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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세미나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되었다. 저자는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현상과 본질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가 독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독일 및 서구사회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 한병철은 현재의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사 인간은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현대의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사회인 것이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하는데, 개인의 성과에 대한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당신들도 나처럼 이 문장에서 박정희와 정주영, 그리고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과거의 착취가 타자에 의한 착취였다면 자본주의의 착취는 '자발적인 착취'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착취'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고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도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공감되는 답을 제시한다. 또한, '피로'를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한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이렇게 해서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짊어지고 있다. 범람하는 성공학 도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한병철은 그것을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자본주의 초기, 중기 단계에서 창업자들과 자본가들, 기업가들만이 프론티어리즘과 같은 '할 수 있다'를 '성과주체'로서 규정된다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문화지배층들은 그 범위를 중산층과 노동자, 서민 등 하층 계급에게도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소진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피로사회라는 것이다.
저자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적절한 답을 제시해준다.(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독일에서 이 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에 묘사하고 있는 성과사회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술 책들이 서점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된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수퍼스타 K2'의 허각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도 그러한 이상일 것이다.(그 자체로 나름 장점이 있는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저자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OECD 국가에서 상위에 차지하는 현실과 학생들을 자살로 내모는 무한입시경쟁 역시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 책은 독일에서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독일의 주요 신문과 방송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으로서 격찬하였다고...
[ 2012년 6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