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0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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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 남북통일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선배와 카페에 앉아 애기를 하던 중 함께 공감했던 대목 중의 하나가 북한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 인민들 삶의 곤궁함은 물론, 북의 정치체제가 조선시대를 방불케 하는 봉건적 절대왕조체제인 점, 정권 지배계층의 안정이 인민의 생존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처리된다는 점, 남북관계 악화로 실제 고통받는 쪽은 집권자측보다 인민들과 하위 조직구성원들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북한이 그동안 자의반, 타의반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정보가 차단되어 있고 미국과 남한의 경우 지배계층들이 정치적, 사적 목적을 위해 북한의 정보를 왜곡, 조작해왔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알기가 쉽지는 않다. 겉보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전후의 경제강국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 보면 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 빈민들이 과반수에 이르고 어린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1위에 이를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적 공동체가 크게 무너져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북한 역시 그동안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소식과 달리 실제 내용은 무척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 정권이라도 해서 완벽하게 내부 정보를 차단할 수는 없는 일이고 중국과는 경제,문화교류가 활발한 상태이며 그동안 남북간 경제교류도 진행되어 왔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지원이 계속되기 때문에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다. 기본적인 정보는 외부에 제공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특히 지난 20~30년 간 북한정권이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함에 따라 주민들의 사정이 더 열악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아주 빈약한 정보와 편합한 언론 기사, 미국이나 남한정권의 적대적인 공세, 중국이나 일본과의 또 다른 오묘한 정치외교적 관계 등으로 일반인들이 북한 내의 자세한 사정이나 과정을 어떤 흐름을 통해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부터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고 편협한 상황인 것 같다.

북한 내에는 지배계층과 조선노동당이나 군대, 다수의 인민들만 존재할까? 오로지 북한정권에 맹복적으로 충성만 하는 이들과 탈북자만 있을까? 탈북자의 경우도 황장엽 같은 고위 간부, 김만철과 같은 인민들만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 전두환, 박정희, 박그네 같은 꼴통들이나 무조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려는 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을 지닌 수많은 생각과 태도를 지닌 이들이 있는 것처럼 북한에도 북한정권을 반대하고 남한 수구기득권 세력을 선호하거나 민주진보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남북의 지배계층을 모두 반대하고 제3세계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북한정권을 반대하면서 장기적으로 북한을 '인민주권'의 국가로 변화시키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실화 같은 소설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부터 책장을 덮을 때까지 '실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 속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생각, 처지, 고민, 상황들에 깊게 몰입되었다. 그가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미군의 평양 폭격으로 처자식이 폭사될 때 허탈감과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한국전쟁 후 북한정권의 안정을 위해 박헌영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는 주인공의 태도에 나도 그의 입장을 두둔하기도 했고 그가 변질되어가는 북한체제에 점차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절망할 때 공감할 수 있었다. 암울한 현대사로 인해 중년에 찾아온 '인연'을 맺지 못한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정에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일흔 여덟이라는 고령임에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최고책임자에게 인민의 삶과 대의를 알리고자 했던 주인공의 헌신에 고개가 숙여지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38년, 식민지 조선에서 연희전문에 등록한 청년 이진선의 일기 형식을 띤 이 소설은 우리 현대사를 장식한 굵직한 인물들의 행적과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길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장중한 역사의 흐름 못지않게 이진선이라는 순수한 사회주의자의 삶을 조망하기도 한다.
이진선의 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순수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 여전히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최첨단 통신기기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폭넓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사이의 벽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와 보수 단체의 갈등은 점점 깊은 골을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인문학의 몰락이 예견될 정도로 사상의 가치가 홀대받고 있는 형편이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p.17)라는 첫 문장은 개인의 삶과 사회주의의 사상적 가치를 우리 시대에 맞게 모색해보려는 작가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기의 작성자인 이진선을 통해 우리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과 사건을 지척의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 불교계의 거목인 휴허 스님,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과 박헌영,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황장엽, 월북한 후로는 김일성과 그 주변 인물들과 어우러지면서 안타까움과 분노의 60년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진선, 개인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삶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여린과 아들 서돌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광경, 최진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집은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삶을 거미줄처럼 잘 짜낸,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순수한 꿈이 일그러져 가는 과정을 통해 불신과 분열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희망의 우리 현대사를 살펴보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피부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역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진선의 일기를 통해 지원병 제도와 조선교육령이 1938년에 실시된 사실, 민족지를 자처하던 신문들이 지원병제도와 조선교육령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한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냉혹한 비판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진선의 일기가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분단된 조국과 그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과 권력가들의 행태이다.
주인공은 남한의 현실뿐 아니라 북한 권력의 심장부에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그들이 순수한 민족애를 어떻게 좌절시켰는지, 지금의 분단 현실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냉철한 시선으로 되돌아본다. 그 과정 속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낯선 북한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전후 사상 재검토의 피바람, 남로당의 숙청,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과 소련 공산당과의 소원해지기도 하고 긴밀하기도 했던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남녀 성비가 맞지 않으면서 과부와 적령기를 넘은 처녀들이 넘쳐나는 등의 사회적 문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4·19혁명이나 5·16쿠테타, 518 광주민중항쟁, 6·29 민주화 선언 등 굵직한 남한의 역사적 사건을 북한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대면할 수도 있다. 북한의 실상에서 사회주의 사상에서 점점 멀어져가며 몰락하는 봉건왕조의 모습을 주인공은 비정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참한 과거와 현실을 들추어내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 즉 ‘아름다운 집’을 세우자는 뜨거운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잃어버린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고, 진실한 삶을 모색케 하는 성찰을 선사해 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 땅 어딘가에서 인민들의 삶과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을 제2, 제3의 이진선, 최진이씨에게 격려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 2012년 4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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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 - 대한민국의 학교를 단번에 바꿀 교육 정책 제안
이기정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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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학부모나 그렇지 않은 시민들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교육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갓 같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스스로의 경험에 의한 것이든, 언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든 관계없이 교육문제는 빈부격차와 양질의 일자리 문제와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입장에서도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달려있고 주변 친척, 지인들 대부분이 초, 중, 고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대화나 관심사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교육이 문제'라는 생각에 대한 어려운 점은 학부모 대다수가 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면서 대처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이런 대처방식은 교육문제만은 아니다. 일자리 문제, 소득의 문제, 주거의 문제, 사회복지의 문제 등 대부분의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를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대처방식은 본능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매일매일 겪는 문제이고 자신에게 목숨과도 같은 피붙이 아이들의 문제인데다가 하루아침에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대처하거나 사회정치적으로 해결하는데 개개인들이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할 뿐더러 그에 따른 비용과 노력이 과도하게 투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과 이들이 정치권과 정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기대를 많이 포기한 듯 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특히 상당수 사람들이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16~17대 국회에게 기대를 걸면서 민주정부의 개혁적인 교육정책을 기다렸다가 크게 실망하면서 개별적인 대응이 확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럼에도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16,17대 국회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정치권, 관료출신들이 자신들이 교욱정책을 잘못 폈다는 것, 그 부분에 대해 학부모들과 유권자들이 실망하고 절망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시민단체들과 진보언론들, 전교조 등 사회단체들 역시 정치권 만큼의 실수와 부족함을 계속 반복해왔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처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하고 개별적인 노력과 접근으로는 충분할 수 없고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교육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이제야 교육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먼저 교육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나 역시 여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나의 노력은 <핀란드 교육혁명>과 <핀란드 부모혁명>, <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 >와 <학교개조론 >, 파울로 프레이리와 체 게바라, 노엄 촘스키의 교육관련 책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고 앞으로는 내가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외부적인 노력을 시작하는 것...

 

이 책은 원래 내가 교육문제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던 세미나 교재였다. 저자의 생각은 지난 주 <학교개조론>(2007, 미래인)을 통해 처음 접했다. 저자는 <학교개조론> 발간 후 4년간의 상황변화와 연구의 진척 등을 반영하여 2012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이 책을 발간했다.
저자는 2012년 대통령 선거가 "학교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학교개혁이 한두 개 정책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정부 내 교육부서 하나가 변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개혁 방안 여러 개를 한꺼번에 제시하여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을 교육으로 만든다면 교육에 희망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저자의 책 발간 취지와 비교하면 책의 제목이 저자의 의도라기보다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출판사의 기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ㅋ)

 

저자는 이 책에서 <학교개조론>에서 제시한 개혁정책과 조금 다른 여섯 가지 정책을 'BIG 6'라는 이름으로 제시한다. <학교개조론>의 핵심 개혁정책 세 가지 중 '교육과 사무행정의 분리'와 '교장선출제'는 유지, 보강하고 '교원평가제'는 제외시켰으며 새로이 '중고등학교의 무학년 학점제'와 '학급당 학생 수 20명으로 감축' 그리고 '특목고, 자사고 폐지와 고교평준화 확대'와 '교과서 자유발행제도 및 자유선택제도'를 추가하였다.('교원평가제'의 경우 저자가 보기에 이미 알맹이가 빠진 채 형식적으로 도입되어 학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BIG 6'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교육개혁 정책 'BIG 6'을 자세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나름대로 6가지 정책의 상호 연관성과 파급효과 순위도 정하고 각각의 정책에 필요한 예산도 산정하여 제시한다. 또한 각 정책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 순위도 매기고 기존 제도와의 충돌 가능성, 좌우파가 갖는 거부감, 타협과 양보 전략도 제시한다. 저자로서는 단순히 자신이 제시한 정책의 옳고 그름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구체성과 정치권과 기득권 집단의 상대적인 반응 등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정책의 현실가능성을 높이고자 연구한 흔적이 엿보인다. 저자가 서문에 밝혔던 "교육정책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과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울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대한민국 교육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경쟁 위주의 입시 체제가 아닌 '학교의 무능'이라 지적하면서 "입시가 사라져도 지금의 학교는 질 좋은 교육을 절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학교의 무능을 개선하고 어떠한 교육 형태에도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안한 것이 바로 '교육 정책 BIG 6'다. 무엇보다 우열반 수업이 아닌 수준별 맞춤형 수업의 실시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학급당 학생 수 감축 방안으로 소개한 교실 수 확대 요령과 교사의 사무행정업무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10만 교원 충원 방안, 교원성과급을 이용한 사무행정업무전담직원의 채용은 서로 단단히 엮여 있어 정책상의 빈틈이 없다.
학생들의 능률적인 학습을 위해 무학년학점제로 실시되는 수준별 맞춤형 수업은 각 학생의 수준에 맞게 필요하고 가능한 만큼의 학업을 이수하도록 유도하여 학생들이 천편일률적인 수업에서 받는 고통을 최소화해 학습 의욕을 극대화하는, 학교교육의 기본 가운데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 정책 'BIG 6'은 이처럼 기본에 충실한 교육의 큰 틀 하나를 제대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교원들의 교육 활동 집중도를 높이고 1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일석이조 이상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교육개혁 정책 'BIG 6' 이외에도 저자가 추가한 교육개혁 과제인 학교 도서관의 활성화, 수능시험의 단순화, 청소직원 도입, 교육전문 대학과 학교현장의 연계, 교장의 수업참여도 충분히 필요하고 가능한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2부에서 고찰하는 '교원평가제'와 '전교조에 대한 검토', '무상급식 논쟁'과 '평준화 폐해에 대한 시각', '교욱에서의 포퓰리즘'과 '수렁에 빠지지 마라'는 소위 좌, 우파로 나뉘어 진영논쟁과 같이 비생산적으로 논의되는 부분들에 대해 이념적인 시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과 교육 당사자와 수혜자 입장에서 각 사안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함에도 두 가지는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학교무능론'과 개혁정책 실현전략이다.
첫 번째 '학교무능론'의 경우 현재 우리나라 교육현실의 문제를 '학교의 무능'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고 왜곡의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분석하고 평가한 한국 교육현실, 교육현장의 문제는 '학교의 무능'이 아니라 '학교제도(시스템)의 문제'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현재 학교 내 교육의 중요한 문제는 대부분 교육자치가 허울만 있을 뿐 실제 존재하지 않고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제도와 시스템으로 학교교육을 망가뜨리고 있음이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교사와 학부모, 아이들이 책임질 문제도 아니거니와 그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이 아닌 것이다.(영향을 일부 미칠 수는 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교사들과 학부모들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바꿔야 할 대상이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저자의 교육개혁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전략에 대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정책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은 느껴지지만 반대로 실현가능한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바람대로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교육개혁 정책이 중요한 공약 중 하나가 되고 선거 쟁점에서 논의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새로 당선된 대통령 당선자의 정책의제에 반영되어 내년부터 한 가지씩 실현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 '가능성'이나 '전략'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본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절실한 문제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2010년 지자체 동시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주요 선거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도록 교육개혁을 원하는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혁정책을 여론화시킬 것인지, 누가 중심이 되어 논의를 확산시킬 것인지, 각 정당에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등이 제시되어야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개혁 정책의 입법자를 국회에서 선출하는 지난 4월 총선에서는 교육과 관련한 정책이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교육 관련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답답함도 많이 느껴지고 전교조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이 커진다. 나도 그만큼 기대가 컸고 앞으로 기대도 크다. 그동안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나 자신도 실망스럽고...ㅠ

 

[ 2012년 4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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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개조론 - 유명 학원 강사 출신 현직 교사의 명쾌한 교육 해법
이기정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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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사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사교육이 정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아이들을 학원에라도 보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뒤쳐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학원에 가지 않으면 아이들이 동네에서 함께 지낼 친구들이 없어서. 학교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아이들이 집에서 놀고 오락만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부모로서 아이들에 대한 의무감을 다했다고 생각해서. 부모 모두가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하교 후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기 때문애 자신의 아이가 뒤쳐질까봐 무서워서..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여기에 적힌 이유 중에서 적어도 한 두가지 이상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아이들이 사교육에(사교육, 공교육을 포함해 절대적인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록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사교육에 보내는 이유를 연결해보면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공교육에 대한, 학교에 대한 불신이다. 학교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 안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게, 선생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 끊임없이 바뀌는 입시제도에 대한 불신과 불안, 아이들의 권리와 이익보다 교육관료들과 교사들의 권리나 이익에 더 민감하다는 불만, 참교육이 아니라 시험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교에 대한 불신, 아이들을 동등하고 평등하게 대하지 않고 무한경쟁과 불평등한 관리로 인해 아이들이 학교에서 상처받고 있다는 불신 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불안과 불신, 불만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닐 것이다.  부모들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그리고 주변 지인들의 경험에 의해 생겨나고 증폭되고 굳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길래 이런 정도까지 학부모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보통 학부모들이 학교 내의 현실과 상황을 알기는 불가능하다. 아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으로, 그리고 간할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사들과의 만남이나 행사 또는 연구수업에 참여해서 학교의 본 모습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학부모 운영위원을 맡는다고 하여 자세하게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들끼리 모여 추측하고 토론한다고 하여 학교실정을 제대로 알 수도 없다. 나 역시 여러번 학교 행사나 모임에 참석했지만 그런건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학교의 실상, 교사들의 모습, 교육체계와 시스템, 제도와 운영방식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 하나가 있다. 오래 알고 지내는 친구 중 드물게 그 찬구는 지금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그 친구는 지금껏 내가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 중 겸손, 성실, 정직, 헌신, 배려 등 다양한 부분에서 최고점을 줄 수 있는 드문 경우다. 그 친구는 진로에 대해 오랜 고민 끝에 교직을 선택한 친구였다. 내가 정신이 없고 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친구와 자주 통화를 할 수는 없지만, 가끔 통화할 때마다 자주 듣는 이야기는 "학교의 사무행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야근을 하고 있다."였다. 그래서 그친구는 저녁 모임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교육과 교직에 대한 친구의 헌신과 노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교육당국과 학교의 현실은 교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이 땅의 미래에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가 더 이상 교육현장과 아이들을 망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전달되지 않을테지만...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학교의 무능'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한다. 책의 마지막 단락에는 학교가 무능함을 넘어 정말이지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음을 속속들이 애기해준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 학부모들이 겉치레와 형식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보충수업, 머리카락 길이 단속, 수업지도안, 봉사활동, 수업진도표, 부장회의, 시범학교, 연구수업 등에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학교의 무능함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교사들이 수업을 아무리 잘해도 보상이 없다. 둘째, 수업을 아무리 못해도 불이익이 없다. 셋째, 학교 제도가 극도로 비효율적이다. 이들 문제는 교육제도와 행정시스템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시스템은 학교 현장에서 '교육'이 아닌 사무행정이 중심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능력과 의지를 평가하지 않는 시스템, 사무행정으로 교사와 학교의 자질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제도화되어 있는 이상 개인적인 의지나 한신성과 관계없이 교사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등한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무능한 학교를 개혁(개조)하기 위한 처방으로 교원평가제, 교육과 사무행정의 분리, 그리고 교장선출제를 제시한다. ‘교원평가제’는 수업을 중심으로, 학생이 교사를 직접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무 행정 능력으로 교사들을 평가하는 기존의 교원 평가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자는 의미다. 교사는 수업 및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육과 거리가 먼 사무 행정은 전담 인력을 따로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 ‘교육과 사무 행정의 분리’다. ‘교장선출제’는 선거나 교황 선출 방식, 추첨제 등을 활용하여 교사들이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을 교장으로 뽑는 방식이다. 

 

저자의 교육 개혁 방안 중 가장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이 교원평가제다. 기존의 근무평정 방식과 달리 저자가 주장하는 교원평가제의 대상은 철저하게 수업 또는 직접적인 교육 활동이며, 평가의 중심 주체는 학생이다. 저자는 교원평가를 바탕으로 학생을 성추행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 수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교사는 교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원 평가가 구조 조정을 초래한다는 전교조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일축한다. 

교장선출제와 관련하여 교장이 되기 위해서는 두 번의 타락을 거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업과 교육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한 번, 비열한 경쟁 과정에서 또 한 번. 교장이 되는 데 필요한 승진 점수 중 가장 비중이 큰 근무평정 점수는 교사의 교육 능력보다 사무 행정 능력이나 교감·교장의 평가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에, 교장이 되려는 사람은 일찌감치 수업이나 교육과는 담을 쌓고 근무평정 점수 올리기에만 골몰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교사들이 교장을 직접 뽑는 선거, 교황을 선출하는 식으로 후보자 없이 교사들이 덕망 있고 능력 있는 교사에게 표를 던지는 방식, 선거+추첨, 교황 선출 방식+추천 등을 제안한다. 이 방법들은 로비와 청탁이 동원되는 기존의 교장 임용 방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다. 

전교조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교육문제의 심각함에 비해 전교조의 활동 성과가 부진한 것에 내심 걱정하는 상태였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전교조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지만 전교조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평가에 대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그동안의 전교조 투쟁을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에 비유한다. 7차 교육과정 반대, 중등교사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 임용 반대, NEIS 반대, 교원평가제 반대 등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구조 조정이 교사들의 목을 자를 것이라는 헛된 위기감에서 나온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전교조의 지난 투쟁은 학생보다 교사의 입장을 고려한 측면이 더 많지 않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전교조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전교조에 거는 저자의 기대 수준을 말해주기도 한다. 학교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도, 교육부도, 교총도 아닌 전교조라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교원평가제, 사무행정업무의 분리, 교장선출제를 중심으로 개혁하면 학교가 정말 개조될 수 있는지 내가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교육과 학교 문제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에 교사로 재직 중인 지인과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깊은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직 교사로서 저자가 제기한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세 가지 개혁방법이 핵심에 가까운 정답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누가, 어떻게'라 할 수 있다. 세 가지 방법은 모두 법과 제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정권과 교육당국, 그리고 국회가 모두 동의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내에 기존 교육제도와 시스템에서 이득을 얻는 기득권 집단이 상당히 존재하고 수구언론과 정치집단이 '문제해결'의 관점이 아니라 '진영논리'의 관점에서 대응하는 이상 쉽지 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점의 결국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학생(학부모)와 교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현재 우리의 아이들을 얽매고 있는 교육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잘잘못만을 따지며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른들의 역심과 무책임,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 아이들은 고통받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문제는 교사 뿐 만 아니라 정치권, 정부, 언론, 시민단체, 그리고 직접 당사자인 학보무들까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학부모들의 불안감과 불신, 교사들의 어려움과 한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에서 시작하여 관심, 대화, 소통이 이루어지고 사회 각 분야에서 연대와 지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시민단체와 정치권으로 의견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 2012년 4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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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 - 대치동 입시전문가, 대한민국 사교육 신화를 뒤집다
박재원.정수현 지음 / 스쿨라움(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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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은 정말 아이들의 성적을 올려줄까?

이 책을 통해 대치동 입시전문가인 저자는 우리나라 사교육의 신화를 뒤집는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언론과 잡지, 인터넷 등을 통해 부모의 경제력과 학력, 사교육이 아이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 사교육의 최고 수혜지역인 대치동 한복판에서 아이들과 부딪치며 목격한 수많은 실패 사례를 통해 '대치동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고 있다.
실제로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면 저자의 결론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도 있다. 내 주변의 경우에도 부모가 서울대 등 유수의 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부모의 재산이 상위 클래스에 속하더라도, 오랜 기간 사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성적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서울지역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 이유가 사교육 기관들의 과잉 홍보와 이에 편승하는 언론집단, 개별 사례에 대한 과도한 소문, 학부모들의 집단 무의식이 합쳐저 만들어진 '집단 착시'라고 지적한다. 사교육에서 성적 상승의 효과를 보는 학생들은 사교육 기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고 그런 학생들은 장기간이 아니라 단기간만 자신이 필요한 학습내용을 얻은 후 사교육을 떠나 다시 자신의 독자적인 공부방식으로 돌아간다.
저자는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내용을 체화하려면 자신만의 공부시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방과후 학교나 학원, 숙제로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학생들은 스스로 복습하고 공부를 심화시키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공부시간 대비 성적 향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뇌과학과 사례분석을 통해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간섭이나 공부시간에 따른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안정감과 정서적인 충족감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실제 핀란드의 학습방법, 미국의 '슈퍼캠프', 영국의 가속학습법, 기적의 두뇌학습법 등의 사례는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는 가족의 유대감, 부모의 무한한 신뢰, 진솔한 대화야말로 학생들이 혼자 공부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고 공부의 효율을 높여줄 수 있으며 성적을 높일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다.

저자의 결론은 사교육은 아이들의 공부를 위한 중요도에서 가장 후순위가 되어야 하며 공부는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고 정서적인 유대감과 신뢰야말로 자율적인 공부를 통해 학생들의 성적향상과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그 아이의 미래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의 미래와 행복'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개념 규정에 따라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개념이 비슷하더라도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사'자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미래와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딸 아이가 서너살일 때, 아이 엄마의 친구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떻게 할거냐?"라고 물어보았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안보낼거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무조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의 잘못이고 학교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할 권리가 있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로 인격체이고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사회, 국가는 아이가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자라나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아이들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최소한의 의식주를 부모와 사회, 국가가 책임져 주어야 하고 안정되고 사랑스러운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호기심 속에서 자연과 사회에서 깨닫고 배우고 놀고 즐겨야 한다.
그러한 아이들의 권리를 방해하고 침해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이 부모든, 사회든, 학교든, 국가든...

현대사회의 국가제도에서 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면 국가제도에 따라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반드시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 강제적인 의무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그러한 국가제도를 거부한 이후 아이에게 힘든 과정을 겪게하고서 더 나은 기간을 보내게해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제도에 순순히 응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시작되는 '공부'와 '학교생활' 역시 역시 아이가 스스로의 호기심과 재미와 즐거움 속에서 보내게 하고 싶다.

내가 아이의 학창시절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알아본 적은 없다. 그냥 평소의 내 주관과 생각과 판단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이가 안정되고 사랑스러운 가정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학교에 다니고 성적과 공부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하루하루 보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해가 거듭할수록 걱정이 앞서기는 하다. 하교 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이 학원과 과외로 동네에서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 경쟁적인 면학 분위기에 휩쓸려 엄마들이 긴장하는 모습, 공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습이 실제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 엄마는 3학년 때부터 또래 아이들의 평균 이상으로 딸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개인적으로 아이의 공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그 나이 때에 누구나 하는 공부에서 성적을 올리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 공부와 성적이 오로지 아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재미를 가지면서 나타나기를 원한다. 공부와 성적 만큼이나 친구들과 놀이를 즐기고 호기심이 동하는 자연과 문화생활을 만끽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원한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거나 대기업이나 공사, '사'자 직업이 없어도 상관없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자신감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비심과 자립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닥치거나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육에 대한 서적을 찾는 중에 '사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책으로 고른 것이다. 저자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대치동에서 학원강사 경험을 했고 교육 전반과 사교육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한 흔적이 엿보였기 때문에 골랐다. <핀란드 교실혁명>과 <핀란드 부모혁명>을 번역, 발간한 저자인 것도 이유였다.

사교육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공부와 성적향상을 위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역으로 사교육은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줄 수 있고 아이들이 공부에 질리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진정 생각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에 대한 부모들 스스로가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먼저 공부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공부와 성적만을 생각하는 부모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학부모가 쉽게 선택한 사교육과 학원이 오히려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관심과 자신감을 빼앗는 것이라면, 자율적인 공부방식과 자신감을 빼앗는 것이라면, 공부시간와 쉬면서 심화하는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 2012년 4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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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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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때론 자주 나는 서구사회, 그 중에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을 부러워한다. 물론 나는 그들 국가의 역사와 사회,정치,경제체제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그들 국가는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봉건 왕조를 무너뜨리고 기본적인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다. 자본주의 초창기 지옥같은 양극화와 빈곤을 사회민주주의적인 정당으로 집결한 유권자의 힘으로 돌려놓았다. 그들 국가에서는 한국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으로 기초적인 민주적 정치체제와 복지국가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런 바탕에는 서구사회에 퍼져있는 르네상스 정신과 철학적, 문화적인 요인이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서구사회, 특히 서유럽 국가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과 파괴, 학살, 착취를 저질러온 나라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중세암흑시대에 수많은 이들을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했고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천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신대륙을 개척한다는 허울아래 또 수 백만명의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민중을 학살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의 잔혹함은 미국이라는 사생아에게 전이되어 이제는 미국을 증심으로 지구상의 '악의 축'을 구성하고 있다.
작년에 일어난 아랍의 민주혁명과 그 진행과정을 곰곰히 바라보면, 그들은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또 다른 이념과 명분으로 약소국들을 착취하고 학살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서구사회의 도덕과 철학, 합리주의와 이성이 어떻게 제3세계 민중을 살해하고 착취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역으로 제3세계 민중이 어떻게 스스로의 생존과 권리를 찾을 수 있는지 말해준다. 파농이 처음 이 책을 발간한 때는 1961년 프랑스에서 였다. 프랑스다. 초판 출간 당시 사르트르가 서문을 썼음에도 이 책이 '판매금지' 도서였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이 책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프란츠 파농이라는 저자의 이름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일찍 알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이 책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경식씨의 에세이 <소년의 눈물>(2004. 돌베개)에서 아래 문장을 발견하였을 때였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p.226) 

이 문장은 작년부터(지금도) 내내 내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도는 화두였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보편적 복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또는 총선과 대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얻지 못하면 그 과정에 차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식민지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이다.

50년도 더 지나 저 멀리 아프리카 북부의 알제리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을 내가 왜 읽고 싶었을까?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또 한국을 비롯해 독립과 자립에 목말라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의 지식인들이 파농의 이 책 속에서 그들 투쟁의 정당성을 찾았다지만, 지금 더이상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고, 제3세계란 말이 낡은 냄새를 피우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말도 식상해진 21세기에, 새삼 이 책을 새로운 서문과 후기까지 붙여 다시 출간한 의도는 무엇일까?

알리스 셰르키는 2002년판 이 책의 서문에서 그 대답을 들려준다. “인간이란 존재가 민족의식 및 정체성의 위축과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을 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파농이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의 식민화는 경찰과 군대 등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근대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 아래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이른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화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 미국의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정보의 주도하에 전세계 민중들의 물질적 재생산과 정신의 영역이 지구적 자본주의 논리에 완전히 흡수되어 자신의 문화와 전통,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그에 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제적·문화적 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전지구적 경제·문화의 지배자는, 파농이 말했듯 “2세기 전 유럽의 식민지는 유럽을 따라잡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어 나타난 유럽의 오점, 병, 비인간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괴물”, 미국이다.
유럽의 오점과 비인간성이 증폭된 괴물은 전지구의 민중을 사물로 전락시켰다. 그들은 더이상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 FDA(미국식품의약국)의 마크는 우리 건강의 보증이며, 영어―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식민지]모국(母國) 언어―구사 능력은 한국어 구사 능력보다 중요하고, 무디스의 평가가 우리 경제 상황을 대표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위축되고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 즉 ‘식민화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식민지 원주민은 사물로 전락하거나 동물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악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원주민, 즉 피억압자는 늘 이주민(억압자)에 의해 열등하게 취급되지만, 그 자신의 열등함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주민이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의 근육은 늘 긴장 상태이며, 이런 긴장은 이따금 유혈적인 폭발로 배출된다. 부족 전쟁, 씨족 갈등, 개인들 간의 다툼이 그런 예이다. “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p.75)

우리가 진정 식민화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농의 탈식민화 과정에 대한 분석도 참고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파농의 외침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미국을 모방하지 않는다면,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모든 지침과 이성을 팽개친 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는 청사진과 본보기를 원한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미국이 가장 본받을 만한 모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런 모방이 가져다준 가슴 아픈 좌절을 살펴본 바 있다. 미국의 성과, 미국의 기술, 미국의 양식은 더이상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미국의 기술과 양식에서 인간을 찾으려 하면, 오직 끊임없는 인간의 부정과 잔혹한 살인만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조건, 인류를 위한 계획, 인간성을 증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일은 진정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문제들이다. 미국을 흉내내지 말자. 우리의 근육과 두뇌를 모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자. 미국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p.354)

결국 진정한 탈식민화는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며, 그 일은 지배적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비판은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이자, 그것에 길들여진 정신적으로 노예화된 자신에 대한 비판의 동시적 진행”(김동춘, 앞의글)이다. 과거에 파농의 알제리와 같은 물리적 식민화의 세계에 살았고, 오늘은 정신적·경제적 식민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불행히도 두 개의 모국을 지닌 식민지의 원주민들이다. 한 모국(일본)에서는 물리적 강압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또 한 모국(미국)에는 경제적·군사적·정신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 따라서 우리가 이제 진정한 탈식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는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미완성된 과거의 탈식민화를 완성할 때 현재의 탈식민화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며, 그 탈식민화의 자리에서 파농의 말처럼 “미국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아직 국어 독해력이 많이 모자라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ㅠ
 
[ 2012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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