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부제 :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지난 2010년 3월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애서 소개한 도서목록 중 열 여덟번 째다. 이 책은 생각보다 한국에 꽤 알려졌다. 2007년에 처음 번역 발간되었음에도 벌써 35쇄나 발간된 것이다. 저자의 유명세도 한 몫 했겠지만, 한겨레 등 여러 신문에서도 소개되었고 인터넷에도 알려져있다. 세계적인 기아문제, 특히 어린이 기아에 대해서는 거의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인터파크 도서 사이트에만 해도 무려 256개의 리뷰(서평)이 실려있다. 

 

이 그림들은 TV나 잡지, 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것이다. 빈곤국이나 내전이 벌어진 국가, 지역에서 기아나 기아난민은 빈번한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간 집단에게 빈곤이 닥?을 때 가장 약자에게 먼저 닥치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도 동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발전과 진보가 유사이래 가장 최고조라는 21에게도 기아 문제가 지구에 남아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가장 먼저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의아하다. 그리고 과연 이 지구 상에 그렇게 인간이 먹을 식량이 없는지, 또 그렇게 '인권'과 '안도주의'를 외치는 미국과 유럽이 이 문제를 방치하는지 궁금해진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당연 탁월하다.

이 책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기아의 실태와 그 배후의 원인들을 작신의 아들과 나눈 대화 형식으로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전쟁과 기배계층의 탐욕,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NGO의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구호조직의 활동과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굶는 현실, 사막화와 삼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 그리고 특히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과두지배와 투기자금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21세기 기아'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이 얼마나 정치, 경제 질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세계 인구의 7분의 1이나 되는 기아인구, 더군다나 그 숫자가 21세기 들어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충격적이고 심각한 현실을 고발한다. 대부분 기아 지역의 외형적인 문제는 전쟁, 내전, 정치적 혼란, 종교분쟁, 지배계층의 탐욕, 기후변화 등이다. 하지만, 기아문제의 역사적, 구조적 원인을 분석해 보면, 그 뿌리는 항상 서구로 귀착된다. 아프리카, 남미, 동나아시아의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지난 18~20세기에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침탈과 수탈을 일삼은데서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위해 평화롭게 자족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사회경제 구조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기후변화를 초래했고 21세기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의 화신인 다국적기업, 금융체계와 투기금융들은 세계 곡물시장을 조작하고 서구 국가들은 자국 농산물에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곡물가격 왜곡에 동참한다.
이처럼 거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조금씩 더 관심을 갖는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정부관료도, 정치인도, 자본가도, 기업도, 투기자금도 아닌 일반시민들이기 때문이다.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추진하지 못하는 정치적인 구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럼 무슨 일을 해야 하냐고 묻는 아이에게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라고 대답한다.(p.153)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그가 교수이고 유엔기구의 고위인사라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런 활동과정에서 그 스스로 알게 되고, 보게 된 것들을 국제적 기아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서 다시 한 번 분류하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기아 관련 저술 중에서 이 책은 가장 고급의 정보를 담고 있고, 몇 가지 점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한 책이다. 아들과의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현재 기아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이득을 보고 있고, 그런 이득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며 더욱더 많은 어린이들을 굶주림으로 내몰고 있는가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우리나라에는 저자가 이 짧은 책에서 말했던 몇 가지 사례와 그것을 둘러싼 구조에 대해서 국제구호단체 활동가와 시민단체 관계자 이외에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정치적 논란의 여지가 될 북한의 기아문제가 아니더라도 칠레에서 벌어진 일과 네슬레의 관계, 부르키나파소에서 드러난 젊은 혁명가들의 애환, 그리고 국제식량기구의 정책 방향이 결정되는 과정과 같은 얘기들은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실 장 지글러 만큼 고급정보를 접하면서도 현장에서 상황을 이해한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학자이며 지식인이며 또한 전문가인 사람들은 다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한가운데나 중남미의 현장에서 상황을 목격하고 분석하고 이것을 전체적인 흐름에서 다시 정리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기아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거의 초보적 수준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정도의 사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하게 저자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먼저 기아의 심각성을 먼저 알아보자.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2005년 기아로 인한 희생자 수를 집계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한 사람이 3분에 1명꼴이며,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198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지금 인구의 2배인 12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먹여 살린다는 의미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 2,400~2,700칼로리 정도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세계질서는 어떠한 사정에서 등장한 것일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것은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사회구조에 있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수단이 없다.

소는 배를 채우고, 사람은 굶는다?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거나 영양과잉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거꾸로 다른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굶어죽고 있다.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이 연간 50만 톤에 달한다.

조작되는 세계 곡물시장 가격과 버려지는 식량이 문제다. 세계시장에 비축된 식량의 가격이 종종 인위적으로 부풀려진다. 세계의 주요 농산물이 거래되고 있는 시카고 곡물거래소는 몇몇 금융자본가들, 앙드레 S.A.(스위스), 켄티넨털 그레인(미국), 카길 인터내셔널(미국), 루이 드레퓌스(프랑스)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부유한 나라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법률이나 그 밖의 조치를 통해 농산물의 생산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남반구에서는 식량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농산물 가격을 높이기 위해 이것이 유럽 등 선진국의 농업담당 집행위원회가 하는 일이란다.

기아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 학교도 변화해야 한다. 정규 수업시간에 전쟁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기아에 대해 가르치는 학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기아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어떤 수단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토론하는 수업 같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뜬구름 잡는 식의 정서적인 대응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부적이고 정확한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얼마전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한비야 씨가 네티즌들에게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량생산을 늘여 굶주림을 없애야 한다고 답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아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서구 각국과 다국적 기업은 기아를 부추기는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이용한다. 2000년 기준으로 아프리카 인구는 세계 인구의 15%에도 못 미치지만 기아 인구의 25퍼센트 이상이 아프리카에 집중되어있다. 1970년에서 1999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만 43차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들 전쟁은 심각한 기아를 초래했다. 전쟁의 이유는 복잡하지만 인종간의 갈등, 다이아몬드나 금, 석유와 같은 토착자본을 독점하고픈 욕망 등, 때로는 국제적인 금융 그룹이나 국제기업 등의 외부세력이 개입해서 은밀히 그 지역의 전쟁지도자에게 무기를 대주거나, 용병을 공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주기도 한다. 이들 전쟁의 희생양은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이다.

북한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1995년에서 2000년 사이에 200만 명이상이 굶어죽었다. 1990년도에 비해 곡물의 수확은 늘었지만, 취약한 토지소유 구조, 비료와 농기구의 부족, 만성적인 에너지 위기로 인해 곡물생산량이 최저 생계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06년 북한의 식량 부족분이 80만 톤 이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수확량이 인구의 최저 생계선을 15퍼센트쯤 밑돌고 있는 것이다. 2004년 유니세프와 FAO는 북한 아동의 영양 실태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15세 미만 아동의 37퍼센트가 심각한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수유모의 30퍼센트가 영양실조로 빈혈증세를 보여, 아이들에게 젖을 줄 수 없는 형편이다.

세계적인 식품회사인 스위스의 네슬레와 아옌데의 비극은 다국적 기업이 빈곤국이나 제3세계 국가를 어떻게 수탈하는지 보여준다. 1970년 칠레의 인민전선은 101가지 행동강령을 발표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칠레가 처한 높은 유아사망률과 어린이 영양실조라는 문제를 놓고 본다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공약을 내건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문제에 가장 곤란함을 느꼈던 것이 스위스의 다국적기업인 네슬레였다. 커피와 우유를 주품목으로 하는 네슬레에게 칠레 정부가 분유를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칠레에서의 성공사례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로 번져갈 경우에는 더욱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가 내건 이 공약이 벽에 부딪힌 것은 칠레의 농장을 장악한 네슬레가 1971년 협력거부 방침을 결정하면서부터이다. 아옌데 정부는 네슬레에게 우유 구매를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는 거부당했다. 이때부터 아옌데는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서 고립되고, 결국 CIA와 결탁한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습격하여 암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따른 아마존의 파괴와 사막화로 인해 기아가 심화되고 있다. 1991년 통계에 따르면 36억 헥타르의 땅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 육지의 4분의 1, 경작이 가능한 건조지대의 약 70퍼센트나 된다. 사막화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서, 매년 약 600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2는 원래 사막을 포함한 건조지대라서, 경작이 가능한 건조지대의 73퍼센트 정도가 사막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럼 아시아는 어떨까? 역시 경작이 가능한 건조지역의 71퍼센트, 약 14억 헥타르에 걸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지중해 남쪽의 건조지대는 이미 그 3분의 2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약 10억의 인구가 가까운 장래에 사막화의 위협에 직면할 거라고 예측된다.
사막화와 농지의 황폐화를 방지하기 위해 ‘사막화방지 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들은 사막화방지 협약에 따라 파견하는 농업, 수리, 식물, 기후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사막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고, 사막화로 인해 수백만의 농민들이 목초지나 경작지를 잃고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그들을 도울 능력이 없음을 절감한 유엔은 그들을 ‘환경난민’이라 부르게 되었어. 그런데 문제는 정치난민과 달라서, 그들은 국제사회가 정한 ‘난민조약’(1951년)에 규정된 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먹는 것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최우선 과제는 먹을 것을 섭취하는 일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피조물은 죽는다. 식물은 물이 없으면 시들고, 먹이가 없는 동물은 기진해서 쓰러진다. 식량을 구하지 못한 인간은 기력을 잃고 사경을 헤매게 된다.
모든 생명체의 두 번째 과제는 번식하는 일이다. 번식하기 위해 식물은 성숙 단계를 거쳐야 하고, 동물은 번식 가능한 나이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그리고 너무 빨리 병들거나 죽지 않고 번식 가능한 나이에 들기 위해서는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
한쪽에는 특권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세계가, 다른 쪽에는 빈궁한 세계가 존재한다. 태곳적 식량 분배는 남자들의 힘에 좌우되었다. 임신한 여자와 아이는 절대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해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영양 섭취는 점점 더 사회적, 정치적, 재정적 힘의 문제가 되었다.

냉전체제의 몰락과 또 한 가지 패러다임 변화는 바로 글로벌화한 자본주의 내부에서 한 가지 자본, 즉 금융자본이 산업, 무역, 서비스 등의 자본들을 제치고 주된 자본으로 부상한 것이다. 금융자본의 이윤극대화 법칙은 오늘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금융자본이 왜 이렇게 우세한 것일까? 거대하고 효율적인 컴퓨터 체계의 발명은 아주 복잡하고 세계적인 ‘경제제국’의 동시적 관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몇 조개의 정보를 빛의 속도(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중단 없이 순환시키는 통일적인 사이버스페이스가 탄생한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이런 패러다임 변화-사회적 양극구도의 몰락과 숨 막히는 기술혁신-는 금융자본의 거의 완전한 글로벌화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99년에 유통된 금융자본은 이 해에 전세계적으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보다 63배나 더 많았다는 것이다.
1919년에 막스 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비참한 세계, 너무도 골이 깊은 불평등한 세계. 오늘날의 세계의 주된 갈등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만성적인 실업난(유럽연합의 실업률은 12.5퍼센트)과 빈곤, 사회의 계층화, 영양실조가 지금은 북반구도 위협하고 있다. 그 주범은 바로 민족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과두지배, 투기자금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 225명의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세계 가난한 자들의 47퍼센트(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수치이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오늘날 개인들은 국가보다 더 부유하다. 세계 15대 부호들의 총자산은 남아프리카를 제외한 사하라 이남의 모든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선다.
이런 숫자의 배후에는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가 존재한다. 불평등이라는 부당한 역동성이 현재의 세계질서를 결정하고 있다.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과두지배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민족주체성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아에 의한 생명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저자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 우선적인 과제는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FAO는 당면한 긴급구호를 위해 비상식량을 비축하고 있다. 이 식량을 배급하고 관리하는 것은 WFP 담당이다. 그러나 담당자들은 도움을 줄 나라의 사회구조가 어떤지 거의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도움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부실하고 부패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으로 기득권 세력을 강화하고, 부당한 사회구조를 고착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함과 수백 년간에 걸친 약탈에 방치해두게 되는 것이다. 원조식량뿐만 아니라 국제단체가 제공하는 대부분의 개발지원금도 마찬가지다.
둘째,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그들에게 농사 짓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구조개혁이 이루어져야한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수출국에 속한다. 그런데도 대도시와 시골에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굶주리고 있다. 지주의 1퍼센트가 경작지의 43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2000년의 경우, 1억 5,300만 헥타르의 땅이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고, 500만의 농민들이 땅이 없이 가족과 함께 이 거대한 나라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샛째, 인프라 정비. 제3세계 나라들의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해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자본, 도로, 적당한 종자, 비축식량, 농경 전문지식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 아프리카 남쪽에는 엄청난 땅들이 놀고 있다. 그 땅들은 투자가 없이는 경작되지 못할 것이다. FAO의 통계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정상적으로 경작되는 땅은 7억 헥타르 정도인데, 작은 투자로도 경작 면적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저자가 생각하듯이 세계 경제의 모든 메커니즘은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대 전제는 바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국제적 구조가 마련되어야 하고 규범과 협약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 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기되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점은 희노애락을 공감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 2012년 2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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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 우리시대 학술연구
문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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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우연하게도 공부모임에서 세미나 교재로 최근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책 두 권을 선택했다. 이 책과 더불어 최장집 교수 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최태욱씨가 엮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 역시도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자유주의'라는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한국사에서 자유주의 담론의 형성과정을 다룬다는 저자의 서문을 읽었을 때 호기심이 컸다.

사실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진영의 일부 인사들의 폄하가 미덥지 않았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유주의를 "재산을지닌 부르주아적 개인들, 즉 근대적 의미의 유산자들의 정치 이념"이자 "이러한 '소유적 개인들' 모두의 자유 공화국을 옹호하는 정치 이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역사적으로 서양 자유주의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기해 온 전형적인 비판임은 맞는 말이다.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한 서양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공식적인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애초에 저항이념으로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진보성과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도덕성을 거의 상실한 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된 19세기 이래로는 저쩜 계급적,제국주의적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그가 경험했던 19세기 현실의 자유주의에서 출발했다. 
요컨대 자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역사적'인 것으로서, 그 문제의식이나 분석대상, 모색된 대안의 적실성과 설득력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곧 마르크스주의적 자유주의 비판이 역사적 맥락을 초월해 어떤 경우에나 무조건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다.
1980년대 한국사회 변혁론의 자유민주주의 비판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적 맥락을 고려할 때, "한국의 자유주의는 계급 중심적 관점에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면이 있으며, 한국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부재'를 곧장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부재 내지 빈곤으로 연결지어야 할 근거는 더욱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는 아주 불편한 단어이자 이념이었다. 그래서 사실 무수한 궁금증을 일으킬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 질문이라 함은, 한국에 자유주의가 도입된 것은 미국의 반공 기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얻어진 우연한 결과인가?, 정부 수립 후 자유주의는 오직 독재 정권의 정치적 수사로만 존재했을 뿐인가?,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 표방된 자유주의와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발전한 자유주의 간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반공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억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한국 자유주의의 익숙한 딜레마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서양 자유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국 자유주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결국 자유주의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건져 낼 수 있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가?...와 같이 끝이 없다.

저자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책에 담았다. 그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둘러싼 통념과 또 자유주의에 대한 서구 중심적 혹은 일면적 평가를 극복하려는 시도도 포함한다. 요컨대 이 책의 목적은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도입, 전개 과정을 추적하고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특성과 전망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좀 더 민주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흔히 ‘한국의 자유주의’는 회의적 냉소적 반응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저자는 그 배경을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분석한다. 
먼저, 반공 분단국가에다 오랜 독재 정권기를 거친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부재했다거나 또는 비정상적이고 미약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한국 사회와 연관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입장과 관련이 있다. 전자가 이념과 사상으로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 비판적이라면, 후자의 입장은 대개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이처럼 그 주제가 직면해 왔으며 또 직면할 수 있는 직접적, 잠재적 비판에 대응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먼저 이 책은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곧 ‘한국의 자유주의화’와 한국의 역동적인 역사적 맥락이 자유주의의 전개 양상 및 성격에 제공한 새로운 면모, 곧 ‘자유주의의 한국화’를 동시에 천착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조명, 평가한다. 
다음으로 이 책은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 즉 ‘지배’ 이념으로 표방된 동시에 그에 맞서는 ‘저항’ 이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한국 자유주의 특유의 전개 양상에 주목하며, 이 점을 드러내고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은 이처럼 ‘한국의 자유주의화’와 ‘자유주의의 한국화’ 그리고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이 씨줄과 날줄로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 내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공과나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맥락에 대한 고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각 장의 중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부 -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과 계보는 개화기 이래 자유민주주의적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투쟁했던 주체적인 노력들을 중심으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및 계승사를 추적한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기원은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었다기보다 갈등과 혼란을 동반한 복잡하고 장기적이며 무엇보다 주체적인 일련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제1부 전체 논의의 목적이다.

1장 - 개화와 자유주의는 ‘서구 근대의 충격’과 그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대응’을 주제어로 자유주의 수용의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고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 일단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항 이래 자유주의의 수용을 위한 노력이 어떤 특성을 보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본다.
2장 - 식민지 시기 자유주의의 굴절과 전화는 일단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어떤 식으로 살아남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식민 통치하에서 자유주의는 정반대의 두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종국적으로 친일,부일의 논리를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그 하나라면, 전투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띠게 된 것이 다른 한 길이다. 이 장에서는 윤치호, 이광수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자의 길을, 양기탁과 안창호, 신채호와 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와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독립운동 이념을 중심으로 후자의 길을 각각 살펴본다.
3장 - 근대국가 형성과 자유주의는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인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과 ‘민족 통일’이 동시에 실현되기 어려운 별개의 과제로 분리되어 인식됨에 따라 자유주의 세력이 우파 민족주의 진영(김구,김규식등)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와 이승만 등 친일적인 극우 단정 세력과 손을 잡게 되는 맥락을 들여다보고, 특히 조소앙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근대국가 건설 이념으로 작동한 자유주의의 특성을 살펴본다. 또한 제헌헌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초기 제도화의 특성과 한계를 검토한다.

제2부 -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이념과 현실은 헌법과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 국가보안법 분석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의 이념과 현실, 실상과 허상을 드러낸다.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외양과 실천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데, 제2부에서는 이 괴리를 구체적으로 부각시켜 그 계기와 진행 과정, 결과를 고찰하는 데 집중한다.

4장 - 자유민주주의 헌법 이념: 제1차 개정 헌법에서 제5공화국 헌법까지는 각 개정의 맥락과 쟁점들을 분석하면서 헌법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굴절, 변조되는지 살펴본다. 거듭된 개정은 결국 독재와 공존 가능한 혹은 독재를 뒷받침하는 명목상의 자유주의만 헌법에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또한 입헌주의의 정착을 요원한 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데 치명적이었음을 지적한다.
5장 -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과 자유주의는 독재 정권이 구사하는 민주주의 담론이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어떻게 왜곡하고 위축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전두환의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담론으로 대변되는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방종이나 분열로 매도하고, ‘일민’이나 ‘국민 총화’ 같은 전체주의적 가치를 강요하며, 무엇보다 ‘국가 안보’를 ‘자유’에 앞세우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변질시켰음을 보여 준다.
6장 - 반공주의의 신성화와 자유주의의 위축은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가 자유주의의 발전에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맥락과 메커니즘, 그리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여기서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를 안정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제도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 장의 논의는 국가보안법이 안보와 자유를 양자택일적인 가치로 만들고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억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강제함으로써 반공주의에 의존한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해 왔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내세우는 국가 안보라는 가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 자체가 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기보다 구성원 개인을 배제한 채 국가권력을 정치의 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지배 질서를 존속시킨다는 점에서 반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다.

제3부 - 민주화 담론과 자유주의는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자유주의가 ‘지배’의 장을 떠나 ‘저항’의 영역을 추동하고 확장하는 기능에 복무하게 되는 역사적 맥락을 추적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국가보안법의 구속을 받는 자유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치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했을 뿐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이름에 걸맞은 이념과 실천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을 통해 발전하게 되는데, 반독재 민주화 담론과 비판적 지식인 담론의 분석을 통해 자유주의가 저항 이념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형성하게 되는 특성을 살펴본다. 또한 1980년대의 상황을 자유주의적 민주화 담론이 어떻게 대응,대처하는지도 살펴본다.

7장 - 반독재 민주화 담론의 형성과 전개: 1950~70년대는 이승만 정권 이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제기된 학생 운동권 및 재야사회 단체의 시국 선언문, 성명서, 결의문 등과 <사상계>를 통해 저항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드러내는 특성을 분석한다.
8장 - 비판적 지식인 담론의 자유주의는 정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자신의 분야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운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담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장준하(사상계)와 함석헌(씨알의소리), 리영희(전환시대의논리, 우상과이성), 한완상(민중과지식인)의 사상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민주화 운동 이념으로 발전한 자유주의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을 살펴본다.
9장 - 자유주의적 민주화 담론의 굴절과 균열 그리고 새로운 전망: 1980년대는 ‘독재 대 민주’의 대치선을 따라 단일한 하나의 진영을 구성한 채 통합적 전망을 제시해 오던 저항적 자유주의 담론이 이른바 ‘1980년대적 상황’에 직면해 내적 균열과 분화를 겪고, 상대적으로 보수화되는 배경과 맥락을 보여준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저항적 자유주의는 특정한 계급적 이해를 공유하는 세력이 아니라 특정한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세력에 의해 지지되었고, 이 점에서 계급적 기반과는 무관하게 민중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모순 구조가 좀 더 복잡하게 전개되는 1980년대 들어 비계급적 혹은 탈계급적 연대는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저항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영향력을 잃지 않고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는지 살펴본다.
 
 
저자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옳고 다른 이념은 그르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만민평등과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라는 원론으로만 보면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도 기본적인 담론의 토대로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동서양에 존재하는 많은 미래의 담론이나 이념 중 한국에 적합한 것이 마땅히 없고 서구에서 한 때 진보적인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가 한국에서 다시 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필요한, 21세기의 담론으로 기능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 자유주의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 2012년 2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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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정치경영연구소 기획총서 1
최태욱 엮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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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Liberalism)'는 그 역사나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이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권이나 언론, 학계, 경제계 등 어디에서도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차라리 1972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개정된 유신헌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후 이 개념과 용어를 특정 정치세력이 전용하고 있다. 원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었다. 18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자들이 폭력적인 왕권에 대항하여 만민평등의 자유주의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탄생한 이념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탄합하던 박정희 유신 군사정권이 당시 반공냉전주의를 등치시키는 이념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곧 전체주의이고 전체주의의 반대는 곧 자유주의라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사용한 것이다. 히틀러처럼 무자비한 군사파시스트 주제에...ㅠ
 
만민평등을 핵심 이념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한국 내에서 수구세력, 우익세력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좌파세력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진보세력이라 불리는 많은 이들 중에서도 '자유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수구,우익세력이 수십 년 동안 독점하여 사용했다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나 역시도 '자유주의'나 '자유주의자(Liberalist)'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차라리 무정부주의자나 아나키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호감이 더 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주변의 적지 않은 지인들 역시 마찬가지임을 느껴왔다. 아마도 내 나이대의 486세대의 경우는 지난 1980년대 대학에서 공부하고 고민하고 활동하던 경험으로 인한 선입견이 크다고 생각된다. 당시 대학과 학계, 지성계에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 또는 관련된 저작이 학생들이 세미나하면서 공부하던 주요 '텍스트'였다. 당시 일본이나 미국을 거쳐 대학에 들어온 이념은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남미의 제3세계론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 학습의 수준은 '추상적인 혁명 이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교재에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장, 사상, 이념이 '정통'이었고 베른슈타인과 같은 비주류 인사의 주장이나 이념은 자유주의, 수정주의, 또는 배신주의로 매도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어리고 순수한 대학생들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와 같은 자유도 민주도, 민중도 민족도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대한 미래의 이상향으로 사회주의 같은 이념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던 것이고 '수정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대열에 끼거나 낙인찍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던 젊은 시절을 거친 후, 대부분의 486세대는 내부적으로는 서구에 존재했던 근현대 정치사상의 역사와 그에 대한 비교, 장단점에 대해 더 이상의 추가 공부를 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붕괴하여 시장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미래의 이상적인 방향과 전망을 잃어버렸다. 갈길을 잃은 채 각자의 생업전선에 나서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부조리하고 문제가 많은 우리나라 체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그 이후 20~30년을 살아오면서 구체적인 현실에서 사회가 크게 바뀌어졌거나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은 겉보기에는 많은 것이 변했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박원순 현 서울시장이나 안철수 원장이 한국정치의 주요 관심인물로 부상한 작년 8~9월 이후, 나의 페이스북과 트위터 상에는 박원순 시장이나 안철수 원장이 '보수'또는 '자유주의자'라는 지적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때의 '자유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분히 부정적인 느낌을 내포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자칭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좌파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이 때의 '자유주의자'는 극우보수주의자가 아니지만 자신들의 진보세력, 좌파세력 내에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싫을 때 적용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글을 자주 접할 수록 "과연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자'는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깊어갔다.
 
보편적인 인권사상,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정치활동에서의 이성적 자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자유주의 핵심 영역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을까?
보펴적 인권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율성, 개인의 기본권이 국가와 공동체의 틀 안에서, 그리고 한 사회에 군림하는 지배적인 목표, 가치관이나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진 어떤 집단적인 가치에 우선한다는 관념과 문화, 사회적 가치가 자리잡을 때 만민평등의 자유는 실현된다. 그러할 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이런 이념과 가치, 정치사회관을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여전히 집단주의와 전체주의, 차이와 다양성의 불인정, 폄하나 비난이 지배적이지 않을까?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측면에서 보면, 정당은 정치를 경험하고 그 효능을 스스로 터득하는 정치교육의 장이다. 자율적, 자유주의적 인간은 이런 공적 공간에서 발생한다. 좁게는 대통령, 넓게는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좌우릴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정치의식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을까? 이는 한국사회가 '소극적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수용하고 얼마나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이 문제에 대한 고려를 회피하는 태도는 보수파들에 비해 개혁의 열정이 강한 진보세력 사이에서 결코 더 약한가?
정치활동에서의 이성적 자유의 측면에서 보면,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와 그 이후를 이어가고 있는 진보적 엘리트 세력들 사이에서 정서적, 추상적 급진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과 갈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현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적 정치조건, 정치문화에서 자유주의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이상과 목표를 과도하게 높게 설정하면서, 정치를 뛰어넘어 이를 일거에 해결코자 하는 경향성에 대한 어떤 해독제적 역할이 아닐까?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대의제를 중심으로 인식되어 미국처럼 보수독점 체제를 형성할 수도 있고 북유럽처럼 사회적 합의제로 작용할 수도 있듯이 자유주의 역시 어느 세력이 어떤 측면을 주도하느냐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될 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역사적으로, 과정상으로, 프레임이나 주도성의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자유주의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도그마로 작용하고 자유주의의 본성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에만 집착할까?
 
 
이 책은 그런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다.(지난 금요일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한 책인데 교재로 결정할 때 세미나에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일이 겹쳐서 금요일 세미나 참석도 못했지만...ㅋ)
처음 '자유주의'에 대한 이념과 역사, 전개과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 책은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였다. 최교수는 그 책에서 우리나라에서 묻혀져 있던 '자유주의'의 원래 이념과 정신, 내용과 필요성을 지적해 주었다.
 
이 책은 소수의 사람들, 즉 자유주의는 본래 진보적이거나 혹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내세운 (자유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는) 조건은 물론 서로 다르다. 그중 고세훈(3장)의 조건이 아마도 가장 까다로울 게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자유주의가 정녕 진보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정치를 통해 개혁에 대한 현실적인 실천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에 비해 최장집(2장)이 덤덤히 서술하는 자유주의의 진보성은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는, 냉전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시장주의나 경제적 자유주의로 연결되는 자유지상주의는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유주의란 법치주의, 입헌주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의미할 뿐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부터 만인평등의 이념이다. 그러니 “만약 ‘진보’가 …… 현실 속에서 권력과 사회경제적 자원에 있어 약자와 소외자들의 권익을 증진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자신의 위치에서 실제로 그렇게 행위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한국의 현실에서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에 가깝다.”
설령 (고전적) 자유주의가 애초에 경제적 자유주의를 포괄하는 사상이었다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가 보수의 틀에 갇혀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이근식(1장)이 정의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포괄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결별을 선언한 ‘새로운’ 자유주의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대신 사회적 자유주의로 자유주의 본래의 진보성을 회복, 유지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이 책의 필자들 대부분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한국의 신자유주의 대안 이념으로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에서 자유주의의 진보성 회복 운동이 복지자본주의 체제라는 결실을 맺었다면, 21세기 전반기에는 한국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그간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왜곡,오용되어 왔다. 이제 제대로 논의해 봐야 한다. 그것을 본래의 그 광명정대하고 진취적이며 역동적인 성격의 자유평등이념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시민들이 그 진보적 자유주의의 가치에 공감해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대안 체제 구축에 나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재벌과 대기업 등의 자유를 통제할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다. 정치권력보다는 경제 권력의 특권적 자유가 일반 시민들의 평등한 자유에 대해 더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통제는 구미의 역사가 증명하듯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진보성에 관한 한 자유주의는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가 진보성에 관해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면 다음으로 따져 봐야 할 것은 그 진보성의 발현 능력, 즉 사회개혁 실천능력이다.
지금 한국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산적해 있다. 신자유주의는 한마디로 자유주의 사상 중에서 정치적,사회적 자유주의를 제거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만 강조한 기득권자들의 논리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언어의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정의사회'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우롱하고 이명박 정권이 '녹색성장'에서 '녹색'을 덧칠한 것처럼... 
진보적 자유주의가 실천력 있는 진보 이념이라면, 고세훈의 지적대로 “확대와 심화일로에 있는 빈곤과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는 데 체계적이고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박동천(4장)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의 실제적 과제, 즉 공동체를 위한 실존적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의미 있는 진보 이념이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제 특정 계급의 이익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봉사한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복지국가 전략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들은 노동 세력을 뛰어넘는 ‘복지 세력’의 연대를 강조한다. 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시작된 서구의 현대 사회민주주의가 이와 같이 계급 정치 일변도에서 벗어나 계급 교차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의 진보적 자유주의와의 차별성은 더욱 옅어진다. 결국 사회민주주의든 진보적 자유주의든 어느 깃발을 들던 간에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복지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양자 간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노동 정치만으로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봉급생활자이지만 그들 중 ‘노동계급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들은 대부분 중산층 의식을 갖고 생활한다. 그러니 노동조합 조직률도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해 OECD 최하위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약한 노동이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럽의 경우와 같이, 아니 그 경우보다 더 절실하게 강한 시민 연대가 필요하다. 계급을 가로지르는 시민 연대가 하나의 복지 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열린다. 한국에서도 이젠 사회민주주의가 특별히 실천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민 민주주의로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해 가야 한다는 점에 있어 그것은 진보적 자유주의와 동일할 뿐이다.

자유주의의 최대 장점은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유연성과 시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장집은 “자유주의의 힘은 그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성을 갖는 원리와 가치를 함축하고, 인간의 사회경제적 발전, 문명 및 교육의 발전과 더불어 그 보편성을 확대시켜 왔다는 데 있다. 그런 평등의 이념은 전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한 사회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어 왔다. 동시에 보편적 인권의 내용은 심화되어 왔다”라고 경탄한다. 자유주의는 어느 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다른 때에는 경제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던 고전적 자유주의가 사회적 자유를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그리고 심지어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까지 발전해 가는 까닭이다. 강조점은 이처럼 시의에 따라 적절히 달라지나,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늘 동일하다.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자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의 자유 수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지상과제다. 이 자유를 훼손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집단이나 조직의 권력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 권력은 정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이나 언론, 혹은 종교 집단일 수도 있다.

케인스주의 혹은 민주적 시장경제, 질서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민주주의 혹은 복지자본주의 등 명칭을 어떻게 하던 간에 전후에 등장한 구미의 조정시장경제 체제는 그 내용에 있어 모두 진보적 자유주의의 구현체였다. 달리 말하자면, 진보적 자유주의가 현지 사정에 맞는 방법론을 택해 자신의 가치를 시의 적절히 구현해 갔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방식도 그 다양한 방법론 중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최장집이 강조하듯이, “자유주의의 장점은 그 개방성과 자체 교정 능력을 갖는 유연성으로 인해 현실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만나면서 굉장한 현실 적응 능력을 실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이념은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운영함에 있어 그 정치적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신’자유주의(현대의 신자유주의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즉 국가의 시장경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는 새로운 자유주의)가 될 수도,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실천력은 이와 같은 방법론적 유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진보성은 현대 사회민주주의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실천력은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더 우수하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 구축에 필요한 신자유주의의 대안 이념으로서 진보적 자유주의는 충분히 훌륭한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전반기에 구미 선진국들이 그리했듯이, 21세기 전반기의 한국도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해 한국형 조정시장경제 체제를 발전시켜 갈 여지는 충분하다. 홍종학(5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이미 그런 실험이 행해졌음을 상기시킨다.
사실 ‘국민의 정부’는 한국 최초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지향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국정 목표 자체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한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비록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한국에서 민주적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보고자 했던 의도는 분명했던 것이다. 홍종학은 김대중 정부의 실험이 성공에 이르지 못했던 요인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정부의 민주적 개혁 역량이 재계의 힘을 관리,조정하기에는 부족했던 탓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 진영의 담론이 실천적 정책으로 충분히 구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이 맞는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민주적 시장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조건은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하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민주적 개입이 효과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조건을 갖추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와 정책으로 구체화된 민주적 시장경제 체제의 현실적 설계도를 제대로 작성하는 일이다.
유종일(6장)은 이 책에서 뒤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즉, 진보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는 대안 체제의 구성 요소와 핵심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평등과 시장경제의 효율을 화학적으로 결합한 체제”는 기회의 평등과 분배의 평등화를 위해 민주적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는 체제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적 조건에서 이 같은 사회경제 체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재벌 개혁,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의 민주화, 복지의 확대, 그리고 정부와 공공 부문의 개혁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선학태(7장)와 최태욱(8장)은 앞의 조건에 대해, 즉 정치적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채워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두 사람은 공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한국형 사회적 합의주의'의 창안과 정착이라고 강조한다. 사회적 합의주의야말로 민주적 시장경제의 근간인 동시에 그 체제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민주적 거버넌스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학태는 한국형 모델로서 “동반 발전형 사회적 합의주의”를 제시한다. 한편, 최태욱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조건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비로소 충족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다수제 민주주의와는 달리 사회적 합의주의를 촉진시키는 제도적 기제를 내장하고 있는 바, 그것이 바로 민주적 시장경제를 포함한 조정시장경제 체제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제도적 기제란 다름 아닌 ‘포괄 정치’를 작동케 하는 비례대표제, 온건 다당제, 연립정부 등의 협의주의 정치제도들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저자의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여러 세력이 독점이나 독선이 아닌 합의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재적 각성이 필요한데, 아직 한국사회의 기득권 집단과 그들을 대신하는 정당은 전혀 그런 생각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능하다면 10~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민주진보 진영이 총선과 대선을 연이어 승리하면서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와 체계를 바로잡고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최선의 합의주의' 정도로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지지세력과 99% 유권자가 등을 돌릴 수 있고 반대급부로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얻을 점은 자유주의라는 단어나 개념, 근대 자유주의의 복권, 또는 자유주의의 장점이나 가능성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성적 가치와 철학, 즉 만민평등의 이념, 본원적 평등,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앞으로의 정치사상의 중심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난 자유주의자로 살고 싶다.
  
[ 2012년 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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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새판짜기 - 세계화 역설과 민주적 대안
대니 로드릭 지음, 고빛샘.구세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미국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한국의 관료들과 정치인들, 언론인, 종교인들, 학자들, 그리고 깨어나지 못한 백성들... 
여기 이들에게 세계화에 대해 소개할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의 저자 대니 로드릭은 '마국 광신도'들이 꿈에서라도 자식들을 보내고 싶은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만하면 '뼛 속부터 친미'인 가카와 우익 정치인, 관료, 언론인, 학자, 종교인들이 귀를 쫑긋 세울 만 한가?

하지만 저자 로드릭은 그들의 선입견이나 바램과는 달리 '세계화 주창자'가 아니라 '비세계화' 경제학자다. 그는 열렬한 자본주의 추종자이자 충실한 민주주의 신봉자다.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시장의 실패'와 '시장의 무능'에 대해 정확하게 꿰뚫고 있고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 국가와 제도, 그리고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에는 '스스로 만들고, 규율을 세우고, 안정되게 하고, 적법화하는 능력'이 없다."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지금 한국의 주류 정치인, 학자, 언론인, 기업인들이 한국이라는 국가와 한국경제에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요즘 정치권과 언론에 한미FTA에 대한 폐기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야당과 상당수 사람들은 한미FTA 협정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이고 한국의 사법제도와 공공성을 제한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재협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계화'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는 '세계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뿐더러 금융 세계화의 경우 현재의 국제 금융체제로서는 명백하게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특히 자국 내의 경제구조와 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세계화 자채가 해당 국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런 관점에서 평가해 보면, 한국의 경우 FTA(자유무역협정)는 고사하고 세계화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내부의 경재구조와 제도, 민주화 정도를 고려하면 WTO 체제도 전체 한국경제에 도움아 되지 않을 수 있다, 차라리 기본적인 국제무역체제는 GATT(브레턴우즈) 체제가 한국에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1997년 초 <세계화는 너무 진행되었는가? Has Globalization Gone Too Far?>라는 책을 냈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우리나를 비롯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닥쳤다. 아시아 경제의 위기를 예견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저자는 자신의 당시 예견이 국제 상품경제에만 국한되어 금융시장의 위기를 진단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내가 보기에는 겸손한 말이지만...)
아시아 경제위기 후 저자는 몇 년간 금융 새계화 문제에 집중하여 연구했다. 2007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논문을 요청하자 그는 <금융 세계화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금융 세계화는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기엄가들이 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고, 위기를 더 잘 버텨낼 수 있는 경험 많은 투자자들이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현금이 부족하고 여러 쇼크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으며 다각화 능력이 부족한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큰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처럼 정작 잘 나가는 국가는 자본을 받아들인 나라들이아니라 잘사는 나라에 자본을 빌려준 나라들이었다. 국제 금융에 의존한 국가들의 실적은 형편 없었다." 저자는 왜 국제 재정지원이 개발도상국들이게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했는지 조명하려 했다.
그 논문을 출판사에 보내자마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미국을 집어 삼켰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 다음에는 다른 선진국들애서, 엄청난 금액의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금융회사를 매입했다. 금융세계화가 바로 이 위기의 중심에 있었다. 아시아와 산유국들의 지나친 절약은 주택 경기 거품과 그로써 탄생한 파생상품이라는 거대하고도 위태로운 구조물을 한층 부풀렸다. 

그 위기가 월스트리트에서 세계 금융 중심 도시들로 그토록 쉽게 퍼져나간 이유는 금융 세계화로 모든 대차대조표가 한데 뒤섞였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저자는 자신이 또 다시 수면 바로 아래 있던 더 큰 사건을 놓치고 말았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물론,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저자 뿐 아니라 거의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던 것은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세계롸, 특히 금융 새계화가 전 세계에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측했고 저자를 비롯한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정치가와 금융가, 학자들은 그런 위기가 발생하는 원인이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예측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예측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들과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 당시 유행하는 담론을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담론이란 시장이효율적이라는 등, 금융 혁신으로 리스크가 그것을 잘 견뎌낼 수 있다는 등, 자가 규제가 최고라는 등, 정부의 개입은 비효과적이고 해롭다는 등 하는 것들이다. "오만은 사람의 눈을 가리는 법이다."
저자는 새계 무역체제가 금융체제와 다른 이유로, 무역 관계가 무너진다고 해서 금융처럼 연쇄 파산이 발생하진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법규가 지나치게 구속적이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국가는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그 효과는 포착하기 어려우며 다자간 상호 자유무역 원칙과 비차별 원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경험한 이후 몇 년 사이에 현재의 국제 무역체제가 부유한 국가들에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 안에서 경제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금융위기 전까지 줄기차게 세계화를 주장했던 대표적인 전문가들 또한 그러하다. 기존에 세계화를 반대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뿐 아니라  세계적 경제학자 폴 새무앨슨, 2008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 폴 크루그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부의장 출신의 앨런 블라인더, 칼러니스트이자 세계화 옹호론자 마틴 울프, 클린턴 행정부의 세계화 추진자 래리 서머스도 회의론자로 돌아섰다.
물론 경제학자들 대다수는 어느 누구도 세계화에 반대하지 않는다.하지만 세계화를 더욱 효과적이고 공정하며 지속가능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국가 내, 국가 간 기관을 설립하고 보완 메커니즘을 만들 수 있다.

저자는 1970년대 이후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세계경제가 '세 가지 정치적 딜레마(trilemmma)'에 빠져 있음을 밝혀낸다. 그것은 민주주의,국민국가, 세계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가 불가능하다는 개념이다. 세계화를 추진하려면 국민국가나 민주주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와 세계화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족자결권을 지키려면 깊은 민주주의와 깊은 세계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아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의 생각은 명쾌하다. "민주주의와 민족자결권이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사회적 합의를 보호할 권리가 있고 이러한 권리가 글로벌 경제의 요구와 충돌할 때 물러서야 할 것은 후자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은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고 국민국가로서의 지위도 불안정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화를 무차별로  강행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국민국가로서의 자결권도 침해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녕 한국 내 기득권들자와 지배계층은 한국을 1980년대의 중남미나 아프리카 후진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정말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세계화를 강행했을 때 자신들의 안위와 자배력이 유지 또는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저자는 17~18세기 자본주의의 태동 이래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시스템과 세계화가 진행되었던 시대의 특징과 흐름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시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화 담론을 제시한다. 첫째는 각국 정부와 사장아 대체제가 아닌 보완재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넓고 바람직한 시장을 원한다면 정부의 개입과 관리가 필요하다. 가장 효율적인 시장은 약한 정부가 아니라 강한 저우가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본주의 모델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시장, 금융체제, 기업지배구조, 사회복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다양하게 조합함으로써 경제번영과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든 자국의 필요와 가치에 따라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으며, 이는 한 국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
저자가 20세기에 자국의 경제발전과 국제무역체제 속애서 모범적이라고 평가한 국가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의 위정자들은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체제와 방식을 내던져 버리고 한국경제와 국민들을 '세계화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21세기에 적절하다고 지목되는 국가는 중국과 인도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화의 새로운 담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전한 세계화'를 위해 4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국제 무역 제도 개혁, 국제 금융 규제, 국제 노동이동 완화, 중국과의 원만한 관계구축이다. 
 
 
- 인상 깊은 문단 :
 
"자본주의는 인간 사회의 경제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번영을 누리는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자원을 분배하고 경제적 보상의 정도를 결정하는 역할을 시장의 손에 맡긴다. 세계화는 자본주의를 범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세계화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세계화의 미래를 논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다." 

"시장은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요구한다. 세계시장은 더더욱 그러하다.
식량이나 다른 일용품 시장은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비교적 잘 돌아갈 수 있다. 작은 무리의 사업가와 금융인들도 공통의 신념체계만 가지고 있다면 무역과 교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 조금이라도 크고 범위가 넓은 시장이 오래 지속되려면 이를 뒷받침할 제도가 필요하다.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한 재산권 규범, 계약을 강제 이행하도록 해주는 법정, 구매자와 판매자를 보호해주는 무역 규칙, 사기꾼을 처벌하는 경찰력, 사업주기를 관리하고 부드럽게 이어나가도록 도와줄 거시정책 틀, 금융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기준과 감독, 금융위기 예방에 기여하는 최종 책임기관, 공공규범에 규합하는 보건 안전 노동 환경 기준, 약자를 위로하기 위한 보상 체제, 시장 리스크에 대비한 사회보험, 그리고 이 모든 제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금을 조달할 세금까지 그 규모는 어미어마하다.
한마디로 시장에는 '스스로 만들고, 규율을 세우고, 안정되게 하고, 적법화하는 능력'이 없다."

"세계화를 떠받치는 기둥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세계 시장은 매우 취약하다. 국가 차원에서 규제와 법령으로 지배하고 지원하는 국내 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 시장에는 독점 규제 기관도, 조정 기관도, 안전망도, 최종 책임자도, 무엇보다 전 지구적 민주주의도 없다. 바꾸어 말해, 세계 시장의 지배구조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며, 대중의 인정을 받기도 힘들다. 이러한 세계 시장의 특성은 각 국가의 시각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화에는 불안정 요소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세밀한 조정을 통해 균형점을 찾을 때에만 세계 경제 체제를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각국 정부에게 지나친 권력을 주었다가는 보호무역주의와 자립 정책을 초래할지 모른다. 반대로 시장에 자유를 지나치게 부여했다가는 세계 경제 불안을 초래해 필요한 사회적 정치적 지원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 2012년 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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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본기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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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를 이해하려면 서구 유럽이 겪어온 유럽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중에서 특히 그리스,로마 시대와 기독교 시대를 알아야 한다. 서구 언어와 습성, 문화와 학문, 정치와 경제의 근원적인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특히 중국과 한국(북한 포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반도 문화와 정치경제 역시 중국 고대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고대의 문헌이 상당수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 전세계를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상과 학문, 문화가 서구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학문 분야에서는 서구식 내용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동양의 각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동양의 고대 유적과 학문이 전세계에 전파되고 있고 서구 연구진들 사이에서도 전공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뿐 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 중심의 학문과 문화, 정치경제가 많은 문제점을 보이고 한계에 봉착하면서 역으로 동양의 그것들애 대한 탐구가 본격화되는 측면도 크다.

그런 면에서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흔들림 없이 서구 중심, 특히 미국 중심의 학문과 문화, 정치경제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20세기 말부터 사상학문에서의 통섭이 활발해지고 동양적인 가치와 제도가 일정 부분 인정받고 연구되고 있음에도 한국 내 학계와 문화계, 기득권 집단들 사이에서는 미국식 문화와 제도에 대한 과도한 편중, 잡착과 추종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실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막연하게 중국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역사의 뿌리 중 하나인 중국에 대해 아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게된 이유다. 이 책 말고도 읽어야할 책은 앞으로도 무수히 많지만...ㅋ

이 책은 중국 24사(史)의 필두이자 전 세계에서도 역사서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사기> 130편 중 제왕들의 전기를 담은 <본기> 12편을 역자가 한글세대에 맞춰 현대적으로 옮긴 것이다. <사기 본기>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당시의 왕인 한나라 무제까지 각 시기별로 패권을 장악했던 제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각양의 인물들을 호령하고 이끌었던 제왕들의 일대기를 담은 [본기]는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자 한 사마천의 역사관이 그대로 녹아든 <사기>의 근본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 영토를 통일했다면, 사마천은 관념적 ‘통일 중국’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사마천의 <사기>가 가진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지대하다고 평가된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전체 형식으로 쓰인 첫 역사서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본기>보다 <열전>이 많이 알려져 있다.
시간적으로는 상고(上古)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 아우르며, 공간적으로는 옛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 이민족의 역사까지 다루었다.

<사기>의 첫머리를 이루는 <본기>는 중국의 시조로 여겨지는 황제(黃帝)부터 한 무제에 이르는 제왕들의 이야기다.
이전의 편년체 역사서에서 시간순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한꺼번에 기술했던 것과는 달리, 사마천은 먼저 제왕을 내세워 뼈대를 잡은 다음 제후 등의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이로써 중국은 하ㆍ은ㆍ주 삼대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게 되는 통일 중국의 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다양한 민족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할거하며 패권을 다툴 뿐이었던 거대한 땅이 <사기> 이후 ‘중국’이라는 관념적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수십 개 나라의 역사도 하나의 중국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수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져,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함에도 통합된 중국을 가능케 하는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저자는 사마천이 [오제 본기]와 [하 본기], [은 본기]를 통해 시도한 '신화의 역사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사마천이 <사기 본기>에 실은 '오제'가 실존했는지에 대해서는 현대의 역사가들 입장에 서 있다. '오제'와 하, 은, 주 3국은 역사적 실체보다 신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은나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일부 유적이 발견되기는 하였지만, <사기 본기>애 담겨 있는 인물과 치세, 사건과 상황은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실체보다는 신화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처음 알게된 것이지만, <사기>는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발분(發憤)의 마음으로 쓴 역사서이다. 따라서 나라에서 관장한 관찬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사마천만의 독특한 사관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기 본기>에 실린 [항우 본기]와 [여 태후 본기]이다. 사마천은 역사는 개개인의 움직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으로 <본기>의 시작부터 전설 속 제왕 황제(黃帝)를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덕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인(人)’을 역사의 중심에 두고자 했다. 이러한 인식은 <본기>의 구성에도 파격을 일으킨다.
항우는 진(秦)나라 멸망 후 한(漢)나라가 패권을 차지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천하에 권력을 행사했다. 항우는 한 고조 유방과 끝까지 대적하며 한나라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넣었던 인물이지만, 사마천은 이러한 항우의 역할을 인정하여 <본기>의 한 편으로 [항우 본기]를 쓰고 [고조 본기] 앞에 두는 모험을 감행했다. 또한 한 고조의 정실부인이자 혜제의 어머니로 고조 사후 권력을 행사했던 여 태후를 내세워 [여 태후 본기]를 쓴 것도 이례적이다. 형식적으로 권좌에만 앉아있는 '허세'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인 '실세'를 인정하고 인간의 활동을 중심에 두는 사마천의 사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렇듯 사마천은 인간 중심적 역사관을 기저로 하여 탁월한 안목으로 인간과 세계를 탐구했고, 2000년이 넘도록 ‘인간학 교과서’라고 불리며 회자되는 <사기> 속에 생생한 인간상을 담아냈다. 

역자는 <사기>가 "역사서로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중에서도 항우가 입지를 굳히게 된 '거록'에서의 전투 장면이나 항우와 유방이 회동한 '홍문연'에서의 긴박한 장면 등을 묘사한 [항우 본기]는 독자마저도 숨죽이게 하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또한 <사기>에 담긴 제왕들의 이야기는 '사면초가', '금의환향' 등 수많은 고사를 만들어 냈고 당시(唐詩)나 송시(宋詩) 등의 옛 문학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작품에서도 모티프가 되어 꾸준히 이어졌다.
[진시황 본기]는 <진용>이나 <영웅> 등의 영화에서 배경이 되었고, 항우와 우 미인의 이야기를 담은 [항우 본기]는 경극 <패왕 별희>를 낳았다. 그 외에도, 걸왕과 함께 폭군으로 유명한 주왕의 몰락을 담은 [은 본기]나 중국 3대 악녀로 일컬어지는 여 태후의 표독스러움을 그대로 묘사한 [여 태후 본기]는 중국 역사가 생소한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보여 준다.


<사기 본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마천이 생각하는 정치의 이상적인 모습은 '덕치(德治)'였다. 나는 학자들과 역자의 분석과는 다르게 사마천이 [오제 본기]와 [하,은,주 본기]를 <사기 본기>에 앞세운 이유 중 하나가 역사자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덕치'를 당대의 한 무제와 이후 제왕들에게 이상적인 정치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기>는 한나라 이후 중국사 뿐 아니라 한반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흥망성쇠를 이어간 국가의 왕들과 정치가, 학자들은 모두 중국사의 주요 국가들과 인연을 맺고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정치와 경제 뿐 아니라 학문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 2012년 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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