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0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남북통일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선배와 카페에 앉아 애기를 하던 중 함께 공감했던 대목 중의 하나가 북한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 인민들 삶의 곤궁함은 물론, 북의 정치체제가 조선시대를 방불케 하는 봉건적 절대왕조체제인 점, 정권 지배계층의 안정이 인민의 생존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처리된다는 점, 남북관계 악화로 실제 고통받는 쪽은 집권자측보다 인민들과 하위 조직구성원들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북한이 그동안 자의반, 타의반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정보가 차단되어 있고 미국과 남한의 경우 지배계층들이 정치적, 사적 목적을 위해 북한의 정보를 왜곡, 조작해왔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알기가 쉽지는 않다. 겉보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전후의 경제강국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 보면 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 빈민들이 과반수에 이르고 어린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1위에 이를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적 공동체가 크게 무너져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북한 역시 그동안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소식과 달리 실제 내용은 무척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 정권이라도 해서 완벽하게 내부 정보를 차단할 수는 없는 일이고 중국과는 경제,문화교류가 활발한 상태이며 그동안 남북간 경제교류도 진행되어 왔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지원이 계속되기 때문에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다. 기본적인 정보는 외부에 제공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특히 지난 20~30년 간 북한정권이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함에 따라 주민들의 사정이 더 열악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아주 빈약한 정보와 편합한 언론 기사, 미국이나 남한정권의 적대적인 공세, 중국이나 일본과의 또 다른 오묘한 정치외교적 관계 등으로 일반인들이 북한 내의 자세한 사정이나 과정을 어떤 흐름을 통해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부터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고 편협한 상황인 것 같다.

북한 내에는 지배계층과 조선노동당이나 군대, 다수의 인민들만 존재할까? 오로지 북한정권에 맹복적으로 충성만 하는 이들과 탈북자만 있을까? 탈북자의 경우도 황장엽 같은 고위 간부, 김만철과 같은 인민들만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 전두환, 박정희, 박그네 같은 꼴통들이나 무조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려는 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을 지닌 수많은 생각과 태도를 지닌 이들이 있는 것처럼 북한에도 북한정권을 반대하고 남한 수구기득권 세력을 선호하거나 민주진보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남북의 지배계층을 모두 반대하고 제3세계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북한정권을 반대하면서 장기적으로 북한을 '인민주권'의 국가로 변화시키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실화 같은 소설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부터 책장을 덮을 때까지 '실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 속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생각, 처지, 고민, 상황들에 깊게 몰입되었다. 그가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미군의 평양 폭격으로 처자식이 폭사될 때 허탈감과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한국전쟁 후 북한정권의 안정을 위해 박헌영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는 주인공의 태도에 나도 그의 입장을 두둔하기도 했고 그가 변질되어가는 북한체제에 점차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절망할 때 공감할 수 있었다. 암울한 현대사로 인해 중년에 찾아온 '인연'을 맺지 못한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정에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일흔 여덟이라는 고령임에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최고책임자에게 인민의 삶과 대의를 알리고자 했던 주인공의 헌신에 고개가 숙여지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38년, 식민지 조선에서 연희전문에 등록한 청년 이진선의 일기 형식을 띤 이 소설은 우리 현대사를 장식한 굵직한 인물들의 행적과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길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장중한 역사의 흐름 못지않게 이진선이라는 순수한 사회주의자의 삶을 조망하기도 한다.
이진선의 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순수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 여전히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최첨단 통신기기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폭넓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사이의 벽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와 보수 단체의 갈등은 점점 깊은 골을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인문학의 몰락이 예견될 정도로 사상의 가치가 홀대받고 있는 형편이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p.17)라는 첫 문장은 개인의 삶과 사회주의의 사상적 가치를 우리 시대에 맞게 모색해보려는 작가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기의 작성자인 이진선을 통해 우리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과 사건을 지척의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 불교계의 거목인 휴허 스님,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과 박헌영,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황장엽, 월북한 후로는 김일성과 그 주변 인물들과 어우러지면서 안타까움과 분노의 60년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진선, 개인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삶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여린과 아들 서돌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광경, 최진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집은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삶을 거미줄처럼 잘 짜낸,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순수한 꿈이 일그러져 가는 과정을 통해 불신과 분열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희망의 우리 현대사를 살펴보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피부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역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진선의 일기를 통해 지원병 제도와 조선교육령이 1938년에 실시된 사실, 민족지를 자처하던 신문들이 지원병제도와 조선교육령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한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냉혹한 비판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진선의 일기가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분단된 조국과 그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과 권력가들의 행태이다.
주인공은 남한의 현실뿐 아니라 북한 권력의 심장부에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그들이 순수한 민족애를 어떻게 좌절시켰는지, 지금의 분단 현실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냉철한 시선으로 되돌아본다. 그 과정 속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낯선 북한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전후 사상 재검토의 피바람, 남로당의 숙청,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과 소련 공산당과의 소원해지기도 하고 긴밀하기도 했던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남녀 성비가 맞지 않으면서 과부와 적령기를 넘은 처녀들이 넘쳐나는 등의 사회적 문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4·19혁명이나 5·16쿠테타, 518 광주민중항쟁, 6·29 민주화 선언 등 굵직한 남한의 역사적 사건을 북한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대면할 수도 있다. 북한의 실상에서 사회주의 사상에서 점점 멀어져가며 몰락하는 봉건왕조의 모습을 주인공은 비정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참한 과거와 현실을 들추어내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 즉 ‘아름다운 집’을 세우자는 뜨거운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잃어버린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고, 진실한 삶을 모색케 하는 성찰을 선사해 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 땅 어딘가에서 인민들의 삶과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을 제2, 제3의 이진선, 최진이씨에게 격려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 2012년 4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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