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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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세미나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되었다. 저자는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현상과 본질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가 독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독일 및 서구사회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 한병철은 현재의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사 인간은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현대의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사회인 것이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하는데, 개인의 성과에 대한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당신들도 나처럼 이 문장에서 박정희와 정주영, 그리고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과거의 착취가 타자에 의한 착취였다면 자본주의의 착취는 '자발적인 착취'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착취'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고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도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공감되는 답을 제시한다. 또한, '피로'를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한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이렇게 해서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짊어지고 있다. 범람하는 성공학 도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한병철은 그것을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자본주의 초기, 중기 단계에서 창업자들과 자본가들, 기업가들만이 프론티어리즘과 같은 '할 수 있다'를 '성과주체'로서 규정된다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문화지배층들은 그 범위를 중산층과 노동자, 서민 등 하층 계급에게도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소진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피로사회라는 것이다.
저자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적절한 답을 제시해준다.(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독일에서 이 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에 묘사하고 있는 성과사회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술 책들이 서점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된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수퍼스타 K2'의 허각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도 그러한 이상일 것이다.(그 자체로 나름 장점이 있는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저자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OECD 국가에서 상위에 차지하는 현실과 학생들을 자살로 내모는 무한입시경쟁 역시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 책은 독일에서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독일의 주요 신문과 방송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으로서 격찬하였다고...

 

[ 2012년 6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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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 개정판
크리스티안 노스럽 지음, 강현주 옮김 / 한문화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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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삶과 죽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말에 조금씩 공감이 된다. 여성 없이 남성이 존재할 수 없고 '너'가 없이 '나'가 존재할 수 없으며 질병 없이 건강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가까운 주변 여성들을 접하다 보면 여성들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크고 작은 자잘한 신체적 불편함이나 질병을 겪고 있다고 기억한다. 남성들의 불편함이나 질병은(내가 남자라 그렇겠지만) 보통 사건사고에 의한 상처나 감기, 과로나 과음에 의한 질병, 고혈압이나 스트레스 등이 주요 증상이었고 신체내부적 특성에 따른 질병은 없다고 생각했던 반면, 여성들에게 그 이외에 나타나는 생리불순이나 소화불량, 냉증, 근종 등은 '여성이라는 다른 신체적 체질이나 성격' 때문이라라 짐작했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대체적으로 감성적이고 민감하고 비활동적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다른 질병의 원인일 것이라 생각해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나의 그런 평소의 생각과 추론이 지극히 무지에 의한 선입견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남성들이 자연이 준 그 자체로 정상적으로 생활하면 큰 병치레를 하지 않을 수 있듯이 여성들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그동안 '다르게' 생각했던 여성들의 질병과 증상은 '남녀 차이'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남녀 차별'이라는 수 천년 동안 이어져온 사회문화적 구조에 의해 '여성들에게만' 발생한 것이었다. 여성을 도구화하고 차별해온 것은 동양에 비해 서양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저자는 여성의 많은 질병이 "남성중심의 중독된 사회구조의 산물"이다고 말한다. "여성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과 내면의 자아를 무시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이유는 남성중심의 중독된 사회구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신의 욕구보다는 다른 사람의 욕구를 먼저 생각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겪는 모든 문제는 그 사회의 문화적인 환경과 관계가 있다." 저자는 특히 여성의 모든 질병이 여성성이 부정되는 남성중심의 중독된 사회구조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자기 내면, 즉 몸의 지혜를 믿고 그 메시지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독자는 초경부터 폐경에 이르기까지, 아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여성이 겪게 되는 온갖 상처와 질병의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원인, 그리고 그 치유법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많은 여성들의 실제 사례와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여성들이 위안을 얻고 자연스럽게 치유의 단계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저자는 여성들이 진정으로 '여성성'을 회복할 때 질병의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제 모든 여성이 치유를 통해 진정한 정체성과 욕구를 드러내고, 여성성을 회복하고, 스스로 결정한 방법에 의해 여성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여성의 자궁과 유방은 질병을 통해 계속해서 슬픔의 메시지와 경고를 보내올 것이다." 

"여성의 모든 질병은 가슴에 묻혀 표출되기를 기다렸던 감정의 분출이다. 몸이 그 타고난 영성靈性으로 여성 자신의 관심을 끌어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증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질병은 몸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여성의 질병은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처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치유의 힘은 여성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몸과의 화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병원이나 의사보다 안전하게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몸의 지혜, 내면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그 내면의 목소리를 믿고 귀기울일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된다."
 
저자의 주장에 많은 신뢰가 드는 이유는 서구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의학을 전공한 후 산부인과 전문의로 일했던 저자가 스스로 서양의학의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체를 분리되고 독립된 신체가 아니라, 자연이나 사회에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고 사회구조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체 내부에서도 수 많은 상호작용과 연계작용을 통해, 또 무의식과 정신적인 상황에 반응하면서 질병과 건강이 균형이 유지된다는 견해를 피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들의 몸에 증상이 나타날 때 그것을 단순한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이상이 있음을 자신의 
의식(정신, 또는 자아)에게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 당장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사건과 사고, 경험과 강박관념 등이 시간이 지나면서 몸의 이상을 통해 치유해 달라고 애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몸의 기억과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단기적인 증상만 처치할 경우 그 증상은 또 다시 동일하게 또는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여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의 치유법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서양의학(한국 대부분은 의원과 병원의 방식)의 접근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과 대화를 통한 치유, 식이요법, 대체요법, 기공과 마사지, 침과 뜸, 자연요법 등 자연적이고 자기치유적인 방법을 우선시, 중요시하고 필요에 따라 서약식 의술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제1부 '몸의 지혜 혹은 내면의 인도자 만나기'에서 남성중심의 중독된 사회구조에 의한 온갖 편견들을 지적하고 모든 여성의 타고난 몸의 지혜, 내면의 인도자에 대해 설명한다. 여성의 몸과 질병에 관한 이전의 잘못들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관점에서 여성의 육체와 정신, 진정한 치유를 만나는 장. 세부적인 질병의 문제들에 접근하기 앞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2부 '질병의 원인, 그리고 진실과 치유'에서는 초경에서부터 폐경기에 이르기까지 자궁, 난소, 외음부, 질, 자궁경부, 유방 등 각 부위별 질병과 그 원인, 치유법 등 거의 모든 여성 질병에 관한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다. 저자는 특히 사람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의학적 지식이나 편견들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한 여성이 일생 동안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생리학적 증상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진실과 그 진실 속에 담겨있는 몸의 지혜를 강조한다.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의학적인 접근과 함께 그것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꼼꼼하게 지적하고 있어 매우 유용할 뿐 아니라 그 정보의 방대함이 여성건강에 대한 종합백과라 할 만하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몸의 지혜 중 일부임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제3부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일이다'에서는 의학적인 치료 외에도 식이요법에서부터 운동과 습관, 그리고 치유를 위한 마음가짐과 자세에 이르기까지 치유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치유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 외에도 다양한 실제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어 모든 여성이 자신의 처지와 조건을 떠나 보다 쉽게 치유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한다. 저자는 특히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일이며, 여성의 건강과 치유가 한 개인이 아닌 사회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이 책을 먼저 모든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물론 남성들도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딸과 아내, 누나와 동생, 어머니, 주변의 여성 지인들이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도록, 행복과 건강을 누리는데 함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2012년 6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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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4 17:38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자본주의, 그 이후 -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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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추천은 커녕 중고책으로도 팔지 않고 벽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별 볼일 없을 뿐더러 거의 500쪽에 달하는 책을 읽는 시간도 아까운 책이다.
저자를 개인적으로 아는 바 없지만 책 속애서 느껴지는 저자의 인식은 '멘탈 붕괴'거나 굳이 좋게 표현하더라도 뉴라이트에 버금가는 '신주사파'라고 명명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00주의'나 '00파'라는 낙인찍기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이지만...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한 시대가 격변하고 있다는 점,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 좌우대립의 이분법만으로는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 지식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점, 기업에게도 나름 장점이 있다는 점, 대결이 아니라 상생이 필요하다는 점, 인본주의가 요구된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요 개념이나 논리 전개, 방향에 대해서는 수긍하기는 커녕 공감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엄청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저자가 헤매는 이유는 먼저 저자가 적용하는 개념이나 단어가 좌충우돌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는 지식이나 창조력을 생산요소로서의 자본, 노동과 동일한 기준이나 반열에서 비교, 적용하고 있다. 산업사회 내에도 지식이 당연히 포함되지만 저자는 산업사회와 지식사회를 별개로 다룬다. 탈산업사회와 탈자본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좌와 우, 자본과 노동, 국가와 시장 등의 대립개념의 이분법적이고 대결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식과 창조력이 자본과 노동, 국가와 시장의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늘어나는 것을 마치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후 형태라고 생각했지만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이후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살아남았듯이 신자유주의가 약화되거나 사라진다는 것과 자본주의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동물인 사람에게서 지식이나 상상력, 감성, 그리고 창조성을 따로 떼어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창조력마저 돈으로 지배하는 자본의 위력을 무시하고 이윤을 최고의 생명으로 삼는 기업의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사상과 문화, 기술을 체화한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표현 속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형이 재등장하는 모습과 변질된 주체사상의 변종을 발견할 수 있다. 2008년 한국에 별종 뉴라이트가 탄생한 후 신종 주사파가 등장하게 되는건지 우려된다. 저자는 색안경을 쓰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한 몸이고 다른 양태임을 꿰뚫어 보는 눈을 잃은 것 같다.

 

공부모임 참석자들 역시 겉으로는 나처럼 심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에는 나보다 더 큰 실망감이나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한 참석자는 "박세길이 피터 드러커에게 말렸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왜 파터 드러커 이상의 애기를 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했고 다른 참석자는 "창조력 역시 일반인들 중 극히 일부분에게서 강하게 드러나는 요소이기에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기업이 이윤을 지상과제로 삼는 한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노동자는 이윤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것이 한국에서 노사갈등의 핵심이지 않은가?"라는 반문도 있었고 "지식기반사회가 되어도 농업과 제조 등 산업사회는 오랜동안 계속될 것이다."라는 반론도 있었다.

'박세길'이라는 이름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학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이후 다른 여러 책들 속에서 한국현대사에 대해 읽었기 때문에 여러 지안들에게 '잘썼다'고 추천받았음애도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읽지는 못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늦기 전에 읽고 아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중 하나다.

공부모임에서 박세길씨의 최신작인 이 책을 세미나 교재로 삼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주저없이 동의하였다. 최근들어 자본주의가 세계경제와 각국 경제에, 전세계인들의 삶애 온갖 몹쓸 나쁜 결과를 가져오고 있고 많은 학자들이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담론들을 제기하고 있다. 국내 학자, 그것도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예상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책을 접한 후, 제목 아래에 달린 부제가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라고 달려 있어 나에게 흥미도 유발시키기도 했다.

책의 서문을 읽어보나 저자가 현실 자본주의로 인한 많은 이들의 고통에 가슴아파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해 오랫동안 많은 열망과 연구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1990년대 10년 동안 새로운 사회를 탐색하면서 원고지 1만 매를 넘는 글을 썼다. 2000년대 초반에는 직접 다양한 실천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단초를 찾으려고 연구단체를 설립하였고 사회단체 상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반이 취약함을 느끼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성찰과 탐구'를 위해 2007년 가을 홀로 치악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저자는 치악산에 들어가면서 두 가지 결심을 했고 모두 이루어냈다고 한다. 하나는 '10만 쪽'의 책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가지 종류의 역사책을 쓴 것이다. 10만 쪽이면 300쪽의 책 300권을 읽은 셈이다. 그는 2008년 6월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을, 2010년 4월 <미래를 여는 한국인사(상,하)>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 이후 저자는 어느날 문득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이 자신의 사고를 규정했다는 것을 깨닫고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후 '편견 없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드디어 영감이 샘솟기 시작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계속하여 서문에서 두 권의 신간을 집필하면서 얻은 결론을 소개했다. 10개나 되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전지구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찾을 수 없다. 둘째, 자유와 평등은 분리되는 순간 둘 모두 불구화된다. 둘은 조화롭게 통일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주의를 지배했던 국가만능주의와 자본주의를 지배했던 시장만능주의 둘 모두 답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국가와 시장의 위상과 상호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넷째,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점이며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섯째, 생산 활동을 주도하는 요소가 자본에서 지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지배권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창조적 능력을 지난 사람에게로 이동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여섯째, 대중이 주역으로 떠오름에 따라 수직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수평적 소통과 협력이 모든 영역을 지배할 것이다. 일곱째,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진보와 보수가 '공존'을 바탕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여덟째,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세대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아홉째, 국가의 절대우위가 사라진 조건에서 국가권력 장악을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변화에 의존해서는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없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열째, 기업 경영은 매우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영역으로서 그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고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새로운 결론'에 기초하여 저자는 책의 본문에서 21세기 세계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따라서 산업사회를 지탱하던 자본과 노동은 더 이상 주도적 생산요소가 될 수 없게" 되었고 "권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지식으로 이동"하면서 지구촌이 "탈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지금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역사의 변곡점'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세계의 패러다임은 대전환 중이다. 그것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화(놀라운 가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사람이 주도적 위치를 되찾고 개인의 삶이 복원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세대의 등장, 근대 경제학의 해체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3부 인본주의 사회로의 진화'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해명하는 데서 핵심 개념이 주도적 생산요소'이며 역사적으로 토지, 자본과 노동이 최근까지의 주도적 생산요소로 작용했다면 앞으로는 '창조력(지식 + 감성 + 상상력)'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력은 생산요소이면서 동시에 생산수단'이고 따라서 '창조력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제 지식으로 무장하고 감성을 구현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경제활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산수단인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로 떠오르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력은 오직 사람 속에만 존재하며 다른 작업수단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사회가 열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p.214) 저자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계급인 '창조자 계급'이 출현하고 기업권력도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는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인본주의 사회이며, 인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중심 고리는 기업에서의 '수평적 조직문화의 정착'임이 밝혀진다"(p.253)

 

그는 '4부 상생의 생태계'에서 세계가 산업시대의 일반적 모습이었던 돈과 기계의 예속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고자 노력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승자독식을 지양하고 동반자 관계의 연쇄사슬인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5부 새로운 사회의 한복판으로'에서 저자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적 가능성"이지만 그이행의 경로와 속도를 규정하는 요소는 사상문화적 동향, 정치사회적 환경, 기술적 조건, 경제적 변화 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상문화적 동향임을 주장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기술을 체화한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면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거꾸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기도 한다"(p.445)

 

책 전체에서 저자는 피터 드러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고 실제 기업과 경영의 가치와 긍정성, 지식과 창조력에 대한 그의 과도한 강조하면서 드러커의 글을 자주 인용한다.

 

[ 2012년 6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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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 - 재벌을 해체하듯 대학을 해체하자
김동훈 지음 / 바다출판사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대학입시 제도의 휴우증, 사교육 광풍, 무한대의 성적경쟁 등 공교육 내지 제도교육(의무교육)에 대해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학벌사회와 SKY 독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육이 하나의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중요성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선생이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는 우스개소리가 우습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교육현장에서 대다수 수 많은 교사들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헌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전체적인 운영구조와 작동논리, 교육당국의 정책과 제도, 교육기관들의 행태는 그 우스개소리가 마음 속 깊이 공감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도 뼈아픈 현실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우리나라의 교육 전반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그 문제점에 대한 정책대안에 대한 논의가 공론의 장에서 실종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초,중,고교생들의 교육현실에 대한 원인과 해결방안은 여러가지가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근본적인 뿌리에는 '무한경쟁 승자독식사회'와 '학벌독점사회'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교육철학과 교육내용, 교육자에 대한 운영시스템 등이 존재한다. 교육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많은 전문가, 학자들의 견해는 전체적으로 승자독식과 학벌사회의 틀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고 논의될 수 있다.

저자 김동훈교수의 경우에는 교육문제의 접근을 대학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 사회적 역할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현재모습으로서의 우리 대학은 별로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망해야 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에 투하되는 우리 사회의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에 비해 대학이 우리 사회에 생산해내는 긍정적 결과물은 아주 미미하다. 생산해내는 것이라곤 대학에서의 생활보장에 힘입어 소수의 학구파 교수들이 생산해내는 약간의 학문적 결과물 정도를 들 수 있을까. 반면에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의 가장 중요한 생산물인 졸업생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당히 불량품이다. 실무에서는 이들을 기초부터 다시 재교육해야 하고, 그렇다고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어떤 수준을 갖춘 것도 아니다. 또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이 생산해내는 학문적 성과물도 미미하기 짝이 없고, 사회도 대학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진단한다. 대학은 "주어진 시스템에 따라 반강제로 배정된 학생과 그 학부모들로부터 돈을 걷어 그것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교직원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갈 곳 없는 젊은이들에게 4년 간의 체류기간을 제공하는데 그치는 순수한 소비집단이다."라고 비판한다. 심지어 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은 고사하고 '발전은 가로막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것이 바로 대학을 개혁해야 개혁해야 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대학이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우리 사회를 학벌에 기초한 신분사회로 재편하는 신분판정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규정한다. '노력이나 경쟁력 없이도 과실을 누리며 우리 사회에 군림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대학은 "우리 사회를 학벌에 의한 신분사회로 편성해 나가는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우리 사회의 봉건적인 신분 의식구조가 다시 이를 뒷받침하며 상호 촉진적, 상호 공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1990년대 말 대학이는 공간에서 교수와 학생, 대학당국고 운영자들이 보아는 한심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대학이 신분사회 존속의 보루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시한다. 학벌사회가 신분사회로서 작동하는 모습과 그 속에서 차별받는 SKY 이외의 대학, 소위 지방대, 여대생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신분사회로서의 학벌사회가 처음 '대학 졸업'에서 다음은 '수도권 대학'으로, 'In Seoul로, 또 다시 SKY로 구축되어 가고 다른 한편으로 고시와 미국유학으로 신분사회를 창출해가는 상황을 말한다. 교수와 시간강사이에 존재하는 '세느강'의 단면도 보여준다.
끝적으로 저자는 대학이라는 집단이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병폐집단인 재벌과 유사한 특징과 모습을 비교하면서 '재벌을 해체하듯 대학을 해체'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재벌과 마찬가지로 대학 역사 '공룡화'되어 가고 '대마불사' 신화를 만들어가며, 사학의 경우 '황제경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고 공적, 사적 자금투입에 비해 사회적으로 손실아 크다는 공통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의 결론은 '대학을 해체'하자는 것이다. 대학의 기능을 분석하여 가능별로 독립된 세부 기관으로 만들고, 그 기능별로 능력을 평가하여 실질적인 경쟁체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학년 일반 교양은 폐지하여 입시가 완화돤 고등학교로 내려보내고, 특수한 기능교육이 주를 이루는 예체능계 교육은 별도의 전문학교 시스템으로 독립시켜야 하며 응용학문이나 실용학문은 개개의 고등직업전문학교 내지 전문대학원으로 독립시켜 교육내용이나 배출규모가 사회의 수요와 보조를 맞추도록 하고, 대학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의 하나인 학문의 연구와 전수를 위해서 응용학문은 주로 그러한 연구 결과물의 수요자인 기업 등에서 주로 자금을 부담하는 개별 연구소들이 다수 세워지도록 하고 순수 학문이나 기초 과학쪽에서는 정부가 주로 자금을 지원하는 다수의 국책연구소들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은 고급 또는 전문교양교육 기관으로 개방돠어 고급문화센터와 같은 구조를 취하도록 한다.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다.

한국사회가 '사농공상'식 신분사회라고 규정하는 저자의 주장이 조금 과도하게 설정했다는 느낌은 들지만 우리 사회가 SKY 중심의 학벌사회로서 신분사회 같은 시스템과 문화가 지배한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한 대안인 '대학 해체론'의 경우에도 기본적인 방향에는 동의할 수 있다. 다만, 현실적인 가능성의 측면에서는 부정적이다. 이 방법은 거의 모든 대학의 기득권 세력 전체를 상대로 '설득하고 싸워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방향을 세우되, 장단기 전략을 통해 선택과 집중으로 풀어가는 방법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기득권 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제도적, 실질적 권력 구조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아래와 위에서 보조를 맞추는 것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정치권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대 출신들의 자각과 노력이 절실하다.
그리고 강준만교수의 '서울대 축소론'이나 김경근교수의 '대학평준화' 등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여 상호 보완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을 계속 다들어야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는 교육 전반에 심각한 문제점이 누적되어 있고 개혁 내지 혁신해야 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전국민적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교육문제 해법은 '논의가 아니라 실행'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해법에 대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익추구적으로 이용하는 집단과 세력이 두려워서 지체되거나 그들의 방해공작(?)이 공론화와 실천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다. 기득권 세력이 교육문제에 대한 담론을 틀어막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 전체를 위해, 현재와 미래의 대부분 사람들에게 개혁과 혁신이 필요함을 인식한다면 지혜롭게 밀고 나가는 수 밖에 다른 도리는 없어 보인다. 문제와 대안을 공론화하고 의견을 취합하여 모범을 만들고 시범적으로 다양하게 시도해봐야 한다.
또한 기득권 세력들도 현재의 교육전반에 대한 문제점이 누적되면 그 기득권 세력마저도 도저히 연착륙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어야 사회의 제도와 구조 속에서 해결책을 시도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제도와 구조를 한꺼번에 부정하려는 급작스럽고 파괴적인, 모두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이 '폭발'하여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 2012년 6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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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서열 깨기
김경근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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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고등학생이 자살했다. 오늘 언론에 보도된대로 하면 '성적 비관'이 이유다. 대구에서는 지난 6개월 사이에 학생 10명이 자살했다. 2012년 2월 발표된 통계청 발표에 나온대로 우리나라 15~19세 청소년 중 8.8%가 '1년에 한 번 이상 자살을 생각'해본 것으로 나타난 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중,고교생의 적지 않은 수가 '자살을 한 번 이상'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라 예상할 수 있다.

언론의 기사를 보면 소위 대다수의 정치인, 관료, 전문가나 교육관계자들은 청소년 들의 자살에 대해 근본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1990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청소년의 스트레스와 자살이 증가하는 것을 20년이 넘도록 제어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일단 교육문제에 있어 나는 정치권과 교육당국은 '무능'의 전형이기에 평가에서 제외하고 싶다. 대신 언론인, 전문가나 교육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 학부모와 교사와의 소통, 정신적 나약함, 기숙학교 방식, 시험과 성적과잉, 학교 내 왕따나 폭력 등을 이유로 제시한다. 따라서 자살과 스트레스 방지 대책은 학교 내 폭력근절, 학교 내 상담사 배치, 교사나 학부모가 아이들과 자주 대화하기, 기숙학교 없애고 시험 줄이기 등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까?

동일한 조건에서 스트레스를 더 받거나 자살까지 하는 청소년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들 개개인이 아이들과 소통하는 정도와 가숙학교 식으로 공부와 성적을 더 심하게 강요하고 하지 않고이 따라 약간의 차이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 학생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교육시스템과 사회문화 현실을 두고 청소년의 자살과 스트레스, 왕따 등 교육문제를 사회적, 제도적,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순간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 인식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0년대 초반에 발표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2008. 청아)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뒤르켐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자살'이란 인종적, 개인적, 병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계급적, 계층적임을 밝혀낸 바 있다.
따라서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 문제 역시 전체적인 시각에서는 뒤르켐의 접근법이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청소년들의 경우 사회적, 구조적인 상황이 '학생'이라는 구체적인 성격이나 위치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결국 교육문제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저자는 다른 나라에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대학입시'가 유독 한국에서는 '압시지옥'이란 현상이 지구상에서 유례없는 '지옥'이 된 이유를 '무한경쟁'의 성격으로 지적한다. "한국의 입시경쟁은 사실상 극소수 명문대 입학을 놓고 벌이는 타인과의 경쟁이다. '제로섬 게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대학입시는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그리고 영영 갈리는 단판 승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시는 더욱 '죽기살기식'의 무한경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군사독재가 마감된 이후 우리나라 주요 권력의 상층부에는 서울대 출신들이 빠르게 점유율을 늘렸다. 육사 출신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서울대 출신들은 지난 30년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언론계, 학계, 재계 등의 주요 요직에 최소 50%대에서 최대 70%대를 자지했다.(겉으로 보이기에 역대 대통령 중 서울대 출신이 한 명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사법부와 언론, 행정부의 고위급으로 올라갈수록 그 점유율이 높아. 그들이 그렇게 능력이 있어서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이 1990년대 이후 경제성장이나 민주주의의 성숙에 실패하고 사회양극화가 심해질대로 심해진 이유가 역으로 그것을 반증한다. 그 30년 동안 사회의 주요 요직에 서울대 출신들이 장악했지만 그들은 IMF를 불러왔고 부동산 거품과 사교육 광풍을 만들었고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대신 수 없이 많은 부정부패와 이기적 탐욕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오만함과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30년 과정에 대한 설명이 과연 가능할까? 저자는 서울대 중심의 서열화 속에서 학벌주의와 학연주의, 엘리트주의가 우리나라의 온갖 문제, 즉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서울대 독점현상, 또는 SKY 독점현상을 30년 동안 보아온 학부모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의 눈 앞에 서울대를 나와야 고위직 판검사가 되어 성추행을 해도 처벌받지 않고 뇌물을 받아도 사면,복권되고 신문사, 대기업, 정부의 고위 관료가 되어 서로서로 이끌어주고 말어주는게 보이는데 어찌 학부모들아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 엄두가 나겠는가?

그렇다면 '입시무한경쟁'을 초래하는 근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대학의 서열화'로 본다. 전국 수 백개의 대학이 서울대를 정점으로 거의 획일적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상태이며, 출신대학의 서열은 곧 자신의 '등급'과 직결되므로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한 단계라도 더 높은 대학에 가려고 무한경쟁을 하니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OECD 어느 국가도 우리나라처럼 획일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1990년대 이후 서울대 입학생 중 부유층 자제들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다수의 '보통' 학부모 자녀들은 입시전쟁의 '예정돤 패배자'안 것이다. 따라서 이 상태가 유지되는 한 서민층 학부모들에게 대학입시는 '한풀이'가 아니라 또 한 번의 한을 쌓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학부모들에게는 교육과 입시병폐으, 근원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대조차 형성되지 않고 있다. 그냥 언론과 교육당국과 사교육과 주변인들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만다. 이것이 현실적인 난관이 된다.

저자가 결론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대학입시 평준화'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입시 평준화를 통해 초등학생들의 입시열풍과 사교육을 해결했고 고교 입시 평준화를 통해 중학생들의 과외와 입시열풍을 해결했듯이 대학입시 평준화를 통해 대학입시 광풍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각 대학은 대학원 중심으로 경쟁을 하고 대학 간 학부경쟁을 통해 진정한 '공정경쟁'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가능성과 현실성, 장단기 추진전략에 대한 판단은 아직 쉽지 않다. '대학입시 평준화'만이 유알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교육문제는 공교육 무력화 현실, 교욱제도와 시스템, 교과내용, 사교육 현실, 서울대 학부 축소, 공공부문에서의 서울대 또는 SKY 독점 완화정책 등과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고 그동안 독점이익을 누려온 대상자들의 반발과 연착륙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여론을 모으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도 남아 있다.
하지만 난 저자의 기본적인 추진방향에는 동의한다.(

* 기억에 남는 문장 :
-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까지... MB는 무의미)이제까지 나온 과외대책들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역시 과외를 없애려면 그 근원안 입시 무한경쟁체제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치열한 경쟁을 거리지 않고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아마 과외를 하라고 떠밀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여론조사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994년 공보처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부모의 88%는 과외를 금지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과외가 자녀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사람은 90%나 되었으며, 실제로 열 명에 일곱은 어떤 식으로든 과외를 시킨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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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무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외가 폐단이 있기 때문애, 비록 학습에 도움이 되지만, 일률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과외를 하는 한 자기 자녀만 빠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과외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다른 사람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왜 그러는가? 그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한국의 대학입시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특히 좁기만 한 명문대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보다 더 하지는 못할망정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자기만 하지 않는 것은 입학을 미리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일괄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내 자녀만 과외를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이것을 내 자녀만 아는 이기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어?든 조사결과는 과외의 근본이 공교육의 수준이나 시험문제의 난이도가 아니라 대학서열화와 그를 둘러싼 무한경쟁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준다.
아는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애기다. 그러나 문제는 과외대책을 세울 때 이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외는 무한경쟁의 소산이며 무한경쟁은 차례로 대학의 서열화에서 생겨나므로 대학의 서열화를 문제삼지 않고서는 진정한 과외대책이 나올 수 없다는 당연한 인식을 당국이나 교육전문가들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당국은 그저 입시제도의 절차나 방법을 개선하려고 하며 교육전문가들은 오직 공교육 정상화가 과외문제 해결의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외는 앞에서 보았듯이 공교육의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걸 알 수 있는데도 교육전문가들아 자꾸 공교육 정상화만 외치는 걸 보면, 실제로 과외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결국 과외를 없애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쟁의 절차, 즉 입시제도의 방법을 바꿀 것이 아니라 경쟁의 구조나 근원 자체를 없애는 '입시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p.53)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이기정, 2011, 인물과사상사)에서 시작된 교육문제에 대한 나의 탐구는 <학교개조론>(이기정, 2007, 미래인), 핀란드 교육 시리즈 3부작인 <핀란드 교실혁명>(후쿠다 세이지, 2009, 비아북), <핀란드 부모혁명>(박재원/구해진, 2010, 비아북), <핀란드 공부혁명>(박재원/임병희, 2010, 비아북), <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박재원, 2012, 스쿨라움)를 연이어 읽었지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책 속에는 학부모들과 학생들, 교사들이 어느 정도 현재의 교육문제 틀 속에서 제한적으로라도 풀어나가고 해결할 수 있는 대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교육문제의 해법이 사회적으로 단기간에 합의되가 어려운 조건 속에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와 더불어 1970년대에 '탈학교화'와 '탈산업화'를 주장한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2011, 생각의나무)를 다시 읽어보고 아주 오랫만에 파울로 프레이리의 고전인 <페다고지>(2012, 그린비)와 <교육과 의식화>(2012, 중원문화), <체 게바라와 파울로 프레이리의 혁명의 교육학>(피터 맥라한, 2012, 아침이슬),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노암 촘스키, 2012, 아침이슬)를 읽으면서 교육철학과 사회과학적인 분석, 미국의 사례 등을 참고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작금의 현실에 적합한 분석결과를 도출할 수가 없었다. 특히 '입시지옥'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국 교육문제의 근원이 단순히 의무교육 현장이 아닌 대학입시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각하여 이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교육문제를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하기 위해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을 자평한 <대한민국 교육 40년>(국정브리핑특별기획팀, 2010, 한스미디어)을 검토하고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잔혹사>(2012, 안물과사상사)와 <서울대의 나라>(1996, 개마고원), <서울대 출신들의 콤플렉스>(공동철 등, 1995, 한솔미디어), 소설 <윈터 스쿨 (상,하)>(이석범, 1999, 살림),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김동훈, 1999, 바다출판사)와 이 책 <대학 서열 깨기>를 읽었다. 앞으로 <학벌사회>(김상봉, 2004, 한길) 등 몇 권을 더 읽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현재의 입시지옥의 근본적인 이유가 "서울대 독점 권력화"라는데 모아진다. 강준만 교수와 이석범 작가, 김동훈 교수에 이어 이 책의 저자 김경근 교수도 '엘리트 중심주의' '대학 서열화' 'SKY 독과점' '엘리트 중심주의' 등을 거론하지만 그 핵심에는 '서울대 권력 독점화'가 놓여져있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출되면 해결방안을 마련하여 어떻게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내고 누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여 끈기있게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 2012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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