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한국사회 - 왜 우리 모두는 아플 수밖에 없을까?
김태형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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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김태형 저 <트라우마 한국사회>를 읽고 / 2013. 04., 368쪽, 서해문집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 강력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한국인들의 심리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불안케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키는가? 누가 약자들과 선량한 이들을 분열시키고 싸우도록 부추기는가? 주변을 돌아봐도, 신문방송을 보아도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인들의 마음이 오래도록 불안정하고 아프다는 것은 곧 그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심리적 상처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마음의 상처를 '트라우마(Trauma)'라고 부른다.

"이러한 트라우마들은 한국인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 즉 한국인의 트라우마는 대부분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사회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라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동일한 트라우마애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주요한 원인이 각자의 개인사에 있다기보다는 공동으로 경험했던 집단의 역사에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저자 서문)

"한국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가 심한 이유는 일제 식미지와 미군정,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을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매우 폭력적인 과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민주화됐다고 하는 현 시점에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법에 의해 일부 사람들을 가두는 것이 집단 트라우마가 강한 사회임을 증명합니다." - 독일 경제학자 홀거 하이데 (2008년 9월 경향신문)

○ 세대, 계층, 분단, 지역으로 쪼개진 한국사회는 좌절과 미완성, 혼돈과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정부 실패, 극우보수세력의 연이은 재집권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이런 상처들이 채 아물기도 전에, 돈 중심, 경쟁 중심의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한국인들은 세대와 계층, 중심과 변방으로 갈가리 쪼개졌다. 
저자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상황을 세대 트라우마와 집단 트라우마로 나누어 세밀히 분석한다. 

우선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각 세대가 가진 마음의 상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성인·중년기별로 나누어 분석한다.(자세한 내용은 제 블로그 http://blog.daum.net/hy2oxy/8691537를 참고)
유년기부터 반복된 좌절의 경험으로 인해 생긴 50년대생(좌절세대)의 ‘좌절 트라우마’, 포기할 수 없는 청년기의 꿈으로 인해 생긴 60년대생(민주화세대)의 ‘미완성 트라우마’, 세계관과 인생관의 혼돈으로 인해 생긴 70년대생(세계화세대)의 ‘혼돈 트라우마’, 공부기계에서 삼포세대로 이어지며 누적된 공포감으로 인해 생긴 80년대생(공포세대)의 ‘공포 트라우마’는 현재 한국사회의 치명적 고질병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세대 갈등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각 세대의 트라우마와 세대 갈등의 근본 원인은 서로 다른 경험과 트라우마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외세와 극우보수세력에게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입니다. 저 또한 이해 적극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저자는 세대별 트라우마의 치유방안에 대해서도 제시합니다.
좌절세대가 좌절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먼저 패배주의와 자기혐오감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그 다음 사회를 빈곤하게 만드는 잘못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젊은이들이 노력할 경우 그런 시도를 적극 지지해주고 동참해야 한다. 또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함으로써 남은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민주화세대가 미완성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좌절세대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사회가 강요하는 '돈을 벌지 못했으니 내 인생은 실패했다'는 식의, 돈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잘못된 자기평가에서 해방됨으로써 자기의 인생을 다시금 긍정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청년기의 꿈을 부활시켜 그것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여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10대에서 20대 초반인 자녀들을 도와주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세대가 미완성 트라우마를 완치하려면 청년기의 꿈, 즉 '인간다운 세상'을 완성시켜야 한다.
세계화세대가 혼돈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무엇보다 세계관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개인주의적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대적 결속력과 힘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화세대도 민주화세대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는 자녀들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공포세대가 공포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무엇보다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면서 동시에 부모와의 동맹을 성사시켜야 한다. 또한 공포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집단적인 승리의 경험을 축척해야 한다.

○ ‘분단 트라우마’는 언제든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극우세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
"분단 트라우마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병들게 만드는 첫째가는 원인이자 한국인들에게 밝은 미래를 박탈하는 기본 장애물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의 정신을 불구화하고 정치를 기형화하며 민족분단을 영구화하는 분단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하는 한 한국사회의 발전이란 요원한 일이다."(p.208~209)

저자는 세대 트라우마에 이어 계층, 분단, 지역감정으로 생겨난 한국사회의 집단 트라우마를 들여다본다. 돈 중심의 세계관이 가져온 계층 간의 갈등은 ‘우월감 트라우마’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 기반한 한국사회 최대의 장애물은 ‘분단 트라우마’로, 차별과 학대, 죄의식의 얽힘으로 인한 지역 갈등은 ‘변방 트라우마’로 규정하고, 이들 트라우마가 생긴 원인과 문제점, 해결 방안 등을 세밀히 분석한다.(자세한 내용은 제 블로그 http://blog.daum.net/hy2oxy/8691542를 참조)

분단 트라우마와 극우세력 콤플렉스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종북(반미)이 아니다",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다까끼 마사오'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단순히 북한에 대한 공포로 여겨졌던 ‘분단 트라우마’가 실은 언제든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극우세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는 대목은 명쾌하면서도 탁월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호남 갈등으로 여겨지는 지역감정이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로 나뉘어 어떻게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는지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서울과 변방(지역)으로 나뉘는 새로운 지역 갈등이 나타나는 현상을 분석한 부분 역시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인 우월감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변경 트라우마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주역들은 세대별 트라우마와 마찬가지로 외세와 극우보수세력, 극우보수언론 등이다. 특히 분단 트라우마의 경우 친일파와 월남세력, 극우기독교 집단과 국가보안법이 추가된다. 따라서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공통적인 과제는 역시 외세와 극우보수세력, 극우보수언론을 이 땅에서 퇴치하는 것이다.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각 트라우마별 방안은,
우월감 트라우마의 경우, 첫째 개인들이 우월감 중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둘째, 한국사회는 사회양극화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한다. 셋째, '돈 중심의 세계관'을 강요하는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
분단 트라우마의 경우, '북 콤플렉스'를 치유하려면 남북이 서로의 체제와 사상문화를 존중하고, 남북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시키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레드 콤플렉스', 특히 '극우세력 콤플렉스'를 치유하려면 극우보수세력을 정치권에서 퇴장시키고, 그들의 절대 무기인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 "나는 특히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데 한국사회가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방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영호남 차별, 서울과 변방 사이의 차별을 없애야 하고, 전국적인 진보정당 혹은 계급정당이 출현해야 하며, 서울을 제외한 변방이 단결해야 한다.

○ 폭발 직전의 위험 수위에 이른 한국, 트라우마 없는 한국사회를 꿈꾸며…

몸의 상처는 눈으로 보이는 데다,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기에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치료를 받는다. 반면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아 파악하기 힘들고, 정신적 고통을 주기에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쌓여 직접적인 문제로 드러날 때는 손쓰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과거 불행한 현대사를 지나오며 생긴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는 IMF경제위기와 돈 중심, 경쟁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세대 트라우마라는 형태로 더욱 확대되어, 이제는 폭발 직전의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이라고 해서 이대로 방치하다 보면 한국사회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미 이러한 마음의 병은 높은 자살률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 학교 폭력, 배금주의, 도덕적 해이로 표출되고 있다. 우리가 매년 지겹게 들어온,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낮다는 조사(OECD 34개국 중 32위-2012년 기준) 또한 현재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과연 한국사회가 집단 트라우마에서 해방되어,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과 함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트라우마 없는 한국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2012년 대선의 승부를 결정지은 한국인의 트라우마

2012년 대선은 한국인의 트라우마가 가진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선거였다. 각 세대, 계층, 분단, 지역 문제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이번 선거의 결과가 갈렸다. 유년기부터 중년기까지 지속적으로 좌절을 맛본 좌절세대(50년대생)는 주도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대세를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이들은 야권의 바람이 불면 야권 쪽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여권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많았는데, 이번 선거에서 결국 여권 쪽으로 움직였다.

‘우월감 트라우마’는 경기 변동에 극히 민감한 자영업자들과 생존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보수세력에 대한 의존심을 부추기고, 부자 되기 열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또 한 번 유혹함으로써 보수세력의 승리에 도움을 주었다. 
‘분단 트라우마’는 야권 진영의 운신의 폭과 공격력을 심하게 위축시킨 반면, 나이가 많은 세대에게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함으로써 여권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영호남 갈등에서 서울-지역 갈등으로 옮겨가면서 한국사회에 날이 갈수록 더 극심해지고 있는 ‘변방 트라우마’ 역시 충청도와 강원도, 나아가 수도권 주민들이 여권에 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

저자는 심리학자로서 현재 미국의 주류 심리학으로, 동물과 사람을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보는 진화 심리학이나 뇌 과학의 오류를 비판하며, 사회심리학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 집필 강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개인의 마음은 개인이 치유해야 한다는 식의 긍정 심리학, 위로의 메시지로 포장한 자기계발 서적들의 달콤한 유혹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이 책을 통해 한국사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거대한 심리적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하나하나 세밀히 분석하였다.

○ 인상 깊은 문장

"좌절세대는 순응의 대가, 즉 한평생 극우보수세력이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한 결과가 결국 좌절이었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찾아 저항에 나서기보다는, 반복된 좌절의 경험으로 인해 여전히 세상에 순응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좌절세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반복된 ‘좌절’이 준 상처이기 때문에 이들의 대표적인 트라우마를 ‘좌절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세대는 한국사회를 바람직하게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떠안게 되었고,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한국사회가 옛날보다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며 과거의 민주화운동이 다 헛고생에 불과했다는 허무감과,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느라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는 패배감까지 느끼고 있다. (중략) 나는 이들의 가장 큰 트라우마가 청년기의 꿈이 완성되지 못한 것과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들의 트라우마를 ‘미완성 트라우마’라고 부를 것이다."

"이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청년기에 받아들였던 개인주의적 세계관과 인생관으로는 바람직한 사회개혁도, 행복한 미래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으면서 세계관적 · 인생관적 혼돈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화세대의 가장 큰 트라우마는 ‘혼돈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공포세대는 그야말로 공포에 짓눌려 있는 세대이므로 이들의 가장 큰 트라우마는 ‘공포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다. 공포세대가 공포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무엇보다 부모와의 동맹을 성사시켜야 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공포세대의 부모들은 한국사회와 더불어 이들에게 공포 트라우마를 강요한 주범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내가 너보다 더 잘났다’는 우월감을 느끼는 데에서 삶의 기쁨을 찾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중략) 나는 모든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이런 집단심리, 즉 병적으로 우월감을 추구하면서 우월감에서 삶의 기쁨을 찾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마음의 병을 ‘우월감 트라우마’로 정의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해방 이후의 좌우 대립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분단 트라우마가 극대화되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남북 간의 화해가 추진되면서 레드 콤플렉스와 북 콤플렉스는 지속적으로 약화된 반면 극우세력 콤플렉스는 여전히 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탈냉전의 21세기를 맞이한 현재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분단 트라우마의 기본 내용은 ‘극우세력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지역차별은 그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지역주민, 피해를 입는 지역주민, 옆에서 구경을 하는 지역주민까지 모두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 즉 지역차별을 당해왔던 호남인만이 아니라 그 차별로 인해 일정 정도 혜택을 입은 영남인, 지역차별을 목격해왔던 나머지 모든 한국인이 변방 트라우마의 희생자인 것이다. 나아가 점점 심해지고 견고해지는 서울공화국 체제로 인해 한국인의 변방 트라우마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 2013년 8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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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인권이다 -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엮음 / 이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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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저 < 집은 인권이다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를 읽고 / 2010. 09., 346쪽, 이후


'집'은 개인적인 그리고 가족 수준의 경제능력을 통해 구입해야 하는 '재화(재산)'일까? 우리에게 '집' 또는 '주거'는 단순히 '잠자는 곳'인가?
저자로 명기되어 있는 '주거권운동네트워크'는 '집', 즉 주거권은 '재화'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사고의 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주거권에는 공동체 생활과 문화도 포함된다.

헨리 조지의 명저 <진보와 빈곤>이 '토지 가격 상승을 통해 생산과 노동의 수탈'이라는 근대 경제학의 숨겨져 있는 뿌리를 주제를 다루었다면, 주거권운동네트워크는 '주거'라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상품화하여 인간을 짐승만도 못하게 대하는 현대 사회의 뿌리를 다루었다고 밀할 수 있다.

'추천하는 글'에서 애기하듯이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달팽이도 집을 메고 사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뜨내기로 산다. 철새도 아닌데, 뜬구름도 아닌데 떠돌며 산다. 골목에 정들 새도 없이, 이웃을 익힐 틈도 없이 곧 떠나야 할 동네에 잠시 머물기를 되풀이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한국사회의 전월세 세입자 등은 OECD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21세기에도 전국민의 절반에 육박한다. 외형상 주택보급율은 103%를 넘어서는 이 시대에...

이 책의 장점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당사자들의 기록이란 점이다. 대다수 글은 자신이 겪은 일을 직접 쓴 것이다. 상당수는 말한 것을 풀어 쓴 것이다. 취재를 거쳐 기록한 것조차 거의 구술에 가깝다.
책에는 집과 주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고 자세하게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 한 챕터 읽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한 사람 한 가족의 애끓는 삶. 자신의 힘든 삶이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구조와 제도라는 생각보다 스스로의 잘못이나 무능으로 체념하는 세입자들. 그런 순수하고 성실한 그렇지만 제도와 문화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화가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자신이 기르는 애완용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집주인들의 세입자에 대한 대우.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관공서와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무대책. 자신은 먹고 살만 하니 착취받는 사람들보다 권력을 지향하는 지식인들. 나만이라도 내 가족만이라도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부동산 투기와 증권 투기를 따라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문제는 제도와 문화, 부정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임에도 스스로의 잘못과 무능으로 주거권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 쪽방, 반지하, 옥탑, 심지어는 동굴에서까지 살아야 하는 주거 극빈층이 한국에 2008년 현재, 무려 162만 명에 이른다. 혼자 1,083채의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이삿짐을 싸야 하는 이도 많다.

저자는 이럴 바에야, '내 집' 마련의 꿈을 버리는 것은 어떻겠는가 제안한다. 여성이라고, 장애가 있다고, 혼자 산다고 해서 집이 필요없지는 않다. 재산이 없다고, 소득이 적다고 집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돈이 없다고 먹지 못해 굶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집 또한, 주거 또한 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인권'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주거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살 만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팔릴 만한' 집을 짓는 건설 자본은 물론, 부동산 경기 부양책이 무슨 경제를 살리는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국가의 자세 또한 틀렸다고 말한다. 집을 소유하고도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하우스 푸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 자체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일의 집 때문에 자신의 오늘을 저당잡힌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거권운동네트워크라는 주거권 운동 단체(모임, 네트워크 ?)에게 아쉬운 점은, 주거권을 생존권이나 행복추구권처럼 인권으로 설정하여 인권운동 차원에서 주거문제를 다룬다는 긍정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인권'이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졌을 때 당사자들의 권리 찾기 내지 자발적 결사나 운동을 도모하기 보다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에 의한 '인권 운동'으로 전개될 우려에 대한 우려이다.

그런 점은 책 속에 등장하는 어떤 단체의 일꾼 역시 주거와 생활을 바라보는 생각이 불의와 부정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불행한 삶'이라는 식의 인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 토지와 부동산에 접근한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당사자들에게 더 분명하고 힘있는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록으로 실은 [유엔 사회권위원회]에 제출한 민간 단체 보고서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주거 현실을 숫자와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주거권 선언―집은 인권이다!] "모든 사람은 살 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1.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던 땅이나 집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을 때까지 살 권리가 있다. 누구도 강제로 쫓아낼 수 없다. 
2. 모든 사람은 적정 수준의 주거비 부담으로 살 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3.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조건에 상관 없이 적당한 수준의 집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건강을 해치지 않을 쾌적한 주거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5. 모든 사람은 각종 시설들을 이용하기에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6. 임대 아파트나 비닐하우스촌, 쪽방 등에 산다는 이유로, 혹은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잔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또한 국적, 인종, 성별, 장애, 나이, 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집을 구하거나 집에서 살아가는 데 불합리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7. 살 만한 집에 살 권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의 권리이기도 하다.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자 연을 파괴하는 마구잡이 개발을 해서는 안 된다. 
8.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동산 및 주택 정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2013년 7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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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의 승리 -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존 올콕 지음, 김산하.최재천 옮김 / 동아시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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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연선택이 동물의 사회 또는 사회적 행동의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서평] 존 올콕(john Alcock) 저, 김산하, 최재천 역 <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The Triumph Of Sociobiolog >를 읽고 /  2013. 03., 383쪽, 동아시아

인간이 40억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 과정에서 탄생한 생명체 중의 하나이고, 역사적 진화의 소산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인간만을 따로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절름발이일 수 있다. 인간이 구성하여 유지하고 있는 '사회'라는 집단 시스템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신이 던져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진화생물학과 더불어 사회생물학에 관심이 많다. 기존 사회과학은 너무 인간을 '별종'으로, 또는 동물과 상관 없이 분리된 '품종'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은 별도의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분류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사회생물학을 "자연선택이 동물의 사회 또는 사회적 행동의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어떤 동물의, 어떤 행동을 연구하는 것일까?

동물 중에서 일부다체제나 일처다부제는 흔한 편이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로 진화한 동물 중에서 '혼외정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호기심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조류의 한 종인 붉은날개지빠귀는 왜 기회만 있으면 배우자 몰래 옆 동네 수컷과 교미하는 것일까?
파트너가 좋은 둥지나 충분한 정자를 제공하는데도 암컷은 은밀한 ‘혼외정사’를 찾아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한때 새는 ‘일부일처제’의 전형으로 여겨졌지만, 일부일처제로 보이는 여러 종에서 암수 모두 번식기 동안 여러 개체와 교미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회생물학자가 핵심적으로 의문을 갖는 점은 짝이 있는 암컷(그리고 수컷)이 둥지 짓기, 먹이 찾기 등 유용한 일을 할 시간에 굳이 혼외교미에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일부일처제를 하지 않는 붉은날개지빠귀 암컷의 혼외교미 파트너가 암컷의 새끼에게 여분의 음식을 주거나 포식자로부터 보호해줬다면, 파트너를 여러 명 거느리는 성향을 가진 암컷은 그렇지 않은 암컷보다 더 많은 자손과 유전자 사본을 남겼을 것이라는 설명을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 암컷들의 성적 정절의 차이가 종의 진화를 결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붉은날개지빠귀나 다른 명금류 암컷이 여러 수컷과 관계를 맺는 그 밖의 이유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므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완전하게 검증이 된 가설은 없다. 게다가 붉은날개지빠귀에서 혼외교미의 적응적 가치에 대한 중요한 예측 중의 하나는 매우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한 연구는 여러 수컷과 교미하는 암컷의 번식성공도가 일부일처제 암컷의 번식성공도보다 높았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연구는 정확히 정반대의 결과를 보고했다. 결국 이 다윈적 수수께끼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다른 사례로 '개체 또는 개체군의 희생'이 있다. 동물이 자신의 유전적 성공을 기꺼이 희생하는 행동은 다윈에게는 수수께끼였다. 해밀턴은 유전자와 유전적 발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다윈의 생각을 발전시켜 극단적 이타주의에 따른 유전적 결과에 집중했다. 극단적 자기희생, 예를 들어 불임 개체가 자살로 집단을 방어하는 행동 등은 거의 항상 가족 안에서 일어난다. 
가장 좋은 예는 척추동물 중에서 개미 집단과 가장 가까운 특징을 보이는 동물인 케냐,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의 벌거숭이 두더지쥐이다. 털이 없고, 작고, 피부 본연의 색을 띤 이 요상하게 생긴 동물의 집단 대부분을 이루는 불임 일꾼들은 복잡한 굴들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하 벙커에서 생활한다. 통상 70~80마리로 이뤄진 집단에서 단 하나의 암컷만이 최대 세 마리의 수컷과 번식한다. 나머지는 이 극단적 소수를 위해 노동하며 때로는 굴을 침범한 뱀에 맞서 죽음을 감수하기도 한다.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이 집단은 거의 전체가 가임 지배자들의 자손으로 이루어져 있어, 위험한 뱀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죽는 일꾼 쥐는 자신과 매우 가까운 친척을 위해 희생을 치룬 셈이다. 집단 내의 유전적 연관도는 형제자매 또는 어미와 아들 간의 근친상간에 의해 더욱 높아질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자손이 부모의 특정 대립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을 연구하던 사회생물학자가 ‘인간의 행동’에 대해 진화적 가설을 제기하면 그 행동이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도덕적인 비판이 가해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도덕적인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선택으로부터 도출되는 도덕적인 교훈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사회생물학적 분석은 인간의 사회행동에 대한 중립적인 설명을 제공할 뿐이며, 정당화나 도덕적 진단, 무엇이 ‘마땅히’ 어떠해야 된다는 규범적 선언이 아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가 강간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생물학자는 자신의 가설이 위험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불쾌하다는 반응을 반드시 듣게 되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강간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사회적 또는 ‘도덕적’ 인자를 제거하는 행위는 강간을 정당화할 것임에 분명하며,” “강간을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과 분리시켜 적응적 의미를 담아 격상시키는 것은 환원주의적이고 반동적이다”라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물론 ‘진화적인’과 ‘도덕적인’이라는 두 가지 수식어가 갖는 의미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생물학적으로 적응적인 형질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강간은 성적 동인의 자연적인 현상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보통 강제적 성관계에 대한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시각은 증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근거에 기초한다. 수전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은 자신의 저서 <의지에 반하여 Against our will>에서 “모든 강간은 힘의 행사일 뿐이며,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에 두기 위해 행하는 의식적인 위협의 과정에 더도 덜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즉 강제적 성관계에 대한 페미니즘의 기본 입장은 강간이 성보다는 힘에 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남성권력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영향으로 여성을 지배하고 위협하려는 욕구가 강간범의 행동 동인이다.

그러나 강간범의 절대다수가 발기된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사정할 정도로 성적으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강간에 성적인 동기가 전혀 없다는 생각은 상당히 반직관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강간범의 행동과 성적 욕망은 관련이 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성적 욕망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기므로 강간도 어떤 의미에서 ‘자연적’이라고 여김으로써 사회가 강간범을 용인하는 것을 페미니스트들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강간이 누군가를 수치스럽게 하려는 단순 명백한 범죄적 행위라고 하면 아무도 강간범을 용서하거나 이 행동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강간에 ‘자연적인’ 원인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것이다.

같은 목적을 위해 강간이 다른 생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순전히 인간만의 현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예 순수하게 문화적인 현상으로 강간이 특정 사회의 남성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주장할 법도 하다. 그렇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을 교육해서 강간에 대한 남성 이데올로기를 바꾸어 문제를 제거해버리면 된다.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단지 남성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몇몇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암컷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교미하는 행동은 곤충에서부터 침팬지, 오랑우탄, 기타 영장류에서 많은 사례가 수집되었다. 예를 들어, 사막 풍뎅이(Tegrodera aloga) 수컷이 암컷을 옆으로 눕히려고 거칠게 몸싸움하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이에 성공하면 수컷은 암컷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경으로 암컷의 생식기를 더듬거리다가 때로는 삽입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수컷이 얼마든지 점잖은 방식으로 구애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에 수컷은 작은 사막식물을 먹는 암컷의 앞으로 조심스레 와서 자신의 더듬이로 암컷의 더듬이를 쓰다듬어 자신의 머리 앞에 난 두 개의 홈으로 인도한다. 둘은 몇 분이 지나도록 서로 마주본 상태에서 암컷은 계속해서 먹이를 먹고 수컷은 계속해서 더듬이를 쓰다듬는다.
즉 인간이란 종만이 강간 또는 강제적 성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인간행동의 전문가로 여긴다. 사람들은 '인간행동'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깊고, 다른 사람의 동인이나 의도를 분석하는 데 인생의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더 잘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사회생물학은 이 분석에 진화적 측면이라는 색다름을 제공한다. 
저자는 이런 인류의 가장 고유한 특징이자 자랑스러운 유산인 문화에 사회생물학자들이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굴드가 사회생물학 분야와 학자들을 수년간 계속 비방해왔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심했다. 이 과정에서 굴드는 사회생물학이 사회적으로 유해하며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치부하고자 하는 여러 페미니스트와 사회과학자들과 동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비사회생물학자에 의해 가장 자주 제기되는 비판들은 대부분 불필요한 오해와 혼동에 기반하고 있다. 

이 책은 실제 연구 사례와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 핵심 오해사항들을 다룸으로써 사회생물학적 접근법이 인간은 물론, 개미에서 영양에 이르는 기타 사회적인 동물을 이해하는 하나의 좋은 자료로서 관심과 존경,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성적 질투심, 여성의 아름다움, 남녀 성의 차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 강간, 간통, 집단학살 등 인간을 주제로 한 여러 사례들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며, 과학과 이데올로기적인 반론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에서 마침내 사회생물학자들의 승리를 외친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가 역자 후기에서 조언하듯 책에서 제기하는 기존의 인문사회학적 문화 연구에 대한 비판과 사회생물학적 인간문화 연구의 실효성에 대한 비교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해 좀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해야만이 기존 서구식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가능할 것 같다.

[ 2013년 7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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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과 수설 - 400년을 이어온 성리 논쟁에 대한 언어분석적 해명
이승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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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승환 저 < 횡설과 수설 : 400년을 이어온 성리 논쟁에 대한 언어분석적 해명 >을 읽고, 2012. 10., 456쪽, 휴머니스트

사실 개인적으로 조선 성리학에 대해 잘 모른다. 예전에는 그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친 대로 '망국적인 당쟁'이라는 선입견만 가지고 있었고, 나이가 든 이후 여러 책과 정보를 접한 후에는 '당쟁'이라는 이미지가 일제의 식민지 사관인 것을 알고 기존 편견을 지우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초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석필, 1997)을 읽고서 '당쟁' 또는 '붕당'으로 이야기되는 조선시대의 사상논쟁과 그 논쟁의 뿌리, 과정 등을 일부 알게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뿌리로 일컬어지는 "동인의 뿌리는 퇴계 이황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시작"되었고. "서인의 뿌리는 율곡 이이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시작"되었다는 것과 "동인과 서인의 정책의 차이는 토지를 둘러싼 싸움"이 컸다는 정도로 정리한 상태였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간의 성리 논쟁은 왜 400년 동안이나 평행선을 달려왔는가?"

<당쟁으로 조는 조선 역사>는 '이기론(理氣論)'의 내용이나 쟁점이 아니라 당쟁의 과정과 주요 인물들과 사건, 당쟁의 배경 등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사상이론이나 쟁점을 자세히 알기는 어려웠다. 저자는 이덕일과 달리 '이기론(理氣論)' 자체를 다룬다.
특히 저자는 조선 이후 400년 넘게 이어져온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이 왜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기 되었는지에 대해 오래도록 연구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서로가 '프레임'이 달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계를 뒤흔들 만큼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동양철학을 비롯하여 기호학, 언어학, 논리학, 심리철학 등을 넘나들며 조선 유학 연구에 새로운 방법론과 뜨거운 쟁점을 제시한다. ‘횡설(橫說)’과 ‘수설(竪說)’이라는 기호학적 프레임을 통해 퇴계-고봉, 우계-율곡, 외암-남당 등 조선 유학사 속 성리 논쟁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정복심(程復心)의 [사서장도(四書章圖)] 초간본을 공개하며 [학기유편]에 얽힌 비밀을 명쾌하게 풀어낸다. 
퇴계와 퇴계학파는 ‘리(理)’와 ‘기(氣)’를 사람의 마음에 깃든 대비적인 관계로 파악했고, 율곡과 율곡학파는 양자를 각기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재료로 파악했다. 개념에 대한 시각차로 인해 발생한 두 학파의 갈등은 단순한 철학 논쟁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를 관통하는 쟁점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바로, ‘리’와 ‘기’ 두 가지 기호를 수평적으로 배치한 ‘횡설(橫說)’, 수직적으로 배치한 ‘수설(竪說)’이라는 기호학적 프레임을 통해 그 의미층위를 밝혀내고자 했다. 퇴계학파가 견지했던 ‘횡설’의 프레임과 율곡학파가 견지했던 ‘수설’이 논리적으로 부딪히게 되었던 원인을 차근차근 논증해가면서, 결론적으로 성리 논쟁을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통합적 프레임을 제시한다. 
출판사는 저자의 연구결과가 조선 유학 역사 속 해결되지 않았던 오랜 질문에 대한 해명일 뿐만 아니라 성리 논쟁 연구를 새로 쓰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단과 칠정(四端 七情), 도심과 인심(道心 人心), 도와 기(道 氣), 성과 형(性 形) 등의 성리학 개념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세 가지 프레임 가운데서 상하의 프레임과 좌우의 프레임을 두고서 격돌했다. 횡설과 수설이 바로 그것이다. '횡설'은 '리'와 '기'를 좌우로 배치하여 서로 갈등하며 승부를 다투는 가치론적 대비 관계로 파악하는 기호 배치 방식이고, '수설'은 이 두 기호를 상하로 배치하여 '리'가 '기'에 타고 있는 존재론적 관계로 파악하는 기호 배치 방식이다. 좌우로 된 프레임(횡설)은 좌파와 우파처럼 서로 갈등관계에 놓인 '가치론적 속성들(도덕과 욕망처럼)'을 이분법적으로 표시하기에 시지각으로 효과적이고, 상하로 된 프레임(수설)은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재료'라는 '존재론적 속성들(육체와 의식처럼)'을 승반 관계로 표시하기에 시지각적으로 적합하다."(p.15)

 

 

 

 

 

 

이 책을 통해 공맹사상, 주자학, 그리고 성리학에서 사용했던 단어들의 개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리(理), 기(氣), 심(心), 성(性), 정(情), 발(發) 등 성리논쟁에 사용된 핵심 개념들이 보통 수십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다의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점을 통해 바로 이 개념의 다의성이 당대의 성리 논쟁이 서로 간에 합치될 수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였음을 예증해낸다. 
퇴계사상의 독창성이 리발(理發)·리동(理動)·리도(理到)로 대변되는 ‘리의 능동성’에 있다고 본 학계의 주장과 달리, ‘리의 능동성’ 테제가 송대 고백화(古白話)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율곡계열의 학자들이 견지했던 승반론(乘伴論)이 현대 심리철학, 윤리학, 미학에서 사용하는 수반이론(supervenience theory)과 필적할 만큼 뛰어난 분석 도구라는 저자의 주장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또한 '횡설 : 수설'의 프레임이 단지 성리논쟁에 국한된 이해의 틀이 아니라 이 프레임을 근대 전야의 다양한 문명담론에 적용함으로써, 위정척사,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 등의 구호에 내포된 ‘허’와 ‘실’을 기호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사는 한국인들도 조선시대 유학자들처럼 '횡설 : 수설' 프레임에 빠져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치열한 이론이나 노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진보진영 학자들, 진보정당 이론가들, 정치인들, 일꾼들 사이에서...
논쟁과 경쟁이 치열하다가 엇나가거나 애초에 경쟁이 선의가 아니라 무언가 자리와 권력을 탐하기 위함이라면 조선의 유학자들처럼 '서로 죽이기'라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 2013년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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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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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달라이 라마(Dalai Lama), 빅터 챈(Victor Chan) 저, 류시화 역 <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를 읽고 / 2004. 09., 292쪽, 오래된미래

"만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니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그 즉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달라이 라마)

이 문장만 보면 많은 지구인들의 영적인 스승이라는 달라이 라마의 뜻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부정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책은 법정스님 추천 도서 중 33번째다. 티베트의 영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절친한 중국인 친구가 나눈 '용서'를 주제로 한 대화를 담은 것이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강제 점령한 이래 티베트 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으며, 그 고통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정신 개혁’과 ‘문명화’라는 명분 하에 중국 정부는 수많은 티벳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동양의 심원한 사상을 간직한 티베트의 사원과 경전들을 불태웠다. 티벳인들은 승려들 중심으로 비폭력 평화적인 방식으로 중국정부의 폭력에 저항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승려들이 생명을 바쳤다.

티벳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침략과 탄압은 천안문 사태와 문화대혁명와 더불어 중국식 사회주의를 회의하도록 만든 초기의 여러가지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지금도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물론 외딴 지역까지 중국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여전히 티베트 인들은 중국인들의 경멸과 감시 속에 힘든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 챈의 말에 따르면 티벳인들의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는 순박하면서도 상대방을 따뜻하게 포용하려는 티벳인들의 미소엔 폭압보다 강한 힘과 평화에의 의지가 어려 있다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승려들과 티벳인들의 그 '웃음'은 오랜 세월 동안 티베트 인들의 평화로운 정신세계를 한결같이 지켜온 ‘용서’의 철학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대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세속적인 행복뿐 아니라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전생애에 걸쳐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며, 그것은 또 다른 생의 비극을 가져오는 인과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와 원한의 감정'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장애물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 용서'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하지만 용서는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나 큰 공동체의 차원에서나 상처는 깊고 오래 간다. 여러 종교를 통해 늘 용서의 의미와 가치를 설득당하지만, 현실에서 우리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안겨주는 이들에 대한 감정의 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준다. 전쟁터와 같은 무시무시한 폭력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 순간 우리를 미워하고 의심하며 상처 입히려는 수많은 적들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단지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을 힘들게 만드는 모든 고통의 요인들까지도 포함된다. 용서 역시 사람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요소와 비극적인 상황까지도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자비로운 심성과 더불어 오랜 성찰과 명상, 그리고 인과관계의 문제와 사물의 실상에까지 이르는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용서의 실천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용서에서 온다."

빅터 챈은 달라이 라마의 수행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두 가지 기둥이 '공(空)과 자비' 그리고 '지혜와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만 있고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산속애서 풀이나 뜯어먹고 사는 외로운 은자나 다를 바 없고, 지혜가 없이 자비심만 있는 사람은 호감 가는 바보일 뿐이다."
이 문장을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의 많은 종교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수행과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깨닫고 대대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 속에서는 현실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물론 그가 전세계적으로 정부나 정치권, 종교세력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와 빅터 챈의 대화 속에 종교의 수행과 현실에 대한 참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 점이 무척 아쉽다.
내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마도 사람의 삶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증오나 미움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개인적인 행복 추구를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 것이며,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전제할 때만이 외적인 노력이나 조직적인 저항 역시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달라이 라마는 한국인들이 얼핏 아는 것과는 달리 티벳이 중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하는 것을 목표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티벳인들은 중국이라는 전체 속에서 자치와 자립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렇게 된다면 티벳과 중국이 서로 조화롭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달라이 라마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 2013년 7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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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