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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ㅣ 정치경영연구소 기획총서 1
최태욱 엮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2월
평점 :
'자유주의(Liberalism)'는 그 역사나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이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권이나 언론, 학계, 경제계 등 어디에서도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차라리 1972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개정된 유신헌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후 이 개념과 용어를 특정 정치세력이 전용하고 있다. 원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었다. 18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자들이 폭력적인 왕권에 대항하여 만민평등의 자유주의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탄생한 이념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탄합하던 박정희 유신 군사정권이 당시 반공냉전주의를 등치시키는 이념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곧 전체주의이고 전체주의의 반대는 곧 자유주의라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사용한 것이다. 히틀러처럼 무자비한 군사파시스트 주제에...ㅠ
만민평등을 핵심 이념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한국 내에서 수구세력, 우익세력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좌파세력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진보세력이라 불리는 많은 이들 중에서도 '자유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수구,우익세력이 수십 년 동안 독점하여 사용했다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나 역시도 '자유주의'나 '자유주의자(Liberalist)'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차라리 무정부주의자나 아나키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호감이 더 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주변의 적지 않은 지인들 역시 마찬가지임을 느껴왔다. 아마도 내 나이대의 486세대의 경우는 지난 1980년대 대학에서 공부하고 고민하고 활동하던 경험으로 인한 선입견이 크다고 생각된다. 당시 대학과 학계, 지성계에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 또는 관련된 저작이 학생들이 세미나하면서 공부하던 주요 '텍스트'였다. 당시 일본이나 미국을 거쳐 대학에 들어온 이념은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남미의 제3세계론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 학습의 수준은 '추상적인 혁명 이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교재에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장, 사상, 이념이 '정통'이었고 베른슈타인과 같은 비주류 인사의 주장이나 이념은 자유주의, 수정주의, 또는 배신주의로 매도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어리고 순수한 대학생들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와 같은 자유도 민주도, 민중도 민족도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대한 미래의 이상향으로 사회주의 같은 이념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던 것이고 '수정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대열에 끼거나 낙인찍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던 젊은 시절을 거친 후, 대부분의 486세대는 내부적으로는 서구에 존재했던 근현대 정치사상의 역사와 그에 대한 비교, 장단점에 대해 더 이상의 추가 공부를 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붕괴하여 시장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미래의 이상적인 방향과 전망을 잃어버렸다. 갈길을 잃은 채 각자의 생업전선에 나서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부조리하고 문제가 많은 우리나라 체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그 이후 20~30년을 살아오면서 구체적인 현실에서 사회가 크게 바뀌어졌거나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은 겉보기에는 많은 것이 변했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박원순 현 서울시장이나 안철수 원장이 한국정치의 주요 관심인물로 부상한 작년 8~9월 이후, 나의 페이스북과 트위터 상에는 박원순 시장이나 안철수 원장이 '보수'또는 '자유주의자'라는 지적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때의 '자유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분히 부정적인 느낌을 내포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자칭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좌파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이 때의 '자유주의자'는 극우보수주의자가 아니지만 자신들의 진보세력, 좌파세력 내에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싫을 때 적용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글을 자주 접할 수록 "과연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자'는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깊어갔다.
보편적인 인권사상,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정치활동에서의 이성적 자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자유주의 핵심 영역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을까?
보펴적 인권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율성, 개인의 기본권이 국가와 공동체의 틀 안에서, 그리고 한 사회에 군림하는 지배적인 목표, 가치관이나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진 어떤 집단적인 가치에 우선한다는 관념과 문화, 사회적 가치가 자리잡을 때 만민평등의 자유는 실현된다. 그러할 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이런 이념과 가치, 정치사회관을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여전히 집단주의와 전체주의, 차이와 다양성의 불인정, 폄하나 비난이 지배적이지 않을까?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측면에서 보면, 정당은 정치를 경험하고 그 효능을 스스로 터득하는 정치교육의 장이다. 자율적, 자유주의적 인간은 이런 공적 공간에서 발생한다. 좁게는 대통령, 넓게는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좌우릴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정치의식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을까? 이는 한국사회가 '소극적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수용하고 얼마나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이 문제에 대한 고려를 회피하는 태도는 보수파들에 비해 개혁의 열정이 강한 진보세력 사이에서 결코 더 약한가?
정치활동에서의 이성적 자유의 측면에서 보면,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와 그 이후를 이어가고 있는 진보적 엘리트 세력들 사이에서 정서적, 추상적 급진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과 갈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현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적 정치조건, 정치문화에서 자유주의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이상과 목표를 과도하게 높게 설정하면서, 정치를 뛰어넘어 이를 일거에 해결코자 하는 경향성에 대한 어떤 해독제적 역할이 아닐까?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대의제를 중심으로 인식되어 미국처럼 보수독점 체제를 형성할 수도 있고 북유럽처럼 사회적 합의제로 작용할 수도 있듯이 자유주의 역시 어느 세력이 어떤 측면을 주도하느냐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될 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역사적으로, 과정상으로, 프레임이나 주도성의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자유주의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도그마로 작용하고 자유주의의 본성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에만 집착할까?
이 책은 그런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다.(지난 금요일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한 책인데 교재로 결정할 때 세미나에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일이 겹쳐서 금요일 세미나 참석도 못했지만...ㅋ)
처음 '자유주의'에 대한 이념과 역사, 전개과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 책은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였다. 최교수는 그 책에서 우리나라에서 묻혀져 있던 '자유주의'의 원래 이념과 정신, 내용과 필요성을 지적해 주었다.
이 책은 소수의 사람들, 즉 자유주의는 본래 진보적이거나 혹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내세운 (자유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는) 조건은 물론 서로 다르다. 그중 고세훈(3장)의 조건이 아마도 가장 까다로울 게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자유주의가 정녕 진보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정치를 통해 개혁에 대한 현실적인 실천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에 비해 최장집(2장)이 덤덤히 서술하는 자유주의의 진보성은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는, 냉전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시장주의나 경제적 자유주의로 연결되는 자유지상주의는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유주의란 법치주의, 입헌주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의미할 뿐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부터 만인평등의 이념이다. 그러니 “만약 ‘진보’가 …… 현실 속에서 권력과 사회경제적 자원에 있어 약자와 소외자들의 권익을 증진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자신의 위치에서 실제로 그렇게 행위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한국의 현실에서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에 가깝다.”
설령 (고전적) 자유주의가 애초에 경제적 자유주의를 포괄하는 사상이었다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가 보수의 틀에 갇혀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이근식(1장)이 정의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포괄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결별을 선언한 ‘새로운’ 자유주의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대신 사회적 자유주의로 자유주의 본래의 진보성을 회복, 유지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이 책의 필자들 대부분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한국의 신자유주의 대안 이념으로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에서 자유주의의 진보성 회복 운동이 복지자본주의 체제라는 결실을 맺었다면, 21세기 전반기에는 한국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그간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왜곡,오용되어 왔다. 이제 제대로 논의해 봐야 한다. 그것을 본래의 그 광명정대하고 진취적이며 역동적인 성격의 자유평등이념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시민들이 그 진보적 자유주의의 가치에 공감해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대안 체제 구축에 나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재벌과 대기업 등의 자유를 통제할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다. 정치권력보다는 경제 권력의 특권적 자유가 일반 시민들의 평등한 자유에 대해 더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통제는 구미의 역사가 증명하듯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진보성에 관한 한 자유주의는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가 진보성에 관해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면 다음으로 따져 봐야 할 것은 그 진보성의 발현 능력, 즉 사회개혁 실천능력이다.
지금 한국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산적해 있다. 신자유주의는 한마디로 자유주의 사상 중에서 정치적,사회적 자유주의를 제거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만 강조한 기득권자들의 논리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언어의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정의사회'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우롱하고 이명박 정권이 '녹색성장'에서 '녹색'을 덧칠한 것처럼...
진보적 자유주의가 실천력 있는 진보 이념이라면, 고세훈의 지적대로 “확대와 심화일로에 있는 빈곤과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는 데 체계적이고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박동천(4장)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의 실제적 과제, 즉 공동체를 위한 실존적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의미 있는 진보 이념이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제 특정 계급의 이익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봉사한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복지국가 전략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들은 노동 세력을 뛰어넘는 ‘복지 세력’의 연대를 강조한다. 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시작된 서구의 현대 사회민주주의가 이와 같이 계급 정치 일변도에서 벗어나 계급 교차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의 진보적 자유주의와의 차별성은 더욱 옅어진다. 결국 사회민주주의든 진보적 자유주의든 어느 깃발을 들던 간에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복지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양자 간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노동 정치만으로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봉급생활자이지만 그들 중 ‘노동계급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들은 대부분 중산층 의식을 갖고 생활한다. 그러니 노동조합 조직률도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해 OECD 최하위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약한 노동이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럽의 경우와 같이, 아니 그 경우보다 더 절실하게 강한 시민 연대가 필요하다. 계급을 가로지르는 시민 연대가 하나의 복지 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열린다. 한국에서도 이젠 사회민주주의가 특별히 실천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민 민주주의로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해 가야 한다는 점에 있어 그것은 진보적 자유주의와 동일할 뿐이다.
자유주의의 최대 장점은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유연성과 시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장집은 “자유주의의 힘은 그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성을 갖는 원리와 가치를 함축하고, 인간의 사회경제적 발전, 문명 및 교육의 발전과 더불어 그 보편성을 확대시켜 왔다는 데 있다. 그런 평등의 이념은 전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한 사회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어 왔다. 동시에 보편적 인권의 내용은 심화되어 왔다”라고 경탄한다. 자유주의는 어느 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다른 때에는 경제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던 고전적 자유주의가 사회적 자유를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그리고 심지어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까지 발전해 가는 까닭이다. 강조점은 이처럼 시의에 따라 적절히 달라지나,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늘 동일하다.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자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의 자유 수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지상과제다. 이 자유를 훼손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집단이나 조직의 권력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 권력은 정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이나 언론, 혹은 종교 집단일 수도 있다.
케인스주의 혹은 민주적 시장경제, 질서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민주주의 혹은 복지자본주의 등 명칭을 어떻게 하던 간에 전후에 등장한 구미의 조정시장경제 체제는 그 내용에 있어 모두 진보적 자유주의의 구현체였다. 달리 말하자면, 진보적 자유주의가 현지 사정에 맞는 방법론을 택해 자신의 가치를 시의 적절히 구현해 갔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방식도 그 다양한 방법론 중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최장집이 강조하듯이, “자유주의의 장점은 그 개방성과 자체 교정 능력을 갖는 유연성으로 인해 현실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만나면서 굉장한 현실 적응 능력을 실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이념은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운영함에 있어 그 정치적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신’자유주의(현대의 신자유주의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즉 국가의 시장경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는 새로운 자유주의)가 될 수도,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실천력은 이와 같은 방법론적 유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진보성은 현대 사회민주주의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실천력은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더 우수하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 구축에 필요한 신자유주의의 대안 이념으로서 진보적 자유주의는 충분히 훌륭한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전반기에 구미 선진국들이 그리했듯이, 21세기 전반기의 한국도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해 한국형 조정시장경제 체제를 발전시켜 갈 여지는 충분하다. 홍종학(5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이미 그런 실험이 행해졌음을 상기시킨다.
사실 ‘국민의 정부’는 한국 최초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지향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국정 목표 자체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한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비록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한국에서 민주적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보고자 했던 의도는 분명했던 것이다. 홍종학은 김대중 정부의 실험이 성공에 이르지 못했던 요인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정부의 민주적 개혁 역량이 재계의 힘을 관리,조정하기에는 부족했던 탓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 진영의 담론이 실천적 정책으로 충분히 구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이 맞는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민주적 시장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조건은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하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민주적 개입이 효과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조건을 갖추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와 정책으로 구체화된 민주적 시장경제 체제의 현실적 설계도를 제대로 작성하는 일이다.
유종일(6장)은 이 책에서 뒤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즉, 진보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는 대안 체제의 구성 요소와 핵심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평등과 시장경제의 효율을 화학적으로 결합한 체제”는 기회의 평등과 분배의 평등화를 위해 민주적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는 체제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적 조건에서 이 같은 사회경제 체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재벌 개혁,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의 민주화, 복지의 확대, 그리고 정부와 공공 부문의 개혁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선학태(7장)와 최태욱(8장)은 앞의 조건에 대해, 즉 정치적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채워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두 사람은 공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한국형 사회적 합의주의'의 창안과 정착이라고 강조한다. 사회적 합의주의야말로 민주적 시장경제의 근간인 동시에 그 체제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민주적 거버넌스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학태는 한국형 모델로서 “동반 발전형 사회적 합의주의”를 제시한다. 한편, 최태욱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조건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비로소 충족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다수제 민주주의와는 달리 사회적 합의주의를 촉진시키는 제도적 기제를 내장하고 있는 바, 그것이 바로 민주적 시장경제를 포함한 조정시장경제 체제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제도적 기제란 다름 아닌 ‘포괄 정치’를 작동케 하는 비례대표제, 온건 다당제, 연립정부 등의 협의주의 정치제도들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저자의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여러 세력이 독점이나 독선이 아닌 합의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재적 각성이 필요한데, 아직 한국사회의 기득권 집단과 그들을 대신하는 정당은 전혀 그런 생각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능하다면 10~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민주진보 진영이 총선과 대선을 연이어 승리하면서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와 체계를 바로잡고 사회복지를 향상시키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최선의 합의주의' 정도로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지지세력과 99% 유권자가 등을 돌릴 수 있고 반대급부로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얻을 점은 자유주의라는 단어나 개념, 근대 자유주의의 복권, 또는 자유주의의 장점이나 가능성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성적 가치와 철학, 즉 만민평등의 이념, 본원적 평등,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앞으로의 정치사상의 중심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난 자유주의자로 살고 싶다.
[ 2012년 2월 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