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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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를 총관리하고 시민들을 위해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총리실에서 몇 년 동안 수 천 수 만명의 민간인을 사찰했고 청와대는 이를 은폐하고 검찰은 이에 대한 수사를 축소했다. 측근비리, 성추행, 불법대출, 부정선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집권 여당과 청와대, 행정부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언론과 사법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에게 우리한 정보만 시민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지 4년이 지나고나니 여기저기서 그동안 감추어왔던 추악한 치부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집권자와 집권여당은 설직하게 공개,사과하고 개선하기는 커녕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권력과 손잡은 언론은 물타기에 여념이 없다. 
정부는 2년 연속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는 넘어섰다고 선전하지만 주변사람들 어느 누구도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심지어 SBS 방송 앵커도 그렇게 말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월급 대비 65%도 안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에 이르고 실업자가 넘쳐나고 빚지고 망하는 소상공인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5대 재벌기업은 이명박 정권들어 계열사가 50% 증가했고 집권여당이 4년 내내 부자감세에 재벌일감 몰우주기를 했으니 2만 달러의 대부분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쉽게 추축이 될 뿐이다.

나는 1987년부터 20여년간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추진하고 확장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그 생각이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되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우리에게 깨닫게해 준 것은 형식적이기만 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 참여와 연대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신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지난 25년간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한국의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시청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 수 밖에 없는가? 왜 촛불을 들어도 그 때 뿐인가?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나에게 수긍할만 한 대답을 해주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감정적이거나 편협된 사고가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하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에 대해, 운동에 대해서, 정당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기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지난 번에 읽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노무현 정권 집권 때 처음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성공을 평가할 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적 징후를 말했고, 지역주의·지역 갈등의 폐해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의미와 효과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에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그는 한국 정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와 그 문제를 이해하는 일관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자주 운위되는 지배적인 견해와는 매우 상반된 주장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의 ‘민중’과 ‘민중운동(론)’, 나아가 ‘촛불 민주주의’가 운위되는 상황에서도 ‘사회적 시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기를 요청한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초점은 지난 개혁 정부들의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맞춰져 있으며, 이 문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기도 하다.
다만 저자가 소통과 갈등을 대립개념으로 비교하는 것은 조금 부정적이다. 저자는 책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소통’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에서는 갈등이 보다 중요한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 말하며,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것만으로는 어떤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갈등'은 한 사회 내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는 개념이고 '소통'은 이러한 갈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대화하는 의미라고 할 때 '소통'은 '갈등'과 동전의 양면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여섯 가지다. 첫째 민주주의에서 갈등이 갖는 역할, 둘째 민주화 이후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변화, 셋째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수반하는 경제 문제를 사회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문제, 넷째 민주주의를 운동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이 갖는 한계, 다섯째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광주항쟁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17대 대선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를 통해 저자는 민주주의의 가치, 제도, 실천을 민주주의의 의미와 다이내믹스를 만들어 내는 주요 구성 요소로 상정하고, 이러한 측면 및 이들 간의 연관 관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민주주의를 이론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민주화 이후 20여 년의 한국 정치, 특히 노무현 정부의 경험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갖는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대면해야 할 문제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민중'과 '시민'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다. 민중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인 소외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중 개념은 갈등의 혁명적인 해결을 상정하면서 그 혁명의 잠재적인 주체로 설정된 개념이었다. 이와 달리 민주화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한 시민 개념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민주적인 해결 주체로 상정된 개념이다. 민중이 정치적 갈등의 혁명화를 위해 설정된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시민화(문명화), 곧 민주적 해결을 위해 상정된 개념이다. 여기서 저자는 민중 담론의 내용에 주목하면서,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을 이룬 데 비해 민중에게는 형식적인 인권이나 기본권만 강조되었을 뿐 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로서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이해는 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민주화의 추동력인 민중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시민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 민주주의는 ‘주체 없는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민권과 시민의 부재에 따른 결과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민중운동 담론은 그 자체 안에 ‘멀지 않은 장래에 빠르게 해체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민중운동 담론은 이념이나 가치 정향에 있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비전, 도덕주의, 낭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장주의 등을 그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도 저자는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원리는 ‘보편성의 원리’라고 했다.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성원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민의 출현은 민중운동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영국 사회이론가 T. H. 마셜의 논의를 옮겨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18세기)와 정치적 권리(19세기), 사회경제적 권리(20세기)로 누적적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점이라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밝혔다. 저자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진전을 위해서는 시민-유권자의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요구가 정당 정책 대안의 근본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부의 양극화나 빈곤의 심화 현상 등이 단순히 신자유주의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책 대안을 채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모든 잘못된 결과들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반신자유주의’론이 환원주의적이며 민중주의적 민주주의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찬성과 반대 내지 긍정 또는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시장구조, 생산체제, 노동시장, 산업·고용 구조의 부정적 효과를 ‘정치의 방법’으로 얼마나 완화·개선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재 때문에 급격한 신자유주의로 나아갔으며,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인가가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강조했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당체제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운동'과 '정당'을 구분하는 계기는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은 그동안 억압되거나 표출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집단적인 행위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고 이익과 열정,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이를 구현코자 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표출된 이익과 요구가 운동이 끝난 뒤에도 일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일정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일상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제도다. 물론 그것은 없던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제도를 확대하고 개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이 제도화의 계기가 완료될 때까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자가 정당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든 정당, 특히 소외 계층이 참여하고 이를 동원하고 대표하는 대중 정당은 운동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당이 제도화의 틀 안에서 사회의 모든 갈등, 이익, 이슈들을 표출하고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도 운동이 역할을 갖는 공간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보다 필요한 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정당은 운동이 표출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의 제도를 통해 다루고 해결하는 정치의 중심적인 메커니즘 내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아무리 사회 문제를 광범하게 제기하고 이를 정부/국가에 압박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의 제도적 틀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특정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운동의 경험이 많고 그 전통이 강하지만, 정당은 미약하고 그 전통 역시 약하다. 저자는 운동 자체가 갖는 효과를 부정하지 않으며, 운동과 정당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점을 강조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뚜렷한 가치 지향과 정책 목표를 갖되 그것을 실현 가능한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정당의 존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개혁파 내지 진보파가 싸워야 할 것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있지 모든 책임과 잘못을 외부화하면서 자신들이 남긴 ‘과거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망각하는 데 있지 않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진정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원하고 이루고 싶을 때, 그리고 그 과정이 일부 선각자나 활동가들로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정치와 정당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유권자들을 탓할게 아니라 정치와 정당활동을 하는 주체들이 스스로 그들을 참여시키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하고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 심판자처럼 자임하면서 감 내놓아라 콩 내놓아라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개선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것들이라도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각성되는 것이고 단련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결론이 운동이냐 아니면 정당이냐의 이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운동과 정당이 서로 배척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정당으로 수렴되고 정당이 운동의 지형을 넓히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발전 수준을 고려할 때 정당이 운동보다 미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운동이 정당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의 성과와 결과물이 정당으로 수렴되어 제도화되지 않으면 운동도 정체되어 경직화되거나 약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2012년 3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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