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지배의 이념과 전략 -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주의의 성장과 쇠퇴
김수진 지음 / 백산서당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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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수진 저 <노동지배의 이념과 전략 :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주의의 성장과 쇠퇴>를 읽고 / 2007. 12., 302쪽, 백산서당

이 책은 스칸디나비아 국가, 그 중에서도 스웨덴과 노르웨의 사회민주정당이 노동당이 20세기 100년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분석한 연구 결과이다.

저자는, 두 국가의 사회민주정당(사민당)이 지난 시기 동안 유럽을 포함한 세계 어떤 민주국가의 좌파정당도 결코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해 냈으며, 사민당의 지배체제 구축은 ‘세계사의 중대한 결절점에서 단행했던 이념과 전략 혁신의 산물이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새 이념과 전략은 자칫 ‘정통 사회주의 진영’에서 영원히 고립될 뻔했던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에 새로운 길을 밝혀 준 등불’이라고 평가한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사회민주 정당이 확립했던 사회민주 정치경제체제는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전 세계 지식인과 인민들에게 지난 수십년 동안,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추구해야 할 사회경제 질서의 모형을 제공해 주었다. 이와 같은 사회민주 지배체제와 정치경제체제가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구축되었고 유지되었으며, 또 최근 왜 이 정치경제체제는 해체되고 있고 지배체제는 쇠퇴하고 있는가? 
저자는 역사제도주의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한다. 그리고 네 번에 걸치 결정적인 역사적 국면에서 양당이 취한 전략과 결과를 평가한다.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맞이한 첫 번째 역사적 국면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두 나라에 의회민주주의의 제도적 골격은 완성되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구축할 사회경제적 질서를 둘러싼 대결과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스웨덴 사민당과 노르웨이 노동당은 주요 정책에서 모두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라는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양당은 노동계급 동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정치적 고립상태에 빠졌다.

두 번째 역사적 국면은 1920년대 말 대공황이 초래한 경제적 위기국면이었다.
양당은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경기부양을 목표로 한 개입주의 정책노선(공공근로사업, 소농 구제책, 국방예산 삭감, 환율인하, 조세확대, 국채발행 등)으로 전환했다. 결과는 화려했다. 양당은 안정된 노농(노동자-농민)연합을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민주 지배체제와 정치경제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세 번째 역사적 국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래한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노르웨이 노동당은 케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과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케인주의를 넘어서는 스웨덴 특유의 사회민주 정치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1932년부터 1976년까지 44년간 지속적으로 집권했으며, 노르웨이 노동당은 1935년부터 65년까지 30년간 연속 집권했다.
저자가 평가하는 양당의 정치경제체제의 특징은 ‘소비의 사회화’와 ‘통제의 사회화’, 보편적 복지제도, 소농과 화이트칼라 계급과의 계급연합 전략, 그리고 국가-노동-자본의 3자 연합 정책결정 방식이었다.

저자는 양당의 경제운용 정책의 차이점에서 노동계급의 지배력의 수준과 기간이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노르웨이 노동당은 합리적 계획경제와 케인즈주의 수요관리정책을 결합시키는 것을 골자였는데, 이 정책노선이 갈수록 노르웨이 정치경제체제의 사회민주적 특성을 약하시켰으며, 이에 대한 노동당의 배타적 지배력 역시 약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반면 스웨덴 사민당의 '렌-매이너드 모델'은 스웨덴 사회민주 정치경제체제를 케인즈주의 체제와 확연하게 차별화시켰으며, 경제운용을 둘러싼 정당 간, 계급 간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사민당의 배타적 지배력을 강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네 번째 역사적 국면은 1970년대 후반 스태그플레이션이 촉발시킨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국면이었다. 스웨덴 사민당과 노르웨이 노동당의 정책노선은 뚜렷이 우선회해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노선에 근접해갔다. 양국 모두 사회민주 정치경제체제의 해체와 지배체제의 쇠퇴를 겪었다.

저자는 양당의 장기 집권은 사회민주 정당의 전략적 선택 뿐만 아니라 네 가지의 역사적 국면에서 정치적 반대편인 부르주아 진영와의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정치경제체제는 “두 나라의 좌,우 진영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지속해 온 정치경쟁의 큰 흐름 속에서 번갈아가며 조성된 합의정치와 대립정치가 사회민주 지배체제의 성장과 쇠퇴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두 나라의 사회민주 지배체제와 정치경제체제의 성장과 쇠퇴는 거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중대한 국면, 이 시기에 좌,우 정당이 선택한 이념과 전략, 그리고 그에 따라 조성된 정치경쟁의 성격이 좌우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사회민주 정당이 네 번째 역사적 위기국면에서 승리하지 못한 이유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사적 격변에 양당이 대응할 수 있는 이념, 전략,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생산요소 교환체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라는 모순에 대응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긴요한 것이 국가의 통제와 규제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이것이 세계화와 자유화가 개별 국가에 가해 오고 있는 압력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이 압력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세계화와 국가의 약화는 국가 내부 정치경제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국가, 노동, 자본 사이의 역학관계를 압도적이고 근본적으로 자본 우위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위기에 사회민주주의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을 연구하는 집단과 사회민주주의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제시하는 정치세력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한국의 근현대사 및 정치경제적 조건이 전혀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통해 국내 연구진들과 진보진영, 그리고 노동운동계가 이 책을 통해 교훈과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우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한국은 지난 100년간 거쳐온 근현대 역사의 과정이 전혀 다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한국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적도 없고, 민족이 반으로 갈라져 분단체제를 70년간 겪은 것도 아니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르지도 않았다.

둘째, 스칸디나비아와 한국에서 의회민주주의가 실제로 정착되던 시기와 사회민주정당의 근간인 노동조합 조직률은 비교할 수 조차 없다. 스웨덴와 노르웨이가 의회주의를 확립하던 시기는 1917년과 1884년 경이었으며, 당시 의석수는 전체 230석 중 86석(노르웨이는 1915년 123석 중 19석)이었고, 1920년 노동조합 조직률은 각각 21%와 18%였다. 한국의 경우 1948년을 의회주의 성립 시기로 보면 좌파당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유지되던 의회주의 역시 1961년 박정희 일당이 군사쿠테타로 말살한 후 무려 24년이 지난 1985년 경 '절반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2015년 현재 10% 미만이며, 26년 전인 1989년 19.8%로 최고 수치였다.(2011년 노동조합 조직률은 스웨덴 67.5%, 노르웨이 54.6%)

셋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달리 한국의 경우 아직도 사상의 자유와 정치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는 사상의 자유 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언론의 자유마저 옥죄고 있으며, 좌파 정당의 경우 2004년 처음 의회에 진출하여 10석 미만으로 유지되다가 2014년 12월 결국 행정부와 사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바 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역사,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정당의 정책과 노선, 노동전략과 복지제도 등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은 마땅히 장려해야 할 일이지만 한반도와 한국의 실정과 현실에 맞도록 교훈과 시사점을 얻어야 할 것이다.






[목차]
1. 서론 
2. 정통 자유주의와 정통 사회주의의 충돌 
3. 적록동맹과 사회민주 지배체제 출현 
4. 사회민주 정치경제체제 
5. 사회민주주의의 쇠퇴: 개관 
6. 노르웨이 사회민주주의의 쇠퇴 
7.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쇠퇴 
8. 결론

[ 2015년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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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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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단편선, 권세훈 역 <변신 Die Verwandlung >을 읽고 / 2007. 01., 191쪽, 가지않은길

의류회사 영업사원인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고 일어났을 때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부모님, 어린 여동생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레고르는 순식간에 집안의 기둥에서 해충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본래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은 그레고르였지만,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돈을 벌어오지 못하자 그동안 병에 걸려 쇠약해서 일을 못하던 아버지는 다시금 건강한 모습으로 일자리를 얻고, 어머니와 여동생도 서서히 자신의 앞가림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가정의 골칫거리가 된 그레고르는 자신의 방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하게 된다. 
그러다 음악학교에 가고 싶어 했던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더 듣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가 징그러운 해충 취급을 받으며, 이 때문에 가족들은 하숙을 하고 있던 신사 세 명의 항의를 받게 된다. 
가족들의 공포와 괴로움의 대상이 된 그레고르는 다음날 아침 벌레의 모습으로 죽은 채 발견되고, 가족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을 하루 쉬고 바람을 쐬러 나간다.

<변신>은 1912년 작품이다. 당시는 유럽 전역을 초기 자본주의 체제가 장악했으며, 빈부격차와 16시간 노동, 어린이 노동 등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토마 피케티의 연구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빈부격차는 역사상 최악이었다. 그런 사회적 조건에서 ‘가족의 붕괴’와 '인간의 소외’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인공이 벌레로 변해서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상황은 21세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슬픈 자화상이 된다. 자신의 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방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는 장면은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를 외면하고 결국 감금해버린다. 이 장면은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저 짐덩이로 전락해 버리는 뼈아픈 현실을 냉정하게 반영한 것이다. 돌아오는 이득이 없으면 소통도 없다는 가혹한 상황을 보여준다.

카프카는 <변신>에서 인간이 동물로 변한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이미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독자가 제기할지 모르는 개연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독자들은 벌레로의 변신 가능성보다 변신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다. 주인공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지속적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맺어지지도 않는 인간관계 등’으로서 20세기 초 대량 생산 체제 하에서 성과와 업적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사회에서의 냉정한 인간관계를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발견한다. ‘식구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받고 그도 기꺼이 돈을 내놓았지만 특별한 온정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으로서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인식에 이르자, 주인공은 희생 대신 탈출을 꿈꾼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찾는 것, 자살,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벌레로의 변신은 주인공의 이런 무의식적인 소망이 반영된 셈이다.
주인공은 벌레로 변심함으로써 점차 가족으로부터 외면받고 배제당했으며,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가 꿈 속에서 그리던 ‘자유’는 현실에서 좌절되었고, 그는 결국 ‘죽음’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 책은 이렇듯 극단적인 가상 상황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는 대표작 <변신>을 비롯해 결혼을 앞둔 아들과 아버시 사이의 갈등 관계에 초점을 맞춘 <선고>와 두 작품과는 달리 갈등보다는 집단 내부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미해결 상태로 마무리되는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다수 작가와 학자들이 물질과 풍요, 신세계 개척을 칭송하 미래를 꿈꾸던 20세게 초에 세상에 내놓은 실존주의 작품이 카프카 문학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에 종종 드러나는 아버지와의 갈등 구조의 배경을 그의 삶에서 찾는 평론가들도 많다.

"평생 아버지와의 대립을 겪으며 작가의 길과 생활인의 길에서 방황했던 카프카 자신의 고뇌가 녹아 있다. 결국 그는 독자들에게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응하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꿈에 도전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숙제로 남겼다.”

"프란츠 카프카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작가다.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그에 따른 고통을 문제작으로 재구성한 작가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 했고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글쓰기에 몰입한 그였지만, 현실은 생계유지를 위해 보험사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책의 대표작 [변신]의 등장인물들도 인간 존엄성보다는 돈을 우선시하며, 벌레로 변해서 일하지 못하게 된 주인공은 결국 버림받고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 아버지와의 대립을 겪으며 작가의 길과 생활인의 길에서 방황했던 카프카 자신의 고뇌가 녹아 있다. 결국 그는 독자들에게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응하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꿈에 도전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숙제로 남겼다."

1883년 7월 3일 태어나 1924년 6월 3일 사망한 카프카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실존주의 대표 작가’라 불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며,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한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 2015년 5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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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완역 전습록 신선명문동양고전대계 36
왕양명 지음, 김학주 옮김 / 명문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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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양명(王陽明) 저, 김학규 역 <신완역 전습록(傳習錄)>을 읽고 / 2005. 02., 752쪽, 명문당

《전습록(傳習錄)》은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호는 陽明), 즉 왕양명(王陽明)의 제학설과 교계(敎戒) · 서간 등을 그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역자는 중국 사부총간(四部叢刊)의 <왕문성공전서 王文成公全書> 38권을 기준으로 주역(註譯) 했다. 양명사상(陽明思想)을 파악하는 데는 《왕문성공전서》 전체를 숙지해야겠지만 《전습록》을 정성껏 읽으면 왕양명의 사상은 대체로 이해된다고 전해진다.
"전습(傳習)"이라는 말은 《논어(論語)》 〈학이(學而)〉 제1(第一)의 "전(傳)한 바를 익혔(習)는가"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데, 즉 이 명칭은 스승인 왕양명으로부터 전수받은 학문을 제자들이 잘 체득하여 익히고 있는지 어떤지를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왕양명의 학문은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반성 내지는 육상산(陸象山) 학문의 계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는 주자학의 역사와 양명학 태동에 대한 주역자의 분석과 평가다.
"남송 시대 주희는 한당(韓當, ? ~ 227년)의 훈고(訓詁)에 힘쓰던 학풍을 바꾸어 공자와 맹자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들의 정신을 밝히는 것을 학문으로 목표로 삼아 대성시켰다. 주자학은 육조(六朝, 229년 ~ 589년) 이래로 도교와 불교에 의하여 다듬어진 철학적인 사유를 끌어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인생과 사회도덕을 논하는 광대한 규모로 공자사상을 확장시키고 있어서, 그 논리체계는 유가사상의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송으로부터 원나라, 명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은 관학(官學)으로 학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의 광대함은 오히려 학문의 통일을 잃게 하였고, 정연한 논리는 끝에 가서는 관념의 유희로 전락하여 번잡한 형식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미 주자와 같은 시대에 육상산은 ‘마음이 곧 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주자의 형식주의적인 학문을 반대하였다.”
“왕양명은 바로 육상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직설적이고도 간단명료한 학문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그 학문을 ‘육왕(陸王)의 심학(心學)’이라 세상에서 부르게 된 것도 그들이 내면적인 마음의 수양에 학문의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역자는 왕양명의 학문이 단번에 깨달아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일생을 두고 여러 단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고 평가한다.

<전습록> 한 번 읽고 내가 ‘양명학’을 알았다고 어디가서 설명할 수 있는 수준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전습록>을 시작으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된 셈이다.

주역자는 왕양명의 학문의 요점을 여섯 가지, 즉 심즉리(心卽理), 격물치지(格物致知), 지행합일(知行合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사상마련(事上磨鍊), 양지(良知)라고 정리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여섯 가지가 아니라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致良知), 세 가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심즉리(心卽理) : ‘마음이 곧 이’라는 것은 이미 육상산이 주장한 이론이다. 왕양명은 그것을 “마음이 곧 이이다. 천하에 또 마음 밖의 일이나 마음 밖의 이(理)가 있겠느냐?” “마음 밖에 이가 없고,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로 발전시켰다. 주자는 마음과 이와 물건의 이를 독립시켜 각기 다른 것으로 보았으나 왕양명은 그러한 안팎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지만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빛깔도 고운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즉 “마음이 있는 곳이 바로 사물이 된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는 게 마음의 본성이다”라는 주장이다. 주자는 ‘사물의 본성이 바로 이’라고 했지만 왕양명은 ‘본성이 바로 이’라고 주장한다.
=> 현대적인 상식이나 철학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존재와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나 현상을 자신(개인)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겪어야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다만, ‘성즉리’라는 개념으로 주자학 또는 성리학(性理學)이 관벽학문과 고시학문으로 전락해버린 당시 시대상황을 타개해버리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는 고려할 만 하다. 
당시 주자학은 왕들의 왕권 강화의 재료로써 전락됐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으며.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 ‘격물’과 ‘치지’는 원래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 중 두 조목으로서 주자도 매우 중시한 것이다. 주자는 ‘격(格)’을 ‘이르는 것[至]’이라고 보고 ‘물(物)’을 ‘사물의 이치[理]’라 풀이하였다. ‘치(致)’는 ‘추궁하여 얻는다’는 뜻으로 ‘지(知)’는 ‘지식’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자의 ‘격물치지'란 “만물에 대하여 그 이치를 추구하여 그에 관한 지식을 모두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왕양명은 ‘격’이란 ‘바로잡는다[正]’로, ‘물’이란 ‘일[事]’이라 풀이하고, ‘치’는 ‘이르는 것[至]’이며 ‘지’란 ‘참된 앎’ 곧 ‘양지(良知)’라 풀이하였다. 따라서 왕양명의 ‘격물치지’는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하고, 참된 앎을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내 마음의 양지를 모든 사물에 이르게 하면 모든 사물은 올바른 이(理)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의 양지를 이르게 하는 것이 치지(致知)이고, 모든 사물이 올바른 이를 얻게 하는 것이 격물(格物)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성의(誠意)’나 ‘정심(正心)’, ‘수신(修身)’도 모두가 ‘격물’과 같은 것이 되며, 이것은 마음의 수양을 통하여 깨닫는 올바를 이치를 실천하여야 하는 적극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행합일(知行合一) : 따라서 왕양명에 의하면 ‘치지’란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앎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그는 “앎이란 행동의 시작이며, 행동이란 앎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음식을 먹어보아야 참맛을 알고 효도를 행해야만 참 효도를 알며, 아픔도 자기가 경험을 통하여 참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지인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양명학의 ‘지행합일’이 대해 현대 한국인들이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던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지행합일’은 보통 “제대로 알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즉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고, 성인은 ‘천리를 순수히 보존하고 인욕을 버리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송대 이래 중국학자들의 이상이었다. 왕양명이 학문의 실천 원칙으로 내세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것도 이것을 계승한 것이다. 천리와 인욕의 구별을 처음부터 부정한 육상산과는 다르다고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는 왕양명이 육상산보다는 주자학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보는 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그러나 ‘마음이 곧 이’라는 왕양명의 전제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공부방법이 모순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주자는 ‘본성이 곧 이’이기 때문에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방법과 조화가 되지만, 왕양명의 마음에는 감정이나 욕망이 포함되어 ‘마음이 곧 이’가 되기 때문이다.

사상마련(事上磨鍊) : 왕양명은 한때 제자들이 세상의 공리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좌하여 마음의 수양을 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자들이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게으름만 피우게 되어 유가의 본시 성격을 벗어나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직접 일을 통하여 올바른 마음가짐과 일처리를 해나가도록 이른바 ‘사상마련’을 주장하게 된다.
‘사상마련’이란 ‘모든 일이나 모든 기회를 수양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환경이나 개인의 욕망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지행합일’과도 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길을 가거나 앉아 있거나 언제 어느 곳이건 수양의 장소가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양지(良知) : ‘양지’는 만년에 이르러 왕양명 학설에 중심을 이룬 것이다. 그는 ‘양지’란 두 글자는 "실로 옛부터 성인들이 서로 전하여 온 한 점의 골수이다”고 말하면서 양지를 깨우쳤던 기쁨을 ‘통쾌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발을 움직여 춤을 추었다’고 말한다. ‘양지’란 <맹자(孟子)>의 진심상() 편 등에 보이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본시부터 지니고 있던 진실한 지혜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양명에 이르러서는 가장 진실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바로 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어느 경우에는 양지란 바로 천리에도 통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왕양명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이 ‘양지를 이루게 하는 것(致良知)’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왕양명의 ‘양지’는 진실한 시비 판단의 기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생성한 본체와도 비슷한 것이다. 그는 ‘양지란 바로 조화이 정령이다’고 하였고, 또 ‘풀 나무나 기왓장 돌 같은 것도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도 말하였다. 
=> 그래서 왕양명의 ‘양지’는 관념론이나 주관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지’란 바로 ‘도’이며 ‘하늘’이라고도 한 것을 보면 개인을 초월한 자연의 섭리 같은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왕수인의 ‘양명학’ 및 사상과 관련하여 좀 더 공부해야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왕수인의 삶일 것이다. 이 책이나 인터넷에서는 왕수인이 문무를 겸비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명나라의 위기를 여러 번 구한 충신이었다고 평가하지만,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강신주는 그의 책 <철학 VS 철학>에서 왕수인을 체제옹호자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왕수인이 명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아 진압한 여러 외적의 침입, 반란이나 ‘도적’은 실제 먹고 살기가 고단했던 명나라 농민들의 난과 봉기도 여러 차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양고전을 공부하겠다며 겁 없이 전습록에 도전한 것을 후회했다. <전습록>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아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기》(禮記)나 주자(周子)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기》(禮記)나 《대학》(大學), 《중용》(中庸)이라는 고전이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제자들과 후학들이 해석한 것이니 내가 그동안 한두 번 읽은 <논어>와 <맹자>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동양고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해서인지 주역이나 한글 해설이 매끄럽지 않고 설명도 분명치 않게 느껴졌다. 물론 전적으로 동양 고전을 직접 읽고 분석하여 주역할 능력도 되지 않는 국내 학자의 일본책 번역서를 읽은 나의 불찰이다.
혹시 양명학을 공부하고 싶거나 <전습록>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정인재가 번역한 <전습록 1,2>(2007 청계)나 김동휘의 <전습록 : 조선이 거부한 양지의 학문>(2010 신원문화사)를 추천한다. 양명학이나 <전습록>을 개략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는 ‘수유너머’ 고미숙씨기 기획한 <낭송전습록>(2014 북드라망)이 적당할 것이다.

[ 왕양명의 생애 ]

왕양명은 여요(餘姚-현재의 저장 성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1481년 10세 때에 진사에 1등으로 올랐다.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던 도중 금산사에서 시부를 지었는데, 그 지혜가 타인을 놀라게 했다. 17살 때 부인 제씨(諸氏)를 남창(南昌)에서 맞이했는데, 혼례날 집을 나가 우연히 근처 산중에서 도사(道士)와 양생설을 논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앉은 채로 밤 새우기도 했다. 
21세 때는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낙방하였다. 수도 북경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주자가 남긴 책을 구해서 공부했는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것 나름의 이치(理)가 있으니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물어야 한다(格物窮理)"는 주자의 말을 실천하겠다고 관서에 있는 대나무를 7일 동안 바라보았지만 병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주자학을 불신하고, 환멸감을 느끼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비로소 관리가 되었다. 공부(工部)를 거쳐 이듬해에 형부 운남 청리사주사가 되었다. 30세에는 강북에서 형벌을 받은 죄수를 심의, 기록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사이에도 승방을 방문하기도 하고, 도사에게 도를 묻기도 했다. 31세 때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한다. 도교와 불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이 안정된 양명은 다음해에 항주의 서호에서 요양하였고, 33세에 북경에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동지를 모아놓고 성학(聖學)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정치에 연루되어 35세 때에 귀주(貴州) 용장(龍場)에 유배되었다.

45세부터 3년 동안 강서, 복건의 각지에서 설치던 무장 도적떼를 토벌하고, 영왕(寧王) 신호(宸濠)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무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자 왕수인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 나이 50세였다. 이듬해에 수인의 아버지가 죽어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3년상을 마친 뒤에도 복직하지 못하고 56세까지 고향에서 아무 임무도 없이 지냈다. 그 사이에 양명은 양지(良知)의 학설을 수립했고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쳤다.  
왕수인의 나이 56세가 되던 5월에 광서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에는 팔색단등협의 이적을 토벌했는데, 그 소굴을 소탕해서 다년간의 우환을 한방에 제거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타지에서 정무를 행하면서 건강이 악화된 그는 광동성 경계에서 광서로 들어가던 도중에 숙사[宿舍]-숙소-에서 타계했다. 가정 7년(1528년) 10월 29일, 그의 57세의 나이였다. 유언은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였다고 한다.

[ 2015년 3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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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탐구히스토리
에드워드 H. 카 지음, 길현모 옮김 / 탐구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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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E. H 카(Edward Hallett Carr) 저, 길현모 역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 1961, 238쪽, 탐구당

20대 시절에도 <역사란 무엇인가>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p.42)
당시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라는 것이 어떤 굳어진 ‘정의’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개념’ 아니라는 것, 교과서나 방송 또는 언론이나 학자들이 제시하는 것 이외에 숨겨져 있거나 감추어져 있는 다른 ‘역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역사에서 위인이나 영웅 개인보다 다수의 개인과 집단이 더 중요하다는 것, 시간이 좀 더 지나거나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교체되면 과거의 사실에 숨겨져 있는 이면이 드러나고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는 진보할 수 있으며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 편으로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이 희미해지고 한국사회에서 부정과 불의가 뿌리깊은 것을 목격하면서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희석화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나마 정의와 양심이 조금씩이나마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하면서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지천명의 나이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고 각별했다.

저자는 이 책의 목차를  첫 번째 ‘역사가와 사실’에서부터 마지막 ‘넓혀지는 지평선’까지 여섯 개로 나누었다. 여섯 개의 목차를 통해 역사가의 의무와 역할, 역사와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 사회와 개인의 관계와 역할, 역사와 과학과 도덕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등을 다룬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와 역사가와 역사서와 인간과 세계를 두루 관통하는 ‘역사철학’을 다루고 있다.(자세하게 공부한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2525 에서 참고)

○ ‘위인’ : 위인에 대한 헤겔과 E. H 카의 정의를 보면, 외국의 위인들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인물이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칭송과 우상화 역시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과거 친일파나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한 시대의 위인이란,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시대의 의지를 전해 주고, 그것을 완성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의 행위는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그는 곧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헤겔)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 내지는 그 사역인(使役人)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사회 세력을 대표하고, 창조하는 뛰어난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E. H 카)

○ ‘역사가와 사실’ : 세계사나 동양사, 한국사 등 인류가 이룩해 놓았다는 제반 역사서들은 과거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역사가들이 특정 사실을 골라서 자신의 역사철학에 맞도록 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역사 또는 역사서 읽기를 전후하여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E. H 카는 친일파와 서구숭배주의자들이 구성한 한국의 과거 역사와 현대사가 불신받을 수밖에 없는는 이유를 명쾌하게 지적한다.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순수한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곡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라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문제이다.”(p.30)
“역사가는 임시로 선택된 사실과, 그러한 사실선택을 이끌어 준 임시적인 해석 - 그것이 타인의 것이건 자신의 것이건 - 과의 양자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서 해석이나 사실의 선택 및 정리는 다 같이 쌍방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미묘한 반무의식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울러 내포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p.42)

○ ‘사회와 개인’ : 인류사회에서 사회와 개인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며, 개인과 집단의 의식과 행위는 사회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역사에서 특출했던 개인은 당시 시대적 과제나 일부 또는 다수의 요구, 외부적인 힘의 작용에 필요한 활동을 했기에 당시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 개인이 시대적 과제나 다수의 요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탄생 직후부터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단순한 생물적 단위로부터 사회적 단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사시대나 역사시대의 여하한 단계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회 속에 태어나는 것이고 또한 태어난 직후부터 사회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개인적인 상속물이 아니라 자기가 자라고 있는 집단에서 받은 사회적 획득물입니다. 언어와 환경은 다 같이 그의 사고의 성격을 결정짓는데 기여하며 그의 초년기의 관념조차도 타인들에게서 받는 것입니다.”(p.44)
“인간의 사회 속에서 개별화의 과정과 사회의 힘 및 결합력의 증대와의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입니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라고 할 때에 그것은 각 개인의 상호의존관계가 진보되고 복잡한 형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근대국가 사회가 개인성원들의 성격과 사상을 형성하는 힘에 있어서나, 그들 간에 단합성이나 획일성을 이룩해 놓는 힘에 있어서 미개부족 사회보다도 무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p.45)

○ ‘역사와 과학’ : 역사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이 양자도 서로 떼놓을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양자 중의 하나만을 우위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가가 보편성과 일반성을 다루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 있으며, 과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비슷하게 역사가의 주관성과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언어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역사가로 하여금 과학자나 마찬가지로 일반화를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p.92)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입니다."(p.93)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은 아닙니다. 과거의 빛에 비추어서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동시에 현재의 빛에 비추어서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간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양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북돋아 주는데 있습니다."(p.99)

○ ‘역사와 종교와 도덕’ : 진지한 천문학자라는 것과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는 양립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마음대로 유성의 궤도를 바꾸고 일식이나 월식을 지연시키고 우주의 운행규칙을 변경시킨다고 믿는다는 것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도덕적 판단을 역사의 인과관계에 개입시키거나 교훈을 얻는 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분리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역사적 인물의 공적인 판단과 행위를 역사서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지 사적인 판단과 행위를 역사서 속에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가에게 맡길 일인 것이다.

“진지한 역사가란 신이 역사 전체의 행로를 명령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고 믿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특정한 인종이나 종족에 대한 살률에 끼어든다거나, 요슈아의 군대를 돕기 위해서 달력을 속여서 낮 시간을 연장한다거나 하는 구약성서식의 신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개개의 역사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댈 수도 없는 것입니다.”(p.108)
"파스퇴르나 아인슈타인은 사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이라기도바도 성자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설사 그들이 불성실한 남편, 잔인한 아버지, 절조 없는 동료였다고 한들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손상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p.111)
“역사가들은 노예 소유주 개인에 대해서는 심판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노예 소유제 사회를 평가한는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해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며, 역사적 해석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 또는 가치 판단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하나의 투쟁 과정이어서 그로부터 나타나는 여러 결과는 우리들이 그것을 좋게 판단하건 나쁘게 판단하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부 집단이 타 집단을 희생시켜가지고 성취할 것입니다. 결국은 지는 편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p.116)

○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역사가에게는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개별적인 예언을 아닐지라도 미래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 즉 E. H 카의 말대로, 개인뿐만 아니라 역사가들 역시 미래에 일어날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 예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의 조건을 따져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대한 개연성 또는 합리적 추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달에 A라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역사가가 할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이, 일부는 A 국가의 사태에 대한 개별적인 지식을부터, 일부는 역사의 연구로부터 끄러내려고 하는 결론은, A 국가의 정세는 이러이러하니까 만일 누군가가 일을 일으킨다든가, 정부측에서 손을 써서 이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다는 정도의 것입니다. 또한 이상의 결론에는 전망까지도 뒤따를 수 있습니다만 그 전망은 일부는 국민 각층이 취하리라고 생각되는 태도에 관한 딴 여러 혁명으로부터 유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p.102)
"볼세비키 당원들은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끝장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혁명도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나폴레옹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하고, 나폴레옹과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임했던 것이다”

○ ‘진보로서의 역사’ : E. H 카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측정함으로써 자기의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이며,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라고 규정한다. 결국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보를 믿지만, 진보로서의 역사의 특징은 “역사에서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이 일직선으로만 전진해 나온 진보는 없다.”는 것과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문명의 탄생이라는 것은 진보의 가설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잡아볼 수는 있겠지만, 문명이란 결코 발명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극적인 비약이 수반되었다고 여겨지는 무한히 점진적인 발전과정"이라 말합니다. 기원전 3천년, 4천년 전에 나일강이나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창안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p.171)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이 일직선으로만 전진해 나온 진보라는 것을 믿는 일은 없었다는 것, 따라서 가장 급각도의 역전이라 해도 반드시 진보에 대한 믿음에 치명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진보란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라 할 수 있다.(p.174)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독자들은 인류의 역사는 수백, 수천 년 전의 역사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과 과학적 증거의 확인, 그리고 삭제되거나 묻혀진 사실을 통해 새로운 관점과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50~100년 전 역사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들과 가해자/피해자의 존재, 그리고 그 후손들과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 속에서 사실 관계가 부족하거나 이해관계가 첨예한 과거사, 지배계층이나 특정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하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해석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 ‘진보’와 ‘역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분단과 민족 문제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한반도의 현실은 그런 태도를 절실히 요구한다.

오랜만에 E. H 카의 역사철학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금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되살려본다. 그렇지만 20대의 열정 이후 또다시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지내오면서 배우고 깨닫고 느낀 지금 시점에서는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그도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했듯이 ‘역사’는 우주나 지구처럼 자연스럽거나 법칙적으로 ‘진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21세기 접어들면서 오히려 과거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과거의 오류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경향도 많고.

21세기 인류는, 서구사회에서 20세기 초 이래 100년 만에 소득과 부의 불평등성이 최고조에 도달한 것처럼, 수천~수만 년에 걸쳐 이룩한 인류의 진보가 후퇴할 수 있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비록 역사가 중단과 후퇴와 전진을 반복한다고 하지만, 현재의 세대가 역사에서의 전진이 아닌 중단 또는 후퇴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자체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2015년 한반도와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이들이 겪고 있는 생생한 삶인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를 살아야 하는 자식들과 후손들이 존재하는 한, 현 세대는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 현재의 역사가 헛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인상깊은 문장-

“인간의 사회 속에서 개별화의 과정과 사회의 힘 및 결합력의 증대와의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입니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라고 할 때에 그것은 각 개인의 상호의존관계가 진보되고 복잡한 형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근대국가 사회가 개인성원들의 성격과 사상을 형성하는 힘에 있어서나, 그들 간에 단합성이나 획일성을 이룩해 놓는 힘에 있어서 미개부족 사회보다도 무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p.45)

“우리들은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정의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하는 문제를 추상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는 도안에 자칫하면 그러한 싸움이 추상적인 관념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그것은 개인 그 자체와 사회 그 자체와의 투쟁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개인집단 상호간의 투쟁인 것이며, 각 집단은 자기편에 유리한 사회정책을 추진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사회정책을 저지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p.48)

“역사가 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한없는 재물과 부를 지니는 것도, 전투를 하는 것도 역사 자체는 아니다. 모든 것을 행하고 차지하고 싸우고 하는 것은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p.71 칼 마르크스 인용)
“2,500만의 가슴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가차 없는 억압, 이것이야말로 철학을 즐기는 변호사나 돈 많은 장사꾼이나 지방귀족들의 금간 허영심이나 적대적인 철학 같은 것보다도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동일한 이치는 국가 여하를 막론하고 이와 같은 모든 혁명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p.71 토마스 칼라일 인용)

“이러한 이름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많고 적고 간에 무의식적인 행동을 함께 하고 있는 개인들이며, 그들에 의하여 하나의 사회적인 힘이 형성되는 것입니다."(p.72)

“역사에 있어서 수(數)라는 것이 중요합니다.”(p.73)

“특권 없는 사람들 위에 부과되는 보수의 대가는 특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위에 부과되는 혁신의 대가만큼이나 무거운 것입니다.”

"일반화라는 것이 개개의 사실을 맞추어 넣을 수 있는 역사의 대체계의 구성을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체계를 세웠다거나 믿고 있었다거나 해서 흔히 비난을 받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그의 서한에서는 일반화의 원칙이 들어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놀랍도록 비슷한 사건도 상이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일어나면 전연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은 사건의 진행을 각각 따라 연구한 다음에 이를 서로 비교한다면 이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는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초월한다는 것을 최대의 덕으로 삼는 역사철학의 이론이 제공하는 열쇠를 가지고서는 결코 이상과 같은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다."(p.95)

“사회과학자들의 모든 관찰에는 반드시 그의 편견이 들어간다는 것 또한 진리는 아니다. 관찰과정 자체가 관찰대상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역시 진리다. 즉 자기 행동이 분석과 예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사자들은 결과에 대한 불길한 예언에 의해서 사전 경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행동의 수정이 가해지게 되고, 설사 그 예언이 아무리 정확한 분석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적중되지 않는다는 일도 생길 수 있다”(p.103)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며 사형선고만을 내리는 가혹한 재판관은 더욱 아니다.(노울즈) 그러나 히틀러나 스탈린, 매카시 상원의원 등처럼 역사가 및 일반 사람들과 동시대의 인물의 경우에는, 그들의 행위로부터 직간접으로 피해를 받은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직능이 아니라는 주장을 누군가가 비판할 때” 역사가들이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고 밝힙니다.(p.114)

“개인에 대한 도덕적인 단죄를 열을 올려 주장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무의식 중에 집단이나 사회 전체를 위한 구실을 마련할 수가 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 도덕에 집중하게 되면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낳아 놓은 사회에 대한 역사가들의 도덕적 판단, 자신들의 집단적 과오에 대한 성찰은 실종될 수 있다.(p.115)

“우리들이 역사나 일상생활에서 적용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이란 은행수표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쇄된 부분과 써넣은 부분이 있습니다. 인쇄된 부분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가, 누구를 우리들과 동등하게 인정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는 것을 딴 부분에 적어 넣기 전에는 수표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 수표의 내용을 기입해 나가는 그러한 방식이야말로 바로 역사의 문제인 것입니다. 즉 추상적인 도덕개념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져 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란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도덕적 판단은 개념적인 틀 속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만, 그 개념적인 틀 역시 역사적 산물 이외의 겻은 아닙니다.”(p.120~121)

“평등, 자유, 정의, 자연법 등의 가상적인 절대자들도 그 실제내용은 시대가 변하고 대륙이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집단은 역사에 뿌리박은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역사로부터 유리된 추상적 기준이나 가치란 추상적인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고 있는 믿음이나 우리가 설정하는 판단기준이라는 것도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인간행위의 그 밖의 측면과 조금도 다를 것은 없는 것입니다."(p.123)

“피부색은 생물학적인 유전이고, 언어는 인간의 두뇌활동을 매개로 하여 전승되는 사회적 획득물입니다. 유전에 의한 진화는 몇 천년, 몇 백만년을 단위로 해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써, 유사 이래로 인간에게는 아직도 이렇다 할 생물학적인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획득에 의한 진보는 세대를 단위로 하여 측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측정함으로써 자기의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하는 것”이라 규정한다.(p.170)

“인간은 조상들의 경험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란 자연계에 있어서의 진화와는 달리 습득된 자산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 ‘자산’에는 물질적인 재력뿐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고, 변형하고 이용하기 위한 능력도 포함된다. 그리고 '진보의 내용'은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어떠한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p.178)

“역사 서술을 진보하는 과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제 사건의 진전에 대해서 부단히 넓혀지고 깊어지는 통찰을 마련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p.186)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p.196)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라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p.198)

[ 2015년 6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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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 흠흠신서로 읽은 다산의 정의론
김호 지음 / 책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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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호 저 <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 [흠흠신서]로 읽은 다산의 정의론>을 읽고 / 2013. 5., 360쪽, 책문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당 5억'이라는 충격적인 이름으로 '만민평등'이라는 민주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든 법원의 판결이 크게 논란이 되었다. 법과 법관이 형벌의 형평성 원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400억원대의 벌금·세금을 내지 않고 출국한 뒤 뉴질랜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는 모습이 포착된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의 구치소 노역 ‘일당’을 5억원으로 정하는 등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것은 ‘전관예우’와 지역법관(향판)제의 문제점이 맞물려 가능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2008년 12월30일 광주지법 형사2부는 허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508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법관의 재량으로 형을 덜어주는 ‘작량감경’을 적용해 검찰이 구형한 벌금 1016억원을 절반으로 깎았다. 벌금 508억원을 내지 않을 경우 일당을 2억5000만원으로 계산해 203일 동안 구치소에서 일하게 했다."(관련기사 : "‘먹튀 회장님’ 노역 일당 5억 판결은 전관예우·향판제의 합작품"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9212.html)

신문기사는 '전관예우와 향판제'로 인해 '황제 노역'이 가능했다고 분석하지만, 허재호와 장병주 사이에 발생한 '법의 균형 상실'은 이미 과거에도 숱하게 발생한 바 있다.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하루 일당은 1억 1천만 원, 그리고 손길승 SK 명예회장은 벌금 400억원을 선고받았는데, 실제 노역비는 하루 1억 원이었습니다."(관련기사 : http://www.ytn.co.kr/_ln/0103_201403241135161476)

실제로 한국사회는 80년대 후반 헌법이 개정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래 사법부의 '균형감을 상실한 판결'을 수차례 목도하여 왔고, 사법부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헌법을 임의대로 '해석'하면서 주권자들의 사법권력에 대한 불신을 키워 왔다. 주권자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셈이다.

물론 공공부서나 공직자의 '무소불위'와 '전횡'이라는 문제점은 사법부 뿐만은 아니다. 청와대, 경찰, 검찰, 국방부, 법원 등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 공공기관이 오히려 불의와 불법에 앞장서는 최근 몇 년을 겪으면서 이 책을 읽으니 대한민국의 공권력과 사법체계는 조선왕조보다 못한 것 같다.
"조선 왕조체제와 대한민국 체제는 껍데기만 다른 착취수탈 체제'라는 어떤 학자의 분석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법률을 채택한 대한민국의 현재가 왕조와 사대부 세력이 갈등, 공존하며 지배세력을 형성했던 조선시대보다 나은 면이 있기나 할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인 1822년, 현대인들에게 '시대의 선각자'라 불리우는 다산 정약용은 백성들이 소송을 통해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촌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려고 해도, 그 일이 권세 있는 아전이나 간악한 향리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 노여움을 살까 봐 겁이 나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한결같이 앞뒤가 맞지 않게 들리니,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다산이 보기에 스스로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어디가 아픈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병든 아이와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호소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산은 소송을 통해서도 제대로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백성들을 위해 형법서 한 권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흠흠신서]다. 
인명에 관한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뜻에서 ‘흠흠신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책은, 다산이 지방관들을 위해 중국과 조선의 법전들과 재판 때 쓰던 조서 등을 모으고 정리한 뒤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만든 일종의 형법 참고서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다산이 제시한 원칙과 방법으로라도 조선의 형법체계가 구성, 운영되었다면 조선 후기의 비극적인 상황이 변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이런 형법서를 편찬했다고 해서 다산의 생각과 원칙대로 조선시대의 형법이 운영된 것은 아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조선시대 후기에 대한 주된 평가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표현되듯이 다산이 살았던 시대 전후로, 특히 19세기에는 조선의 국가 운영체제 자체가 기득권자들만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기에 그에 따른 민중(백성)들의 저항과 민란이 19세기 내내 끊이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다산이 [흠흠신서]에서 문제제기하는 여러 재판이나 형벌집행을 보면, 조선시대 후기에는 친분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관용을 남발하거나 사적인 감정이나 신분질서에 근거하여 엄한 형벌을 내리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검찰과 법원, 그리고 정치권과 재계와 언론과 학계가 결탁하는 모습은 19세기 초 조선왕조의 사법관리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이다. 
저자가 풀이한 다산의 [흠흠신서]는 형법의 원리나 원칙의 측면에서 근대 사상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산의 사상은 토지와 권력을 소유하는 왕조-사대부 계급과 그들의 소유물이자 지배를 받는 평민-하층민이라는 지배-피지배 권력체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산은 "법의 수단에 기대기보다 덕의 교화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유교이념의 원리"에 입각한 형법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흠음신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의미있는 책이라 할 수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주권자의 권력을 위임받아 일시적으로 행사하는 사법부와 검찰, 경찰의 일상적인 부정부패와 정치권과 재계의 전횡과 부정부패, 그리고 이를 감시, 감독, 비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결탁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모습은 19세기 조선 왕조, 부패기득권 체제의 부활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서문에 [흠흠신서]를 번역한 저자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져야 가능한 일이요,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는 행동이 늘어나야 가능하다. 다산의 절절한 마음이 오늘날까지 울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 공정한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불의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다산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다산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관리들이 이 땅에 진정한 정의의 마중물을 부어 주길 바랐다. 정의가 흐릿해지고 금권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을 보면, 그가 꿈꾼 정의와 정의로운 나라의 모형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듯하다."

적어도 사법고시나 로스쿨을 졸업하여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다산의 [흠흠신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익보다 헌법과 정의와 양심을 되찾기를 바란다.
이 말은 검찰과 형사법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법조인이라고 주창하는 이들 중에서도 사적 감정이나 편견에 무릅을 꿇고 양심과 근거를 멀리하면서 정치논리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조인들이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감싸고 자신들만의 성을 쌓으려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이 법조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존중받으려면 '법조인'으로 대우하고 존중하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전문권력을 위임한 주권자들 편에 서야 할 것이다.

[ 2014년 4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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