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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ㅣ 박병엽 증언록 2
박병엽 지음, 유영구.정창현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0년 11월
평점 :
추천 [서평]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담: 박병엽 증언록2> 2010. 11., 382쪽, 선인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를 읽으며 시작된 북한 인물 평가와 기록에 대한 관심이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 정창현 교수의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에 이어 박병엽의 증언록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기존 한국현대사 기록이나 연구에 드러나지 않았던 겜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담이 소개되어 있다. 증언록을 제공한 박병엽은 1980년초 북한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역임하던 중 월남(탈북)했고, 1998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는 1922년 전남 무안출생으로 1930년대에 가족을 따라 함경도로 이주했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평양에서 공청, 북로당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그후 조선로동당 사회부와 대남연락부 등에서 지도원, 책임지도원, 과장 등을 거쳤다. 조선로동당
3호청사의 자료실에서 일한 적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부국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했으며, 마지막 직급은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이었다.
박병엽의 경력과 활동상황을 고려해보면, 해방 후 한반도 정국에서 남북의 주요 인사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동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그의 증언록은 1990년대 초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되었다. 통일부 전직 공위간부는 그의
‘존재’를 확인해주었다고 하며, 이 증언록을 엮어낸 유영구와 정창현은 그의 증언 대부분을 신뢰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 책의 증언내용을 활용하고
검증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는 필자에게 지난 북한 현대사와 남북관계사 속에서 발생한 사건,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남겼다. 그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웬만한 조선로동당 문헌은 줄줄이 외고 있었다. 그 많은 당대회, 당 전원회의, 당
정치위원회 회의 등에서 이뤄진 보고와 토론내용을 빠짐 없이 기억했다. 곡절 많았던 북한의 정치사 속에서 계속된 사상투쟁과 검열 과정을 견뎌낸
결과라고 생각된다. 1990년대 초 그의 증언이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됐을 때 한 현대사 연구자는 그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증언이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사실과 상세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그의 경력과 증언이 과장됐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일부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증언에는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과 문헌을 읽어 알게 된 부분이 간혹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1980년대 초반 서울에 왔을 때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통일부 전직 고위간부로부터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부에서 나온 「북한 인명록」에도 그가 1960년대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가명이다.”(7쪽)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중앙당의 대남부분의 연락원으로 배치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은필, 최광호 등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서울에도 몇 차례 내려왔다. 1949년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중앙당 사회부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1953년 박헌영·이승엽사건'이 터지면서 대남연락부가 재편될 때 대남연락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책임지도원, 과장으로 승진했다. 한때 남조선문제연구소(현재 조국통일연구원)에서 일하기 도 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로
대외정보조사부에서 활동했다. 남조선문제연구소에 있을 때 그는 로동당 고문헌실에 있는 당 문헌과 남북관계 비밀문헌, 남쪽 출신 월북자들의 경력파일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업무상 과오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한 공장의 지배인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경험도
있다.”(9쪽)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느끼겠지만, 특히 <박헌영 트라우마>의 내용과 ‘박헌영’이라는
인물, ‘박헌영 등 간첩사건’, 그리고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큰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증언록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에 대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한국현대사나 남북관계,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당, 남로당과 북로당에 대한 내용들이 많은 부분에서 재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후
남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와 좌파라 할 수 있는 박헌영, 여운형(조선중앙일보 사장, 건국동맹 및 건국준비위원회 창립자, 조선인민당 당수,
서울에서 피살), 백남운(남조선신민당 당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북한 초대 교육상, 최고인민회의 의장), 홍명희(소설 <임꺽정>
작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월북) 등이 공산당 활동과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일제시대에 비슷한 생각과 투쟁을 해왔던 이들이 해방 후 한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자주
만나고 도모해야 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예측’을 그동안 하지 못했었다.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남한에 오래도록 집요하게 구축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기초적인 상식과 합리성마저 무디어지게 만들었던 탓이리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은 5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장의 내용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에 관해서다. 제2장은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동, 제3장은
백남운과의 비밀회동, 제4장은 홍명희 작가의 월북과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 제5장은 "박헌영. 이승엽사건"의
전말이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의 체포령에 의해 남한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을 때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여섯 차례의 비밀회동에는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 및 북조선노동당 포함) 정치위원회나
집행위원회 등과 공식적, 비공식적 회의에 참석한 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후자는 남한과 북한에 대부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비밀회동은 모두 제3자가 배석하여 이루어졌다. 제3자가 배석한 덕에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박병엽은 비밀회동의 참가당사자로서 그리고 참가당사자들이 나중에 작성한 ‘자술서’ 등을 그가 읽었기 때문에 여섯 차례의 비밀회동에 대한
증언을 남길 수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여섯 차례 비밀회동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0월 이후 그가 북한으로
월북할 때까지 이루어졌다. ‘비밀회동’이 진행된 것은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정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여러 정치세력은 한반도 전체에서 단일하고 유기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 인위적으로 38도선이 그어지고
외국군이 주둔하면서 한민족의 자치활동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주의 좌파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은 미군정이 한반도 남단에 주둔한 미군정의
반좌파, 반민족주의적 정책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한반도에는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항복 직전에 이루어진 미국, 소련, 영국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인 3국은 모스크바에서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와 조선의 문제를 한민족과 조선인 스스로에게 맡기지 않은 채 자신들이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신탁통치를 통해
자치국가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민족 스스로 해방을 달성하지 못한 것 그리고 하나의 국가로 세계대전에 참석하지 못한면서 발생한
것이다. 한민족과 조선인의 운명이 타국에게 맡겨진 불행하고 원통한 상황이었고, 21세기 한반도 분단의 원초적인 출발점인
셈이다.
명망가 중심의 우익, 우파 세력의 활동방식과 달리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은 조직적,
집단적 활동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한국독립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을 결성하였다. 각 당은 북쪽 지역에서도
지역당 조직이 존재했으나 미군정의 감시와 방해, 그리고 남북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활동의 자유나 정치적
활동에 의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특히 북쪽에서 정치적 조직적 영향력이 대폭 확장된 반면 남쪽에서는 미군정의 방해와 탄압을 받았던
조선공산당의 입장에서는 38도선이 정당활동에 치명적인 조건이었다. 북쪽에서 조선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소련군정의 지지와 지원을
받던 김일성과 조선공산당의 공식적인 당수이자 남쪽의 활동에 주력했던 박헌영이 비밀회당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비밀회동이 자주 필요했던 이유는 긴박했던 해방 직후 한반도 상황과 더불어 김일성과 박헌영은 해방 직후
정세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한 평가가 달랐고 38도선이라는 조건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
정세 인식이 다르니 정치노선과 조직노선 또한 다르게 판단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정세인식이 한국전쟁 기간까지 이어진
것이다.
박병엽의 증언은 두 사람이 해방 이후 5년 동안 주요 정세인식과 정치,조직노선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 미군정에 대한 평가, 미소공위의 결정에 대한 판단,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방안, 다른 민족주의
정당이나 좌파 정당에 대한 평가, 농지개혁 방안, 주요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 좌파 3당 합당 방식에 대한 전략, 미군정의 탄압에 대한 전술적
대응, 조선혁명과 통일 수행방안 등에서.
그증언은 해방 이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과 정치조직 노선이 상당 부분 부적절하고 그릇되었다고
말한다.(물론 그가 1980년대 말까지 이북 정권에서 정치적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인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 이북을 버리고 이남에 정착한 그가 일부러 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노동당)의 정세 인식과 정치조직 노선을 후호적으로 평가하려고
애썼을 것이라는 평가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저자(역자)는 박헌영과 남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정세인식과 정치조직
노신이 달랐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분단 이후 한반도 정세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또한 김일성과 조선공산당(노동당) 북조선분국이 해방 이후 이북에서 보여준 완벽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이나 정책수립이 미군정의 의혹, 즉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제공한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린다.
제5장은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전말이라는 제목으로 박헌영의 월북 이후 활동상황이 소개되어 있고,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과 ‘박헌영,이승엽 사건’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박병엽의 증언은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전개과정과 사건의 실체 등을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박헌영과 이승엽이 국가전복음모 혐의로 사형이 언도된 것과 이승엽이 해방 이전부터 간첩행위를 한 것, 박헌영의 행동 중에 간첩행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점들이 설명되어 있다.
이로써 완벽하지는 않지만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박헌영에 대한 공부가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추가 자료나 정보가 나오면 박헌영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소위 ‘박헌영, 이승엽 사건’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냐,
아니었냐’는 이분법적 판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박헌영과 박헌영 사건을 다룰 때 우선 견지해야 할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 보통
일반인을 보는 시각이 아니라 공산당 당원, 그중에서도 공산당 당수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점. 둘째, 일정한 평가원칙이 필요한데, 그것은
공산주의적, 혁명적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 간부의 평가원칙에 입각해 사건을 규명해야 한다는 점. 셋째, 사건을 평가할 때 역사적 과정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넷째, 역사주의적 관점, 객관적 시각에서 규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저자는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특히 사건의 배경 내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서 월북 이후 박헌영의 활동을 보여
준다.
박병엽은 월북 이후 남로당의 활동을 지휘했던 박헌영이 무모하고 조급한 투쟁을 지시한 것으로 증언한다.
자기 주위에 과거의 정치경력이 깨끗하기 못한 사람들을 우대하는가 하면 독선적 행동으로 인해 이남의 다른 당 출신은 물론 남로당 출신의 일부
간부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헌영은 북로당 지도부와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남북간의 대립이 격화되던 한국전쟁
직전에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남한 내 남로당의 정치활동 수준과 조직역량에 대해 과도하게 내세우면서 혁명전쟁(한국전쟁)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로당 지도부와 박헌영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특히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당,정 고위간부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박헌영이 당 정치위원이라는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후퇴를 제대로 조직하기는 커녕 단독으로 내뺀 사실이 드러나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 일부 간부, 당원들의 국가전복행위 음모와 간첩행위는 전쟁 기간 중에
발각되었다. 박헌영, 이승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범죄사항으로 다뤄진 것은 무장폭동에 의한 국가전복음모였다.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간첩죄,
남조선혁명역량 파괴죄가 덧붙여졌다. 박헌영과 이승엽에 대한 사형언도는 무장폭동 음모가 원인이었다.
“전쟁 기간 중 박헌영에 대한 의혹이 날로 커가고 있을 때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몇몇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말 이래의 김영식 배철의 다툼, 이송운의 연락부 내부상황 보고, 조옥래 윤병삼의 다툼 등 일련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로당 지도부는 박헌영과 그 측근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차제에 ‘뭔가 음모가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특히 임화, 조일명, 박승언,
이승엽 등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에 대한 사회안전성의 치밀한 감시가 시작되었다. 이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이남 출신끼리 모여 연회를
열고 당에 불평불만을 갖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왔다.”(324쪽)
“1952년 조선노동당 제5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내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적 경향,
그리고 개인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어 1953년 1월~9월, 11월~1954년 5월까지 전원회의 보고서, 결정서, 붉은편지 등
3가지 문헌을 토의하는 ‘문헌토의사업’에 들어갔다. 토의는 문헌에 기초하여 자신의 당 사업을 총화하는 것이었다. 1월 중순부터 전당적으로,
세포단위로 진행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문헌토의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헌영, 이승엽의 과거 비리와 문제점이 하나둘
폭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전에 발각된 미국의 정보원들과 이승엽, 임화 등이 관계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미국의 정보공작라인이 여럿
침투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다.”(331쪽)
“1953년 3월초 이승엽 등의 국가전복행위 음모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사회안전부장
방학세는 3월 3일 박헌영을 제외하고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보고하였고 토의가 이루어졌다. 정치위원회는 우선 임화, 조일명, 박승원,
이승엽 등을 체포하여 종합된 자료에 따라 음모를 밝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30명이
체푀된다.”(340쪽)
[ 김일성과 박헌영이 여섯 차례 비밀회동 상세내용 ]
1.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1차 비밀회동은 조선공산당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1945년 10월
10일)을 이틀 앞둔 10월 8일~9일 사이에 개성 북방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고 이남에 미군이, 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남북은
서로 판이한 정세 아래 놓이게 된다. 당시의 정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서로 달랐다. 박헌영의 ‘8월 테제’에는
38선이라는 특수한 정세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세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일치시켜 조직적
행동통일을 꾀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차 비밀회동은 김일성과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남측 핵심과 북측 핵심의 노선
차이로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비밀회당에 배석한 이들은 로마넨코 소련군 민정사령관과 김일성 측의 주영하, 장순명,
이주연, 박정애 등이었고, 박헌영 측은 권오직, 이인동, 허성택이었다. 박병엽 역시 그전까지는 1차 비밀회동에 대해 몰랐다가 이승엽 등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는 권오직과 주영하의 ‘자술서’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에서 제기된 과제로는 북조선분국 창설문제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혁명의
참모부인 조선공산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생각이자 소련군정의 생각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소련측은 일본이 공산당을 탄압했는데 같은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라 해서 큰 차이가 날 리 없다, 이남에서 공산당에게
정세의 주도권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인 당지도부 를 어디에 둘 것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다음
과제는 북조선만의 중앙기구, 즉 특수환경에서 이북만을 지도할 수 있는 북조선 지도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지도기구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운영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이 이북의 지방당 조직과 연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서북5도당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의에서 박헌영의 서울중앙을 지지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중앙의
승인을 받아야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 그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결국 김일성은 비밀리에 박헌영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예비회의에서 김일성측의 입장에 반대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10월 10일부터 열성자회의를 개최하자니 김일성은 박헌영과
사전협의라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16쪽)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의 합의에는 북조선분국 결성에 대한 문제,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에 대한 결정서를
따로 채택하는 문제, 분국 결성 뒤에 사후승인을 받는 문제, 그리고 열성자회의에서 서울 장안파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채택하는 문제 및 정세변화와
관련해 서울중앙과 북조선분국이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협의하는 문제 등이 포함되었다. 대여섯 시간 논의 끝에 새벽녘에야 합의를 보고 이들은
헤어졌다. 박헌영과 함께 참석했던 권오직과 이인동은 열성자회의의 옵서버로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올라왔다. 이것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번째
만남의 전모이다.”(24쪽)
“권오직은 ‘자술서’에서 ‘새파란 젊은이가 불같은 정열로 뿜어내는 논리에는 박헌영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했다.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 위한 협의 자리였으나 이미 이때 실제 주도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고 느꼈다’라고 썼다. 결국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중앙이 1946년 10월에 이르면 이북으로 옮겨지고 마는데 박헌영은 이러한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고 김일성과 소련군정 측은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의 시점에서 이러한 정세를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역사를 달리 가정해보는 일은 의미가
없겠지만, 박헌영이 이 무렵 정세를 제대로 파악했거나 김일성의 의견에 동조했더라면 박헌영이 뒷날 중앙을 차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
비밀회동에서 김일성과 로마넨코 소장은 공산당의 중앙을 이북에 둘 것과 박헌영이 이북에 올라와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일설에는 훗날 서울의
소련영사도 박헌영에게 이를 권유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공산당 중앙의 위치문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만남에서 의견교환에 그쳤을 뿐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22쪽)
2.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2차 회동은1945년 12월 29일~ 46년 1월 1일까지 박헌영이 평양의
김일성의 사택에 머무는 동안 공산당 북조선위원회 사무실과 회의실(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12월 27일에 끝난
모스크바삼상회의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조선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에서는 28~29일 반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서울의 대세에 따라 반탁 입장을 내놓았지만 서울의 소련영사관이 본국 훈령이 아직 없다며 함구하는
데다 이북에서는 신탁통치에 관한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의구심을 갖고 답답하여 평양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다. 29일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방 북조선분국
확대집행위원회가 진행되었다.
“박헌영의 월북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 즉 ‘조선문제에 관한 의정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남북의 좌익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정세였기 때문이었다. 남북의 공산당 세력이 기본원칙이나 방향에서 동일한
투쟁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남과 북의 형편이 달랐기 때문에 전술적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에서 공동보조가 필요했던
것이다.”(25쪽)
“회의에서 주로 논의한 것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결정
내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 지지할 뿐 아니라 그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도록 전당적·군중적으로 민주역량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제가 논의되었다.”(30쪽)
“주영하의 ‘자술서’를 보면 박헌영이 김일성과의 제2차 회동 때에는 당 중앙을 이북에 넘겨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고 씌어져 있었다. 이북에 당 중앙을 넘겨준다는 것은 김일성에게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것을 뜻한다. 어찌 보면 1946년
2월 이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이남에서도 인민위원회 정권창출, 토지개혁 실시의 구호가 등장함으로써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가 사실상 당 중앙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헌영은 이처럼 김일성과의 제2차 비밀회동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대책을 받아 가지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1일 평양에서 신년연회를 가진 뒤 평양을 떠났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1일 밤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2일 서울에 도착해 조선공산당 중앙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이 날짜로 이북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찬탁),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34쪽)
3.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3차 회동은 박헌영이 1946년 4월 2일 밤에 38선을 넘어 3일 오후에
평양에 도착해서 6일 오전 11시경 점심을 먹기 전에 평양을 떠나 서울로 향하기 전까지 이루어졌다. 박헌영의 3차 월북 때 동행한 사람에는
박치우와 박문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3차 김 , 박 회동을 갖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본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2주일 이내에 남북에 주둔하고 있던 미·소 군사령관이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1월
16일에 소련 대표가 이남으로 내려가 예비접촉을 가졌다. 일주일 정도의 예비접촉을 거쳐 본격적으로 예비회담을 가진 것은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였다. 이 예비회담을 마친 뒤 3월 20일부터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본회의를 개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비회담의 결정에 따라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임시정부 수립 현안으로 부상 미소공위가 순조롭게 개최되어 1호, 2호 성명이 나오고
위원회가 열린 지 채 열흘도 지나기 전인 3월 29일에 3호 성명이 나왔다. 3호 성명은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담고 있었다. 이에 따른
대책이 필요했다.”(38쪽)
“3차 회동시기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개별적으로 밀담을 내용에는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인민당을 분열시키고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려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사주해 사회민주당을 만들도록 공작하였다.
김일성은 “사회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공작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자 박헌영도 동감을 표시했으며, 김일성이 이 사실을 폭로하여 여운형을
도와주자고 하자 박헌영도 동의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또 박헌영에게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여운형, 백남운, 김원봉, 홍명희, 김창숙, 장건상,
김성숙 등 좌파 인사들도 만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처음에는 견제 심리에서인지 꺼리는 태도를 보였던 박헌영도 결국 동의했다고 한다. 이 밀담이
계기가 되어 박헌영이 4월 6일 서울로 돌아간 지 열흘 남짓만에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 이것은 박헌영이 "여운형에게도 소련군정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김일성의 제안에 일단 동의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추진시키지 않자 김일성이 여운형의 월북을 위해 직접
사람을 파견한 결과였다. 아무튼 4월 5-6일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밀담에서는 통일전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좌익계 인사들과 접촉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중에 박헌영이 쓴 ‘자술서’를 보면 김일성이 이남 좌익계 인사들의 인적사항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되어있었다. 이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2차 회동 이후에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에서 대남 연락실과 연구실을 두고 정보수집과 분석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연락실 성원은 7명쯤이었고 연구실은 이보다 조금 작았다. 연락실과 연구실 실무자들이 남조선신문 등을 깊이
연구한데다 김일성 자신이 사람 관련사항을 중시하니까 이남 지도자들에 대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52쪽)
4. 제4차 회동은 박헌영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약 보름간 평양과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당시의 월북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에 따른 대책, 조선정판사사건을 비롯한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 3당합작 문제 등에 대한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3당합당 문제가 가장 중심적인 현안이었다. 다만 완전한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3당합당 문제와 관련하여 일단 이남의 신민당과 인민당의 반응을 알아볼 필요성이 제기된 데다가 당시 이남에서 큰 수해가 났기 때문에 이북의
수재의연금을 이남의 공산당에 전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밖에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철수문제, 서울에서 일어난 화물자동차회사의 파업사태 문제 등
긴급현안이 생겨 박헌영은 일시적으로 다시 서울로 내려오게 된다 제4차 회동과 관련하여 우선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세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 4월 중순에 나온 미소공위 5호 성명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호 성명이 나온 이래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대상, 참가대상의 자격을 규정하는 문제를 놓고 숱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은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고 특정 조직을 대표해야 하며
운동 실적도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논의됐다. 최종적으로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서약을 하는 정당·단체들을 협의대상에 포함시킨다는 5호
결정이 나왔던 것이다.”(54쪽)
“김일성과 박헌영의 밀담에서 정판사사건문제, 좌우합작문제, 미군정과 경찰의 전면적인 탄압공세에 대한
대처 전술, 즉 ‘정당방위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고 들었다. 전술문제, 좌우합작문제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견해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 박헌영은 특히 최창익이나 한빈 등 신민당 측 사람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헌영은 김일성·허가이와 함께
모스크바에 갔다 온 것이다.(70쪽)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박헌영에게 서울로 가서 여운형 . 백남운 등 , 배나은 드 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그들이 협의차 이북에 오면 환영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미군정과의 투쟁은 필요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정면대결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박헌영도 파업으로 인한 미군 과의 정면충돌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수습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총비서로서 감당해야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박헌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73쪽)
5. 제5차 비밀회동은1946년 7월 16일경~ 22일경 박헌영이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박헌영은 허성택, 이태준, 박치우와 함께 평양에 왔다. 박헌영의 5차 월북 기간에 7월 18일과
20일쯤 두 차례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주로 3당합당 문제, 정판사사건 문제, 단독정부 수립문제, 좌우합작
문제,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합당사업과 관련하여 남북 공산당의 보다 긴밀한 협조와 연락을
위한 협의·연락기구 구성문제도 논의되었다.”(74쪽)
“남북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합당사업과 관련하여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 김일성과 박헌영 제5차
회동의 가장 큰 결실이었다. 박헌영이 서울로 돌아가 여운형과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한다는 것, 이남의 3당합당 문제에 대해 박헌영과 김일성이
긴밀히 협의해 나간다는 것, 이북의 신민당이 남조선신민당과 긴밀히 협의하도록 요청한다는 것 등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김일성이 이남의
여운형, 허헌, 백남운을 만나는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7월 중순경 서울에 있던 조선신민당 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으로 바꾸는
결성대회를 여는 것이 현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때 이미 이북의 신민당지도부와 공산당지도부 사이에는 내부적으로 합당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신민당의 한빈과 최창익이 비공개로 서울에 내려가 남조선신민당 결당을 촉진하기로 하였고, 한빈과 최창익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 가며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83쪽)
6.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6차 비밀회동은 1946년 10월 11일과 그 이후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6차 비밀 회동은 박헌영의 월북 권유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남의 9월 총파업과 관련하여 이북에서는 3당합당을 마친 뒤 통일된 역량으로 10월쯤에 가서
총파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10월이 되어야 농민들의 추수가 끝나고 노동자·농민들의 공동투쟁이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7월 박헌영의 평양방문 때만 해도 이북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합당을 마치고 총파업을 전개하되 노동자·농민들의 단결 아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을
진행한다는 전술이 확인됐었다. 이남에서 총파업이 예정보다 앞당겨진 것은 박헌영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남에서는 이북에서든 8월에
합당을 마치고 그 기초 위에서 농민들의 추수가 끝난 뒤에 노동자들과 연합해 투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총파업의 시기를 딱 10월로 못
박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합당 후 대투쟁을 통해 통일된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는 방침이 섰다. 파업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3당합당이 이뤄지고 또한
농민들도 총파업에 동조하는 투쟁을 전개할 만한 시기가 무르익어야 했다. 그러나 9월 총파업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 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다.”(94쪽)
“조선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주도하자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된다. 이북 지도자들은 이남에서 합당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전되기보다는 3당 간에 갈등만 표출된 상황에 서 총파업이 일어나 합당사업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가 이남에 있다가 미군정에 체포 되기라도 하면 좌익세력의
기둥이 날아가는 판이라고 우려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연락원을 이남으로 급파해 박헌영을 이북으로 불러들이고 그가 이북에 머물면서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받은 성시백이 몇 차례 서울을 방문해 박헌영에게 이북 지도부의
뜻을 전하였다. 성시백뿐 아니라 한은필도 서울에 내려갔었다. 이렇게 박헌영을 이북으로 올라오도록 종용한 것 은 그의 신변보호 및 이남
공산당지도부의 극좌노선을 진정시킬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남 공산당지도부의 극좌노선에 박헌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헌영은
처음에 서울에서 계속 투쟁해야 한다며 월북을 거부하다가 10월 인민항쟁이 폭발하자 생각을 바꾸게
된다.(85쪽)
“이날 회의(1956년 10월 15~16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 이후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개별적인 대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려진 결론은 10월인민항쟁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말고 이를 수습한 뒤 합당사업을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박헌영이 이북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 간부들과 북로당 정치위원들의 합동회의를 소집해
구체적인 대안을 논의하자는 방침이었다. 대체로 이런 입장으로 정리된 만큼 박헌영은 합당이나 인민항쟁 문제에서 공산당 총비서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박헌영은 일단 이남에 내려갔다 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일성 측은 박헌영에게 이남에 가지는 말고
38선에서 가까운 해주쯤에서 지도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폈다.(97쪽)
[2016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