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서열 깨기
김경근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또 다시 고등학생이 자살했다. 오늘 언론에 보도된대로 하면 '성적 비관'이 이유다. 대구에서는 지난 6개월 사이에 학생 10명이 자살했다. 2012년 2월 발표된 통계청 발표에 나온대로 우리나라 15~19세 청소년 중 8.8%가 '1년에 한 번 이상 자살을 생각'해본 것으로 나타난 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중,고교생의 적지 않은 수가 '자살을 한 번 이상'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라 예상할 수 있다.

언론의 기사를 보면 소위 대다수의 정치인, 관료, 전문가나 교육관계자들은 청소년 들의 자살에 대해 근본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1990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청소년의 스트레스와 자살이 증가하는 것을 20년이 넘도록 제어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일단 교육문제에 있어 나는 정치권과 교육당국은 '무능'의 전형이기에 평가에서 제외하고 싶다. 대신 언론인, 전문가나 교육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 학부모와 교사와의 소통, 정신적 나약함, 기숙학교 방식, 시험과 성적과잉, 학교 내 왕따나 폭력 등을 이유로 제시한다. 따라서 자살과 스트레스 방지 대책은 학교 내 폭력근절, 학교 내 상담사 배치, 교사나 학부모가 아이들과 자주 대화하기, 기숙학교 없애고 시험 줄이기 등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까?

동일한 조건에서 스트레스를 더 받거나 자살까지 하는 청소년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들 개개인이 아이들과 소통하는 정도와 가숙학교 식으로 공부와 성적을 더 심하게 강요하고 하지 않고이 따라 약간의 차이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 학생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교육시스템과 사회문화 현실을 두고 청소년의 자살과 스트레스, 왕따 등 교육문제를 사회적, 제도적,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순간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 인식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0년대 초반에 발표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2008. 청아)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뒤르켐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자살'이란 인종적, 개인적, 병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계급적, 계층적임을 밝혀낸 바 있다.
따라서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 문제 역시 전체적인 시각에서는 뒤르켐의 접근법이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청소년들의 경우 사회적, 구조적인 상황이 '학생'이라는 구체적인 성격이나 위치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결국 교육문제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저자는 다른 나라에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대학입시'가 유독 한국에서는 '압시지옥'이란 현상이 지구상에서 유례없는 '지옥'이 된 이유를 '무한경쟁'의 성격으로 지적한다. "한국의 입시경쟁은 사실상 극소수 명문대 입학을 놓고 벌이는 타인과의 경쟁이다. '제로섬 게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대학입시는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그리고 영영 갈리는 단판 승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시는 더욱 '죽기살기식'의 무한경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군사독재가 마감된 이후 우리나라 주요 권력의 상층부에는 서울대 출신들이 빠르게 점유율을 늘렸다. 육사 출신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서울대 출신들은 지난 30년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언론계, 학계, 재계 등의 주요 요직에 최소 50%대에서 최대 70%대를 자지했다.(겉으로 보이기에 역대 대통령 중 서울대 출신이 한 명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사법부와 언론, 행정부의 고위급으로 올라갈수록 그 점유율이 높아. 그들이 그렇게 능력이 있어서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이 1990년대 이후 경제성장이나 민주주의의 성숙에 실패하고 사회양극화가 심해질대로 심해진 이유가 역으로 그것을 반증한다. 그 30년 동안 사회의 주요 요직에 서울대 출신들이 장악했지만 그들은 IMF를 불러왔고 부동산 거품과 사교육 광풍을 만들었고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대신 수 없이 많은 부정부패와 이기적 탐욕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오만함과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30년 과정에 대한 설명이 과연 가능할까? 저자는 서울대 중심의 서열화 속에서 학벌주의와 학연주의, 엘리트주의가 우리나라의 온갖 문제, 즉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서울대 독점현상, 또는 SKY 독점현상을 30년 동안 보아온 학부모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의 눈 앞에 서울대를 나와야 고위직 판검사가 되어 성추행을 해도 처벌받지 않고 뇌물을 받아도 사면,복권되고 신문사, 대기업, 정부의 고위 관료가 되어 서로서로 이끌어주고 말어주는게 보이는데 어찌 학부모들아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 엄두가 나겠는가?

그렇다면 '입시무한경쟁'을 초래하는 근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대학의 서열화'로 본다. 전국 수 백개의 대학이 서울대를 정점으로 거의 획일적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상태이며, 출신대학의 서열은 곧 자신의 '등급'과 직결되므로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한 단계라도 더 높은 대학에 가려고 무한경쟁을 하니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OECD 어느 국가도 우리나라처럼 획일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1990년대 이후 서울대 입학생 중 부유층 자제들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다수의 '보통' 학부모 자녀들은 입시전쟁의 '예정돤 패배자'안 것이다. 따라서 이 상태가 유지되는 한 서민층 학부모들에게 대학입시는 '한풀이'가 아니라 또 한 번의 한을 쌓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학부모들에게는 교육과 입시병폐으, 근원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대조차 형성되지 않고 있다. 그냥 언론과 교육당국과 사교육과 주변인들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만다. 이것이 현실적인 난관이 된다.

저자가 결론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대학입시 평준화'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입시 평준화를 통해 초등학생들의 입시열풍과 사교육을 해결했고 고교 입시 평준화를 통해 중학생들의 과외와 입시열풍을 해결했듯이 대학입시 평준화를 통해 대학입시 광풍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각 대학은 대학원 중심으로 경쟁을 하고 대학 간 학부경쟁을 통해 진정한 '공정경쟁'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가능성과 현실성, 장단기 추진전략에 대한 판단은 아직 쉽지 않다. '대학입시 평준화'만이 유알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교육문제는 공교육 무력화 현실, 교욱제도와 시스템, 교과내용, 사교육 현실, 서울대 학부 축소, 공공부문에서의 서울대 또는 SKY 독점 완화정책 등과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고 그동안 독점이익을 누려온 대상자들의 반발과 연착륙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여론을 모으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도 남아 있다.
하지만 난 저자의 기본적인 추진방향에는 동의한다.(

* 기억에 남는 문장 :
-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까지... MB는 무의미)이제까지 나온 과외대책들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역시 과외를 없애려면 그 근원안 입시 무한경쟁체제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치열한 경쟁을 거리지 않고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아마 과외를 하라고 떠밀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여론조사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994년 공보처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부모의 88%는 과외를 금지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과외가 자녀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사람은 90%나 되었으며, 실제로 열 명에 일곱은 어떤 식으로든 과외를 시킨다고 대답했다.
.....
학보무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외가 폐단이 있기 때문애, 비록 학습에 도움이 되지만, 일률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과외를 하는 한 자기 자녀만 빠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과외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다른 사람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왜 그러는가? 그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한국의 대학입시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특히 좁기만 한 명문대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보다 더 하지는 못할망정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자기만 하지 않는 것은 입학을 미리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일괄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내 자녀만 과외를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이것을 내 자녀만 아는 이기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어?든 조사결과는 과외의 근본이 공교육의 수준이나 시험문제의 난이도가 아니라 대학서열화와 그를 둘러싼 무한경쟁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준다.
아는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애기다. 그러나 문제는 과외대책을 세울 때 이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외는 무한경쟁의 소산이며 무한경쟁은 차례로 대학의 서열화에서 생겨나므로 대학의 서열화를 문제삼지 않고서는 진정한 과외대책이 나올 수 없다는 당연한 인식을 당국이나 교육전문가들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당국은 그저 입시제도의 절차나 방법을 개선하려고 하며 교육전문가들은 오직 공교육 정상화가 과외문제 해결의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외는 앞에서 보았듯이 공교육의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걸 알 수 있는데도 교육전문가들아 자꾸 공교육 정상화만 외치는 걸 보면, 실제로 과외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결국 과외를 없애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쟁의 절차, 즉 입시제도의 방법을 바꿀 것이 아니라 경쟁의 구조나 근원 자체를 없애는 '입시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p.53)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이기정, 2011, 인물과사상사)에서 시작된 교육문제에 대한 나의 탐구는 <학교개조론>(이기정, 2007, 미래인), 핀란드 교육 시리즈 3부작인 <핀란드 교실혁명>(후쿠다 세이지, 2009, 비아북), <핀란드 부모혁명>(박재원/구해진, 2010, 비아북), <핀란드 공부혁명>(박재원/임병희, 2010, 비아북), <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박재원, 2012, 스쿨라움)를 연이어 읽었지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책 속에는 학부모들과 학생들, 교사들이 어느 정도 현재의 교육문제 틀 속에서 제한적으로라도 풀어나가고 해결할 수 있는 대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교육문제의 해법이 사회적으로 단기간에 합의되가 어려운 조건 속에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와 더불어 1970년대에 '탈학교화'와 '탈산업화'를 주장한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2011, 생각의나무)를 다시 읽어보고 아주 오랫만에 파울로 프레이리의 고전인 <페다고지>(2012, 그린비)와 <교육과 의식화>(2012, 중원문화), <체 게바라와 파울로 프레이리의 혁명의 교육학>(피터 맥라한, 2012, 아침이슬),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노암 촘스키, 2012, 아침이슬)를 읽으면서 교육철학과 사회과학적인 분석, 미국의 사례 등을 참고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작금의 현실에 적합한 분석결과를 도출할 수가 없었다. 특히 '입시지옥'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국 교육문제의 근원이 단순히 의무교육 현장이 아닌 대학입시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각하여 이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교육문제를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하기 위해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을 자평한 <대한민국 교육 40년>(국정브리핑특별기획팀, 2010, 한스미디어)을 검토하고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잔혹사>(2012, 안물과사상사)와 <서울대의 나라>(1996, 개마고원), <서울대 출신들의 콤플렉스>(공동철 등, 1995, 한솔미디어), 소설 <윈터 스쿨 (상,하)>(이석범, 1999, 살림),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김동훈, 1999, 바다출판사)와 이 책 <대학 서열 깨기>를 읽었다. 앞으로 <학벌사회>(김상봉, 2004, 한길) 등 몇 권을 더 읽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현재의 입시지옥의 근본적인 이유가 "서울대 독점 권력화"라는데 모아진다. 강준만 교수와 이석범 작가, 김동훈 교수에 이어 이 책의 저자 김경근 교수도 '엘리트 중심주의' '대학 서열화' 'SKY 독과점' '엘리트 중심주의' 등을 거론하지만 그 핵심에는 '서울대 권력 독점화'가 놓여져있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출되면 해결방안을 마련하여 어떻게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내고 누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여 끈기있게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 2012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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