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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서평]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비명>
이덕일 저, 2011. 11., 쪽, 역사의아침
이 책은 <사도세자의 고백>(이덕일 1999)의 개정판이자 증보판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개정하면서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을 보충하고 내용을 더욱 보강하여 더욱 완성도 높여 내놓은 신작이다. 영조 38년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시 조명한다.
저자가 <사도세자의 고백>을 증보 개정한 이유는 <사도세자의 고백>이 서점가에 돌풍을 몰며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은 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정병설이 인터넷 강의에서 <사도세자의 고백>과 저자에 대해 비평 아닌 비난을퍼부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13년 동안 추가로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를반영했다.
영조 38년(1762년) 윤5월 21일, 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가 죽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으며, 그 누구도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부왕 영조는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 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진실의 빈자리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이 메웠다. <한중록>은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라 했다. 세자의 부인이 쓴 피맺힌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달랐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한중록>이 전하는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너무나 다른 두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자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전하는 다양한 사료를 취합하고 분석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기록 행간에 담긴 사도세자의 본모습과 그 죽음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세밀히 분석되는 삼종의 혈맥,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 영조의 탕평책과 그 한계 등 영, 정조 대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 지형은 조선 역사의 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혜경궁의 기록인까닭에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있었으며, 그 정신병은 자식들을 편애한 영조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남편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만들어낸 비극임을 강변한다.
그러나 세자가 죽은 후에도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과 중부(仲父) 홍인한이 승승장구해 정승의 지위를 누린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혜경궁의 친정 풍산홍씨 가문은, 공교롭게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으로 몰려몰락했다. 이는 <한중록>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건 관련자의 기록이며, 또한 가해자의 기록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시아버지 영조의 성격이상 등을 강조하면서 <한중록>을 집필한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과 자신의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무고함을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영조는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 노론과 혜경궁은 정신병자라고 했으나, <영조실록>에 기록된 온양 행차 때 사도세자의 모습은 달랐다. 마구간을 탈출한 군마가 농토를 상하게 하자 쌀 한 섬을 밭주인에게 주어 보상케 했고, 나이 많은 노인들을 불러위로연을 베풀었으며, 선비들을 불러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했다. 몸이 불편해 요양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강연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귀경길에는 농사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라고 하령했다. 아버지 영조 못지않은 애민(愛民)의 세자였으며, 성군의 자질을 가진 작은 군주였다.
온양 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자가 ‘포악하다’ ‘정신병이 있다’는 등 노론이 조직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히는계기도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온양 행차 때 보인 백성들의 찬사와 충청도 사대부와 부로들의 칭송은 노론과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더욱 경계하게만들었다.
영조 31년(1755) 2월 4일,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붙었다. 소론 강경파인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모의를 꾸미며 붙인 벽서인데 나주 목사 이하징 등 서울과 지방의 소론 일부가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이 사건과 관련된 자들 중에는 과거, 노론이 주상인 경종의 살해를 모의한다는 고변으로 벌어진 임인옥사 때 당시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역모의 수괴로 주장한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옳다고 이야기한 자도 있었다. 영조와 노론의 입장에서는 나주 벽서 사건은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민감한 사건이기도 했다. 결국노론은 이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고 영조는 이를 추인했다
하지만 세자의 생각은 아버지 영조와 달랐다. 경종 시절 노론의 세제 책봉과대리청정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 생각하던 그는 경종 때 연잉군이던 부왕을도운 소론 온건파마저 적당으로 모는 데에 반대했다. 또한 나주 벽서 사건 이후 벌어진 토역경과 사건에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한중록>에서조차 ‘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는 분명 노론과 다른 정치관,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노론에게 세자는 자신들이 모셔야 할 다음주군이 아닌 분명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휘령전에서 뒤주로 들어갔다.
14년 동안이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대신들은 세자를 구원하기는커녕 그 반대 행위에 열중했다. 세자의 가족들 중 세자의 목숨을 구하고자 영조에게 빈 인물은 세손뿐이었다. 세자가 뒤주에서 밤을 새운 첫날에 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홍봉한은 ‘세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대신들을 힐난하고, 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울부짖었다’는 이유로 한림 윤숙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다. 세자가 죽던 날 그는 한강에서 한가히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세자가 죽은 후 홍봉한은 “영빈께서 아뢴 것은 오직 전하를 위한 것으로서 성상께서 단행하신 것이고, 신이 성상의 뜻을받들어 행한 것이며, 그다음은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행한 것입니다”라고 세자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자신이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영조의 뜻을받들어 실행에 옮겼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세자는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신음하다가 영조 38년 윤5월 21일, 이승을 하직했다.
250년 전 역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과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라는 학문과 연구자, 그리고 ‘역사서’라는 책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수십, 수백 가지 다른 사실과 과정과 이유가 작용하여 발생하게 된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어떤 입장에서, 어떤 관점에서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나 진실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수없이 목격했다.
<한중록>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고집불통 아버지인 영조와 정신병에 걸린 아들 사도세자의 대립구도로 바라보던 것이 지난 250년 간 주류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조 치세 조선사회의 정치적 갈등구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고찰하는 것은 정치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 당시 사회경제구조와 왕실 내부의 이해관계와 갈등, 그리고 노론-소론-남인 등 정파들의 세력타툼 구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볼 수도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고 현세와 후세에게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게 된다.(저자가 ‘노론 300년 독재’라는 관점으로 인조반정 이후 현대까지 한반도를 고찰하는 것도 나름 합리적이고 일관된역사인식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하나의 관점, 하나의 해석, 하나의 이론만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은 도그마나 독재에 다름 아니다. 순수성과 단일성을 주창하는 대다수의 종교도 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 2016년 11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