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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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공부모임이 끝나자 참석자 한 분이 <의자놀이>를 읽었냐고 물었다. "아직요..." 그러자 그 분이 <의자놀이>를 선물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은 쌍용차 문제를 적극 알리기 위해 <의자놀이>를 선물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책을 읽은 후에 공감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며칠 후 집으로 배달되어온 <의자놀이>를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게는 쌍용차 문제가 '용산 참사'와 더불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다. 2009년 8월 경찰이 쌍용차 건물 옥상에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인터넷에서 잠깐 보았을 때, 나는 그 해 1월 '용산 참사'의 참혹한 영상이 기억났다. 그리고 1986년 11월 초 건국대 교양과학관 옥상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이 무의식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1986년 가을 옥상에서도 헬리콥터의 굉음과 프로펠러의 강풍, 끝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 숨쉬기도 불가능한 최루탄 냄새, 백골단의 군화발과 몽둥이가 춤을 추웠다.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1986년 건국대 사건은 2009년 쌍용차 사태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1986년 사건은 그냥 3박4일의 농성과 무자비한 진압, 대규모 구속과 실형, 학생운동에 대한 색깔 씌우기로 끝나고 말았다. 2009년 쌍용차 사태는 8월은 하루동안의 무자비한 폭력 뿐 아니라 진압일 전후 오랜기간 동안 '인간의 바닥을 무너뜨리는' 교활하고 천인공노할 수준의 폭력이었다. '폭력'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의 표현력이 짜증날 정도로...
국가와 자본과 언론과 사법부와 회계전문가와 정치권은 한 몸이 되어 쌍용차 노동조합과 해고자들에 대한 오랫동안 야만적인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벌어진 제주도와 거창의 양민학살사건의 21세기 버전일 것이다. 자본과 경영자들은 회계법인과 짜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자들에게 거짓말로 일관하며 사법부와 정부와 언론에 거짓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노동자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 시켰고, 노동부와 경찰과 검찰은 노동자들에게 부당하고 불법적인 협박과 폭력을 자행했고, 사법부와 정부와 언론은 자본가들의 주장을 의심 없이 그대로 인정했다. 쌍용차의 자본가, 경영자는 국내인도 아닌 중국, 인도인들이었다.

"어느 날 자다가 꿈을 꿨는데 꿈에서 제가 자살을 하는 거예요. 그게 꿈인데 제가 우는 거예요, 자면서."
"파업 때, 남편 아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새총을 겨누고 있었대요. 그 생각만 하면, 그 얘기만 하면 자꾸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아,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우리 애들한테 제가 폭력을 행사합니다. 감정이 앞서면서 가끔씩 그런 게 나타나거든요. 그게 제일 두렵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통제가 잘 안 됩니다."

 

이 책 속에는 파편으로 흩어진 22개의 죽음과 해고자 2,646명의 전염병처럼 번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들이 담겨 있다.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 유령처럼 스며든 정리해고 명단, 거기에 속한 이들은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기준도 상식도 없는 일방적인 해고에 삶의 터전을 잃은 노동자가 절실하게 물으며 몸부림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을까. 77일간의 파업은 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환멸과 소통할 곳 없는 고립감을 가슴 깊이 느끼게 했다. 그리고 죽음의 행렬은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해고 노동자도 있었고, 해고당하지 않은 노동자도 있었고, 해고 노동자의 가족도 있었다. 해고의 영향은 불행히도 당사자에게만 머물지 않고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심리치유센터 ‘와락’의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노동자의 경우, 정신과 의사를 하며 접한 최악의 사례이며, 이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과 비슷하며 그냥 놓아둘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제 더는 이들이 죽음의 기운에 전염되지 않도록 사회가 나서야 한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국회와 법원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가해를 한 주체인 국가와 자본가, 경찰 뿐 아니라 지켜만 보았던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

작년(2011년) 2월 26일, 쌍용자동차 13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몰랐거나, 알았어도 그냥 지나쳤을 쌍용차 노동자의 죽음이 이번엔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알려졌다. 10개월 사이 부부가 모두 죽고 졸지에 고아가 된 남매의 이야기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파업과 해고는 뉴스 한 자락에 늘 있어 왔는데, 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단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일까? 작가 공지영은 이 죽음을 접하고, 그 후 이어진 죽음의 행렬을 보면서 이제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또 다른 도가니"라고 규정하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이 사건을 알리는 것이 작가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
이 책은 그녀가 쌍용자동차 77일간의 뜨거운 파업의 순간부터 22번째 죽음까지를 작가적 양심으로 써내려간 첫 르포르타주다. 잔혹한 게임은 끝났으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자들과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는 이 싸움에 시민적 양심으로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 용기 내서 같이 걸어가자고 뜨거운 손을 내민다.

 

작가 공지영이 쌍용자동차 사건을 '의자놀이'로 규정한 것은 그 사건의 핵심이 '1%를 위해 99%끼리 싸움을 붙이는' 자본가의 모략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는 노동자들끼리 생존을 걸고 싸우는 잔혹한 의자놀이와 같다. 동료를 밀쳐 엉덩이를 먼저 의자에 붙이지 못하면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니까. 작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을 따라가는 내내 곳곳에서 의자놀이가 벌어지는 현장을 마주한다. 자본은 무척이나 악랄하게 그들의 이익을 위해 생명을 건 의자놀이를 수시로 벌인 셈이다.
쌍용자동차는 참여정부의 결정으로 2005년 중국 상하이차에 이미 투입된 국가 세금의 절반 값으로 서둘러 매각되었고(1조2천억 국고 투입 - 5,900억에 매각 - 실제 투입현금은 1,200억) 기술 유출이 본격화됨과 동시에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77일간의 옥쇄파업과 인간사냥과도 같은 경찰의 진압이 있었고, 죽음이 잇달았다. 그 후 2011년 쌍용자동차는 인도 마힌드라사에 다시 매각되었고, 복직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삶의 터전을 잃은 노동자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자들과의 싸움을 지속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이다.

한국사회는 2000년대 들어서 시민의식도 크게 성장했다. 부당한 일에 대해 일인시위도 하고 함께 촛불을 들었다. 억압하는 권력자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무능하고 시민의 힘은 미약했고 더 용기 있게 앞선 사람들은 남다른 고통을 당했다.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 사건, 쌍용차 사건 등. 그렇다면 반복됐던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여 풀 수는 없을까. 이번 쌍용차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단순히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 작가 공지영, 출판사 휴머니스트, 의학박사 정혜신과 심리치유센터 ‘와락’, 칼럼니스트 하종강, 우희종, 조희연, 시인 송경동, 정호승, 변호사 김태욱, 여러 매체의 기자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자신의 재능을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세나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참여한 모든 이들과 출판사가 전액을 기부하는 사례는 처음이다.
하지만 이 책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우리는 이제 독자 여러분께도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다. 이 책의 인세, 판매 수익금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게 전해진다. 책 한 권을 사면 독자 여러분도 4,000원가량을 이들에게 전하는 셈이 된다. 제2, 3의 의자놀이를 막고 권력을 가진 이가 비상식적인 일을 자행하지 못하도록 시민 권력이 감시의 눈을 빛내야 할 때다. 다시는 그들이 제멋대로 잔혹한 ‘의자놀이’를 기획하지 못하도록."

 

결국 쌍용차 해고자 문제는 2012년 한국사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화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말해주고 있는... 쌍용차 사태는 한국 자본주의 비극의 축소판이다. 어느 가업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지금도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대기업 군에 속하는 쌍용차 노동자를 그렇게 학살하는 구조인데 중소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또한 쌍용차 문제는 국가의 문제, 국가권력의 문제, 자본의 문제, 노동의 문제, 사법과 법치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함께 사는 문제, 사람의 문제다. '국가가 먼저냐 시민이 먼저냐'라고 따져볼 수도 있고, 차여정부의 과오를 다루는 문제이고, 그 이전에 정부와 사법부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사람이 수단이냐 목적이냐의 관점의 문제이고, 서로 모른채 하며 잘 살아보려고 애쓸 것이냐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외국자본 유치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물을 수도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먼저 각자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쌍용차 문제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니 별로 없었다. 독후감이야 내가 늘 쓰는 것일 뿐이고, 쌍용차 해고자를 위한 모금이나 '와락센터' 치료비 기부는 이미 참여했다. 공지영씨처럼 대한문 앞 농성장에 찾아가 위로를 드릴 만큼 적극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쌍용차 사태의 전모와 본질을 주변에 널리 알리는 것이고, 내가 선물받을 때 약속한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의자놀이>를 사서 읽기를 권하는 것. 그래서 책을 모두 읽은 후에 인터넷 서점에서 3권을 주문했다.

 

[ 2012년 10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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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 시대의 지성, 청춘의 멘토 박경철의 독설충고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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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전에는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 원장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묘사되는 박경철씨는 '시골의사' 출신으로 '주식투자 등 실물경제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가 발간한 책들도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이나 <시골의사의 주식투자란 무엇인가>와 같은 실물경제 성공전략이었다. 실물경제에 뛰어들어 어려움과 고통스러움을 뼈저리게 맛본 나로서는 책 한두 권으로 실물경제를 '코치'하겠다는 발상을 반기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성공담'을 미끼로 책을 팔아보겠다는 '수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박경철씨가 그런 수작으로 책을 썼다는 애기가 아니라...ㅋ)
이번에 박경철 원장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안철수 후보와 강준만 교수 때문이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안철수 후보를 알아보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접근방법 중 하나가 안철수 후보가 가까운 이들의 책을 읽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가 자신의 '경제멘토' 중 한 명으로 소개한 사람이자, 오랜기간 안철수 원장과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청춘세대의 멘토로서의 박경철과 대통령 후보 안철수의 경제멘토로서의 박경철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알아야했다. 그리고 강준만 교수가 <멘토의 시대>에서 박경철 원장을 '멀티, 관리자형 멘토'로 평가했고, 멘토로서의 박경철씨의 특징과 속성을 나도 책에서 읽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박경철 워장의 책 중에서 굳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가장 최신작이기도 하고, 청년학생들의 멘토로서 자신을 의식하면서 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난 느낌은 반반이다. '반반'이라는 의미는 강준만 교수가 설명한 '멀티, 관리자형 멘토'로서의 느낌은 공감되지만, 멘토로서 청년들에게 제시하는 자신의 깊이가 별로라는 의미다. 본인 스스로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마찬가지로 책 속에서 '문.사.철'을 많이 접한 사람치고는 아직 제대로 자기 중심에서 그것들을 소화를 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내심 대상 독자로 삼은 청춘세대들에게 이 책이 실제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 물론, 나와 같은 비판을 미리 의식했다는 듯(겸손한 마음가짐이겠지만...) 박경철 원장은 책의 서문에 "필자 자신도, 책에서 다룬 이야기들을 그대로 내 삶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에게 이 책은 내 삶의 후회를 담은 시행착오의 기록이기도 하다."라고 밝혀놓았다.

안철수 후보의 '경제멘토'로서 어떨까라는 애초 궁금증을 이 책으로 해소하지는 못했다. 경제관련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경제 상황에 대한 일부 글에서 비정규직 문제,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 재벌의 폐해, 제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인했다.
 
저자의 글은 보통의 청춘세대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많다. 한국판 '탈무드'나 '논어'로까지 칭송하지는 않겠지만, 그에 버금갈 수 있는 명언과 혜안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단락은 무수히 많다. "방황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낯선 것을 통해 본질을 통찰하라" "침묵은 가장 능동적인 대화다" "배움의 즐거움" "진정한 행복은 과정의 몰입에서 온다" "발산하지 말고 응축하라" "언어는 그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다" "진실을 보고 행하는 참지식인이 되자" "환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며 기회다" "자기 삶의 혁명가가 돼라" "경계를 넘어서야 진보가 온다" "철학을 통해 사유의 경계를 넓혀라"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잡기" "자신을 감동시켜야 진정한 노력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인간의 가치는 밀도가 결정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통섭하라"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내는 주인공이 돼라" "공공의식을 가진 공감형 리더쉽이 요구된다" 등등... 그리고 책 읽기와 글 쓰기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책의 상당부분은 저자 자신의 경험과 학습과 깨달음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저자의 삶은 아주 치열하고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통사람들 중에서 자기혁명을 위해 어느 순간 술과 골프를 끊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저자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장점과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자기혁명'은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스스로 청춘세대에게 애기하고픈 것을 정리했다고 밝혔음에도, 그의 주장과 이야기는 청춘세대의 현실에 기초했다고 보기 어렵다. 저자의 말대로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청춘들도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청춘세대는 극히 드물다. 저자의 조언은 절대 쉽지 않은 것들이다. 저자의 삶 자체가 동 시대인들 중에서 평범하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기혁명'의 동기부여와 전략을 제시했음에도 오히려 청춘세대들이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좌절감을 느끼거나 포기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그리고 저자의 '자기혁명'은 단독 또는 개별적인 개인에 대한 충고라는 것이 또 다른 한계로 보인다. 개인이 자신의 불안함이나 부족함을 뛰어넘어 '자기혁명'을 이루기는 극히 어렵다. 인간 자체가 사회적인 동물인 이유가 개인의 '자기혁명'이나 '자기변화'를 사회 속에서 타인과 영향을 주고 받을 때 가능함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성공담이라는 경험에 기초했기 때문에 강조했지만, 청춘세대의 다수의 노력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다.(이런 평가는 내 자신의 추론이다. 청춘세대가 이 책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나는 모른다.)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해보겠다. 저자는 청춘들이 자신의 재능을 찾고 노력하면서 독서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자기 혁명을 통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하지만 공부와 시험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학교제도, 학습경쟁은 없이 스펙쌓기와 고시만이 가득한 대학, 경제적 격차로 인한 교육기회의 불평등, 새로운 기회나 도전이 불가능한 중산층과 서민의 가계구조, 공부와 생존을 위해 하루종일 알바와 비정규직에 시달리는 대학생, 창업과 재기가 불가능한 사회경제구조에 놓여져 있는 청춘들에게 '자기혁명'만을 주문하는 것이 과연 멘토의 역할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대부분의 청춘들에게 독서하고 사색하고 봉사하고 여행할 여유와 기회가 주어져 있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전체적으로 잠언집과 같은 명언을 제공함에도, 나는 저자의 멘토링 중에서 중간중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보면, 저자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고민하며 방황하고 노력하는 것은 바른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이어야 한다"(p.19)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너무 당위적이면서도 한쪽 측면만 부각한 것이다. 사람이란 고민하고 방황하여 스스로를 부정하고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처절하게 깨지고 자신을 부정한 후 일어서는 경우도 있고 사람에 따라 그런 방식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상을 버리고 본질을 관통하려면, 다양한 체험적 지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생각과 기존의 것을 비교하고 개선하는 긍정적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p.30)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경험을 통해서 본질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선입관을 버리고 현상을 면밀하게 세세하게 고찰하고 그 이면까지 분석하여 본질을 꿰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직관도 있을 수 있고 합리적 추론도 있을 수 있다.
"위로를 주는 대상은 내부에 있고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은 외부에 있다" 이 표현은 전형적인 근대적 또는 서구식 사고방식이 아닐까? 위로야 말로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고 음악이나 옆 사람에서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야 말로 외부의 대상에 대해 내가 어떤 선입견이나 감정을 가지고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것이거나 서로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행복의 개념은 단지 '요청되는 것'일 뿐이다. 행복의 대상은 '함께한으로써 더욱 빛나고 가치가 변하지 않으며 새로운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해 내는 것들이다." '행복론'은 시대별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사회적이고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 '행복론'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깨우침을 얻는 것도,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도, 단지 함께할 누군가가 있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
"철학의 역사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의 씨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또한 서양철학사에만 관통하는 것이지 않을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운 바람직하고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모든 선택을 그것에 의거해 해나가는 것이다"(p.83) 일찍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도 좋지만, 가치관을 조금씩 세워나가고 경험하고 공부하며 부단히 수정하는 게 좀 더 평범하고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평생을 학습해도 제대로 알기 힘든 세상에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사는 것이 인간이라면, 항상 주관이 있으면서도 외부에 열려있는 가치관이 되어야 독선이나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삶에서 20대는 준비, 30대는 질주, 40대는 수확의 시기다. ... 그래서 청년의 시기에는 무조건 발산하지 말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p.91) 사람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렇게 사람의 인생을 무우 자르듯 가르는 건 너무 획일적이다. 무조건 발산하지 말자'는 타당하지만 '무조건 인내' 역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요즘과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지금의 20대는 고민하되 저항하고 실험하고 경험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굳이 세대로 분류한다면, 준비는 원래 10대부터 하는 것이리라...
"새로운 시대는 사람이 부가가치 창출의 핵심 수단이다" 산업화 시대야말로 사람이 부가가치와 이윤의 핵심 수단이었다. 새로운 시대는 사람이 수단이 이니라 목적인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만이 존재의 의미를 두는 시대야말로 변해야 한다. 또 '가치'에 대한 근대적 경제 중심적 시각을 재검토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란 따로 없다. 인간 그 자체가 유의미하고 가치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의 상당분량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위한 전략과 태도를 어떻게 갖출 것인지에 대해 다룬다. 심지어 사람이 99번 성공해도 100번째 실패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규정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도 공공의식을 가지는 것도, 공감하는 것도 모두가 '성공'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인생에게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개 밖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도대채 무엇이 성공인 것인지 저자에게 묻고 싶다.
저자의 글에 많이 공감이 되면서도 진정성이 깊숙히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80년대 학창시절에 대한 소회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가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건사고들이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와 광주민중항쟁, 전두환 군사정권, 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 선거,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그 과정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21세기 한국이라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에 지나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절은 시절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밝혀야 했다. 청춘세대들은 크게 관심이 없겠지만, 나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궁금해할 수 있다.
 
'추신' : 저자가 '말의 세 가지 교훈'이라면서 "첫째, 말을 조심하자. 둘째, 별 생각 없이 상투적으로 한 남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셋째, 말의 때를 알자"라는 문장을 소개했다. 장경동 목사가 한 말을 책에 인용한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장경동 목사가 "스님들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고 발언한 당사자라면 크게 실수한 것 같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허언(虛言)'일 뿐이며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2012년 10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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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경제학
이정우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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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참여정부의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과 정책기획위원장을 엮임하며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참여정부에서 퇴임 후 한미FTA 체결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진보적이고 우호적인 이미지는 남아 있다.(오늘도 기자간담회에서 한미FTA를 반대하는 소신을 밝혔죠) 지금은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문재인 후보의 선거캠프 내에서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민주화'가 가장 뜨거운 정책경쟁의 대상이고, 유력한 야권 후보 중의 하나인 문재인 후보의 경제민주화 정책과 공약을 제시할 사람이 저자이기에 이 책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는 오랫동안 '소득분배' 경제학을 연구했던 학자였음을 처음 알았다.
 

소득분배 경제학자인 저자는 '분배정의'를 주요 국정과제로 삼았던 참여정부에서 오랜기간 몸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참여정부는 어느 정부 못지 않게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 부동산 폭등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경제정책을 비롯한 여러가지 참여정부의 국정실패의 여파로 '역대 최악의 정권'으로 손가락질 받는 이명박 정부를 불러들였다.
문재인 후보와 마찬가지로 이정우 교수 역시 '참여정부 실정'이라는 과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에서 저자가 경제정책에 실패한 이유가 학자와 정부의 정책책임자라는 위치가 전혀 연결되지 않았던 것인지, 학자의 능력은 좋지만 청와대 관료로서의 능력은 부족했는지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이번에 또다시 정책책임자로 대권 경쟁의 한 축으로 뛰어든 셈이다. 유권자로서 당연히 우려스럽다.
나로서는 이정우 교수가 참여정부 실패의 한계와 과오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어떻게 99% 유권자를 위한 문재인 후보의 정책과 공약에 기여할 지 알아볼 수 밖에 없다. 유권자의 한 사람이자 가정과 아이가 있는 가장으로서...


이 책은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서가 아니었다. 경제학의 한 부류인 '소득분배 경제학'에 대한 저자의 학술 논문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한 설명과 평가는 일부 밖에 담겨있지 않다. 그래도 저자의 소득분배 경제학에 대한 관점과 이론, 정책과 대안, 참여정부 사례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담겨 있다.
저자는 소득분배 경제학의 기초 개념으로서 '소득분배'의 개념과 측정방안을 소개하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과 노동시장 구조, 노동조합의 관계에 대한 여러 이론을 검토한다. 또한 불평등을 일으키는 차별이론, 자산과 불평등, 토지와 불평등까지 검토한다. 빈곤의 개념과 현황, 소득재분배의 필요성과 이론과 정책수단, 세계 각국의 불평등 구조, 한국의 불평등의 실상과 정책방향 등을 분석하고 제시한다.
저자는 전체적으로 불평등 이론을 소개하고, 통계치들을 제시하면서 각 불평등 요소에 대한 한국의 실상을 분석하고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책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저서가 아니기 때문에 개략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럼에도 저자의 방향제시에 있어 적지 않게 비판적이지 않을 수 없다. '교육과 불평등'의 경우, "교육개혁은 교육 그 자체를 아무리 수술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렵고, 교육 바깥 쪽의 개혁, 즉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개혁이 있고서야 비로서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안철수 교수의 <안철수의 생각>과 유사한 진단이다. 하지만 교육개혁의 방향이 "참교육을 이땅에 실현"한다는 다소 추상적이고 내용 없는 교육개혁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노동시장구조와 불평등'의 경우, 한국의 노동시장이 이중적, 삼중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그 해결방향을 "한시적 노동자의 과도한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한시적 노동의 사용 억제보다는 정규직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참여정부가 비정규직 증가와 노동시장 구조의 악화를 가져옴으로써 노동정책에서 크게 실패했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의 노동정책이 참여정부와 비교하여 전혀 개선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노동조합과 불평등'의 경우, 노동조합의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과 비소속 노동자들의 임금에 불평등을 가져오는지를 주로 분석하는 선에서 그친다. 자본가, 경영진, 그리고 주주들의 이익과 노동조합의 결성 유무에 따른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교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이 경우는 전체적인 불평등 구조를 간과한 절름발이 연구라 할 수 있다.
'차별과 불평등'의 경우, 인종차별과 남녀차별만 다룸으로써 학력,학벌에 의한 차별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 등을 분석하지 않았다.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해결하는 방향도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 기업의 비용 절감 때문이라는 논리를 극복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라고 단정짓고 만다. 현행 법규에 규정되어 있는 처벌 조항을 정부와 사법부가 엄하게 적용하는 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기업들의 차별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인지...
'부(자산)와 불평등'의 경우, 현황만 파악하고 아무런 정책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세계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소득에 의한 불평등 뿐 아니라 자산에 의한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저자가 현실을 안이하게 바라보거나 문제의식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토지와 불평등'의 경우,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옳은 방향'이었다고 평가한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중 인정할 만한 것은 면적이 아닌 금액에 의한 과표 기준 산정, 실거래가 의무 신고, 그리고 LTV(주택담보인정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를 도입한 것 정도다. 참여정부 내내 부동산 거품의 증가, 임대주택공급의 실패, 종부세의 무리한 도입으로 보유세 인상 실패, 행정중심도시와 기업도시와 혁신도시 등으로 인한 지방 부동산 폭등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말해준다.
'소득재분배와 복지국가'의 경우, 저자는 소득재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정책 유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최저임금제, 임금 가이드라인, 가격 지지 제도, 독점 견제, 노동조합의 교섭력 강화, 교육기회 균등, 조세정책, 사회보장, 공공서비스 등을 거론한다. 그렇지만 참여정부에서 소득재분배 정책을 제대로 과제로 삼고 열성적으로 추진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결론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불평등'의 경우, 저자는 분배의 평등, 일한 데 대한 정당한 보상, 불로소득의 축소, 빈곤층에 대한 최저한의 생활 보장, 주택 및 교육 문제의 획기적 개선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활성화와 경영참여, 기업 공개와 종업원지주제, 임금격차의 축소, 부 및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 서민주택 개선, 교육제도의 개혁, 사회보장의 확충을 제기한다. 기본적으로 앞으로 추진하게 될 경제민주화에 필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저자의 <불평등의 경제학>은 경제에서 불평등한 구조와 관계를 연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한 주체인 정치와 정부정책, 그리고 기업이 실질적으로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연구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경제에서 가장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연관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 일국의 범위 내에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자본과 노동 뿐 아니라 정부정책(정치 포함)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서 실제 연구결과의 객관성과 신뢰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정부정책과 재벌의 입김이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는 점에서 저자의 '경제학' 연구에 의문을 가지도록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노동시장 구조의 불평등'이나 '노동조합의 불평등'을 논의하면서 정부정책과 재벌의 로비가 두 가지 문제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에도 이를 다루지 않고 있다. 정부권력이 경제를 상당부분 좌우하는 현실이서 시장 만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경제학 연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이 책을 읽는 내내 곤혹스러웠다.
또한 통계자료가 몇 가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80~90년대 수치라 학문적으로도 현실 정책적으로도 객관성이나 현실적인 가치가 떨어져 보인다.


그럼에도 결론 부분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불평등한 경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문재인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 속에 재벌개혁, 노동개혁 등 부족한 부분을 포함하여 주요 항목으로 포함시키면 좋을 것 같다. 그의 '결론'이 문재인 후보의 선거 공약과 앞으로 민주통합당의 정책에 그대로 담겨지기를 바란다. 한미FTA 반대 등 개혁적인 소신이 문재인 후보나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로부터 꺽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책의 도입부와 본문이 결론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지가 않는 것 같다. 이상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해봤다. 그에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한국식 엘리트 교육'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보고 들은 자료와 정보가 많아 정답은 기억하는데 그 이유나 과정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남는다.


[ 2012년 10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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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외국사회를 바라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많듯이, 한국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모습이 전통에서 이어져온 문화적인 것이라면 '다름'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상식'적으로도 이상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저자는 외국에서 볼 때 한국사회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에 교육문제가 특별하다고 말한다.
그 중 하나는 중,고등학교까지는 OECD 상위권에 위치하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순위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에 서열을 매기는 '학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등부터 꼴찌까지 순위를 매기는 '객관식' 시험이다. 객관식 시험의 경우 초중고, 대학 뿐 아니라 각종 고시와 공무원 시험, 자격시험 등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시험은 객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그 핵심 이유와 뿌리를 '입시공화국'에서 찾는다. '입시감옥'이라는 단어가 더 알맞을 수도 있다.


"온 나라가 병영이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어른이 보기엔 별 실용적 의미가 없어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의 삶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과거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더 이상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은 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가공할 인권 탄압을 '교육 문제'라고 부른다."(p.16)


지금의 40~50대가 다니던 초,중,고등학교와 지금 초,중,고등학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애기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구속하는 감옥은 학교 뿐이 아니다. 가정과 학원, 그리고 사회 전체가 감옥이 되었다. 학부모와 교사, 학원강사, 언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모두 감옥의 간수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감옥인가? 그것은 '수능시험'을 위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입시만을 위해 준비한 것이 단판 승부로 결정되는 날, 한국에서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진다. 1등 대학부터 꼴등 대학까지, 인기 학과에서 비인기 학과까지 서열이 매겨진 한국 사회에서 수험생들은 더 상위의 대학과 학과를 가기 위해 1등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줄을 세우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 수험생과 학부모, 학교는 물론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 가히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시. 과연 이 입시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우리나라가 유례를 찾기 힘든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입시에 목숨 거는 과열된 교육열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 21세기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지식정보와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입시와 교육 철학이 그러한 시대에 대비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입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한국의 교육과 인재관에 던지는 본질적인 회의이자 도전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은이는 지금의 입시로는 “NO”라고 한다. 인재와 입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학교와 학원 그리고 가정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채 감시와 처벌 속에서 길러지는 우리의 아이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는 기회를 말살당한 채 인재가 아니라 그저 ‘쉼 없이 뛰는 조그만 선수들’로 양산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교육은, 좀더 정확히 말해 오직 입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은 인적 자원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인재를 죽이고 나라를 망치는 ‘원흉’이다. 교육이 인재를 기르고 국제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주장은 한갓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열화된 대학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무한 경쟁에서 승리한 엘리트들은 허약할 수밖에 없다. 허약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자연히 허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엘리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커녕 남을 위한 일말의 배려도 찾아볼 수 없다.
저자는 상식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한국의 입시 교육을 비판하고 있다. 아이들이 힘들어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의 어려움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지금의 무한 ‘입시’ 경쟁이 유일한 방법인지. 누가 ‘인재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아이들을 무자비한 입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서울대는 전 세계 대학에서 그 전례가 없는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즉 세계 최상위권의 인재들을 싹쓸이하고 있다. 서울대는 한마디로 우수한 인재들의 집합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재들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의 최고 대학일 뿐 국제적인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일까? 세계적인 대학자는 없고, 희대의 논문 조작이 있을 뿐이다.
지은이는 입시만을 위한 교육에서 그 문제점을 찾는다. 수능 시험이 끝나면 고등학교 수업은 시간 때우기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학 교육이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무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경쟁은 끝난다. 가능한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공부를 시작하고 제대로 경쟁해야 할 대학에서는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오로지 고시 시험과 스펙 쌓기 뿐이다.


공교육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으로 몰리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의 무엇이 부실한 것인가? 지은이는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대학 입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경쟁 학생보다 1점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받아서 한 단계라도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학과에 입학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인 상황에서 공교육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제공되는 학교 수업은 남보다 앞서는 것이 교육 목표인 상황에서 내용이 견실해도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줄 세우기에 방해가 되는 학교 교육은 내용과 방식을 아무리 개선해도 부실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대학 서열화가 계속 유지된다면 공교육이 부실하다는 비난은 더 거세지고 많은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토론식이나 논술식이 아닌 주입식 교육과 ‘찍기’의 객관식 시험이 중심을 이룬다. 학교나 교사 모두 논술식 교육을 진행할 준비와 능력도 부족하지만, 채점에 대한 시비 때문에 정답이 명백하게 있는 단답형 시험을 벗어날 수 없다. 논술을 위한 사교육시장은 급팽창하고 있다. 공교육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사교육이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사는 논술에 있어서 ‘아마추어’이고 학원 강사는 ‘프로’이다. 팽창하는 사교육은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성적, 순위가 매겨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논술, 통합 교과형 논술 시험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서울대와 주요 사립대들이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워 기존의 대학 서열을 공고히 하기 위한, 그래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학의 자율성이니,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느니, 아니면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한 엘리트 교육이 필요하다느니, 그리고 이는 국제적 경향이니 하는 것은 그저 변명이요 허위의식이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대학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국가, 국민, 사회 등 거창한 이름으로 감추고 있다.
객관식 시험에서는 “정답이 1개인 특성을 감안해 어느 모로 보나 정답인 답항을 골라야” 한다. 복수 정답을 인정하라는 소송의 법원 판결이다. 정답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는 우리 학생들이 창조적인 인식과 자율적인 사고가 가능할까? 프랑스 바칼로레아에선 “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문제가 출제된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는 과정 자체 즉, 논증 방식과 절차 그리고 사유의 참신성과 독창성 등이 답일 것이다.


진짜 경쟁은 중,고등학교가 아닌 대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경쟁을 해야 할 대학에서는 경쟁하지 않는 엘리트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허약한 엘리트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던 것처럼 정답 찾기에 여념이 없다. 정답을 찾으면 나머지는 모두 오답이다. ‘조국 근대화’, ‘세계화’, ‘BK21’, ‘천재론’, ‘지식정보 사회’, ‘FTA’ 이것들은 허약한 엘리트들이 찾은 정답들이다. 한때 정답이었다가 다른 정답이 제시되면 오답이 되고 만다. '성장'과 ‘세계화’가 정답이던 시절 모든 것을 성장과 세계화에서 찾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 이유도 ‘성장'과 '세계화’였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랬다. 그러나 그 정답의 결과는 외환 위기였다. 이후 새롭게 찾은 정답은 ‘지식정보 사회’이다. 구호만 난무하고 수단에 불과한 컴퓨터 보급과 인터넷을 까는 것이 전부였다. 정답을 찾아 헤매는 허약한 엘리트들은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허약한 엘리트가 지배하는 허약한 사회의 스산한 자화상이다. 허약한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에 허약한 민중들이 끌려다닌다.
엘리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엘리트가 다수를 대신하여 이끄는 시대도 지났다.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여 다수가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만들고, 지혜와 대안을 수렴하여 사회적으로 합의하도록 해야 한다.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은 이미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반을 조성해 놓았다. 구조적으로 참여가 어려운 이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조금 더 고민하고 배려하면 된다.


대통령 선거가 70일 앞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을 체념과 절망과 포기로 밀어넣고 있는 입시공화국, 입시지옥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정책을 제시하여 동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정답이 될 만한 대안들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제시되어 있다. 무상교육, 중고교와 대학의 분리, 대학평준화, 수능시험 폐지와 자격고사,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전문대학원 체제, 교육민주화, 교사 충원 및 획일적 교육방식 개선, 각종 객관식 시험제도 개선 등... 토론하여 선택하고 합의를 도출하여 내년부터 새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면 된다.
독일 대학에서 저자가 보내는 한국교육애 대한 이 메시지를 대선 후보들, 특히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에게 들려주고 싶다. 제대로 된 교육도 복지국가의 중요한 요소다. 안철수 후보의 <안철수의 생각>이나 문재인 후보의 <문재인의 힘>에서는 한국 교육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두 후보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엘리트 지위에 위치한 사람들부터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 2012년 10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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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
존 프란시스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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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개인이 작은 결심으로 시작해 오랜 기간 꾸준하게 노력하여 사람들과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 이야기가 있다. 존 프란시스(John Francis). 아버지는 파나마 태생의 전기회사 보선공이었고, 어머니는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다. 어머니의 혈통에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노예가 섞여 있다. 그는 194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시력도 동년배들보다 1년 정도 늦었던 아이였다. 그는 조부모, 삼촌과 사촌 형제들과 함께 따스한 애정을 받으며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그는 세 번째로 대학을 그만둔 직후인 1969년 캘리포니아 주 인네버스로 이사했고, 1971년 인네버스에서 소방 부서에 근무하는 중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를 목격했다.

 

존 프라이스는 기름유출 사고 직후 원유에 뒤엉킨 새와 바다생물을 살리기 위해 애써보고, 해변을 뒤덮은 기름을 문질러 닦는 자원봉사자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더 깊이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구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더 이상 자동차를 타지 않기로 하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동차를 버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모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동차 뿐 아니라 동력으로 움직이는 모든 운송수단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의 결심에 놀라고 의아해했으며 때로는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보생활은 시작에 불과했다. 몇 달 후 존 프란시스는 침묵을 맹세하고 17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침묵하면 제가 거짓말을 한 하게 되지요") 17년간의 침묵을 통해 사람들이 망각한 자연의 리듬을 발견하고, 말 한 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 1972년 4월부터 걷기 시작하였고,1983년 1월 1일부터 1990년 1월 아틀랜틱 시티의 대서양 해변까지 8년 동안 미국 전역을 걸어서 횡단했다. 그는 결국 22년 동안 걸어다녔다.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추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준다. 내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침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히 내가 입을 다물 때 생기는 말의 부재가 아니다. 침묵은 총체적이면서 독립적인 현상으로, 외적인 요소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p.83)

 

저자는 침묵 여행과 만남을 통해 말 한 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 태평양 북서부를 거쳐 시에라 산맥과 로키 산맥을 횡단했으며, 태평양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미국 땅을 도보로 가로질렀다. 대나무 숲으로부터 듣는 법을 배우고, 야생지대에서 자연을 배웠다. 사막을 건너며 옐로스톤 평원을 거치면서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위대함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침묵 속에서 여행하면서도 남오리건 주립대학에서 과학 학사과정을 그리고 몬태나 대학에서 환경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결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토지자원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친구들과 함께 도보 순례를 통해 환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환경보호와 세계평화를 촉구하는 비영리 교육기구인 '플래닛워크(Planet Walk)'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하여 활동을 병행했다. 그의 걷기와 침묵에 대한 소문을 점점 미국 전역에 퍼져 UNEP(UN 환경계획 Environment Programme)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고, 미국 연방정부 해안경비대와 함께 유조선을 규제하는 규정(OPA 90)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94년부터 1999까지 그는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브라질, 볼리피아, 아르헨티나, 남극까지 지구와 환경을 위한 여정을 확대하였다.

 

"이동하는 데 석유를 소비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석유 유출사고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 더 많은 양의 석유를 더 싸고 더 빠르게 공급받으려 하니까 그 과정에서 일부가 유출되는 게 아닌가?"(p.436)

 

책 속에는 존 프란시스가 여행 중에 직접 그린 그림이 곳곳에 실려 있고,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충고도 곁들여져 있다. 그가 여행 중 겪은 긍정적인 경험과 위기의 순간들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독자들은 그가 만난 아름다운 세상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체험할 뿐 아니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착실히 삶의 지혜를 터득한 ‘순례하는 철학자’의 통찰과 지혜를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존 프란시스가 걸어간 수많은 길 위를 따라가면서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새만금 등 환경문제를 적당히 바라본 나를 되돌아 본다. 나 역시 태안과 새만금으로부터, 환경과 생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존 프란시스 만큼 치열하지도 못하다. 2010년 가을부터 가급적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한 달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을 자동차를 운전한다. 그리고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담배도 끊지 못했고 여전히 샴푸도 사용한다. 재활용도 잘 못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엉망이다. 다시 한 번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천지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50권 중에서 27번째이며, 도보여행과 침묵여행을 통해 우리 대부분이 망각해 버린 자연의 리듬을 재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2012년 10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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