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 우리시대 학술연구
문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지난 연말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우연하게도 공부모임에서 세미나 교재로 최근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책 두 권을 선택했다. 이 책과 더불어 최장집 교수 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최태욱씨가 엮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 역시도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자유주의'라는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한국사에서 자유주의 담론의 형성과정을 다룬다는 저자의 서문을 읽었을 때 호기심이 컸다.

사실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진영의 일부 인사들의 폄하가 미덥지 않았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유주의를 "재산을지닌 부르주아적 개인들, 즉 근대적 의미의 유산자들의 정치 이념"이자 "이러한 '소유적 개인들' 모두의 자유 공화국을 옹호하는 정치 이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역사적으로 서양 자유주의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기해 온 전형적인 비판임은 맞는 말이다.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한 서양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공식적인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애초에 저항이념으로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진보성과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도덕성을 거의 상실한 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된 19세기 이래로는 저쩜 계급적,제국주의적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그가 경험했던 19세기 현실의 자유주의에서 출발했다. 
요컨대 자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역사적'인 것으로서, 그 문제의식이나 분석대상, 모색된 대안의 적실성과 설득력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곧 마르크스주의적 자유주의 비판이 역사적 맥락을 초월해 어떤 경우에나 무조건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다.
1980년대 한국사회 변혁론의 자유민주주의 비판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적 맥락을 고려할 때, "한국의 자유주의는 계급 중심적 관점에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면이 있으며, 한국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부재'를 곧장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부재 내지 빈곤으로 연결지어야 할 근거는 더욱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는 아주 불편한 단어이자 이념이었다. 그래서 사실 무수한 궁금증을 일으킬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 질문이라 함은, 한국에 자유주의가 도입된 것은 미국의 반공 기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얻어진 우연한 결과인가?, 정부 수립 후 자유주의는 오직 독재 정권의 정치적 수사로만 존재했을 뿐인가?,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 표방된 자유주의와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발전한 자유주의 간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반공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억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한국 자유주의의 익숙한 딜레마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서양 자유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국 자유주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결국 자유주의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건져 낼 수 있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가?...와 같이 끝이 없다.

저자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책에 담았다. 그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둘러싼 통념과 또 자유주의에 대한 서구 중심적 혹은 일면적 평가를 극복하려는 시도도 포함한다. 요컨대 이 책의 목적은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도입, 전개 과정을 추적하고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특성과 전망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좀 더 민주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흔히 ‘한국의 자유주의’는 회의적 냉소적 반응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저자는 그 배경을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분석한다. 
먼저, 반공 분단국가에다 오랜 독재 정권기를 거친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부재했다거나 또는 비정상적이고 미약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한국 사회와 연관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입장과 관련이 있다. 전자가 이념과 사상으로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 비판적이라면, 후자의 입장은 대개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이처럼 그 주제가 직면해 왔으며 또 직면할 수 있는 직접적, 잠재적 비판에 대응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먼저 이 책은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곧 ‘한국의 자유주의화’와 한국의 역동적인 역사적 맥락이 자유주의의 전개 양상 및 성격에 제공한 새로운 면모, 곧 ‘자유주의의 한국화’를 동시에 천착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조명, 평가한다. 
다음으로 이 책은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 즉 ‘지배’ 이념으로 표방된 동시에 그에 맞서는 ‘저항’ 이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한국 자유주의 특유의 전개 양상에 주목하며, 이 점을 드러내고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은 이처럼 ‘한국의 자유주의화’와 ‘자유주의의 한국화’ 그리고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이 씨줄과 날줄로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 내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공과나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맥락에 대한 고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각 장의 중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부 -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과 계보는 개화기 이래 자유민주주의적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투쟁했던 주체적인 노력들을 중심으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및 계승사를 추적한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기원은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었다기보다 갈등과 혼란을 동반한 복잡하고 장기적이며 무엇보다 주체적인 일련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제1부 전체 논의의 목적이다.

1장 - 개화와 자유주의는 ‘서구 근대의 충격’과 그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대응’을 주제어로 자유주의 수용의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고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 일단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항 이래 자유주의의 수용을 위한 노력이 어떤 특성을 보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본다.
2장 - 식민지 시기 자유주의의 굴절과 전화는 일단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어떤 식으로 살아남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식민 통치하에서 자유주의는 정반대의 두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종국적으로 친일,부일의 논리를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그 하나라면, 전투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띠게 된 것이 다른 한 길이다. 이 장에서는 윤치호, 이광수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자의 길을, 양기탁과 안창호, 신채호와 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와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독립운동 이념을 중심으로 후자의 길을 각각 살펴본다.
3장 - 근대국가 형성과 자유주의는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인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과 ‘민족 통일’이 동시에 실현되기 어려운 별개의 과제로 분리되어 인식됨에 따라 자유주의 세력이 우파 민족주의 진영(김구,김규식등)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와 이승만 등 친일적인 극우 단정 세력과 손을 잡게 되는 맥락을 들여다보고, 특히 조소앙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근대국가 건설 이념으로 작동한 자유주의의 특성을 살펴본다. 또한 제헌헌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초기 제도화의 특성과 한계를 검토한다.

제2부 -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이념과 현실은 헌법과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 국가보안법 분석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의 이념과 현실, 실상과 허상을 드러낸다.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외양과 실천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데, 제2부에서는 이 괴리를 구체적으로 부각시켜 그 계기와 진행 과정, 결과를 고찰하는 데 집중한다.

4장 - 자유민주주의 헌법 이념: 제1차 개정 헌법에서 제5공화국 헌법까지는 각 개정의 맥락과 쟁점들을 분석하면서 헌법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굴절, 변조되는지 살펴본다. 거듭된 개정은 결국 독재와 공존 가능한 혹은 독재를 뒷받침하는 명목상의 자유주의만 헌법에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또한 입헌주의의 정착을 요원한 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데 치명적이었음을 지적한다.
5장 -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과 자유주의는 독재 정권이 구사하는 민주주의 담론이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어떻게 왜곡하고 위축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전두환의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담론으로 대변되는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방종이나 분열로 매도하고, ‘일민’이나 ‘국민 총화’ 같은 전체주의적 가치를 강요하며, 무엇보다 ‘국가 안보’를 ‘자유’에 앞세우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변질시켰음을 보여 준다.
6장 - 반공주의의 신성화와 자유주의의 위축은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가 자유주의의 발전에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맥락과 메커니즘, 그리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여기서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를 안정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제도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 장의 논의는 국가보안법이 안보와 자유를 양자택일적인 가치로 만들고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억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강제함으로써 반공주의에 의존한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해 왔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내세우는 국가 안보라는 가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 자체가 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기보다 구성원 개인을 배제한 채 국가권력을 정치의 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지배 질서를 존속시킨다는 점에서 반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다.

제3부 - 민주화 담론과 자유주의는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자유주의가 ‘지배’의 장을 떠나 ‘저항’의 영역을 추동하고 확장하는 기능에 복무하게 되는 역사적 맥락을 추적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국가보안법의 구속을 받는 자유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치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했을 뿐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이름에 걸맞은 이념과 실천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을 통해 발전하게 되는데, 반독재 민주화 담론과 비판적 지식인 담론의 분석을 통해 자유주의가 저항 이념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형성하게 되는 특성을 살펴본다. 또한 1980년대의 상황을 자유주의적 민주화 담론이 어떻게 대응,대처하는지도 살펴본다.

7장 - 반독재 민주화 담론의 형성과 전개: 1950~70년대는 이승만 정권 이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제기된 학생 운동권 및 재야사회 단체의 시국 선언문, 성명서, 결의문 등과 <사상계>를 통해 저항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드러내는 특성을 분석한다.
8장 - 비판적 지식인 담론의 자유주의는 정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자신의 분야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운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담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장준하(사상계)와 함석헌(씨알의소리), 리영희(전환시대의논리, 우상과이성), 한완상(민중과지식인)의 사상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민주화 운동 이념으로 발전한 자유주의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을 살펴본다.
9장 - 자유주의적 민주화 담론의 굴절과 균열 그리고 새로운 전망: 1980년대는 ‘독재 대 민주’의 대치선을 따라 단일한 하나의 진영을 구성한 채 통합적 전망을 제시해 오던 저항적 자유주의 담론이 이른바 ‘1980년대적 상황’에 직면해 내적 균열과 분화를 겪고, 상대적으로 보수화되는 배경과 맥락을 보여준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저항적 자유주의는 특정한 계급적 이해를 공유하는 세력이 아니라 특정한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세력에 의해 지지되었고, 이 점에서 계급적 기반과는 무관하게 민중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모순 구조가 좀 더 복잡하게 전개되는 1980년대 들어 비계급적 혹은 탈계급적 연대는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저항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영향력을 잃지 않고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는지 살펴본다.
 
 
저자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옳고 다른 이념은 그르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만민평등과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라는 원론으로만 보면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도 기본적인 담론의 토대로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동서양에 존재하는 많은 미래의 담론이나 이념 중 한국에 적합한 것이 마땅히 없고 서구에서 한 때 진보적인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가 한국에서 다시 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필요한, 21세기의 담론으로 기능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 자유주의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 2012년 2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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