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모는 부모들의 결정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공부 효율성,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저 수준이다. 결과만 중요시하고 과정은 소홀히 하는 왜곡된 기준이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마주치는 우리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과 축 늘어뜨린 어깨가 그 어떤 수치보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잘 대변한다. 특목고, 명문대를 목표로 한 성적 중심의 교육 아래서는 부모나 아이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입시제도를 무조건 쫓아가다가는 부모나 아이 모두 방향성을 잃고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위험도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자녀의 교육문제에 대한 거의 모든 결정권을 부모가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핀란드에서는 세 살짜리 아이가 자기 나이에 해당하는 셋까지만 헤아릴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모들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글 교육, 영어 교육 등 조기교육을 강행한다. 학교에 진학하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학교 수업, 선행 학습 등에 쫓겨 다니느라 잠잘 시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격하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모들은 "어쩔 수 없다"며 외면한다.
그러나 저자는 "핀란드를 알면 알수록 공부와 행복은 비례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 아이들도 즐겁게 공부할 수 없을까? 그가 핀란드 교육에 관심을 두게 된 문제의식이다. "배우는 일은 스스로의 몫이지 남과 경쟁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경쟁이라는 틀에 갇혀 아이들을 학교로 몰아넣고는 친구들을 다 뛰어넘어 선두로 나아가라고 채찍질한다. 이러니 공부가 재밌을 리 없고, 한창 꿈을 키우며 행복해야 할 시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예민해지고 무기력해진 아이들과 부딪쳐야 하는 부모들도 같이 불행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며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학교도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회는 아이들을 소비 주체로만 바라보며 사교육을 부추기는 가운데 아이들이 마음 편히 기대 쉴 데라고는 오직 부모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부모 역할이 중요해진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서부터 지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정까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부모에게 내려진 과제다.
저자는 경쟁 없이 즐겁게 공부하면서도 세계 최고의 학력과 공부 효율성을 자랑하는 핀란드를 통해 우리의 교육문제가 처한 문제적 상황을 점검하고, 가정에서 적용 가능한 현실적인 방법을 정리하고자 했다.
  
왜 대한민국 부모와 아이들은 불행할까? 너나없이 '강요된' 성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내재된 잠재력이 있고,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타고난 자질을 다 무시하고 하나 같이 명문대에 진학하여 의사, 변호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할 10년 뒤의 미래를 과연 부모가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까. 부모들의 정보력이라고 해봤자 고작 직간접적 경험과 소문,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 수준이다. 그럼에도 "넌 공부만 해. 다른 건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라며 '능력 있는 매니저'로 살기를 자처한다. 그것만이 자녀가 당장도 훗날도 성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부모 역시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는 미래와 직면해서는 무기력하고 불안할 뿐이다. 이런 부모에게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전적으로 위임하며 사는 아이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짐작하면, 불안을 넘어 암담할 지경이다.
국제학업성취도 1위를 놓치지 않는 핀란드를 비롯하여 교육선진국들이 당면 과제로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가르칠 것인가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어떤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현명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만 갖춘다면 미래의 불안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을 때 공부도 즐길 줄 알고, 나아가 자신의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들의 문제해결능력 향상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애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직접 만드는 법을 가르치거나 숲에서 버섯, 베리 등을 채취하여 요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문제해결능력 방법의 하나다. 가족 간에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 가족회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고,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 할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독서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쓴다. 이처럼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대안적 자녀교육법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다만 직접체험을 강조하는 진로 지도는 많이 낯설었고, 동시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핀란드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가 일하는 현장을 방문하고,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직접 자기가 일하고 싶은 직장을 찾아가 실무 경험을 쌓게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의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가장 행복해할 일을 찾아 부모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핀란드의 가정교육의 전제는 우리 부모가 간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짚어준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잠재력을 타고난다. 둘째, 아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 있을 뿐이다. 셋째,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넷째, 아이가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줘야 한다. 국제학업성취도 1위, 세계 학습 효율성 1위 등 핀란드의 교육 경쟁력은 이처럼 아이의 타고난 학습 프로그램을 잘 살려 최대한 발휘하도록 지원한 결과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남의 집 아이와 비교하고, 성적과 입시 위주의 공부를 강요하는 것과는 참 다르다. 위스콘신 의과대학의 대럴드 트레퍼트 교수의 지적은 자녀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예민하게 바라보며 언어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 부모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존감을 인정받는다고 느낄 때 타고난 잠재력을 발휘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
우리는 당장의 입시를 위해 아이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교육 선진국은 미래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창의력, 통합적 사고, 열린 사고, 문제해결능력 등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또 실천한다. PISA 역시 미래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 역량으로 응용력, 사고력, 창조성, 실천력을 제시하며, 핀란드의 교육 시스템을 가장 인정하고 주목한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벼락치기 효과를 경험한 우리 아이들이 장기적 안목으로 '느린' 단계를 견디고 미래형 인간으로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제 부모들의 혁명적 결단이 남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격려하며, 독서습관을 통해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고, 폭넓고 깊이 있는 경험을 쌓도록 지원해야 한다. 아이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아이의 타고난 잠재력을 믿어주며, 크든 작든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 그 결과 부모와 아이가 모두 만족하고 행복한 가정, 이것이 책의 두 저자가 발견한 진정한 핀란드식 자녀교육 철학이었다.
 
한국사회는 미래 세대를 위해 사회 전분야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해야 한다. 교육 문제가 단순히 교육 문제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정치권과 행정부, 사법부, 사회 각 분야에서 오래 걸리더라도, 점진적이라 하더라도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성장을 생각보다 무척 빠르다. 10년 정도면 아이들이 부쩍 커버리고 그 10년 동안 아이들이 겪어온 과정이 이후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을 결정해 버린다. 수동적인 세계관, 스트레스로 점철된 무의식, 경쟁과 시험의 수렁에 빠져 지낸 10년이 아이들의 성장이나 행복에 평생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 부모들은 아이들의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지 못할까.. 그냥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면서 자신의 흥미와 자질을 개발하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것일까..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을 부모들의 기준에 맞추는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냥 아이들의 친구로, 대화 상대로,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한 행복한 공간으로 가정을 유지할 수는 없는가...
부모들 스스로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공감과 대화, 사랑과 배려, 나눔과 도움이 행복의 열쇠임을 느끼지 않나?
다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 역시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느낀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행복한 교육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지가 일어나고 있다. 성공 일방향의 교육이 아닌 아이들의 타고난 개성과 적성을 최대한 살려주는 가치 지향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절박한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교육감선거의 결과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책은 위기 속에 돌파구를 찾는 부모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부제에서 보듯, 이 책은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와 아이가 행복해지는 대한민국 가정 희망 프로젝트'다.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 아닌 누구나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하며, 그 토대로서 건강한 자녀교육법을 제시한다.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공부하는 핀란드의 부모들은 어떤 자녀교육관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 과학적인 근거와 핀란드의 성과를 통해 증명하는 한편, 우리 부모들이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과 비전까지 선사한다.
친구, 선후배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
 
"아이에게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를 보지 말고, 무엇이 있는지를 보라. 그러면 아이는 변할 것이다."(위스콘신 의과대학 대럴드 트레퍼트 교수)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큰 사람이 된다."(괴테)

 
[ 2012년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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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한 오라기의 혁명 - 자연농법 철학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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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결국 한미FTA가 발효되었다. 그리고 현 이명박 정권은 3월에 중국과의 FTA도 의욕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칠레 FTA나 한-EU FTA 체결 이후 간혹 중소기업 수출이 늘었다거나 칠레의 와인수입이 늘었다는 정부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FTA의 본질은 자본과 금융의 세계적인 거래를 자유화하는 것이고 그것도 거래 상대방 국가와의 '국력' 차이에 의해 불공평하게 체결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미 FTA가 얼마나 불공정, 불공평한지 새삼스럽게 애기할 필요도 없다. FTA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일반 시민들은 정부의 홍보논리에 세뇌되어 그냥 넘어갈 뿐이다. 어쩔 것인가... 한국에서 혜택받는 측은 수출하는 재벌기업이고 외국인 투자자일 뿐이다. 노동자, 농민, 서민, 중산층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을 뿐...

중국산 농산물이 이미 한국인의 식당과 상점을 잠식해있는 상태다. 여기에서 더 빗장을 풀어버리면 그마나 어렵게 생존해 있는 농촌과 농업, 농민은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먹거리'마저 외국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소위 '선진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념있는' 국가가 자국의 '먹거리' 산업과 산업 종사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데 비해 역대 한국정부는 무심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정치인, 관료들의 의식 상태가 무척이나 의심스럽다.
 
농업 경쟁력, 농민의 생산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미래의 후손들에게 불안감과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큰 정부의 정책들...  그럼에도 엇그제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FTA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고 재벌과 기득권의 이익에 충실한 정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54.3%의 낮은 투표율이었지만, 정책이나 공약은 후보 선택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현 정부의 정책, 여당의 정책, FTA 등에 의해 가장 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계층은 농촌과 중산층, 서민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정책이나 공약과 상관없이 농민, 중산층, 서민이 가장 많은 강원도, 충북, 경북, 경남은 여당을 선택했다. 선택의 대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몇 년간 참혹할 것이다. 다만, 그 유권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해서 선택한다는 현실이 암울할 뿐이다. 그래서 유권자를 탓하지 못한다.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 언론 종사자들이 나쁜 놈들인 것이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효과적으로 진실과 정책을 유권자에게 알리지 못한 야권과 '깨어있는 시민'들이 부족하고 모자랐을 뿐인걸...
 
 
이 책은 '자연농법'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씨의 2004년 저작이다. 단순히 어떤 특이한 농법에 관한 숱하게 많은 주장이나 학설들 중의 또 하나가 아니다. 이 책은 자연농, 자연식, 자연인이라는 철학을 역설하고 있는 사상서라 할 수 있다. 자연농법은 자연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이 삼자를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꿈꾸는 혁명이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사랑한 책, 그분이 추천한 책 목록 21번째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흔히 '현대의 노자'라고도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평생을 외곬으로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농학자로서 요코하마세관 식물검사과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후쿠오카는, 어느 날 인간의 지식, 과학문명이 모두 허상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위의 일체는 무용하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을 통해 검증코자 했다. 그리고 쌀·보리농사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는 땅갈기, 퇴비, 제초제와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훌륭한 수확을 내어 실증함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 보였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보잘것없는 지식(지혜)에 기대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후쿠오카는 '방임'과 '자연'을 구별한다. 가령 한번 가지치기를 한 나무는 다음해에도 계속해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말라 죽어버린다. 이것은 방임이다. 이미 나무(자연)에 교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지혜로 뭔가 잘못된 일을 해놓고서, 그 결과로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열심히 고치는 것, 이것이 현대의 과학농법인 것이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과학농법은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궁리해낸 기술도 부분적·한시적일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도리어 더 많은 문제를 배태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자기파괴적 행위의 결과가 극한에 치닫고 있으므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책이 쓰여진 지 한세대가 지난 지금, 인류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길'을 방기한 데 대한 우리의 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자연농법은 진실로 엄격한 농법이다. 농부는 자연의 힘을 완전하게 믿고, 그 흐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서로 다른 조건(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서로서로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어제 저곳에서 최상의 조건이었던 것이 오늘 여기서는 최악의 조건일 수 있다.
따라서 농부의 일이란 자연을 섬기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그러나 충실하게 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농업은 신(神)의 시종으로서 신에 봉사하는 역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본질을 망각한 사람들이 근대농업이라든가 기업농업이라면서 신의 측근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고 이익을 앞세우는 현실을 슬퍼한다. 농부의 기쁨은 다만 오늘 하루의 일에 전념해서 씨를 뿌리고, 자연의 활동에 따라서 작물을 애호하면서 작물과 함께 생활해가는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음미하는 것이 농부의 생활방식이고, 그것이 진정한 농부의 모습이다.
실은 이것은 보편적 인간 삶에 대한 지침이다. 자연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신의 뜻, 자연의 의지에 따라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복종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완성, 자연인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혜로 온전히 밝힐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에게 있어 자연농법은 영원한 미완성의 길, 구도(求道)의 길이다.
 
내가 직접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저자의 '자연농법'에 대해 거의 판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책에 기록한 것처럼 '자연농법'의 성과를 거두었다면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역시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농사를 짓는가?"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처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무한 성장을 위해, 무한 소유를 위하게 되면 그것이 농업이든, 제조업이든, 금융업이든, 무역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비슷한 경제구조와 비슷한 사회문화구조, 그리고 자연과 환경의 파괴, 인간성과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 2012년 4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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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
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 오마이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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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금) 한국경찰의 대표적인 문제점이 노출된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신부님 한 분이 추락사고를 당한 것이고 또 하나는 수원에서 경기도 경찰청이 112 신고가 접수되어 6분 넘게 강간,살인 피해자가 살려달라고 했는데도 늑장 대응하여 결국 살해된 사건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파출소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고 심지어 경찰은 자신들의 태만과 실수를 고의로 감추려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강정마을에서의 경찰 과잉진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본연의 업무인 치안과 민생 보호에는 뒷전이고 정권과 재벌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강정마을 사건의 경우, 6일 오후 문정현 신부가 강정마을 방파제에서 성 수난 주간을 맞아 천주교의 '십자가의 길' 예식을 펼치며 이동하는 중 경찰에 떠밀려 7m 아래로 떨어져 심한 부상을 당했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국민에게 사업의 취지와 정보를 공개하고 국민과 대화하면서 협조를 구하려 하지 않고 국민의 의사와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힘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몹쓸 태도와 무식한 방식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끝까지 용산참사와 매년 예산안 날치기, 4대강 죽이기, 한미FTA 날치기, 외환은행 불법 매각, 언론사 장악, 국민들의 알권리 침해 등 여론을 무시한 수 많은 '강행'으로 점철되었다.
강정마을의 경우,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주권을 지켜야 할 정부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스스로 망가뜨리고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면서 1948년 4월 이후 64년 만에 또 다시 제주도민들에게 악몽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로 결정,강행되는 과정에서 정부가 얼마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어겼고 거짓말을 일삼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강정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삶과 구럼비바위 등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자 애쓰는지에 대한 것이다.(이 책은 지난 주 공부모임 교재였다.)
 

 

 

 

 
구럼비는 제주 강정마을 해안가에 넓게 펼쳐진, 길이가 1.2킬로미터나 되는 너럭바위의 이름이다. 연산호 군락과 붉은발말똥게를 포함해 여러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제주 올레 7코스에 속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은 이 너른 바위에 기대어 책을 읽거나 바다를 감상하고 피곤할 땐 누워 잠을 잤다. 아름다운 강정바다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2011년 9월, 해군과 공사 시행업체(삼성과 대림)는 구럼비바위로 가는 길목에 높이 3미터짜리 철제 펜스를 치고, 다음날부터 굴착기로 구럼비바위를 부수기 시작했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이 4년 넘게 반대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끝내 강압적인 방법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평화롭던 제주 강정마을이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2007년 4월, 당시 마을회장이 불과 주민 87명의 동의를 얻어 해군기지 유치를 결의하면서부터다. 분노한 주민들은 2007년 8월 해군기지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전체 주민 1.970명 중 725명이 참여해 94%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강정마을은 애당초 해군기지 후보에조차 없던 마을이었다. 해군은 2002년 해군기지의 최적지로 '화순항'을 선정했다. 그런데 워낙 주민들이 강하게 반대하니까 슬그머니 후보지를 바꾸어 2005년 9월 느닷없이 남원읍 위미리를 사업 대상지역으로 정했다. 물론 또다시 위미리 주민들의 강한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군기지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를 불과 사흘 앞두고 강정마을이 후보지로 선정된 것이다. 계속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해군과 정부는 기지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후보지 지역주민과 참을성 있게 협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음모가들처럼 몰래 마을회장을 구워 삶고 일부 주민들을 회유하여 부당하고 부적절한 날치기 주민투표를 졸속처리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절대보전지역 지정이 해제된 때가 2009년 9월이었으니 만 2년 동안 해군은 불법 공사를 진행했다. 이런 야만스러운 정부가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인지...ㅠ
강정마을 주민들과 민주당·민주노동당 등 정치권에서는 세계자연유산 3관왕(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존지역) 지역인 강정마을 일대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한국 정부는 남방해상무역 보호 등의 이유로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군사전문가들은 제주해군기지가 중국을 압박하는 미군의 기항지로 활용되면서 ‘관광의 섬 제주’가 ‘동북아의 화약고’로 바뀔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군은 한·미안보동맹과 한·미행정협정 등에 근거해 언제든지 한국의 기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강정마을은 매향리와 대추리에 이어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매향리, 대추리, 용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싸웠던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는 2011년 7월부터 강정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강정 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한 김민수 씨는 아예 ‘강정 김씨’로 본을 바꾸고, 3년째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온 ‘마음치료사’ 뱅자맹 모네는 평화를 위해 작은 힘을 보태는 강정의 생활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느끼고 있다. 대만에서 온 평화운동가 왕에밀리는 강정마을에서 ‘양심의 소리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발 들어달라고 호소한다. 즉 이 책은 제주 강정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유배’를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지속적으로 취재해온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는 강정마을 ‘평화유배자들’을 인터뷰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와 자유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한국전쟁’과 ‘분단권력’을 주요한 테마로 삼아 사진 작업을 해온 노순택 작가는 강정 사람, 강정 바다, 구럼비바위의 소박하지만 강인한 모습을 포착해냈다

 

 

 

 
"사람들은 너른 내 몸에 기대 책을 읽거나 피곤할 땐 누워 잠을 잤죠. 그 흔한 일상의 풍경이었던 모습들이 이젠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군요. 내게로 오는 길을 다 막아버렸기 때문이에요. 해군과 시공업자들은 육지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내게로 올 수 있는 모든 길목에 높이 3미터짜리 철제 펜스를 쳤어요. 그리고 다음날부터 굴착기에 정을 꽂아 내 몸을 부수기 시작했어요. 하얀 살이 터져 포말처럼 강정바다에 흩뿌려졌어요. 너무 아팠지만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어요. 너무 슬펐지만 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웠기 때문이에요. 내 등을 주방 삼아 요리하던 종환 삼촌, 감옥에 갇혀 있는 문주란 꽃처럼 순한 사람 동원 씨, 그리고 우리들의 공주님이었던 일곱 살 태나……. 그리움이 깊으면 다시 만날 것이란 믿음에 그들에게 고통을 핑계로 구걸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온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겐 신음소리 한 점 내주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끝내 저 3미터 펜스를 넘어 다시 만날 테니까요.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려요. 다시 아이들을 안고 싶어요. 내 너른 등에 무등을 태우고, 강정바다 수평선 너머를 함께 꿈꾸고 싶어요. 나를 가두고, 나를 죽이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섬마을 아이들의 꿈을 죽이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우는 건 참을 수 없어요."(p.238)
 
 
헌법 제1조는 학생들 시험문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주권'은 민주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리임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향후 인류에게는 인간들의 자유의사 보다 수 백만, 수 억년 동안 먼저 지구상에 존재해온 자연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국민의 자유의사 보다 '국가'를 빙자한 정권의 의사는 2순위일 수 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해군은 기지공사를 중단하고 원점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정부가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하고 다수의 후보예정지를 대상으로 공정하게 협의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방사성물질폐기처리장 유치 과정이 절반 정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삶의 터전에 관계된 국가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처리 방식은 방폐장건을 토대로 수정하여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하고 필요한 국가정책이라도 국회와 국민들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진행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할 뿐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그렇다면 우리사회 내부에서부터 평화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대화와 협의를 통해 진행해야 한다.
 
며칠 남지 않은 4월 11일 총선에서 야권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만이 해군기지 건설공사 강행을 막는 방법인 것 같다.
 
[ 2012년 4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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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파울루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피터 맥라렌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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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진보'해 왔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돌아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만민평등'이라는 개념이 각국의 헌법과 교과서에 담겨 있음에도 실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인종적, 성적인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가 그러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가져오는 시스템이지만 최근 몇 십년 동안 전세계에 위세를 떨친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경향을 훨씬 강화시키고 있다.
국가 내의 양극화, 국가 간 양극화, 대륙 간 양극화, 인종별 성별 양극화가 지나친 상황이다. 결국 제도와 시스템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의식과 집단적 사회문화까지 고려하지 않는 현실,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그러한 '더불어 삶'과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이 훨씬 강하게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정치경제나 사회문화와 별도로 배움과 학습, 교육과 학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남미의 두 인물, 체 게바라와 파울루 프레이리의 삶과 철학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지향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란 무엇이며 이를 위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모색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프레이리와 게바라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점”이었다고 말한다. 일찍이 <페다고지>로 널리 알려진 프레이리는 비폭력 저항과 투쟁을 주장했지만, 브라질에서는 그의 반(反) 패권적 사상 때문에 위험한 반체제주의자로 찍혀 투옥되었고 오랜 정치적 망명생활을 했으며, 게바라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제국주의자들에게 토지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며, 폭력적 저항은 파시즘과 양키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신처럼 군림하는 식민주의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 게릴라였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가슴을 나눈 형제였다. “그들은 감옥, 전쟁터, 교육 투쟁의 현장 등 어디에서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지만, 머리와 가슴으로 비슷한 세계관을 지녔으며, 지적 정치적 동료로써 인간 정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p.09)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공부를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해 순교자처럼 거칠고 엄격한 게바라, 부드러우면서도 대담한 파울루에게서 그들이 공유한 세계관을 풀어내고 그들의 삶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책은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의 처형 당시의 모습부터 시작하여 게바라의 일생과 그의 철학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횡포,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 등의 혁명투쟁과 교차되어 서술된다. 처형 직전에도 현지의 교사와 교육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과 전투 현장에서도 게릴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기에 대한 비평을 해주는 등 끊임없이 교사 역할을 수행했던 게바라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피터 맥라렌은 두 사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본주의의 파우스트적 욕망이 세계를 생태적 위기에 몰아넣고, 북아메리카인이 향유하는 경제적 안락이 남아메리카의 형제자매의 빈곤과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게바라와 프레이리가 “지역적, 범세계적으로 권력의 비대칭적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교육부문에서의 행동방향을 남겨주었기 때문”(p.279)이라고 말한다.
피터 맥라렌의 정의에 따르면, 혁명적 교육학은 비판적 교육학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해서,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내적인 모순에 따른 충돌상태에 놓는 교육학이다. 혁명적 교육학의 핵심은 ‘지식’과 ‘존재’ 및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우리 사고방식을 인식론과 존재론 모두에서 혁명적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다. 프레이리와 게바라의 교육학은 이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내서 비판적 문해능력을 강조하며 정치 프로젝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게바라는 보다 직관적이고 프레이리는 보다 체계적이나 상호배려를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두 사람의 견해에 따르면 민중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해방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수준까지 키워내야 진정한 성공이다. 그것은 미완적 존재로서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자신과 사회를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변화시켜가는 ‘새로운 인간’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혁명의 과정이다.

'왜 지금 게바라와 프레이리를 다시 되살려야 하는가?' 이 문제 제기는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맥라렌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두 선각자가 남긴 세계관을 추적하며, 21세기를 맞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에 필요한 교육과 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을 그들로부터 발견했다. 그것은 곧 프레이리와 게바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이었고 그것은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정치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맥라렌은 세계화된 세계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세계로 정의한다. “‘족쇄가 풀린’ 자본주의와 끝없는 자본축적에서 비롯된 ‘자유시장혁명’은 모두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 실제로 그 ‘혁명’은 미국사회의 하부구조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으며, 방위산업과 금융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고혈을 짜냈다.”(p.60)
“사기극에 능한 깡패 정치인들은 공익, 공공서비스, 공적 권리, 그리고 최근에는 캘리포니아 법안 187호, 209호, 227호에서 보듯이 시민권까지 무시하면서 민간산업을 위한 충견노릇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게다가 케인스식 복지국가를 미친 듯이 와해시켜, 착취라는 개념은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개인과는 동떨어진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 버렸다. 자본은 선의의 진보적인 교육자들에게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p.69~70)
그는 두 사람을 통해 족쇄 풀린 자본주의, 자유시장주의,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병폐를 척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혁명의 교육학’이었으며 ‘저항의 교육’, ‘사랑의 교육’이었다.

체 게바라는 티셔츠, 핀, 포스터, 열쇠고리, 스티커 등의 형태로 상업화되고 소비문화에 코드화되어 자유분방한 혁명가로 전락되어 버렸다. 미국의 교사들과 교수들에게 체는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삶을 살고 메시지를 남긴 사람이 아니라, 먼 과거에 이상적인 꿈을 꾸었던 낭만적 아이콘이고 제3세계의 상징적 인물일 뿐이다. 심지어 교회까지 체의 상징적 이미지를 이용해 왔다. 혁명가 체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영국의 ‘교회홍보네트워크’는 체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남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5만여 개 교회에 그것을 구입하라는 전국적인 포스터 캠페인을 벌이며 이상스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교회신도들이 부활절에 교회를 찾도록 체의 포스터를 미끼로 쓰라는 것이었다.
체 게바라에 대한 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맥라렌은 이 책에서 체 게바라가 팽배한 자본주의 상품사회와 교육, 정치 등에서 교육자, 정치인, 포스트모던 좌파들에 의해 어떻게 상품화되고 왜곡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짜맞추기 교육, 은행예금식 주입교육을 비판하며 억업 받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꿈과 욕망을 채워주는 부속물로 살아가는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 파울루 프레이리로부터 비판적, 혁명적 교육을 이끌어내고 있다.

‘새로운 인간사회’를 모색하는 젊은이에게 프레이리와 게바라는 용기를 얻고 본받아야 할 표본을 남겨주었다. 일확천금이나 무소불위한 권력을 꿈꾸거나 자극적인 환상, 무자비한 폭력, 무절제한 섹스로 공허한 정체성을 채우는 반면에 게바라와 프레이리의 사상과 실천에 담긴 혁명적 자아는 정치와 교육에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해줄 것이다. 맥라렌은 탈정치화된 프레이리나 게바라를 거부했다.
“우리 시대는 꿈의 시대이다. 그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혁명가의 교육학적 프락시스를 되살려내고, 자본의 착취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세계사적 행동을 재연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교육의 권위자들이 유행병에라도 걸린 듯이 변절을 밥 먹듯 하지만, 이런 흐름에 혁명의 교육학까지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p.311)

이제 체 게바라를 전체적으로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2012년 4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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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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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를 총관리하고 시민들을 위해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총리실에서 몇 년 동안 수 천 수 만명의 민간인을 사찰했고 청와대는 이를 은폐하고 검찰은 이에 대한 수사를 축소했다. 측근비리, 성추행, 불법대출, 부정선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집권 여당과 청와대, 행정부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언론과 사법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에게 우리한 정보만 시민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지 4년이 지나고나니 여기저기서 그동안 감추어왔던 추악한 치부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집권자와 집권여당은 설직하게 공개,사과하고 개선하기는 커녕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권력과 손잡은 언론은 물타기에 여념이 없다. 
정부는 2년 연속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는 넘어섰다고 선전하지만 주변사람들 어느 누구도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심지어 SBS 방송 앵커도 그렇게 말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월급 대비 65%도 안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에 이르고 실업자가 넘쳐나고 빚지고 망하는 소상공인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5대 재벌기업은 이명박 정권들어 계열사가 50% 증가했고 집권여당이 4년 내내 부자감세에 재벌일감 몰우주기를 했으니 2만 달러의 대부분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쉽게 추축이 될 뿐이다.

나는 1987년부터 20여년간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추진하고 확장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그 생각이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되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우리에게 깨닫게해 준 것은 형식적이기만 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 참여와 연대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신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지난 25년간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한국의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시청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 수 밖에 없는가? 왜 촛불을 들어도 그 때 뿐인가?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나에게 수긍할만 한 대답을 해주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감정적이거나 편협된 사고가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하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에 대해, 운동에 대해서, 정당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기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지난 번에 읽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노무현 정권 집권 때 처음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성공을 평가할 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적 징후를 말했고, 지역주의·지역 갈등의 폐해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의미와 효과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에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그는 한국 정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와 그 문제를 이해하는 일관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자주 운위되는 지배적인 견해와는 매우 상반된 주장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의 ‘민중’과 ‘민중운동(론)’, 나아가 ‘촛불 민주주의’가 운위되는 상황에서도 ‘사회적 시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기를 요청한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초점은 지난 개혁 정부들의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맞춰져 있으며, 이 문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기도 하다.
다만 저자가 소통과 갈등을 대립개념으로 비교하는 것은 조금 부정적이다. 저자는 책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소통’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에서는 갈등이 보다 중요한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 말하며,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것만으로는 어떤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갈등'은 한 사회 내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는 개념이고 '소통'은 이러한 갈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대화하는 의미라고 할 때 '소통'은 '갈등'과 동전의 양면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여섯 가지다. 첫째 민주주의에서 갈등이 갖는 역할, 둘째 민주화 이후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변화, 셋째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수반하는 경제 문제를 사회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문제, 넷째 민주주의를 운동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이 갖는 한계, 다섯째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광주항쟁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17대 대선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를 통해 저자는 민주주의의 가치, 제도, 실천을 민주주의의 의미와 다이내믹스를 만들어 내는 주요 구성 요소로 상정하고, 이러한 측면 및 이들 간의 연관 관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민주주의를 이론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민주화 이후 20여 년의 한국 정치, 특히 노무현 정부의 경험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갖는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대면해야 할 문제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민중'과 '시민'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다. 민중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인 소외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중 개념은 갈등의 혁명적인 해결을 상정하면서 그 혁명의 잠재적인 주체로 설정된 개념이었다. 이와 달리 민주화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한 시민 개념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민주적인 해결 주체로 상정된 개념이다. 민중이 정치적 갈등의 혁명화를 위해 설정된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시민화(문명화), 곧 민주적 해결을 위해 상정된 개념이다. 여기서 저자는 민중 담론의 내용에 주목하면서,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을 이룬 데 비해 민중에게는 형식적인 인권이나 기본권만 강조되었을 뿐 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로서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이해는 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민주화의 추동력인 민중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시민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 민주주의는 ‘주체 없는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민권과 시민의 부재에 따른 결과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민중운동 담론은 그 자체 안에 ‘멀지 않은 장래에 빠르게 해체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민중운동 담론은 이념이나 가치 정향에 있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비전, 도덕주의, 낭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장주의 등을 그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도 저자는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원리는 ‘보편성의 원리’라고 했다.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성원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민의 출현은 민중운동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영국 사회이론가 T. H. 마셜의 논의를 옮겨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18세기)와 정치적 권리(19세기), 사회경제적 권리(20세기)로 누적적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점이라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밝혔다. 저자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진전을 위해서는 시민-유권자의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요구가 정당 정책 대안의 근본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부의 양극화나 빈곤의 심화 현상 등이 단순히 신자유주의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책 대안을 채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모든 잘못된 결과들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반신자유주의’론이 환원주의적이며 민중주의적 민주주의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찬성과 반대 내지 긍정 또는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시장구조, 생산체제, 노동시장, 산업·고용 구조의 부정적 효과를 ‘정치의 방법’으로 얼마나 완화·개선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재 때문에 급격한 신자유주의로 나아갔으며,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인가가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강조했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당체제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운동'과 '정당'을 구분하는 계기는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은 그동안 억압되거나 표출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집단적인 행위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고 이익과 열정,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이를 구현코자 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표출된 이익과 요구가 운동이 끝난 뒤에도 일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일정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일상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제도다. 물론 그것은 없던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제도를 확대하고 개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이 제도화의 계기가 완료될 때까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자가 정당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든 정당, 특히 소외 계층이 참여하고 이를 동원하고 대표하는 대중 정당은 운동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당이 제도화의 틀 안에서 사회의 모든 갈등, 이익, 이슈들을 표출하고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도 운동이 역할을 갖는 공간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보다 필요한 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정당은 운동이 표출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의 제도를 통해 다루고 해결하는 정치의 중심적인 메커니즘 내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아무리 사회 문제를 광범하게 제기하고 이를 정부/국가에 압박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의 제도적 틀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특정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운동의 경험이 많고 그 전통이 강하지만, 정당은 미약하고 그 전통 역시 약하다. 저자는 운동 자체가 갖는 효과를 부정하지 않으며, 운동과 정당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점을 강조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뚜렷한 가치 지향과 정책 목표를 갖되 그것을 실현 가능한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정당의 존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개혁파 내지 진보파가 싸워야 할 것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있지 모든 책임과 잘못을 외부화하면서 자신들이 남긴 ‘과거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망각하는 데 있지 않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진정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원하고 이루고 싶을 때, 그리고 그 과정이 일부 선각자나 활동가들로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정치와 정당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유권자들을 탓할게 아니라 정치와 정당활동을 하는 주체들이 스스로 그들을 참여시키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하고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 심판자처럼 자임하면서 감 내놓아라 콩 내놓아라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개선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것들이라도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각성되는 것이고 단련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결론이 운동이냐 아니면 정당이냐의 이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운동과 정당이 서로 배척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정당으로 수렴되고 정당이 운동의 지형을 넓히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발전 수준을 고려할 때 정당이 운동보다 미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운동이 정당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의 성과와 결과물이 정당으로 수렴되어 제도화되지 않으면 운동도 정체되어 경직화되거나 약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2012년 3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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