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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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때론 자주 나는 서구사회, 그 중에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을 부러워한다. 물론 나는 그들 국가의 역사와 사회,정치,경제체제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그들 국가는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봉건 왕조를 무너뜨리고 기본적인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다. 자본주의 초창기 지옥같은 양극화와 빈곤을 사회민주주의적인 정당으로 집결한 유권자의 힘으로 돌려놓았다. 그들 국가에서는 한국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으로 기초적인 민주적 정치체제와 복지국가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런 바탕에는 서구사회에 퍼져있는 르네상스 정신과 철학적, 문화적인 요인이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서구사회, 특히 서유럽 국가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과 파괴, 학살, 착취를 저질러온 나라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중세암흑시대에 수많은 이들을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했고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천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신대륙을 개척한다는 허울아래 또 수 백만명의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민중을 학살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의 잔혹함은 미국이라는 사생아에게 전이되어 이제는 미국을 증심으로 지구상의 '악의 축'을 구성하고 있다.
작년에 일어난 아랍의 민주혁명과 그 진행과정을 곰곰히 바라보면, 그들은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또 다른 이념과 명분으로 약소국들을 착취하고 학살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서구사회의 도덕과 철학, 합리주의와 이성이 어떻게 제3세계 민중을 살해하고 착취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역으로 제3세계 민중이 어떻게 스스로의 생존과 권리를 찾을 수 있는지 말해준다. 파농이 처음 이 책을 발간한 때는 1961년 프랑스에서 였다. 프랑스다. 초판 출간 당시 사르트르가 서문을 썼음에도 이 책이 '판매금지' 도서였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이 책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프란츠 파농이라는 저자의 이름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일찍 알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이 책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경식씨의 에세이 <소년의 눈물>(2004. 돌베개)에서 아래 문장을 발견하였을 때였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p.226) 

이 문장은 작년부터(지금도) 내내 내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도는 화두였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보편적 복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또는 총선과 대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얻지 못하면 그 과정에 차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식민지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이다.

50년도 더 지나 저 멀리 아프리카 북부의 알제리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을 내가 왜 읽고 싶었을까?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또 한국을 비롯해 독립과 자립에 목말라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의 지식인들이 파농의 이 책 속에서 그들 투쟁의 정당성을 찾았다지만, 지금 더이상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고, 제3세계란 말이 낡은 냄새를 피우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말도 식상해진 21세기에, 새삼 이 책을 새로운 서문과 후기까지 붙여 다시 출간한 의도는 무엇일까?

알리스 셰르키는 2002년판 이 책의 서문에서 그 대답을 들려준다. “인간이란 존재가 민족의식 및 정체성의 위축과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을 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파농이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의 식민화는 경찰과 군대 등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근대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 아래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이른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화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 미국의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정보의 주도하에 전세계 민중들의 물질적 재생산과 정신의 영역이 지구적 자본주의 논리에 완전히 흡수되어 자신의 문화와 전통,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그에 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제적·문화적 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전지구적 경제·문화의 지배자는, 파농이 말했듯 “2세기 전 유럽의 식민지는 유럽을 따라잡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어 나타난 유럽의 오점, 병, 비인간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괴물”, 미국이다.
유럽의 오점과 비인간성이 증폭된 괴물은 전지구의 민중을 사물로 전락시켰다. 그들은 더이상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 FDA(미국식품의약국)의 마크는 우리 건강의 보증이며, 영어―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식민지]모국(母國) 언어―구사 능력은 한국어 구사 능력보다 중요하고, 무디스의 평가가 우리 경제 상황을 대표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위축되고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 즉 ‘식민화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식민지 원주민은 사물로 전락하거나 동물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악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원주민, 즉 피억압자는 늘 이주민(억압자)에 의해 열등하게 취급되지만, 그 자신의 열등함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주민이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의 근육은 늘 긴장 상태이며, 이런 긴장은 이따금 유혈적인 폭발로 배출된다. 부족 전쟁, 씨족 갈등, 개인들 간의 다툼이 그런 예이다. “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p.75)

우리가 진정 식민화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농의 탈식민화 과정에 대한 분석도 참고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파농의 외침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미국을 모방하지 않는다면,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모든 지침과 이성을 팽개친 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는 청사진과 본보기를 원한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미국이 가장 본받을 만한 모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런 모방이 가져다준 가슴 아픈 좌절을 살펴본 바 있다. 미국의 성과, 미국의 기술, 미국의 양식은 더이상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미국의 기술과 양식에서 인간을 찾으려 하면, 오직 끊임없는 인간의 부정과 잔혹한 살인만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조건, 인류를 위한 계획, 인간성을 증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일은 진정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문제들이다. 미국을 흉내내지 말자. 우리의 근육과 두뇌를 모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자. 미국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p.354)

결국 진정한 탈식민화는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며, 그 일은 지배적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비판은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이자, 그것에 길들여진 정신적으로 노예화된 자신에 대한 비판의 동시적 진행”(김동춘, 앞의글)이다. 과거에 파농의 알제리와 같은 물리적 식민화의 세계에 살았고, 오늘은 정신적·경제적 식민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불행히도 두 개의 모국을 지닌 식민지의 원주민들이다. 한 모국(일본)에서는 물리적 강압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또 한 모국(미국)에는 경제적·군사적·정신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 따라서 우리가 이제 진정한 탈식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는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미완성된 과거의 탈식민화를 완성할 때 현재의 탈식민화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며, 그 탈식민화의 자리에서 파농의 말처럼 “미국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아직 국어 독해력이 많이 모자라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ㅠ
 
[ 2012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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