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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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비명>

이덕일 , 2011. 11., 역사의아침


 책은 <사도세자의 고백>(이덕일 1999) 개정판이자 증보판이라   있다저자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 개정하면서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을 보충하고 내용을 더욱 보강하여 더욱 완성도 높여 내놓은 신작이다영조 38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조선 500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시 조명한다.

저자가 <사도세자의 고백> 증보 개정한 이유는 <사도세자의 고백> 서점가에 돌풍을 몰며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정병설이 인터넷 강의에서 <사도세자의 고백> 저자에 대해 비평 아닌 비난을퍼부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그는  13 동안 추가로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를반영했다.


영조 38(17625 21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가 죽었다이후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으며 누구도  사건에 대해 말할  없었다부왕 영조는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  결정적인 역할을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진실의 빈자리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 메웠다. <한중록>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라 했다세자의 부인이  피맺힌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달랐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한중록> 전하는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있는 기록들을 찾을  있다. 

이에 저자는 너무나 다른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자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전하는 다양한 사료를 취합하고 분석한다이를 통해 각각의 기록 행간에 담긴 사도세자의 본모습과  죽음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과정에서 세밀히 분석되는 삼종의 혈맥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영조의 탕평책과  한계  정조 대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 지형은 조선 역사의  부분을 이해할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혜경궁의 기록인까닭에 후세 사람들이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인지상정이다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있었으며 정신병은 자식들을 편애한 영조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더불어 남편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만들어낸 비극임을 강변한다. 

그러나 세자가 죽은 후에도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과 중부(仲父홍인한이 승승장구해 정승의 지위를 누린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혜경궁의 친정 풍산홍씨 가문은공교롭게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으로 몰려몰락했다이는 <한중록> ‘사도세자의 죽음 자유로울  없었던 사건 관련자의 기록이며또한 가해자의 기록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정신병시아버지 영조의 성격이상 등을 강조하면서 <한중록> 집필한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과 자신의 친정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 대해 무고함을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영조는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노론과 혜경궁은 정신병자라고 했으나, <영조실록> 기록된 온양 행차  사도세자의 모습은 달랐다마구간을 탈출한 군마가 농토를 상하게 하자   섬을 밭주인에게 주어 보상케 했고나이 많은 노인들을 불러위로연을 베풀었으며선비들을 불러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했다몸이 불편해 요양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강연은 멈추지 않았다또한 귀경길에는 농사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라고 하령했다아버지 영조 못지않은 애민(愛民) 세자였으며성군의 자질을 가진 작은 군주였다. 

온양 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세자가 ‘포악하다’ ‘정신병이 있다  노론이 조직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히는계기도 되었다하지만 역설적으로 온양 행차  보인 백성들의 찬사와 충청도 사대부와 부로들의 칭송은 노론과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더욱 경계하게만들었다.


영조 31(1755) 2 4,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붙었다소론 강경파인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모의를 꾸미며 붙인 벽서인데 나주 목사 이하징  서울과 지방의 소론 일부가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게다가  사건과 관련된 자들 중에는 과거노론이 주상인 경종의 살해를 모의한다는 고변으로 벌어진 임인옥사  당시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 역모의 수괴로 주장한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옳다고 이야기한 자도 있었다영조와 노론의 입장에서는 나주 벽서 사건은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민감한 사건이기도 했다결국노론은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고 영조는 이를 추인했다

하지만 세자의 생각은 아버지 영조와 달랐다경종 시절 노론의 세제 책봉과대리청정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 생각하던 그는 경종  연잉군이던 부왕을도운 소론 온건파마저 적당으로 모는 데에 반대했다또한 나주 벽서 사건 이후 벌어진 토역경과 사건에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한중록>에서조차 ‘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그는 분명 노론과 다른 정치관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이제 노론에게 세자는 자신들이 모셔야  다음주군이 아닌 분명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영조 38(1762) 5 13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휘령전에서 뒤주로 들어갔다.

14 동안이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대신들은 세자를 구원하기는커녕  반대 행위에 열중했다세자의 가족들  세자의 목숨을 구하고자 영조에게  인물은 세손뿐이었다세자가 뒤주에서 밤을 새운 첫날에 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홍봉한은 ‘세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대신들을 힐난하고세자가 뒤주에 갇힐  울부짖었다 이유로 한림 윤숙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다세자가 죽던  그는 한강에서 한가히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세자가 죽은  홍봉한은 “영빈께서 아뢴 것은 오직 전하를 위한 것으로서 성상께서 단행하신 것이고신이 성상의 뜻을받들어 행한 것이며그다음은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행한 것입니다라고 세자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이는 자신이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영조의 뜻을받들어 실행에 옮겼음을 의미한다그렇게 세자는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여드레 동안   모금 마시지 못한  신음하다가 영조 38 5 21이승을 하직했다.


250  역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과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라는 학문과 연구자그리고 ‘역사서라는 책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그리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수십수백 가지 다른 사실과 과정과 이유가 작용하여 발생하게 된다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어떤 입장에서어떤 관점에서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나 진실이 얼마든지 다를  있다는 것을 우리는수없이 목격했다.

<한중록>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고집불통 아버지인 영조와 정신병에 걸린 아들 사도세자의 대립구도로 바라보던 것이 지난 250  주류의 해석이라   있다마찬가지로 영조 치세 조선사회의 정치적 갈등구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고찰하는 것은 정치학적으로역사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여기에 당시 사회경제구조와 왕실 내부의 이해관계와 갈등그리고 노론-소론-남인  정파들의 세력타툼 구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볼 수도있을 것이다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고 현세와 후세에게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게 된다.(저자가 ‘노론 300 독재라는 관점으로 인조반정 이후 현대까지 한반도를 고찰하는 것도 나름 합리적이고 일관된역사인식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하나의 관점하나의 해석하나의 이론만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은 도그마나 독재에 다름 아니다순수성과 단일성을 주창하는 대다수의 종교도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 2016 11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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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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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비오따쓰 GAVIOTAS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Alan H. Weisman, 1947 3 24~) 황대권  / 2008. 10., 364랜덤하우스


<가비오따스>  마디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이 일구어낸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 ‘자연과 함께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면 <가비오따스>는 ‘여럿이 함께 자연과 살아가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가비오따스' 콜럼비아 수도 보고타로부터 동쪽으로 자동차로 16시간 거리에 있는 사바나 대평원 지대(일명 야노쓰) 위치한 생태환경도시이다이곳은 나무 한그루 없는 콜롬비아 사막 불모의땅으로 알려져 있다가비오따쓰는 100년 넘게 콜럼비아를 온통 둘러싼 무장 폭력과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며 조금 비켜나 있다.

1970년대 초반파올로 루가리와 동료 1인은 '자연과 융화하며 자급자족의 공동체로서 척박한 열대지방의 특성을 살려 에너지를 거의 모든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 친환경적인 도시' 조성할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다. 루가리의 좌우명은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다”이라 한다. 2명으로 시작된 공동체는 2003년에 200명으로 늘어났다.


와이즈먼이 보여주는 가비오따쓰에는 빈부격차에 의한 계층도직업의 귀천도 없다모두들 맡은 일을 하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비오따쓰에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거나 나름대로 일거리를 만들어서 일했다도시에서 의사교수과학자였던 사람들도 있으며천민 취급을 받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던 거리의 아이들과이보 인디언들도 있었지만그들은 모두 같은 급료를 받았다임금은 높지 않았지만 숙소와 음식교육보건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쓰레기를치우는 사람도 최신 태양열 기구를 발명해낸 사람 못지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가비오따쓰는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있도록 지원하였다과학자와 기술자들은 태양열을 이용한 발명품들을 자체 개발해내고 기술을  3세계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결과그들은 적도의 미풍만으로도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풍차손가빌 하나의 힘으로도 작동시킬  있는 초효율 펌프태양열로 작동하는 정화 주전자프레온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태양열 냉장고태양열 주방자연의 바람을 이용해 열대의 뜨거운 기후에서도 쾌적함을 유지할  있게 설계된 병원 등을 발명해냈다. 

또한 그들은 공동체 회의를 통해 축구 대회음악회자연 실습 등을 꾸려가며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가비오따쓰는 주위를 둘러싼 혼탁한 세상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다. 


저자는 “가비오따쓰인들은 비싸고 한정적인 석유 대신 누구나 사용할  있고 무한한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고척박한 야노쓰에서도 가능한 수경재배법을 개발하고 채소를 키워 자급자족하고 있었으며학교와 병원을 세워 지역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와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었다그리고 마른 풀밖에 없었던 황량한 야노쓰에 소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4 헥타르의열대우림을 만들어냈다 열대우림은 가비오따쓰의 가장  성과다콜롬비아에서만 10 동안 60 헥타르의 숲이 사라졌다지구의 허파가 되는 열대우림의 소실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인류의  위협이다그들이 만들어낸 열대우림은 사라졌던 생태계를 불러들이고 적도의 열기를 막아주었다 모든 일들은 가비오따쓰인들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만들어간 인내와 노력투쟁의산물이었다가비오따쓰의 업적은 환경을 손상시킨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있음을 희망적으로 보여준다.”라며 인류의 미래라고 칭찬해 마지않는다.

루가리와 가비오따쓰 주민들의 노력과 열정은 오늘날 생태주의에 입각한 공동체 건설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비오따스’는 단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들의 꿈일 수도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온전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콜럼비아의 주요 사회체제에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비오따쓰는 어찌할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바로잡을  있는 능력이 인류에게 그것도 제3세계인들에게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와이즈먼이 생각하는 가비오따스의 미래는 불완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가비오따스의 탄생과 유지가 콜럼비아 상류계급인 파울로 루가리 등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과 가비오따스가 콜럼비아 주류 사회경제체제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루가리와 상류층 출신의 구성원들이 아니었으면 가비오따스가 생존하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비오따스는 필요한 기술과 자재, 인력과 상품시장을 루가리의 인맥, 그리고 유엔과 콜럼비아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가비오따스의 규모가 커질수록 의존도는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콜럼비아 및 남미, 그리고 전세계에 걸쳐 저소득층과 극빈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힘(또는 주요 모순)에서 개인이 아닌 일정 규모의 집단이 벗어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콜럼비아 사회 전체의 흐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힘을 쏟는 것이 지름길일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은 최근 콜럼비아 정부와 게릴라군 간의 평화협정이 말해주고 있다.


1970년대에 콜럼비아가 처한 현실이나 21세기에 콜럼비아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의 공통점 중의 한 가지는 콜럼비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콜럼비아에 내재하는 문제점, 즉 빈부격차와 양극화, 외세의 개입과 대외의존적 경제구조, 불안정한 정치사회, 공동체 붕괴 등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15세기 마제란으로 상징되는 유럽대륙의 아메리카 침략이며 그 이후 5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서구 국가와 자본의 아메리카 수탈과 개입이다.

콜럼비아는 스페인으로부터 오랫동안 식민지로 신음했으며, 장기간의 식민지 구조는 독립 후에도 콜럼비아의 정치사회 구조를 절름발이와 폭력으로 물들여 놓았다. 보수를 표방하는 세력과 자유를 표방하는 세력 간에 벌어진 수십 년간의 유혈대립, 그리고 민병대의 잔혹한 살상, 정부군과 게릴라군의 무장투쟁, 미국의 개입 등이 20세기 콜럼비아 사회를 규정했다.


다행하게도 21세기 들어 콜럼비아 정부와 게릴라군 간에 평화협정이 타결되었다. 이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에 쿠바 정부와 노르웨이 정부가 중재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로 미국이나 유엔, 유럽 주요국가 아닌 외국에 의해 콜럼비아와 남미에 평화의 희망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콜럼비아 사회가 미국의 집요한 개입을 극복하고 평화협정을 이행하고 사회경제 체제를 바꾸어 나가면 가이보따스에 콜럼비아 전체에게 끼친 영향보다 훨씬 광범위한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가비오따스의 의미나 가능성이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평화협정이 콜럼비아 사회 전체와 모든 국민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지는 못랄 것이며,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구체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의 적폐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화협정은 가비오따스의 유지와 확장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1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3921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2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7840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3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2523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4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05534

'52 내전콜롬비아 평화협정 타결…"102 국민투표"(종합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6/08/25/0607000000AKR20160825036951087.HTML?input=www.twitter.com


<가비오따스>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50  44번째 책이다.


[2016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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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 박병엽 증언록 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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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현대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2010. 09., 395


 노동당 중앙위원까지 지낸 박병엽(1922~1998)씨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차례에 걸쳐 증언을 남겼다증언을 끌어내고 엮은 사람은 중앙일보 기자였던 유영구와 정창현이다.

그의 증언은 처음 중앙일보의 기획연재물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91.9~1992.12  115) 가장  비중으로 담겼다당시 그는 가명을 사용했다중앙일보의 연재는 1992년과 1993단행본으로 출간된  북한현대사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다박병엽 사후 그리고 단행본을 읽고 다른 북한 관련 자료와 정보를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역자는 기존단행본을 새롭게 출간하게  것이다.

<김일성과 박헌영그리고 여운형> 박병엽의  번째 증언록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번째 증언록이다.


박병엽 증언의 신뢰도와 가치에 대해서는 상당수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다도진순 교수는 "특히 서용규(박병엽의 가명) 증언은  범위가 매우 넓고논리적 기저가 일관되며 탁월한 구체성을갖추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면서 “이러한 폭넓은 증언과  료의 발굴을 기초로 「비록」이 엮어낸 내용은 1945-48 남북한 현대사특히 정치사 전반에 걸친 매우 포괄적인 것이다 중에서 특히주목해야할 부분은 북한 현대 정치사남북 정치지도자들 사이의 공식·비공식 회동을 포함한 남북관계사라고 생각한다 지적한  있다.(4)


박병엽이 증언한 북한 정권의 탄생과정은 기억으로서의 역사일뿐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역사라   있다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부터 외세에 의해 한민족이 갈라진  전개된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해방  5년간 대한 실체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한민족 5천년 역사와 더불어 수천~수만 년을 이어갈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기억 정보는 뇌에서 사라질  있으되 체험은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다 땅의 해방동이가 65세에 이른 지금, 80 노인들이어야 당시 15 전후였음을 감안하면 이제 '해방공간에 대한 기억이나 ‘체험' 남아 있는 세대를 찾기는 어렵다 점에서도 그의 증언은 귀하다."(9)

"해방 3년은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공간이었으니 만치  시기의 자료와 증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역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다증언은 자료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사서술의 수단이다미국·러시아 등지에서의 북한 현대사에 관한 문서공개 열풍이 사라진 지금추가적인 자료발굴이 여의치 않은 조건에서 이미 채록해놓은 증언이라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10)


박병엽의 증언을 통해 독자들은 북한 정권과 지도부의 권력 장악 과정과 현대사 속에서 이어진 북한 정권의 정책의 기초를 파악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민족 ‘통일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전쟁 이후에 남북 갈등 과정에서도 ‘민족 ‘통일 표면적으로든실질적으로든 북한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인 셈이다.(1990년대 중반 이후 ‘생존 추가되었고..) 

김일성 주석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주요 발언이나 정책이 어떤 이념적역사적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지   있게 된다김정은 체제가 수립된 이후 북한의 노동당이나언론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 자주 거론될 정도로 북한에서 ‘수령’ 김일성과 ‘지도자’ 김정일의 상징은 대단히 크다따라서 ‘유훈통치 강조하는 김정은 체제의 향후 대미대남통일정책을 예측하는  도움이  것이다. 

"한편  책이 역사의 기록이라는 과거의 측면 못지 않게 현재적 의미와 미래가치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정에 관한 해명은 이북 정권의 존재근거와 정당화특히 그들의 대남·통일정책의 이해와 직결된다정권 수립시의 정강에 조국통일의 목표가 설정된 이래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조국통일'  사상적 기초로서의 '민족대단결' 주장했으며 그의 유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조국통일과 민족대단결' 강조해왔다북측은 해방 3년의 기간에 통일정부의 수립과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으며 책에는  과정이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14) 


그런 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더불어남북간의 당국회담에 참석하는 정부당국자들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여러 분야의 민간교류 인사들그리고 시민·통일운동가들에게  책은 적지 않은 시사점과 지혜를  것이다. 

아울러 해방  70 년의 우리 역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는 독자들과 청년지식인들이라면  책에 눈여겨볼 대목과 습득할 지식이 많을 것이다그리고 한반도와 한국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고민하고 있는 기성세대전문가기업인 그리고 지성인에게는  책에 묘사된 해방공간 3년이 사유의 좋은 텍스트가될  있다역사에서의 반복과  차이를 반추연역해볼  있는 실마리가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1 ‘소련군의 진주 1945 8 조선의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군  군정 책임자들의 평양 도착과 소련군의 진주과정 그리고 소련군의 만행을 다루고 있다또한 38 이북의 정치권 동향과 조선 해방  항일빨치산파의 존재 그리고 항일빨치산과 갑산파의 관계에 대한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김일성은 주로 동남만 5 현에서 활동했고 최용건은 북만주김책은 주로 남만주에서 각각 활동했다 가운데 김일성부대가 가장 크고 다음으로 최용건부대그리고 북만주에 간지 얼마  되는 김책부대가 가장 소부대였다."(35)

"항일빨치산파 중에서도 유독 김일성그룹의 단결력이 다른 그룹에 비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김일성의 직계인 김일·최현·강건·안길·김광협 등은 주로 동만 5  출신들이다이들은 항일무장부대가 크든 작든 1930년대 초반부터 줄곧 뭉쳐서 활동했다그러다가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이들은 소대장·중대장 간부로 흩어져 활동하게 됐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령으로 들어가 재회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들은  자신을 지칭할  일심동체의 빨치산 출신임을 염두에 두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김일성 역시 ''라는 말을 절대로  밖에 내지 않고 언제나 '우리라고 말하곤 했다.그들 빨치산 가운데 항일투쟁 과정에서 배반한 사람은   사람 밖에 없었다고 자랑할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보였다이들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사상의지적 통일을 이뤄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이것이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통치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38)


2 ‘김일성의 부상 김일성의 입북 과정과 소련군정의 김일성 발탁의 배경그리고 소련군정의 김일성 지원과 10 14 김일성환영대회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은 이북지역에 들어와서도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김영환  몇몇 가명을 쓰고 다녔지  바로 "내가 바로 김일성이라고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만날 때만은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밝혔다그러다가 일반대중들 앞에서 김일성의 이름으로 공개된 것이 바로 '김일성환영대회였다."

"당시 언론들은 김일성환영대회에 40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보도했지만 다소 과장이 있었던 듯하고 입추의 여지없이 동원되었던 것은 사실이다지금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김일성경기장자리에 있던 공설운동장에서 환영 대회가 열렸다공정원들이나 보안대원들적위대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선전삐라도 대량 살포하였다조직적인 동원이 이뤄지기도하였다."(63)


3 ‘소련군정 하의 여러 정치세력들 해방 직후 소련파조만식과 소련군정조만식과 김일성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인적 구성과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현준혁 암살사건과 연안파의 입북,신의주 무장해제사건과 연안파와 신민당 창당그리고 무정의 등장과 몰락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무정이라는 인물의 약점은 성격이 급한데다가 고집이 세고 자유주의적 경향이 많아 다른 지도자들과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그는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포병사령관을 하고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지냈다고 해서 다소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군사능력을 과신해 상부의 조직적  령보다 자신의 판단  우위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 자주 비판받았다사람이  산만하고 조직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최창익이나 박일우 같은 사람들이 민족해방투쟁 시기에는 무정보다 하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은 정치위원이 됐지만 무정은 그렇질 못하였다무정의 정치적 식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117)

"무정이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은 6.25전쟁 시기였다개전 당시에 무정은 2군단장이었고 1군단장은 김웅이었다. 2군단 참모장은 항일빨 치산 출신인 김광협이었고 2군단 예하에 2사단,5사단, 7사단이 있었다. 2사단 단장은 중국인민해방군 출신 이종의, 5사단장은 항일빨치산 출신 오백룡, 7사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덕이었다. ... 2군단의 주역할은 이남 국방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한편 후방지원을 끊어버리는 것이 었다일종의 서울 포위 내지 압축작전을 쓰려했던 것이다서울로 직접 진입하는 부대의 도하작전과 계속적 진군을 보장하려는 것이 었다이것이이른바 개전  단계의 기본전략계획이었는데 무정의 2군단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의정부와 양평 방면에서 국방군의 저항이 심하여 계획대로 진군하지 못했고특히 경탱크부대가 역할을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이에 대하여 나중에 2사단과 5사단이 책임추궁을 당했는데 속도가 늦어진 것은 순전히 무정의 지휘 오류라는  드러났다."(118~119)


4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이북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조직화 과정과 지도부 선출 그리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립  운영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북부 5도당 책임자  열성자회의는 남과 북의  정파별 조선공산주의자들간에 의견 차이가 컸기 때문에 박병엽이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서 밝혔듯이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회담이 진행된  1945 1013 ~15 사이에 개최되었다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는 김용범이 선출되었다북조선분국 2 확대집행위원회는 1945 11 23~24 개최되었으며 인민적인 민주개혁혁명의 근거지론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과 일제잔재 청산민족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전민족의 단결이 결의되었다북조선분국 3 확대집행위원회는 1945 12 17~18 개최되었으며 북조선분국의 강화와조직체계 정비(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 간부대열의 정비종파주의 비판이 결의되었다. 

"18 오후 회의에서 김용범은 신상발언을 통해 자신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그동안 일을 해왔지만 능력도 모자라고 건강악화로 직무를 계속 수행하기 어려우니 사임하고 싶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그런 후에 김용범은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추대할 뜻을 밝혔고 아무도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가운데 박수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사실 회의 분위기로도 그렇고 김일성 계열의기세에 압도되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반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당시의 이북 사회의 분위기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흔하게 불렀고 “김일성 장군은 절세의 애국자만고의 빨치산민족의 영웅'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판이었다 내부를 보더 라도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창립의 실질적인 장본인인 데다가 북부 5도당 책임자  열성자회의와  예비회의에서 수십 차례 발언에 나섰고 당내 지도자들과 여러 면담을 가졌으며2 확대 집행위원회에서는 정치노선에 관하여 보고하는  실질적인 중앙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견이 있을  없었다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김용범은 새로 조직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을 맡게된다. 

조직문제를 마친 뒤에 일단 공식회의 일정은 끝났지만 2 확대집행위원회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당규약과 유사한 내용의 강습회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148~149)


5 ‘북조선로동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임시인민위회 설립과 인민위원회에 의해 실시된 토지개혁건국사상총동원운동보안간부훈련대대 설립에 대해 증언이 담겨 있다또한 1미소공동위원회와 북조선로동당 2차대회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북에서 1946 11 시점에 인민위원회선거라는 정치수순을 밟기 시작했는지를 들여다 필요가 있다  무렵에 선거가 실시됐는지·· 인민위원회 선거의 성격을어떻게  것인지 하는 것이다 선거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정권기관을 창출하기 위한 절차였다고   있는데 1946 11월에 가서야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이유가 있었다.

이북에서는 1946 3월부터 민주기지 노선에 따라 토지개혁노동법령중요산업 국유화남녀평등권법령 등의 제반 민주개혁 조치가 취해졌고 1946 말에 이르면  토대가 공고해졌다고  있다 정권을 창출해나가던 공산주의자들은 1946 말에 이르러 이북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와 봉건 잔재 일소 등의 과제에서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인민민주주의혁명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민주제도의 틀이 어느 정도 짜여졌다고  것이다이에 따라 초보적인 민주제도를 바탕으로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공고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민주제도를 법적제도적으로 공고히 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인민정권기관을 탄생시키는 일이었다합법적인 인민정권기관을 출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제도를  공고히 하지 않으면 여전히 취약한 이북의 사회체제가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민주개혁을 통해  나름의 인민민주주 의의 기초는 마련하였으나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면인민정권기관을 합법 적으로 출범시키지 않을  없었다는 것이다."(218)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과정은 이북의 헌법제정 준비와 1948 이남에서 이승만 등에 의해 단독정부 수립과 5.10 단독선거가 추진되자 이에 반대하여 진행된 남북연석회의와 2 정당단체지도자협의회의 전개과정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다또한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전개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와 지하선거와 8.25선거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준비와 진행과 공화국수립 이후 움직임이 소개 된다.

" 답신을 받은 북로당은 준비된 정치일정에 따라 김구김규식이 불참하 더라도 2 지도자협의회를 밀고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1948)6 29일부터 7 5일까지 일주일간 ·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기로 확정했던 것이다김구·김규식뿐 아니라 여운홍장건상  이남의 정당·단체 대표들의 회의 참가가 불가능해진 상황이어도 회의를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다만 성시백을 통해 북로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안우생박건웅권태양  김구·김규식의 일부 측근들은 2 지도자협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6 27일께 평양으로 올라왔다. 

평양에서 열린 2 지도자협의회에는 이북의 모든 정당·단체 대표자들은 물론 남북연석회의 뒤에 이북에 잔류한 이남의 정당·단체 대표자들그리고 비밀리에 38선을 넘은 일부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참가 정당·단체 수는 남북연석회의 때의 56개에 훨씬  미치는 40 미만이었다이북의 정당 3개와 사회단체 12개는 그대로였지만 이남의 정당·단체가 20 개로 줄어들었다."

"지도자협의회의 마지막 날인 7 5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선거의 절차 문제를 토의하고 합의서를 채택하였다.”(343)


[2016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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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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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하다가도, 박정희의 일본 전쟁범죄 면죄 사건을 대하면서도, 2015년 말 한일 양국 정부의 패륜적인 위안합 합의에 분노하다가도, 국내 수구기득권 세력의 ‘뼛속 깊은 친일 유전자’에 분개하면서도, 늘 느꼈던 것이 ‘일제 침략 및 학살사’에 대해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분히 시간 나는대로, 관련 서적을 통해 ‘일제 침략 과거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찾아본 책이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다.

 

이 책은 재일사학자 강덕상이 2003년에 출간한 <관동대진재 關東大震災. 학살의 기억>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저자가 초판을 발행한 1975년으로부터 24년이 지난 1999년, 역자 김동수가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 객원연구원으로 있을 때 처음 발견했다.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불안과 지배 심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관동대지진의 재앙, 재일 조선인 6천여 명 이상을 대량 학살한 그 참혹한 기억을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났던 재일 조선인 대량학살(최소 6천명)의 진상을 방대한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파헤친다.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는 사진과 도표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일본 내 각종 자료와 문서, 증언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참혹한 기억의 현장에 다가간다. 

 

수많은 증언과 기억들을 통해 되살아나는 학살의 기록들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와 군사기록을 비롯하여 정부 고위관료의 수기, 당시의 신문 기사, 일반 시민.말단 경찰.군인의 증언 등이 현장감 있게 전개된다. 

또한 당시 경찰과 군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엄령과 학살을 진행해갔는지 정확하게 읽어내며,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움직였던 제국주의의 지배심리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그리고 당시의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시켜 기록했던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계엄령의 발포 시점과 조선인 관련 정책, 희생자 조사 등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도 일본당국이 지닌 식민지 전쟁의식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권력의 중추에 있는 관료와 군인은 1918~1920년 사이의 식민지 전쟁(기미독립항쟁, 국내에서 ‘3.1운동’으로 명명되는…)을 수행할 때 제일선에 있었던 자가 의외로 많다. 그 현장에서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었을 때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본에 적대 의식을 가진 세인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권력의 와해를 틈타 혹시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예단으로 선제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엄령의 발동이었다. 최강의 권력으로 변한 계엄권력 아래에서 관민(官民) 일체의 대학살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이런 추론을 반증해 준다. 적대시하는 시각이 엾었다면 계엄령도, 학살도 없었을 것이다.”(9쪽)

 

한편 저자는 식민지 지배시기부터 현재까지 일본 민중과 정부 모두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재일 조선인 차별의식의 깊은 뿌리에 접근해간다. 당시 관헌의 업무지침으로 상세하게 하달된 조선인 식별자료, 조선인 감시 명부, 감시 상황, 조선인 유학생 관리 명부 등을 상세히 소개하며, 식민지 지배사상에 오염된 일본인들의 조선인 차별관은 어느 정도였는지, 관헌의 편견과 조선인 적대정책은 어떻게 현실화되었는지 상세히 소개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이 또다시 참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대다수 정상적인 국가들은 자국 내 주권자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한국인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 묶여 있는 조선인들은 조국으로부터 다른 대접을 받아왔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내에서 살아갈 수 없거나 일제의 사기행각에 속아 일본으로 넘어간 후, 일본에 체류하다가 일제에 의해 학살, 징용, 징병당한 것에 대해 역대 한국정부가 무관심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한국정부와 정치권은 해방 이후에도 재일동포에 대해 아무런 조사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물론 현재도 그런 상태는 이어지고 있다. 역대 정부뿐 아니라 대다수의 야당, 지식인, 진보단체, 시민사회종교단체 역시 재일동포의 수난사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정부에게 관심을 제대로 촉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재일동포 사학자나 연구자들이 재일조선인과 재일동포의 수난사를 조사하고 기록하고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일부 헌신적인 연구자와 활동가들도 이에 해당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정부가 아닌 민간분야에서 조금씩 일제의 잔혹사를 연구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관동대학살 유족 "日, 6천명 죽이고 93년 외면…유골이라도" http://cbs.kr/FJ8uec

˝사실을 잊은 민족과 기억하는 민족은 앞날이 달라˝ http://chosun.com/tw/?id=premium*2016090600702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일본 정부 관여로 시작" #강효숙 #김성수 #조선인학살 #관동대지진 김성수 기자 http://omn.kr/9ykp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뿌리가 친일매국노였다는 과거가 여전히 현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과거’일 뿐 아니라 그들이 ‘현재의 권력’이라는 데 있다. 친일은 배신과 탐욕과 부정과 폭력과 굴종의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박근혜와 그들과 함께한 집권여당으로 이어지는 정치권력의 역사가 현존하고 있으며, 삼성과 두산 등 일제와 친일권력에 빌붙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해온 재벌들의 경제권력, 그리고 법조계와 문화계, 학계와 종교계까지 친일의 뿌리가 줄기가 되고 가지가 되고 심지어 잎사귀까지 되어 한국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도시라고 있다. 현재의 한일관계와 기득권층의 태도가 그런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숫자는 전체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잡고 있던 권력과 부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동일한 정치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영향을 끼쳐왔고, 상당 부분 구조적 체계적으로 얽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뿌리를 뽑아내기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세대가 꾸준히 태어났고, 대다수 한민족과 한국인들이 단 하루도 굴함 없이 친일세력과 부정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온 항일투쟁과 저항의 역사 또한 이어져 왔으니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내리라 믿어 본다.

 

[ 2016년 10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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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박병엽 증언록 2
박병엽 지음, 유영구.정창현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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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담: 박병엽 증언록2> 2010. 11., 382쪽, 선인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를 읽으며 시작된 북한 인물 평가와 기록에 대한 관심이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 정창현 교수의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에 이어 박병엽의 증언록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기존 한국현대사 기록이나 연구에 드러나지 않았던 겜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담이 소개되어 있다. 증언록을 제공한 박병엽은 1980년초 북한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역임하던 중 월남(탈북)했고, 1998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는 1922년 전남 무안출생으로 1930년대에 가족을 따라 함경도로 이주했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평양에서 공청, 북로당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그후 조선로동당 사회부와 대남연락부 등에서 지도원, 책임지도원, 과장 등을 거쳤다. 조선로동당 3호청사의 자료실에서 일한 적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부국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했으며, 마지막 직급은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이었다. 

박병엽의 경력과 활동상황을 고려해보면, 해방 후 한반도 정국에서 남북의 주요 인사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동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그의 증언록은 1990년대 초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되었다. 통일부 전직 공위간부는 그의 ‘존재’를 확인해주었다고 하며, 이 증언록을 엮어낸 유영구와 정창현은 그의 증언 대부분을 신뢰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 책의 증언내용을 활용하고 검증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는 필자에게 지난 북한 현대사와 남북관계사 속에서 발생한 사건,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남겼다. 그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웬만한 조선로동당 문헌은 줄줄이 외고 있었다. 그 많은 당대회, 당 전원회의, 당 정치위원회 회의 등에서 이뤄진 보고와 토론내용을 빠짐 없이 기억했다. 곡절 많았던 북한의 정치사 속에서 계속된 사상투쟁과 검열 과정을 견뎌낸 결과라고 생각된다. 1990년대 초 그의 증언이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됐을 때 한 현대사 연구자는 그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증언이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사실과 상세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그의 경력과 증언이 과장됐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일부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증언에는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과 문헌을 읽어 알게 된 부분이 간혹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1980년대 초반 서울에 왔을 때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통일부 전직 고위간부로부터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부에서 나온 「북한 인명록」에도 그가 1960년대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가명이다.”(7쪽)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중앙당의 대남부분의 연락원으로 배치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은필, 최광호 등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서울에도 몇 차례 내려왔다. 1949년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중앙당 사회부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1953년 박헌영·이승엽사건'이 터지면서 대남연락부가 재편될 때 대남연락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책임지도원, 과장으로 승진했다. 한때 남조선문제연구소(현재 조국통일연구원)에서 일하기 도 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로 대외정보조사부에서 활동했다. 남조선문제연구소에 있을 때 그는 로동당 고문헌실에 있는 당 문헌과 남북관계 비밀문헌, 남쪽 출신 월북자들의 경력파일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업무상 과오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한 공장의 지배인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경험도 있다.”(9쪽)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느끼겠지만, 특히 <박헌영 트라우마>의 내용과 ‘박헌영’이라는 인물, ‘박헌영 등 간첩사건’, 그리고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큰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증언록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에 대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한국현대사나 남북관계,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당, 남로당과 북로당에 대한 내용들이 많은 부분에서 재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후 남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와 좌파라 할 수 있는 박헌영, 여운형(조선중앙일보 사장, 건국동맹 및 건국준비위원회 창립자, 조선인민당 당수, 서울에서 피살), 백남운(남조선신민당 당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북한 초대 교육상, 최고인민회의 의장), 홍명희(소설 <임꺽정> 작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월북) 등이 공산당 활동과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일제시대에 비슷한 생각과 투쟁을 해왔던 이들이 해방 후 한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자주 만나고 도모해야 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예측’을 그동안 하지 못했었다.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남한에 오래도록 집요하게 구축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기초적인 상식과 합리성마저 무디어지게 만들었던 탓이리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은 5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장의 내용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에 관해서다. 제2장은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동, 제3장은 백남운과의 비밀회동, 제4장은 홍명희 작가의 월북과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 제5장은 "박헌영. 이승엽사건"의 전말이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의 체포령에 의해 남한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을 때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여섯 차례의 비밀회동에는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 및 북조선노동당 포함) 정치위원회나 집행위원회 등과 공식적, 비공식적 회의에 참석한 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후자는 남한과 북한에 대부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비밀회동은 모두 제3자가 배석하여 이루어졌다. 제3자가 배석한 덕에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박병엽은 비밀회동의 참가당사자로서 그리고 참가당사자들이 나중에 작성한 ‘자술서’ 등을 그가 읽었기 때문에 여섯 차례의 비밀회동에 대한 증언을 남길 수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여섯 차례 비밀회동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0월 이후 그가 북한으로 월북할 때까지 이루어졌다. ‘비밀회동’이 진행된 것은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정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여러 정치세력은 한반도 전체에서 단일하고 유기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 인위적으로 38도선이 그어지고 외국군이 주둔하면서 한민족의 자치활동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주의 좌파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은 미군정이 한반도 남단에 주둔한 미군정의 반좌파, 반민족주의적 정책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한반도에는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항복 직전에 이루어진 미국, 소련, 영국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인 3국은 모스크바에서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와 조선의 문제를 한민족과 조선인 스스로에게 맡기지 않은 채 자신들이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신탁통치를 통해 자치국가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민족 스스로 해방을 달성하지 못한 것 그리고 하나의 국가로 세계대전에 참석하지 못한면서 발생한 것이다. 한민족과 조선인의 운명이 타국에게 맡겨진 불행하고 원통한 상황이었고, 21세기 한반도 분단의 원초적인 출발점인 셈이다.

명망가 중심의 우익, 우파 세력의 활동방식과 달리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은 조직적, 집단적 활동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한국독립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을 결성하였다. 각 당은 북쪽 지역에서도 지역당 조직이 존재했으나 미군정의 감시와 방해, 그리고 남북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활동의 자유나 정치적 활동에 의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특히 북쪽에서 정치적 조직적 영향력이 대폭 확장된 반면 남쪽에서는 미군정의 방해와 탄압을 받았던 조선공산당의 입장에서는 38도선이 정당활동에 치명적인 조건이었다. 북쪽에서 조선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소련군정의 지지와 지원을 받던 김일성과 조선공산당의 공식적인 당수이자 남쪽의 활동에 주력했던 박헌영이 비밀회당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비밀회동이 자주 필요했던 이유는 긴박했던 해방 직후 한반도 상황과 더불어 김일성과 박헌영은 해방 직후 정세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한 평가가 달랐고 38도선이라는 조건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 정세 인식이 다르니 정치노선과 조직노선 또한 다르게 판단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정세인식이 한국전쟁 기간까지 이어진 것이다.

 

박병엽의 증언은 두 사람이 해방 이후 5년 동안 주요 정세인식과 정치,조직노선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 미군정에 대한 평가, 미소공위의 결정에 대한 판단,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방안, 다른 민족주의 정당이나 좌파 정당에 대한 평가, 농지개혁 방안, 주요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 좌파 3당 합당 방식에 대한 전략, 미군정의 탄압에 대한 전술적 대응, 조선혁명과 통일 수행방안 등에서.

그증언은 해방 이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과 정치조직 노선이 상당 부분 부적절하고 그릇되었다고 말한다.(물론 그가 1980년대 말까지 이북 정권에서 정치적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인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 이북을 버리고 이남에 정착한 그가 일부러 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노동당)의 정세 인식과 정치조직 노선을 후호적으로 평가하려고 애썼을 것이라는 평가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저자(역자)는 박헌영과 남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정세인식과 정치조직 노신이 달랐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분단 이후 한반도 정세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또한 김일성과 조선공산당(노동당) 북조선분국이 해방 이후 이북에서 보여준 완벽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이나 정책수립이 미군정의 의혹, 즉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제공한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린다.

제5장은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전말이라는 제목으로 박헌영의 월북 이후 활동상황이 소개되어 있고,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과 ‘박헌영,이승엽 사건’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박병엽의 증언은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전개과정과 사건의 실체 등을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박헌영과 이승엽이 국가전복음모 혐의로 사형이 언도된 것과 이승엽이 해방 이전부터 간첩행위를 한 것, 박헌영의 행동 중에 간첩행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점들이 설명되어 있다.

 

이로써 완벽하지는 않지만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박헌영에 대한 공부가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추가 자료나 정보가 나오면 박헌영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소위 ‘박헌영, 이승엽 사건’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냐, 아니었냐’는 이분법적 판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박헌영과 박헌영 사건을 다룰 때 우선 견지해야 할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 보통 일반인을 보는 시각이 아니라 공산당 당원, 그중에서도 공산당 당수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점. 둘째, 일정한 평가원칙이 필요한데, 그것은 공산주의적, 혁명적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 간부의 평가원칙에 입각해 사건을 규명해야 한다는 점. 셋째, 사건을 평가할 때 역사적 과정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넷째, 역사주의적 관점, 객관적 시각에서 규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저자는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특히 사건의 배경 내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서 월북 이후 박헌영의 활동을 보여 준다.

박병엽은 월북 이후 남로당의 활동을 지휘했던 박헌영이 무모하고 조급한 투쟁을 지시한 것으로 증언한다. 자기 주위에 과거의 정치경력이 깨끗하기 못한 사람들을 우대하는가 하면 독선적 행동으로 인해 이남의 다른 당 출신은 물론 남로당 출신의 일부 간부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헌영은 북로당 지도부와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남북간의 대립이 격화되던 한국전쟁 직전에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남한 내 남로당의 정치활동 수준과 조직역량에 대해 과도하게 내세우면서 혁명전쟁(한국전쟁)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로당 지도부와 박헌영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특히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당,정 고위간부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박헌영이 당 정치위원이라는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후퇴를 제대로 조직하기는 커녕 단독으로 내뺀 사실이 드러나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 일부 간부, 당원들의 국가전복행위 음모와 간첩행위는 전쟁 기간 중에 발각되었다. 박헌영, 이승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범죄사항으로 다뤄진 것은 무장폭동에 의한 국가전복음모였다.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간첩죄, 남조선혁명역량 파괴죄가 덧붙여졌다. 박헌영과 이승엽에 대한 사형언도는 무장폭동 음모가 원인이었다. 

 

“전쟁 기간 중 박헌영에 대한 의혹이 날로 커가고 있을 때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몇몇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말 이래의 김영식 배철의 다툼, 이송운의 연락부 내부상황 보고, 조옥래 윤병삼의 다툼 등 일련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로당 지도부는 박헌영과 그 측근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차제에 ‘뭔가 음모가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특히 임화, 조일명, 박승언, 이승엽 등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에 대한 사회안전성의 치밀한 감시가 시작되었다. 이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이남 출신끼리 모여 연회를 열고 당에 불평불만을 갖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왔다.”(324쪽)

“1952년 조선노동당 제5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내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적 경향, 그리고 개인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어 1953년 1월~9월, 11월~1954년 5월까지 전원회의 보고서, 결정서, 붉은편지 등 3가지 문헌을 토의하는 ‘문헌토의사업’에 들어갔다. 토의는 문헌에 기초하여 자신의 당 사업을 총화하는 것이었다. 1월 중순부터 전당적으로, 세포단위로 진행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문헌토의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헌영, 이승엽의 과거 비리와 문제점이 하나둘 폭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전에 발각된 미국의 정보원들과 이승엽, 임화 등이 관계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미국의 정보공작라인이 여럿 침투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다.”(331쪽)

“1953년 3월초 이승엽 등의 국가전복행위 음모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사회안전부장 방학세는 3월 3일 박헌영을 제외하고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보고하였고 토의가 이루어졌다. 정치위원회는 우선 임화, 조일명, 박승원, 이승엽 등을 체포하여 종합된 자료에 따라 음모를 밝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30명이 체푀된다.”(340쪽)

 

[ 김일성과 박헌영이 여섯 차례 비밀회동 상세내용 ]

 

1.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1차 비밀회동은 조선공산당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1945년 10월 10일)을 이틀 앞둔 10월 8일~9일 사이에 개성 북방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고 이남에 미군이, 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남북은 서로 판이한 정세 아래 놓이게 된다. 당시의 정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서로 달랐다. 박헌영의 ‘8월 테제’에는 38선이라는 특수한 정세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세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일치시켜 조직적 행동통일을 꾀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차 비밀회동은 김일성과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남측 핵심과 북측 핵심의 노선 차이로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비밀회당에 배석한 이들은 로마넨코 소련군 민정사령관과 김일성 측의 주영하, 장순명, 이주연, 박정애 등이었고, 박헌영 측은 권오직, 이인동, 허성택이었다. 박병엽 역시 그전까지는 1차 비밀회동에 대해 몰랐다가 이승엽 등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는 권오직과 주영하의 ‘자술서’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에서 제기된 과제로는 북조선분국 창설문제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혁명의 참모부인 조선공산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생각이자 소련군정의 생각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소련측은 일본이 공산당을 탄압했는데 같은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라 해서 큰 차이가 날 리 없다, 이남에서 공산당에게 정세의 주도권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인 당지도부 를 어디에 둘 것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다음 과제는 북조선만의 중앙기구, 즉 특수환경에서 이북만을 지도할 수 있는 북조선 지도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지도기구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운영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이 이북의 지방당 조직과 연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서북5도당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의에서 박헌영의 서울중앙을 지지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중앙의 승인을 받아야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 그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결국 김일성은 비밀리에 박헌영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예비회의에서 김일성측의 입장에 반대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10월 10일부터 열성자회의를 개최하자니 김일성은 박헌영과 사전협의라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16쪽)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의 합의에는 북조선분국 결성에 대한 문제,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에 대한 결정서를 따로 채택하는 문제, 분국 결성 뒤에 사후승인을 받는 문제, 그리고 열성자회의에서 서울 장안파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채택하는 문제 및 정세변화와 관련해 서울중앙과 북조선분국이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협의하는 문제 등이 포함되었다. 대여섯 시간 논의 끝에 새벽녘에야 합의를 보고 이들은 헤어졌다. 박헌영과 함께 참석했던 권오직과 이인동은 열성자회의의 옵서버로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올라왔다. 이것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번째 만남의 전모이다.”(24쪽)

“권오직은 ‘자술서’에서 ‘새파란 젊은이가 불같은 정열로 뿜어내는 논리에는 박헌영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했다.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 위한 협의 자리였으나 이미 이때 실제 주도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고 느꼈다’라고 썼다. 결국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중앙이 1946년 10월에 이르면 이북으로 옮겨지고 마는데 박헌영은 이러한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고 김일성과 소련군정 측은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의 시점에서 이러한 정세를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역사를 달리 가정해보는 일은 의미가 없겠지만, 박헌영이 이 무렵 정세를 제대로 파악했거나 김일성의 의견에 동조했더라면 박헌영이 뒷날 중앙을 차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 비밀회동에서 김일성과 로마넨코 소장은 공산당의 중앙을 이북에 둘 것과 박헌영이 이북에 올라와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일설에는 훗날 서울의 소련영사도 박헌영에게 이를 권유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공산당 중앙의 위치문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만남에서 의견교환에 그쳤을 뿐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22쪽)

 

2.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2차 회동은1945년 12월 29일~ 46년 1월 1일까지 박헌영이 평양의 김일성의 사택에 머무는 동안 공산당 북조선위원회 사무실과 회의실(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12월 27일에 끝난 모스크바삼상회의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조선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에서는 28~29일 반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서울의 대세에 따라 반탁 입장을 내놓았지만 서울의 소련영사관이 본국 훈령이 아직 없다며 함구하는 데다 이북에서는 신탁통치에 관한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의구심을 갖고 답답하여 평양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다. 29일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방 북조선분국 확대집행위원회가 진행되었다.

 

“박헌영의 월북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 즉 ‘조선문제에 관한 의정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남북의 좌익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정세였기 때문이었다. 남북의 공산당 세력이 기본원칙이나 방향에서 동일한 투쟁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남과 북의 형편이 달랐기 때문에 전술적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에서 공동보조가 필요했던 것이다.”(25쪽)

“회의에서 주로 논의한 것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결정 내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 지지할 뿐 아니라 그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도록 전당적·군중적으로 민주역량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제가 논의되었다.”(30쪽)

“주영하의 ‘자술서’를 보면 박헌영이 김일성과의 제2차 회동 때에는 당 중앙을 이북에 넘겨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고 씌어져 있었다. 이북에 당 중앙을 넘겨준다는 것은 김일성에게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것을 뜻한다. 어찌 보면 1946년 2월 이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이남에서도 인민위원회 정권창출, 토지개혁 실시의 구호가 등장함으로써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가 사실상 당 중앙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헌영은 이처럼 김일성과의 제2차 비밀회동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대책을 받아 가지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1일 평양에서 신년연회를 가진 뒤 평양을 떠났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1일 밤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2일 서울에 도착해 조선공산당 중앙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이 날짜로 이북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찬탁),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34쪽)

 

3.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3차 회동은 박헌영이 1946년 4월 2일 밤에 38선을 넘어 3일 오후에 평양에 도착해서 6일 오전 11시경 점심을 먹기 전에 평양을 떠나 서울로 향하기 전까지 이루어졌다. 박헌영의 3차 월북 때 동행한 사람에는 박치우와 박문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3차 김 , 박 회동을 갖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본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2주일 이내에 남북에 주둔하고 있던 미·소 군사령관이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1월 16일에 소련 대표가 이남으로 내려가 예비접촉을 가졌다. 일주일 정도의 예비접촉을 거쳐 본격적으로 예비회담을 가진 것은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였다. 이 예비회담을 마친 뒤 3월 20일부터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본회의를 개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비회담의 결정에 따라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임시정부 수립 현안으로 부상 미소공위가 순조롭게 개최되어 1호, 2호 성명이 나오고 위원회가 열린 지 채 열흘도 지나기 전인 3월 29일에 3호 성명이 나왔다. 3호 성명은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담고 있었다. 이에 따른 대책이 필요했다.”(38쪽) 

“3차 회동시기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개별적으로 밀담을 내용에는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인민당을 분열시키고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려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사주해 사회민주당을 만들도록 공작하였다. 김일성은 “사회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공작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자 박헌영도 동감을 표시했으며, 김일성이 이 사실을 폭로하여 여운형을 도와주자고 하자 박헌영도 동의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또 박헌영에게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여운형, 백남운, 김원봉, 홍명희, 김창숙, 장건상, 김성숙 등 좌파 인사들도 만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처음에는 견제 심리에서인지 꺼리는 태도를 보였던 박헌영도 결국 동의했다고 한다. 이 밀담이 계기가 되어 박헌영이 4월 6일 서울로 돌아간 지 열흘 남짓만에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 이것은 박헌영이 "여운형에게도 소련군정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김일성의 제안에 일단 동의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추진시키지 않자 김일성이 여운형의 월북을 위해 직접 사람을 파견한 결과였다. 아무튼 4월 5-6일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밀담에서는 통일전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좌익계 인사들과 접촉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중에 박헌영이 쓴 ‘자술서’를 보면 김일성이 이남 좌익계 인사들의 인적사항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되어있었다. 이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2차 회동 이후에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에서 대남 연락실과 연구실을 두고 정보수집과 분석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연락실 성원은 7명쯤이었고 연구실은 이보다 조금 작았다. 연락실과 연구실 실무자들이 남조선신문 등을 깊이 연구한데다 김일성 자신이 사람 관련사항을 중시하니까 이남 지도자들에 대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52쪽)

 

4. 제4차 회동은 박헌영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약 보름간 평양과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당시의 월북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에 따른 대책, 조선정판사사건을 비롯한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 3당합작 문제 등에 대한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3당합당 문제가 가장 중심적인 현안이었다. 다만 완전한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3당합당 문제와 관련하여 일단 이남의 신민당과 인민당의 반응을 알아볼 필요성이 제기된 데다가 당시 이남에서 큰 수해가 났기 때문에 이북의 수재의연금을 이남의 공산당에 전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밖에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철수문제, 서울에서 일어난 화물자동차회사의 파업사태 문제 등 긴급현안이 생겨 박헌영은 일시적으로 다시 서울로 내려오게 된다 제4차 회동과 관련하여 우선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세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 4월 중순에 나온 미소공위 5호 성명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호 성명이 나온 이래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대상, 참가대상의 자격을 규정하는 문제를 놓고 숱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은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고 특정 조직을 대표해야 하며 운동 실적도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논의됐다. 최종적으로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서약을 하는 정당·단체들을 협의대상에 포함시킨다는 5호 결정이 나왔던 것이다.”(54쪽)

“김일성과 박헌영의 밀담에서 정판사사건문제, 좌우합작문제, 미군정과 경찰의 전면적인 탄압공세에 대한 대처 전술, 즉 ‘정당방위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고 들었다. 전술문제, 좌우합작문제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견해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 박헌영은 특히 최창익이나 한빈 등 신민당 측 사람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헌영은 김일성·허가이와 함께 모스크바에 갔다 온 것이다.(70쪽)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박헌영에게 서울로 가서 여운형 . 백남운 등 , 배나은 드 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그들이 협의차 이북에 오면 환영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미군정과의 투쟁은 필요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정면대결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박헌영도 파업으로 인한 미군 과의 정면충돌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수습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총비서로서 감당해야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박헌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73쪽)

 

5. 제5차 비밀회동은1946년 7월 16일경~ 22일경 박헌영이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박헌영은 허성택, 이태준, 박치우와 함께 평양에 왔다. 박헌영의 5차 월북 기간에 7월 18일과 20일쯤 두 차례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주로 3당합당 문제, 정판사사건 문제, 단독정부 수립문제, 좌우합작 문제,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합당사업과 관련하여 남북 공산당의 보다 긴밀한 협조와 연락을 위한 협의·연락기구 구성문제도 논의되었다.”(74쪽)

“남북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합당사업과 관련하여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 김일성과 박헌영 제5차 회동의 가장 큰 결실이었다. 박헌영이 서울로 돌아가 여운형과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한다는 것, 이남의 3당합당 문제에 대해 박헌영과 김일성이 긴밀히 협의해 나간다는 것, 이북의 신민당이 남조선신민당과 긴밀히 협의하도록 요청한다는 것 등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김일성이 이남의 여운형, 허헌, 백남운을 만나는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7월 중순경 서울에 있던 조선신민당 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으로 바꾸는 결성대회를 여는 것이 현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때 이미 이북의 신민당지도부와 공산당지도부 사이에는 내부적으로 합당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신민당의 한빈과 최창익이 비공개로 서울에 내려가 남조선신민당 결당을 촉진하기로 하였고, 한빈과 최창익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 가며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83쪽)

 

6.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6차 비밀회동은 1946년 10월 11일과 그 이후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6차 비밀 회동은 박헌영의 월북 권유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남의 9월 총파업과 관련하여 이북에서는 3당합당을 마친 뒤 통일된 역량으로 10월쯤에 가서 총파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10월이 되어야 농민들의 추수가 끝나고 노동자·농민들의 공동투쟁이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7월 박헌영의 평양방문 때만 해도 이북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합당을 마치고 총파업을 전개하되 노동자·농민들의 단결 아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을 진행한다는 전술이 확인됐었다. 이남에서 총파업이 예정보다 앞당겨진 것은 박헌영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남에서는 이북에서든 8월에 합당을 마치고 그 기초 위에서 농민들의 추수가 끝난 뒤에 노동자들과 연합해 투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총파업의 시기를 딱 10월로 못 박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합당 후 대투쟁을 통해 통일된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는 방침이 섰다. 파업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3당합당이 이뤄지고 또한 농민들도 총파업에 동조하는 투쟁을 전개할 만한 시기가 무르익어야 했다. 그러나 9월 총파업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 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다.”(94쪽) 

“조선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주도하자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된다. 이북 지도자들은 이남에서 합당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전되기보다는 3당 간에 갈등만 표출된 상황에 서 총파업이 일어나 합당사업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가 이남에 있다가 미군정에 체포 되기라도 하면 좌익세력의 기둥이 날아가는 판이라고 우려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연락원을 이남으로 급파해 박헌영을 이북으로 불러들이고 그가 이북에 머물면서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받은 성시백이 몇 차례 서울을 방문해 박헌영에게 이북 지도부의 뜻을 전하였다. 성시백뿐 아니라 한은필도 서울에 내려갔었다. 이렇게 박헌영을 이북으로 올라오도록 종용한 것 은 그의 신변보호 및 이남 공산당지도부의 극좌노선을 진정시킬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남 공산당지도부의 극좌노선에 박헌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헌영은 처음에 서울에서 계속 투쟁해야 한다며 월북을 거부하다가 10월 인민항쟁이 폭발하자 생각을 바꾸게 된다.(85쪽)

“이날 회의(1956년 10월 15~16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 이후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개별적인 대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려진 결론은 10월인민항쟁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말고 이를 수습한 뒤 합당사업을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박헌영이 이북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 간부들과 북로당 정치위원들의 합동회의를 소집해 구체적인 대안을 논의하자는 방침이었다. 대체로 이런 입장으로 정리된 만큼 박헌영은 합당이나 인민항쟁 문제에서 공산당 총비서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박헌영은 일단 이남에 내려갔다 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일성 측은 박헌영에게 이남에 가지는 말고 38선에서 가까운 해주쯤에서 지도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폈다.(97쪽)

 

[2016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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