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 박병엽 증언록 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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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현대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2010. 09., 395


 노동당 중앙위원까지 지낸 박병엽(1922~1998)씨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차례에 걸쳐 증언을 남겼다증언을 끌어내고 엮은 사람은 중앙일보 기자였던 유영구와 정창현이다.

그의 증언은 처음 중앙일보의 기획연재물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91.9~1992.12  115) 가장  비중으로 담겼다당시 그는 가명을 사용했다중앙일보의 연재는 1992년과 1993단행본으로 출간된  북한현대사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다박병엽 사후 그리고 단행본을 읽고 다른 북한 관련 자료와 정보를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역자는 기존단행본을 새롭게 출간하게  것이다.

<김일성과 박헌영그리고 여운형> 박병엽의  번째 증언록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번째 증언록이다.


박병엽 증언의 신뢰도와 가치에 대해서는 상당수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다도진순 교수는 "특히 서용규(박병엽의 가명) 증언은  범위가 매우 넓고논리적 기저가 일관되며 탁월한 구체성을갖추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면서 “이러한 폭넓은 증언과  료의 발굴을 기초로 「비록」이 엮어낸 내용은 1945-48 남북한 현대사특히 정치사 전반에 걸친 매우 포괄적인 것이다 중에서 특히주목해야할 부분은 북한 현대 정치사남북 정치지도자들 사이의 공식·비공식 회동을 포함한 남북관계사라고 생각한다 지적한  있다.(4)


박병엽이 증언한 북한 정권의 탄생과정은 기억으로서의 역사일뿐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역사라   있다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부터 외세에 의해 한민족이 갈라진  전개된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해방  5년간 대한 실체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한민족 5천년 역사와 더불어 수천~수만 년을 이어갈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기억 정보는 뇌에서 사라질  있으되 체험은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다 땅의 해방동이가 65세에 이른 지금, 80 노인들이어야 당시 15 전후였음을 감안하면 이제 '해방공간에 대한 기억이나 ‘체험' 남아 있는 세대를 찾기는 어렵다 점에서도 그의 증언은 귀하다."(9)

"해방 3년은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공간이었으니 만치  시기의 자료와 증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역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다증언은 자료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사서술의 수단이다미국·러시아 등지에서의 북한 현대사에 관한 문서공개 열풍이 사라진 지금추가적인 자료발굴이 여의치 않은 조건에서 이미 채록해놓은 증언이라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10)


박병엽의 증언을 통해 독자들은 북한 정권과 지도부의 권력 장악 과정과 현대사 속에서 이어진 북한 정권의 정책의 기초를 파악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민족 ‘통일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전쟁 이후에 남북 갈등 과정에서도 ‘민족 ‘통일 표면적으로든실질적으로든 북한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인 셈이다.(1990년대 중반 이후 ‘생존 추가되었고..) 

김일성 주석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주요 발언이나 정책이 어떤 이념적역사적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지   있게 된다김정은 체제가 수립된 이후 북한의 노동당이나언론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 자주 거론될 정도로 북한에서 ‘수령’ 김일성과 ‘지도자’ 김정일의 상징은 대단히 크다따라서 ‘유훈통치 강조하는 김정은 체제의 향후 대미대남통일정책을 예측하는  도움이  것이다. 

"한편  책이 역사의 기록이라는 과거의 측면 못지 않게 현재적 의미와 미래가치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정에 관한 해명은 이북 정권의 존재근거와 정당화특히 그들의 대남·통일정책의 이해와 직결된다정권 수립시의 정강에 조국통일의 목표가 설정된 이래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조국통일'  사상적 기초로서의 '민족대단결' 주장했으며 그의 유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조국통일과 민족대단결' 강조해왔다북측은 해방 3년의 기간에 통일정부의 수립과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으며 책에는  과정이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14) 


그런 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더불어남북간의 당국회담에 참석하는 정부당국자들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여러 분야의 민간교류 인사들그리고 시민·통일운동가들에게  책은 적지 않은 시사점과 지혜를  것이다. 

아울러 해방  70 년의 우리 역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는 독자들과 청년지식인들이라면  책에 눈여겨볼 대목과 습득할 지식이 많을 것이다그리고 한반도와 한국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고민하고 있는 기성세대전문가기업인 그리고 지성인에게는  책에 묘사된 해방공간 3년이 사유의 좋은 텍스트가될  있다역사에서의 반복과  차이를 반추연역해볼  있는 실마리가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1 ‘소련군의 진주 1945 8 조선의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군  군정 책임자들의 평양 도착과 소련군의 진주과정 그리고 소련군의 만행을 다루고 있다또한 38 이북의 정치권 동향과 조선 해방  항일빨치산파의 존재 그리고 항일빨치산과 갑산파의 관계에 대한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김일성은 주로 동남만 5 현에서 활동했고 최용건은 북만주김책은 주로 남만주에서 각각 활동했다 가운데 김일성부대가 가장 크고 다음으로 최용건부대그리고 북만주에 간지 얼마  되는 김책부대가 가장 소부대였다."(35)

"항일빨치산파 중에서도 유독 김일성그룹의 단결력이 다른 그룹에 비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김일성의 직계인 김일·최현·강건·안길·김광협 등은 주로 동만 5  출신들이다이들은 항일무장부대가 크든 작든 1930년대 초반부터 줄곧 뭉쳐서 활동했다그러다가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이들은 소대장·중대장 간부로 흩어져 활동하게 됐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령으로 들어가 재회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들은  자신을 지칭할  일심동체의 빨치산 출신임을 염두에 두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김일성 역시 ''라는 말을 절대로  밖에 내지 않고 언제나 '우리라고 말하곤 했다.그들 빨치산 가운데 항일투쟁 과정에서 배반한 사람은   사람 밖에 없었다고 자랑할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보였다이들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사상의지적 통일을 이뤄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이것이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통치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38)


2 ‘김일성의 부상 김일성의 입북 과정과 소련군정의 김일성 발탁의 배경그리고 소련군정의 김일성 지원과 10 14 김일성환영대회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은 이북지역에 들어와서도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김영환  몇몇 가명을 쓰고 다녔지  바로 "내가 바로 김일성이라고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만날 때만은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밝혔다그러다가 일반대중들 앞에서 김일성의 이름으로 공개된 것이 바로 '김일성환영대회였다."

"당시 언론들은 김일성환영대회에 40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보도했지만 다소 과장이 있었던 듯하고 입추의 여지없이 동원되었던 것은 사실이다지금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김일성경기장자리에 있던 공설운동장에서 환영 대회가 열렸다공정원들이나 보안대원들적위대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선전삐라도 대량 살포하였다조직적인 동원이 이뤄지기도하였다."(63)


3 ‘소련군정 하의 여러 정치세력들 해방 직후 소련파조만식과 소련군정조만식과 김일성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인적 구성과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현준혁 암살사건과 연안파의 입북,신의주 무장해제사건과 연안파와 신민당 창당그리고 무정의 등장과 몰락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무정이라는 인물의 약점은 성격이 급한데다가 고집이 세고 자유주의적 경향이 많아 다른 지도자들과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그는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포병사령관을 하고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지냈다고 해서 다소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군사능력을 과신해 상부의 조직적  령보다 자신의 판단  우위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 자주 비판받았다사람이  산만하고 조직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최창익이나 박일우 같은 사람들이 민족해방투쟁 시기에는 무정보다 하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은 정치위원이 됐지만 무정은 그렇질 못하였다무정의 정치적 식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117)

"무정이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은 6.25전쟁 시기였다개전 당시에 무정은 2군단장이었고 1군단장은 김웅이었다. 2군단 참모장은 항일빨 치산 출신인 김광협이었고 2군단 예하에 2사단,5사단, 7사단이 있었다. 2사단 단장은 중국인민해방군 출신 이종의, 5사단장은 항일빨치산 출신 오백룡, 7사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덕이었다. ... 2군단의 주역할은 이남 국방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한편 후방지원을 끊어버리는 것이 었다일종의 서울 포위 내지 압축작전을 쓰려했던 것이다서울로 직접 진입하는 부대의 도하작전과 계속적 진군을 보장하려는 것이 었다이것이이른바 개전  단계의 기본전략계획이었는데 무정의 2군단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의정부와 양평 방면에서 국방군의 저항이 심하여 계획대로 진군하지 못했고특히 경탱크부대가 역할을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이에 대하여 나중에 2사단과 5사단이 책임추궁을 당했는데 속도가 늦어진 것은 순전히 무정의 지휘 오류라는  드러났다."(118~119)


4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이북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조직화 과정과 지도부 선출 그리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립  운영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북부 5도당 책임자  열성자회의는 남과 북의  정파별 조선공산주의자들간에 의견 차이가 컸기 때문에 박병엽이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서 밝혔듯이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회담이 진행된  1945 1013 ~15 사이에 개최되었다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는 김용범이 선출되었다북조선분국 2 확대집행위원회는 1945 11 23~24 개최되었으며 인민적인 민주개혁혁명의 근거지론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과 일제잔재 청산민족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전민족의 단결이 결의되었다북조선분국 3 확대집행위원회는 1945 12 17~18 개최되었으며 북조선분국의 강화와조직체계 정비(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 간부대열의 정비종파주의 비판이 결의되었다. 

"18 오후 회의에서 김용범은 신상발언을 통해 자신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그동안 일을 해왔지만 능력도 모자라고 건강악화로 직무를 계속 수행하기 어려우니 사임하고 싶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그런 후에 김용범은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추대할 뜻을 밝혔고 아무도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가운데 박수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사실 회의 분위기로도 그렇고 김일성 계열의기세에 압도되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반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당시의 이북 사회의 분위기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흔하게 불렀고 “김일성 장군은 절세의 애국자만고의 빨치산민족의 영웅'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판이었다 내부를 보더 라도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창립의 실질적인 장본인인 데다가 북부 5도당 책임자  열성자회의와  예비회의에서 수십 차례 발언에 나섰고 당내 지도자들과 여러 면담을 가졌으며2 확대 집행위원회에서는 정치노선에 관하여 보고하는  실질적인 중앙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견이 있을  없었다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김용범은 새로 조직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을 맡게된다. 

조직문제를 마친 뒤에 일단 공식회의 일정은 끝났지만 2 확대집행위원회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당규약과 유사한 내용의 강습회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148~149)


5 ‘북조선로동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임시인민위회 설립과 인민위원회에 의해 실시된 토지개혁건국사상총동원운동보안간부훈련대대 설립에 대해 증언이 담겨 있다또한 1미소공동위원회와 북조선로동당 2차대회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북에서 1946 11 시점에 인민위원회선거라는 정치수순을 밟기 시작했는지를 들여다 필요가 있다  무렵에 선거가 실시됐는지·· 인민위원회 선거의 성격을어떻게  것인지 하는 것이다 선거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정권기관을 창출하기 위한 절차였다고   있는데 1946 11월에 가서야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이유가 있었다.

이북에서는 1946 3월부터 민주기지 노선에 따라 토지개혁노동법령중요산업 국유화남녀평등권법령 등의 제반 민주개혁 조치가 취해졌고 1946 말에 이르면  토대가 공고해졌다고  있다 정권을 창출해나가던 공산주의자들은 1946 말에 이르러 이북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와 봉건 잔재 일소 등의 과제에서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인민민주주의혁명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민주제도의 틀이 어느 정도 짜여졌다고  것이다이에 따라 초보적인 민주제도를 바탕으로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공고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민주제도를 법적제도적으로 공고히 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인민정권기관을 탄생시키는 일이었다합법적인 인민정권기관을 출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제도를  공고히 하지 않으면 여전히 취약한 이북의 사회체제가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민주개혁을 통해  나름의 인민민주주 의의 기초는 마련하였으나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면인민정권기관을 합법 적으로 출범시키지 않을  없었다는 것이다."(218)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과정은 이북의 헌법제정 준비와 1948 이남에서 이승만 등에 의해 단독정부 수립과 5.10 단독선거가 추진되자 이에 반대하여 진행된 남북연석회의와 2 정당단체지도자협의회의 전개과정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다또한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전개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와 지하선거와 8.25선거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준비와 진행과 공화국수립 이후 움직임이 소개 된다.

" 답신을 받은 북로당은 준비된 정치일정에 따라 김구김규식이 불참하 더라도 2 지도자협의회를 밀고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1948)6 29일부터 7 5일까지 일주일간 ·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기로 확정했던 것이다김구·김규식뿐 아니라 여운홍장건상  이남의 정당·단체 대표들의 회의 참가가 불가능해진 상황이어도 회의를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다만 성시백을 통해 북로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안우생박건웅권태양  김구·김규식의 일부 측근들은 2 지도자협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6 27일께 평양으로 올라왔다. 

평양에서 열린 2 지도자협의회에는 이북의 모든 정당·단체 대표자들은 물론 남북연석회의 뒤에 이북에 잔류한 이남의 정당·단체 대표자들그리고 비밀리에 38선을 넘은 일부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참가 정당·단체 수는 남북연석회의 때의 56개에 훨씬  미치는 40 미만이었다이북의 정당 3개와 사회단체 12개는 그대로였지만 이남의 정당·단체가 20 개로 줄어들었다."

"지도자협의회의 마지막 날인 7 5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선거의 절차 문제를 토의하고 합의서를 채택하였다.”(343)


[2016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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