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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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에 짐을 꾸리고
인천공항을 나서고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그리고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

그곳에선 낮의 뜨거운 태양, 밤하늘의 달마져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설레였다
속을 간질이고 빨라지는 심장 박동수....

여행
저마다 목적도 달랐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또 다른 나, 자아의 재발견이었고 삶의 목적을 바꿔 놓는거

이 책을 읽으면서 분명 그녀가 산티아고의 길을 밟은 이유는 나와는 또다른 방식이었지만 부러웠다.
저마다 여행을 통해 느끼는 바도 분명 다르겠지만 그녀가 자신과의 줄을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그 무언가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녀의 설레임, 두근거림, 슬픈 그렇지만 시원한 울음, 외로움, 상쾌한 웃음, 깨끗한 만남, 그 모든 게 잠시나마 내가 거쳐 왔던 여행의 순간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순수한 영혼들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과 자유

사실, 요즘 나에게 조차 적응 못했고, 낯설었던 내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었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다시금 그 길을 떠나기 위해, 비상하기 위해 조금은 참아내야지...스스로를 다독거리게 되었다.
나만이 깨달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그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조금은 아껴두는 노력이 꼭 필요하니까

가본 적은 없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내 모습을 조금은 상상하고 싶어졌다
나라를 옮겨 다니며 여권에 비자를 받고 스템프를 채워나가는 뿌듯한 기쁨에 크레텐시알 도장까지 받는 또다른 즐거움이 생기는 기분 좋은 곳이니까
책을 읽는 내내 자작나무 밭을 지나 러시아를 횡단하며, 분명 고됬지만 간간히 만났던 눈물나게 푸르렀던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다시금 그 곳을, 그리고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선사해 준 산티아고 길을 나도 걷고 싶어졌다.


* 후기
- 이 책은 작년에 저자로부터 직접 선물받은 것이다...^^
  대학 동기들끼리 <내 인생이다> 출판 축하모임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 이 독후감은 나에게 이 책을 빌려간 회사 직원(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이 다른 책을 선물받기 위해 반은 강제로 작성한 것이다...ㅋㅋ
- 여행의 대한 많은 이들의 정의와 목적이 "또 다른 나, 자아의 재발견"이고 "삶의 목적을 바꿔 놓는 것"이라고들 한다. 나는 아직 그런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듯하다. 나에게 여행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주변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자연과 새로운 환경에서 조용히 아무런 생각없이 지내는 것’이다.
- 아직 난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직원의 독후감으로라도, 책 속에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사진만 보고 있어도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길이다. 굳이 순례가 아니라도...


[ 2011년 1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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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 앨 고어의 긴급환경리포트
앨 고어 지음, 김명남 옮김 / 좋은생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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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앨 고어'라는 이름에 대한 기억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측의 의심스러운 플로리다주 선거운동의 결과로 대통령 당선에 실패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부적절한 선거로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미국 내 애국법 제정, 2003년 이라크 침공, 아프카니스탄 침공 등 미국과 전세계에 전쟁과 공포를 조장하였고 미국의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빈부격차를 늘렸다.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에도 공격적인 외교를 펼쳤고 그 바람에 김대중 전대통령에 이어 6자 회담, 금강산 관광 등 남북간 화해와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바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앨 고어가 일찍부터 환경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거쳐 미국 1977~1993년 테네시주의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하여 2000년까지 부통령으로 재임했고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정보통신과 환경문제, 민생문제 해결에 전념했다. 특히, 1997년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 의정서' 창설을 주도하고 온실가스 배출 최소화 및 국립공원 확대조치를 이끌어내는 등 지구적인 환경보호를 위한 정치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2000년부터 세계 각지를 돌며 지구 온난화에 대한 슬라이드 강연을 1,000회 이상 진행하였는고 그 자료와 경험을 토대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과 해결방안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책 속에는 그 동안의 강연에서 사용된 도표, 사진 등 구체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자료들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칼라 사진과 흑백 사진을 담아서 이산화탄소 증가 등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가 지구와 인류를 어떻게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준다. 가령 킬리만자로의 눈은 거의 녹아버렸고,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는 지금도 끊임없이 녹아내리고 있으며,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쑥대밭으로 만든 '카트리나' 같은 초대형 허리케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20여 년 내에 플로리다, 상하이, 뉴욕 등이 물에 잠기게 되고, 극단적인 이상 기후, 홍수, 가뭄, 전염병이 찾아오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 저자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사람들 각자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환경보호를 위해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10가지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생활 지침들도 친절하게 안내한다. 
- 가정에서 에너지 아끼기 : 에너지 휴율이 좋은 조명과 가전기기, 가전기기의 적절한 사용, 효율적인 냉난방, 단열 보강, 에너지 검사 받기, 온수 절약, 대기 상태 전력 낭비 절약, 청정 에너지로의 전환
- 교통수단에서 온실가스 절감 :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 현명하게 운전, 효율이 좋은 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대체 연료, 연료전지 자동차, 재택 근무, 비행기 적게 타기
- 생활 에너지 절약 : 적게 쓰고 오래가는 물건을 사고 쓰레기를 줄임, 재활용, 종이 낭비 자제, 장바구니 활용, 퇴비 생산 및 활용, 개인용 컵 사용, 육류 소비 축소, 지역 생산물 이용  
- 변화의 촉매가 되자 : 기후변화에 대해 배우라, 남들에게 알려라, 학교나 회사가 방출량을 감축하도록 권고하라, 돈으로 투표, 투자의 영향을 고려, 정치적 행동을 취하라, 환경단체를 후원하라

화려한 사진과 도표는 '앨 고어'라는 이름과 더불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직접 사진들을 보게 되면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어쩌다 한 번씩 자연재해에 대한 언론 소식을 듣거나 짧은 자료, 또는 텍스트로 된 환경자료를 보던 사람들에게 선명한 총천연색의 환경재앙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진가 도표가 책의 중심인 대신에 사진에서 나타난 모습들이 지구 온난화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학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설득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지구 온난화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고 온실가스 축소에 따른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수 많은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들, 그들의 대리인들은 지난 세기부터 엄청난 금액을 쏟아부어 온실가스와 지구 온난화의 인과관계, 그리고 지구 온난화와 자연재해 등 피해와의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이비 과학자와 언론을 돈으로 매수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전세계 의사결정자들과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그래도 부통령까지 지낸 저자가 환경문제 해결에 온몸으로 나선 것을 한국 정치인과 언론인, 교수와 종교인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다. 
 
* 책 속의 문장 : 
- 사실 지구의 기후 변화가 인간의 활동 탓이라는 사실에는 과학적 합의가 거의 이루어져 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온도가 갈수록 오른다는 데 동의하며, 그 원인이 사람이며, 대기 중 온실 가스 방출을 지속할 경우 온난화가 한층 심각하게 진행되리라는 데에도 동의한다.(p.308)
 
- 물론 기후는 이산화탄소 외에도 여러 가지에 민감하다. 태양의 흑점이나 수증기가 그 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이산화탄소 및 기타 인공적 온실 가스에 대해 더욱 걱정해야 하는 증거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기후가 여러 자연적 요인들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는 사실은 경고일 뿐이다. 인간이 일으키고 있는 유례없이 방대한 변화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다. 인간은 어떤 자연의 힘보다도 강력한 존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p.309)
 
- 물론 기후는 자연적으로 변화한다. 나이테나 호수 침전물, 빙핵, 기타 과거 기후의 단서가 되는 것들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과거에도 기후는 자연적으로 변해 왔으며 급작스러운 변화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의 일들은 지금 우리가 일으키고 있는 변화보다 훨씬 작은 양의 이산화탄소 변화로 일어났던 것이다. 남극 빙핵 조사 결과, 현재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65만 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높음이 밝혀졌다. 자연적 기후 변화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더욱 쌓이면 온도도 계속 올라갈 것이다.(p.312) 
 
[ 2011년 5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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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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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 책의 처음 인연은 2009년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나는 ’통섭’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접하면서 ’관념적이 사변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선물만 해주고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작년 말에 독서모임의 책을 블로그에 담으면서 독서모임에서도 이 책을 교재로 하여 토론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책의 정보에 대해 알아보았고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이 책은 연말에 런던에 가서 하루하루 일정을 마친 후 칠흙같은 영국의 밤을 벗삼아 읽었다.
 
21세기 현재 인류의 지식과 지성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식 사회와 대학의 지식,학문들은 수 백, 수 천가지의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인류는 그 지성이 탄생한 이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모든 지성이 한 데 어우려저 탄생하고 교류하고 발전하였다.
저 멀리 서구의 소크라테스, 아이작 뉴턴에서부터 가까운 이웃나라 공자와 노자, 이 땅의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16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에서부터 통합되었던 학문은 한 갈래 씩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구식 사상과 문화의 특성인 ’나누기’와 ’쪼개기’는 자연과학에서 원자, 양성자, 미립자까지 나아갔고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수 많은 세부 학문들로 세분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지식,학문같지도 않은 것들까지 버젓이 대학의 학과로 편성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흐름은 ’전공’과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대세로 인정되었고 중세기부터 약500년 동안 지속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전문화는 각 분야의 깊숙한 수준까지 연구,분석을 용이하게 한 긍정적인 측면과 동시에 각 분야의 소위 전문가들이 자신이 전체 인류에서, 전체 사상과 지식에서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문화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전체와 동떨어지게 만들었고 학문 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 사람과 자연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분리되도록 한 큰 원인이 되었다.
옆 방에서, 다른 학문과 학과에서, 근처 대학에서, 이웃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게 만들었고 각자의 학문과 연구가 점점 더 관념적이고 사변적으로 만들게 한 부작용도 점점 커지고 있다.

결국, 서구의 사상과 학문은 20세기 말을 지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누기’와 ’전문화’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서구에서도 인식하기 시작한다.
  
나 역시 의무교육 시절과 대학 시절에 국어, 국사, 수학, 과학, 사회, 경제, 도덕, 음악, 미술 등으로 나누어진 교과 체계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사람이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국가가, 하늘과 땅이, 인간과 자연이 연관되어 있듯이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은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 초보적이나마 철학과  역사, 사회와 자연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런 심증은 커졌지만, 세상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기본 지식을 늘리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몇 년 전부터 부족한 나의 소양을 키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지식이나 학문 사시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은 그런 나의 내재된 관심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저자는 사회생물학 분야를 탄생시킨 학자 중 하나다.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사회생물학 논쟁은 학문적 논의 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180도 뒤집었다.
그런 진전은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행동유전학 등의 ‘통합 과학’들을 발전시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사회적, 생물학적 존재로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시작했다.
저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 <생명의 다양성(The Diversity of Life)> 등을 출간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통합 과학’적 이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왔다.

이 책의 주제는 저자의 서문대로 ’지식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다.
책 속에는 ’사회생물학’의 태동 이래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두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틈을 메워 온 저자의 노력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인간의 지식이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 연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물리학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된 연구 속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간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21세기적 지식 혁명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가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지들 속에 숨어 있는, 그렇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 통합의 가능성을 찾아내 명확하게 보여 준다.
서구 학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근대 학문과 과학의 모체가 되었던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 이론에까지 이르기까지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 속에서 인간의 지적 모험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아우르는 이 책은 그의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제럴드 홀턴의 말대로 “파편화되어 있는 오늘날 지식 세계의 풍경을 진정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높은 고지대로 이끌어 준다.”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에서 펴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과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가 편찬한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 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도 그 뜻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괄하여 관할하다.”이므로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저자는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전자(通涉)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역자는 후자를 택했다.(옮긴이 서문 에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narro, Ergo Sum)"
저자는 르네 데카르트의 언명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대안으로 새로운 구절을 제시한다.
그동안 인류가 ’생각하는 뇌’를 들여다보기에 바빴으나, 앞으로는 ’설명하는 뇌’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명하는 뇌’는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뇌’가 보다 긴밀하게 협조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리라 예측하는 것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느낌은 "많이 어렵다"는 것...^^
저자가 일반일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책 속에 종종 드러나기는 하지마, ’통섭’의 역사나 필요성, 관련 분야의 현황 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설명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어려울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어 ’통섭’이든,  영어 ’Condilience’ 등 모든 학문이 통해야 하고 서로 연관되어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데 동의,공감한다.
어떻게 보면, 유사 이래 동양에 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태극’이나 ’음양’처럼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든 사물에는 동전의 양면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큰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서구에서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일원론’과 ’시비론’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수 백년, 수 천년에 걸쳐 먼 길을 돌아 학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런지...
 
아무튼,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을 ’통섭’시키기 위해 장구한 서구 학문을 연구하여 그 이론적 기반을 닦으려는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 책 속의 문장
- 인간 사고에 대한 단순한 결정론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사고 과정은 명확한 인과 관계를 통해 몸과 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개인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p.222)  
 -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만들고 특정 행동들을 상대적으로 더 잘 배우게 만드는 신경 형질들이다. 유전적으로 대물림되는 형질은 모방자, 즉 문화의 단위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종류의 기억 요소들을 고안해 내고 전달하는 방식이다.(p.268)
-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은 모두 창조적 정신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는 그원적으로 다르다. 예술과 과학 간 교류의 핵심은 ’혼성화’, 즉 ’과학적 예술’이나 ’예술적 과학’과 같은 떨떠름한 혼합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지식과 미래에 대한 그 지식의 독점적 감각으로 예술에 대한 ’해석’을 되살리는데 있다. ’해석’은 과학과 예술 간의 통섭적 설명이 가질 수 있는 논리적 통로이다.(p.365)
-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모든 현상들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p.461)
- 현존 기술과 최근의 소비 및 낭비 수준을 유지하면서 나머지 세계의 생활 수준을 대부분의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수학적 불가능에 도전하는 꿈일 뿐이다. 오늘날의 소득 불균형을 평준화하려면 선진국의 생태적 발자국을 줄여야 한다.(p.484)

[ 2011년 1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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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 - '공부도둑' 장회익의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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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살아온 시대나 집안 분위기가 달라서 그런지 나는 어렸을 때 부모나 주위 어른들로부터 공부를 방해받지는 않았다. 차라리 저자처럼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필요한 교재나 참고서, 독서용 책이 부족했을 뿐이다. 초등학교~고등학교까지 학교 도서관에는 읽을만 한 책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쓸만한 도서관을 갖춘 학교도 초등학교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와 고전 몇 종, 자연과학 관련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도서관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는 교실이 있었지만 그곳은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험공부를 하는 ’특별한 장소’일 뿐이었다.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정하고 그곳에서는 수험공부만 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고전 시리즈와 일부 교과서 이외의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읽으라고 권하는 선생도 없었다.
 
저자와 나의 나이 차이가 대략 20년 정도 되었지만, 책 속에서 저자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50년대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70년대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나마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저자는 한국전쟁 와중에 학교를 몇 번 옮기면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고 중학교마저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나는 큰 장애없이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국가의 교육 시스템, 교사의 질, 교과목, 공부에 대한 개념은 50년대와 70년대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 세대 역시 어느 누구에게로부터도 공부란 무엇인지, 왜 공부를 하는지, 인생과 공부는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중,고등학교라는 학제 시스템에 이끌려 ’당연히’ 학교에 다니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고 진급할 뿐이었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는 그 부적절하고 부족했던 교육시스템과 교사 문제, 교과과정, 공부개념이 더욱 악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뿐더러 사교육 시장에 휘둘리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공부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가 어려서부터 살아 온 경험을 기초로 어렵게 공부를 접하였지만 역으로 그 어려운 과정이 저자의 창조력과 학구열, 공부의 질과 욕구를 더 높여 주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즐겁고 신나게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면서 현재 가정과 학교, 대학과 국가의 공부에 대한 관념과 태도,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이야기. [창고에 갖힌 도둑] 조선 전기의 문신 사숙제私淑齊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글 중에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도자설'을 통해 커다란 곤경을 겪으면서 터득한 기술이나 방법이야말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래야 대가를 이룬다는 교훈이다. 저자는 이 옛 이야기를 자신의 공부과정에 빗대어 여러 번의 곤경을 겪으면서 저자 스스로가 공부하는 법과 자신의 앎을 세워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 [인삼과 산삼] 할아버지의 반대에 의한 학교 중퇴, 종교에 대한 경험, 개인적인 학습 노력의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과 시스템에 의한 공부가 아니 스스로의 학습법에 의한 공부야말로 '인삼'이 아닌 '산삼'이 되는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셋째 이야기. [교실 안과 교실 밖] 저자는 자신의 독립적인 공부가 청주공업고등학교 입학과 졸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독자적인 물리학 입문과 학교 밖을 활동을 통해 스스로 학습법이 효율이 컸음을 말한다. 이런 현장은 강도와 깊이는 다소 다르더라도 우리 세대 역시 비슷하게 겪은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과목의 경우,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서 교사로부터 배운 내용보다는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참고서, '정석' 또는 '성문종합영어'를 스스로 학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넷째 이야기. [방황과 모색]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지만 기대와는 달리 대학 교과과정은 저자를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배움도 얻지 못하게 되면서 교과과정에 있어 '자동차 조립론'이 아닌 '송아지 사육론'의 타당성을 제기한다. '자동차 조립론'이란 교과과정이 교양과목과 전공과목 모두 세부적으로 교양과 전공을 나누어 분절적으로 가르친 후 나중에 종합하는 방식이고 '송아지 사육론'이란 송아지 사육처럼 처음부터 교양이나 전공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나간 후 점점 뼈대와 살을 붙여가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스스로 전공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상대성이론' 등 최신 물리학 이론을 접하면서 철학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철학과에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다섯째 이야기 [앎의 되새김질] 저자는 서울의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3년간의 국방의 의무를 마쳤는데 사관생도에 대한 강의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앎으로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을 '되새김질'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물리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여섯째 이야기 [물질에서 생명으로] 결혼하고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어한 이후 저자는 생계와 공부의 연장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에 입학한다. 저자의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연구를 했던 유진 위그너 교수의 제자인 캘러웨이 교수임을 밝히면서 은근히(?) 아인슈타인의 학문 계보를 이은 느낌을 가졌음을 고백하기도 한다.(실제로 저자는 아인슈타인 이후의 흐름이 '야생학풍'이었음을 지적하고 한국식 학계의 '계보'에 대해 비판한다.) 대학원 과정을 진행하던 중, 저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을 통해 처음 DNA를 접하면서 생물학과 생명에 대한 지적 자극을 받았음을 이야기한다.
 
일곱째 이야기 [학문과 등산] 저자는 학문은 경쟁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학문을 '경주'보다는 '등산'에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과학과 협동과정, 자연과학기초론 등의 교과과정을 개설하는데 참여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진행하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학 1학년 때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물리학 개론'과 '화학 개론'을 수강하였는데 내 기억에 저자의 강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과목에 해당하지 않아 접하지 못했다. 내가 당시에 저자의 강의를 들었다면 이후의 내 삶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90% 이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답일 것이지만...^^
 
여덟째 이야기. [가르침과 깨달음] 저자는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교수 및 교사의 교습법, 학습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 후, 저자의 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 학문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던 '온생명'에 대해 설명한다. 지구상의 개별 생명체들은 자체로 소중한, 그렇지만 홀로 생존할 수 없는 '낱생명'이며 지구의 자연과 태양, 달은 '낱생명'과 함께 엮어진 '보생명'이고 '낱생명'과 '보생명'이 한데 어우려저 '온생명'을 이룬다.
 
아홉째 이야기. [오래 묵혀둔 과제] 저자는 서구의 자연과학과 물리학에만 의존하는 동양과 한국의 세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하면서 자신의 족보상 선조인 조선시대 선비 장현광張顯光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현광은 16세기 중엽에 태어나 <우주설宇宙說>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자연과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이 들어있다. 저자는 서울대 재직 중 장현광의 '우주론'을 연구한 바 있다.
 
열째 이야기. [녹슬지 않은 배턴을 넘기기 위해] 저자는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최대한의 충실을 기한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자신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 끝없이 자신의 깊이를 되새기는 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삶이 일종의 이어달리기 이므로 후손들에게 '녹슬지 않는 배턴' 넘기기 위해 앎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끝까지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  

 1950~80년대 한국은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다. 분단과 한국전쟁, 전쟁의 폐허와 기아, 생필품 부족과 빈곤, 국가주도 경재개발 및 재벌경제 시스템... 그 고난의 시기에 대부분 저자 혼자 힘으로 공부의 길을 개척하고 유학을 떠나고 물리학과 철학까지 학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한국의 물리학과 학문간 통합을 주도해가는 저자의 모습이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저자보다 한결 나은 형편과 조건에서 학업을 해온 내가 부족한 점과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배우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저자가 공부해온 과정, 삶의 여정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자세와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주어진 조건과 위기를 기회로 삼는 자세,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으려는 모습, 지식과 지혜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정신... 그러한 자세와 태도가 지금의 장회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비록 저자가 살아온 인생의 조건과 과정이 우리세대와 또 지금의 10대나 20대와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저자와 같은 자세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행복한 사람’에 속하는 소수에 해당한 것 같다. 삶과 우주에 대해, 사회와 세계에 대해 저자 만큼 알고 있으면서 특별한 물리적, 정신적 어려움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행복의 정복>에서 과학자 집단이 다른 학문집단, 또는 다른 직업군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지적했지만 장회익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실제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글을 쓴 의도는 알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이 보여주는 일정한 한계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글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미 저자가 살아온 조건과 독자들이 살고 있는 조건이 무척이나 다른 점을 고려한다면 독자들이 저자와는 또 다른 역경 속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 방법론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단초를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자서전 같기도 하다. 서문 말미에 "한평생 공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살매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드린다"에서는 일부 독자들이 약 올라 하고 짜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나는 성경 자체가 나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실하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일 수 있다. 그리고 고의로 거짓저술을 했다기보다는 잘 몰라서 혹은 그런 형식 밖에 빌릴 수가 없어서 오늘 우리가 보기에 부적절한 내용들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 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유지하되, 제도화된 기독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도신경’을 강요하는 기독교와는 결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p.170)
 
- 요즈음은 가히 경쟁만능 시대라 부를 만큼 모든 것을 경쟁에 맡겨야한다는 생각들이 만연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더구나 그렇다. 학문은 기여이고 협동이지 결코 경쟁이 아니다.(p.282)
 
- 학문하는 일을 바둑에 비기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장거리 경주에 비기기도 하지만, 학문은 역시 등산에 비기는 것이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바둑이나 경주와는 달리 등산은 승부에 매달리지 않고 경쟁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자기 능력과 취향에 맞게 목표를 정하고 자기 흐름에 따라 걸음을 조정할 뿐이다.(p.301)
 
-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라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의 한 부분인 ’낱생명’이었으며, 이것이 생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밖에 있는 이것 못지않게 본질적인 존재인 ’보생명’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께해서 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그 전체가 바로 ’온생명’이라는 이야기다.(p.330)
 
[ 2011년 5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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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법정 스님 전집 7
법정 지음 / 샘터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세 번째로 읽었다.
이 책도 서점에 나온 스님의 책 중에서 초창기(1993년~1996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스님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새가 깃들지 않은 숲을 생각해보라.
그건 이미 살아 있는 숲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기와 그 화음을 대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삶 또한 크게 병든 거나 다름이 없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스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우리들 각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현상의 그림자'라고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라는 것...
'우리 시대(근대 이후)에 이르러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심성과 생활환경이 말할 수 없이 황폐화 된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저지른 재앙이다.
흙과 물과 나무와 공기와 햇빛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이 그와 같은 고마운 자연을 끊임없이 허물고 더럽힌다.'고...
 
예전 같은 경우, 큰스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 으레 동양적인 철학으로서 '그런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그 말들이 구체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예를 들어, 나 뿐 아니라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돈에 대한 생각, 차에 대한 생각, 아이들이나 어른들에 대한 태도, 생활질서, 쓰레기 버리기, 물적인 욕심과 낭비, 편리함만의 추구, 단기간의 이익추구, 사회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 들이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 태도들이 결과적으로 무모한 권력에 눈이 먼 정권과 정치인이 나타나도록 하고 전사회와 계층이 황금만능주의에 물들게 되고 도로에 차가 넘치고 차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로교통체계가 수립되고 아이들을 입시교육에 내몰고 어른들을 무시하고 방치하고 시내 곳곳에 쓰레기가 넘쳐나고 책보다 게임이 대중화되고 무궁화열차가 사라지는 대신 KTX 밖에 탈 수가 없고 한 쪽은 흥청망청, 다른 쪽은 밥먹기도 벅찬 삶이 존재하고 온갖 비리와 부조리가 판을 치게 하는 뿌리가 되었다.
이명박과 같은 대통령을, 안상수와 같은 국회의원, 공정택같은 교육감, 땅투기 선수인 장관 후보, 4대강 망치기 등등...
이 모든 말도 안되는 현실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자문해 본다.
 
스님 말씀대로 일찍이 동양의 신앙은 산하 대지를 신성한 존재로 여겨 귀의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래서 인간과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서양의 백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환경의 지배를 추구했다. 그 결과 과잉 소비와 포식 사회를 이루어 오늘날과 같은 온갖 질병과 환경 위기를 불러들인 것이다.
삶의 원천을 망각한 채 도시화와 산업화로 줄달음치면서 날로 인간의 설자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새삼스럽게 삶의 질을 문제 삼을 만큼, 그 동안 우리들이 추구했던 그 풍요가 한낱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과 생활 습관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지구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봄이 와도 꽃이 피어나지 않고 새들도 찾아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생물인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
 
제레미 리프킨이 <엔트로피>나 <수소혁명>, <육식의 종말>, <유러피안 드림>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법정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서구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프킨이 작년에 <공감의 시대>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이론에 대한 정립을 시도해보지만 그다지 여의치 않았던 것은, 동양적인 철학과 사고방식이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스님처럼 모든 인연을 끊고 홀로 산속에 들어가 자연과 벗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스님의 말씀처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점차 소유와 소비를 줄이고 육식과 포식을 줄이고 자연과 벗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담배가 제일 문제...ㅋ)
 
또, 스님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서 나의 독서 태도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신다.
'우리가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음악에 대해, 존재에 대해, 종교에 대해, 책에 대해, 직업에 대해,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안내한다.
 
* 책 속의 문장
- 좋은 음악은 무디어지거나 녹슬기 쉬운 인간의 감성을 맑고 투명하게 다스려준다.(p.32)
-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가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p.34)
- 우리는 굳어진 고정관념 때문에 기왕에 알려진 것만을 받아들일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부족하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맑은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가 바로 우리 곁에 수없이 깔려 있다.(p.64)
 
- '양관 화상 良寬和尙'의 시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하는 바 있으면 만사가 궁하다
  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
  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
  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p.66)
 
-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 다시 말해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임이다. 바깥 소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와 하나가 되도록 자극하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침내 귀가 활짝 열린다.(p.79)
- 절이나 교회에 종교가 있다고 잘못 알지 말아라. 어떤 종교든지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종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때 그 종교는 더 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종교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종교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는 없다.(p.82)
- 무엇이든지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남한테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남이 겪어 말해 놓은 것을 내가 알은체할 뿐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몸소 체험한 것, 이것만이 참으로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p.84)
- 공부가 됐건 일이 됐건 전적으로 하라.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하다가 그만두지 말라. 안 한 것만 못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여 하라. 그때 자기 안에서 어떤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의 과정에서 참된 자기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p85)
 
- 분수 밖의 욕구인 탐욕은 목마른 허욕일 뿐 근원적으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본래 내 것이란 없는 법이니까. 어떤 개인의 소유라 할지라도 크게 보면 이 우주의 선물이다. 개인의 소유란 그 사람이 한 때 맡아 가지고 관리하는 것이다.(p.130)
- 우리가 행복하고 보다 뜻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그때 그때 자신의 분수와 처지에서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소유를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정신생활을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요체다.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채 소유에 마음이 빼앗기면 눈이 흐려져 인간적인 마음이 움트기 어렵다.(p.132)
- 어떤 직종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된다.(p.139)
- 꽃은 단순히 눈요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곱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우리 이웃이다.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과 조화를, 거칠고 메말라가는 우리 인간에게 끝없이 열어 보이면서 깨우쳐 주는 고마운 존재다.(p.143)
 
- 아이들은 텅 빈 물통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 한 개의 도토리다. 어떤 식물학자나 정원사도 도토리에게 참나무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줄 수는 없다. 그 작은 씨앗 속에서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서 수백 년을 살고 수백만 개의 도토리와 나뭇잎과 줄기를 만들어 낼 그런 힘이 들어있다.(p.163)

- 자연은 부처나 예수, 모하메드나 간디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연의 제자이기 때문이다.(p.163)
- 꿀벌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면서 어느 꽃에도 해를 입히지 않고 조금씩 꿀을 모은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에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할 때, 계속해서 빼앗기만 하여 그것이 소진되고 고갈되어 자원이 끝장날 때까지 간다. 우리는 꿀벌한테서 조금만 얻어 오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p.163)

- 삶에는 이유도 해석도 붙일 수 없다. 삶은 그저 살아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것, 그리고 누려야 할 것들로 채워진다. 부질없는 생각으로 소중하고 신비로운 삶을 낭비하지 말 일이다. 머리로 따지는 생각을 버리고 전 존재로 뛰어들어 살아갈 일이다. 묵은 것과 굳어진 것에서 거듭거듭 떨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이끌어내고 형성해갈 수 있다.(p.174)
-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맙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알며, 또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데서 맑은 기쁨이 솟는다.(p.196)
-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인연이 있어 그 부모를 거쳐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동물이건 식물이건 간에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신성한 우주다.(p.202)
 
- <삼국유사> 5권에는 혜통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혜통이 출가하기 전 세속에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냇골 어귀에 있었다.
어느 날 집 근처 시냇가에서 수달 한 마리를 잡게 되었다.
고기는 끓여서 먹고 그 뼈는 뜰가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뜰가에 나가 보니 그 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웬 핏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었다.
그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전날 수달을 잡았던 그 근처 보금자리에 수달의 뼈가 고스란히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그는 크게 놀랐다.
자신의 행동을 자책한 끝에 그는 마침내 속세를 등지고 출가 수행자의 길로 떠났다."(p.204)
이것은 지극한 모성애와 영혼의 작용을 의미하는 이야기라 한다.
 
- 인간끼리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 천한 직업은 없다. 다 필요에 의해서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웃과 사회에 덕이 되는 것은 좋은 직업이고, 해독을 끼치는 것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p.244)

- 자기 자신이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그 일을 통해 삶의 기쁨과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생활의 한 방편으로 하고 있다면, 그의 삶은 날로 생기를 잃어갈 것이다.(p.245)
-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곁을 떠나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그답게 존재하고 있다고 눈 밝은 현자들은 말한다.(p.251)
-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마음이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내 마음이 착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렇게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이라 한다.(p.264)

- 마하마트 간디가 말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우리의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p.296)
- 힌두교 성전인 <우파니샤드>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다름아닌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물이다. 극섯이 좋은 것이든,나쁜 것이든"(p.304)
- 현재 우리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한 생각이나 입에 담는 말, 그리고 몸으로 하는 행동은 지금 한때로 그치지 않고 이 다음의 나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하고 결단한 의지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서 해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지요.(p.307)
- 삶을 충만케 하는 길이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넘어서서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독자적인 사유와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사람은 그 사람만이 지니고 누릴 수 있는 독창적인 존재가 된다.(p.321)

[ 2011년 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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