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
김갑수 외 지음 / 615(육일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이시우, 이병창, 손우정, 김갑수 등 공저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를 읽고 / 2013. 11., 245쪽, 615출판사


지난 8월 28일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한국사회에 내던져진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 사건'

모든 언론을 떠들석 난리를 떨며 시작된 이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만4개월이 지났고, 작년 11월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지난 2개월 간 진행된 법정 공판에서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증거 채택 여부와 공소 적절성 등을 다투었고, 그 결과 녹취파일 원본의 상당수가 훼손되거나 제대로 증거로서 적법성이 상실당했으며, 당시의 녹취록에서 제기한 주요 문장과 맥락이 270여 곳 이상 조작, 변조되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제보자로 불리는 프락치의 증언을 통해 'R.O'라는 존재 자체가 추측과 망상에 근거했다는 것도 재판을 통해 대부분 드러났다.
처음부터 국정원과 검찰의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무리한 수사와 기소였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http://blog.daum.net/hy2oxy/8691760)

이 책은 재판이 공식적으로 진행되기 직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녹취록이나 내란음모의 팩트 또는 진실에 대해 명확한 근거나 팩트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국정원이 언론에 흘리면서 시작된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언론과 정치권에서 구체적인 근거나 논리적인 사실취재보다 국정원이 흘려주는 '카더라'식 정보를 마구잡이로 확대재생산하면서 마녀사냥식 언론재판을 벌이는 것에 대해 저자들이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국정원이나 언론, 정치인,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내세우는 논리나 주장에 대한 비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책에 담긴 세 명의 공저자의 글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다. 바로 김준식 작가와 이시우 작가, 그리고 이병창 교수다.(물론 다른 분들의 글 역시 큰 도움이 되며 한꺼번에 대할 수 있는 장점도 책을 구입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하다..^^)
세 명은 작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 때에도 사실관계를 근거로 사태를 바라보는 식견과  언론과 지식인 그룹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여론몰이가 어떤 토대에서 발생하는지 철학적, 심리적, 사회학적, 논리적 식견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을 뜨게 한 것이다.
특히 이병창 교수의 사이비 언론인에 대한 비판은 냉엄하고도 준열했다.(http://blog.daum.net/hy2oxy/8691761)

 


8월 말 이후 한 달 가까이 모든 언론에서 국정원이 흘린 녹취록과 각종 수사 정보를 받아쓰기 하면서 크게 다루었다. 그 결과 이석기 의원과 구속된 진보당 당원들은 하루아침에 '국가 중대 범죄자'로 마녀가 되었고, 박근혜 정권은 이를 근거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을 헌재에 청구했다.
명색이 진보언론이나 진보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글이 고작 당시의 당국의 발표나 언론보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견과 추측에 기반한 혐오스러운 표현들, 진영논리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 정치적 마타도어, 중립이나 중도를 내세우며 날을 세우는 양비론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작년에 이어 다시 한 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말 언론보도 이후 4개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당시 경악하고 흥분하며 핏대를 올리고 조롱하던 많은 이들이 머쓱해져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전제로 내세웠던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자체가 사실이 아님을 국정원이 스스로 인정해 버렸고, 언론과 종편에 도배되었던 수많은 선정적 보도들 역시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물론, 사실관계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여전히 종편이나 조중동만 읽으면 결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이전에 접했던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 의도된 조작이고 편집이었음을 안다면, 그런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누군가를 공격했고 종북몰이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알았다면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다시는 지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굳이 공개적으로 자기비판할 것까지는 필요한 게 아니라...(특히 얼토당토 않은 시리즈 인터뷰를 연재한 오마이뉴스와 시리즈 연재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한 권영길, 주대환, 조승수, 김창수, 이진경, 김기식... 김영환은 기대도 하지 않음..ㅋ)

몇 년째 내가 고민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 중 하나가 소위 진보진영의 분열과 비이성과 비겁함이었다. 사상의 자유(주의)니, 민주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인민주권이니 하는 고상한 담론들이 현실 앞에서 여지 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한 때는 그런 철학적, 정치적 용어들이 경멸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김준식, 이시우 작가, 이병창 교수의 글이 21세기 한국사회의 현실, 사건사고 속에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민주권, 정치적 언행과 철학적 연관성 등을 연결시켜 보는 관점과 기준을 제시해주었고 혼란에서 벗어나는 데 다시 한 번 도움이 되었다.

* 인상 깊은 문장 :

"이렇게 글과 문장이 악의적으로 쓰이고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는 작가들에게서 일제시대 친일작가와 지식인의 잔영을 본다. 아니, 조중동 등 거대언론에 순치된 우리 문단의 구조적인 모순과 나약함을 다시금 절감한다. 지금 국정원과 박정권이 문장 조작으로 범죄를 만들고 있는 것, 이건 단순히 녹취록이나 기소문 등 실용문을 작성하는 일상적 차원으로 볼 수 없다.
그 안에는 우리말의 의미를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과정이 있으며, 이후 그런 방식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려는 저의가 담겨 있다. 더구나 저들은 논리적 추론만으로 사람을 범죄로 몰고 압살하려한다. 그런데도 글을 다루며 산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건 분명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자제력은 아닐 것이다."(p.112)

“진보적이고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현상에 압도되어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매카시즘의 노예들과 별 차이가 없다.” 김대규(서울 디지털대 교수, 법학)

“결국 이들은 사회적 약자였고, 평균적 국민들보다 전쟁에 대한 공포를 먼저 느끼고 울음을 터트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준식(소설가)

“어마어마한 사건의 증거는 달랑 내부 협력자, 즉 프락치가 구해준 정체불명의 녹취록이 전부였다. 그만큼 남재준 원장은 다급했던 것일까?” 문경환(‘동북아의 문’ 대표)

“‘헌법 밖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라는 식의 요상한 말들은 스스로 체제의 안전한 공간에 둥지를 틀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손우정(시사평론가)

“일단 주체사상이 대한민국에서 금지된 것이라고 하자. 지금 진보당 안에서 주체사상이 공적으로 표현되는가? 진보당의 어디에서도 그런 조짐은 발견할 수 없다.”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철학)

“우리 역사에서도 법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기각했지만 전두환의 내란죄는 확정했다. 자유국가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반혁명세력이다. 진정 자유로운 국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혁명하라.” 이시우(사진작가)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도 설마 뭔가 했으니까 구속된 거 아니냐고. 국정원이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여론몰이를 해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임이화(구속자 가족)

[ 2014년 1월 04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실의 제국
김민웅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김민웅 저 <밀실의 제국 : 제국 수호의 메카니즘>을 읽고 / 2003. 03., 350쪽, 한겨레출판


그동안 김민웅 교수는 '좌파 목회자'이자 '좌파 지식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좌파'라는 단어는 "서양(서구)의 사상을 동양이나 한국사회의 역사, 문화,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직수입하는 '교조주의 또는 사대주의 사조'"라는 편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를 종합하면, "저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내 관심의 정도였다. 최근 1~2년 사이 한국사회 내 진보진영 사이에 횡행하였던 "사실 관계를 따지지 않고  맹목적 반북 이데올로기나 마녀사냥에 동참"한 것과 관계없이...

그런데 올해(2012년) 가을 쯤 그가 '겨레하나'라는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 단체의 대표직을 수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자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언론에 기고했거나 인터뷰했던 기사를 찾아보았고, 그의 입장이나 논리가 담겨 있을 만한 책을 구해보았다.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김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을 예정이다.(물론, 박세길 교수처럼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책으로 발간했어도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생각이 바뀌거나 전혀 다른 정치사상적 입장으로 변경(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된 때는 2003년 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초창기에 군사, 외교, 남북관계에 대한 정책의 차이로 한-미관계가 악화되고, 부시 정권이 대 이라크 전쟁을 종료한 직후 곧바로 북한을 겨냥하는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인 학자가 쓴,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중요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의 요지는 여는글의 제목인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를 거부하며"라 할 수 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는데,

먼저, 저자는 미국의 군사팽창주의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관철되며, 힘을 갖는지 살펴보고 당시 미국이 보이고 있는 여러 행태를 '전쟁국가의 강화'라고 규정한다. 전쟁은 제국(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적을 만들어내고 국가 위기를 조장하면서 제국이 성장한다고 보고 있다. 
제1부 '제국의 역습'에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이 밀어붙이는 '대테러 전쟁'의 본질을 분석하여 '전쟁국가'와 '제국주의적 세계화'임을 고발한다. 
제2부 '제국의 밀실'에서는 CIA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지배층의 정치공작의 역사, '펜타곤 자본주의'의 실상, 전쟁국가에 복무하는 언론의 폐해 등에 다루면서 '위기를 파는 자들'에 대해 분석한다.
제3부 '제국의 대변자들'에서는 제국주의 세계화에 기생하는 미국 내 지식인들의 가면을 벗기고, 서방 언론의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대변하는 각종 매체와 인물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미국 내부에서 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활약을 소개한다.

이에 저자는 남한이 주도하여 민족공멸을 막고 한반도 민족화해와 평화정착이라는 대의를 실현시킴으로서 미국이라는 제국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북한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설정이 관건이라는 것 등을 말하고 '한반도의 영세 중립화'에 대해 결론짓고 있다.
제4부 '제국의 논리와 본심'에서는 한미 관계라는 '동맹의 허상'을 드러내고,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본심이 '남북간 결속 강화 저지'라는 것을 지적한다. 결국 '한미동맹'이라는 허울 속에 가려진 식민지 체제의 극복이 남한이 가야할 방향임을 천명한다.
제5부 '아메리카 제국이 폭력, 우리의 평화'에서는 북미 제네바 합의를 부시정권과 네오콘이 무시하고 북한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에 대한 '역봉쇄전략'을 구사해야 만이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능함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최종 통일방안은 '영세중립화'다.

미국의 각종 정책과 전략을 분석하여 '팍스아메리카나'의 본질을 파헤치고 미국의 전략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미국에 대한 '역봉쇄전략'과 '영세중립화 통일'이라는 결론을 제시하는 저자의 논리는 전체적으로 합리적이라 느껴지고 공감이 된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사실 관계와 정보에 대한 근거와 출처가 명시되지 않아 이 책을 토대로 다른 곳에서 사람들과 논의하거나 논리를 제시할 때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실제로 대이라크 정책은 원유 확보라는 숨겨진, 그러나 공공연한 목적을 향한 제국주의적 점령정책이 그 본질이다. 서방 국가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침묵하거나 협조하는 이유는 전쟁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다."(p.51)

"미국에 대한 패배주의를 극복하라. ... 결국 초강대국 미국의 힘 앞에서 우리 자신의 패배주의적 식민지 근성을 척결하고 자주적 처신을 견고하게 갖추어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평화의 길이다. 우리에게 평화는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합하지 않는 한 확보되기 어렵다. ... 우리 민족을 지난 반세기 이상 미국의 식민지적 상황에 처하게 하고 민족 내부의 분단과 적대관계를 심하시켜 온 일체의 종속적 냉전체제를 극복하는 데 역량을 총결집해야 할 것이다."(p.73)

"그런 점에서 향후 한국 정치개혁의 본질적 요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놓인 식민지 정치를 청산하고, 이에 기초한 일체의 지역분열주의 내지 지역패권주의를 격파하며, 미국의 패권전략에 민족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사대주의적 냉전 특권세력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자주적, 민주적, 평화적 토대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 알게 모르게 장치된 미국의 지배질서를 하나하나 해체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중차대한 일차적 과제다. 그러써 지난 100년간 우리를 옭아맨 제국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을 완결짓기 위한 결의에 찬 행보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p.74)

"이들 CPD(Commottee on the Present Danger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대응위원회) 세력의 압력 아래 카터 정권은 임기 말년에 강경한 군사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이른바 혁명 예방적 조치로 한국의 1979년 말과 1980년 5월 정세에 개입하지만, 레이건에 패배함으로써 CPD 재등장의 길을 열게 된다."(p.114)

"1942년 6월 루스벨트가 설치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비밀공작국)는 한국 현대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이 이승만의 정치적 부상과 OSS와의 관계다. ... OSS에서 도노번의 작전부 참모로 있던 프레스턴 굿펠로우 중령은 이승만을 환대했고, 이승만은 그의 소개로 전쟁성으로부터 조선인 출신 OSS 요원 충원작업의 권한을 얻어 워싱턴 내 정치적 입지가 급상승하게 된다. 해방공간에 귀국하여 추구하게 될 친미 정치노선을 다지는 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p.122)

"1980년 전두환 체제가 등장하자 레이건은 즉각 F-16 전투기 36대를 한국에 판매했으며, 100만 달러에 달하는 최루 가스와 경찰용 소총 판매를 허가했다. 이 기간 중에 발생한 노스럽 사의 로비 자금 추문은 바로 군부의 무기구입 증가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미국에 의한 한국의 무장국가 체계 강화과정의 산물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미 군수산업의 최대 시장의 하나가 되고 있으며, 엄청난 민족자원을 비생산적으로 탕진하고 있다."(p.149)

"<AP통신>이 타전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과 최근 또다시 <AP통신>이 전세계에 타전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 공군이 저지른 민간인 폭격도 모두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중대한 전쟁범죄 행위이므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분명한 논란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유고를 공습한 더 본질적인 이유가 발칸반도 지역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야기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기를 든 신유고 정부에 대한 통제와 이 지역의 군사적 장악에 있었다는 측면에 주목하면, 미국과 나토가 최우선 보호대상인 민간인들의 생명을 경우에 따라 희생시킨 것은 미국의 정책논리상 모순이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한국전 때도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롭게 확보한 자신의 식민지체제 방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민간인들의 생명은 일차적인 배려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약소국들의 현지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p.185)

"<뉴욕타임즈>의 기사에서 새롭게 조명된 부분은 한국에서 자본시장 자유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대목이다. 미국이 김영삼 정권하의 한국정부에서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수용할 경우 서방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당시 한국정부는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절차를 밟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 내 금융시장이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도 않은 채 단기성 자본의 이동을 허용함으로써 일거에 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가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외환위기가 일어날 수 있는 구조적 토대를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갑자기 급증한 단자회사들이 이러한 자본시장의 자유화 정책을 타고 생겨난 투기자본의 공급처가 된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난 시절 겪은 외환위기에는 정책 선택상의 문제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 자체의 문제도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p.194)

"미국이 패권정책은 언제나 대상 국가 내부에서 적극적인 동조자를 물색하고 그를 권력의 정점에 세우기 위한 정치공작에 몰두한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지난 반세기의 미국 대외정책사가 고스란히 입증하고 있다. 부시 정권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그러한 각도에서 제국의 대본영과 식민지체제의 하부구조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나라당과 그 지지세력의 집권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p.228)

"우리의 현대사적 진실은 해방의 진정한 성과물을 몰수당한 채 미국의 식민지 체제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극복의 단서를 포착하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제국주의 패권체제의 질곡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다."(p.256)

"결론적으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며 우리는 이 제국주의 지배 아래 놓인 식민지라는 사실, 이러한 식민지적 주종관계를 청산하기 전까지는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언제나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민족의 제1차적 과제는 따라서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민족해방투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이미 낡아버린 구호가 아니다. 엄연하고 절박한 현실인 것이다."(p.270)

[ 2012년 12월 31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조국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조국 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를 읽고 / 2010. 07.(개정판), 198쪽, 책세상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파업의 자유, 신체의 자유, 이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헌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헌법 조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권자들의 의식과 제도가 필요하다. 주권자들의 의식이 바로 여론이고 문화인 셈이고, 제도가 바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이다. 그리고 행정, 입법, 사법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헌법을 해석하고 실제 행동하기 때문에 종종 또는 오랫동안 헌법을 훼손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처음 제정된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1987년까지 헌법은 어두운 참고에 박혀 있었고, 학살자 독재자들이 맘대로 정한 법률로 행정, 입법, 사법을 휘둘렀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역시 노태우 정권에서 현재의 박근혜 정권까지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유린되어 왔다.
한국에서 헌법을 토대로 실제 법률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현실은 아직 미숙한 단계에 불과하다.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그런 대표적인 사례, 특히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긴급한" 폭력의 위험이 없는 한 보호되어야 할 생각이나 양심이나 사상이나 표현이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한국은 헌법 제19조에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헌법학계는 이 조항에서의 양심의 의미는 널리 사상의 자유까지도 포괄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실제로 보장되고 있는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 색깔론, 종북공세, 사상공포증이 일소되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조국 교수가 2007년 이 책을 출간하면서 우려한 일들이 2012년부터 전사회적으로 시작되어 올해에는 한국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근거도 없고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특정 개인과 정치세력의 생각과 사상을 캐묻고 단정하고 낙인찍고 매도하고 처벌하고 있다. 좀 바웠다는 이들까지 헌법과 양심,사상의 자유를 앞장서서 침해한다.
헌법을 지키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앞장서서 보호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같은 국회의원의 생각과 사상을 재단하고 낙인찍고 마녀사냥식으로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데 협조했다. 조폭 수준도 안 되는 정보기관이 불법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찌라시 수준도 안 되는 언론이 여론몰이에 나서고 정당과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여론의 마녀사냥에 굴복해 숨을 죽이고 있다. 저자 자신도 움추러든 모습이 느껴진다.
부정하게 권력을 쥔 자들이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소수 야당에 대해 정당해산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다른 야당과 정치지향적인 세력들은 내년 지방선거의 유불리를 계산하느라 더 분주하다.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조국 교수의 저서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민주를 위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만 명시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 사회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받고 통제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 비판하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가 여전히 ’준법서약제’나 ’양심적 집총거부권’, ’빨갱이 콤플랙스’와 같은 우리 정신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고 있고,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지탄받는 국가보안법을 비판하고 있다. 
책은 법 앞의 평등을 침해하는 보호관찰법, 대체복무제 도입을 고민해야하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빨갱이 콤플렉스와 사상을 표현하고 실현할 자유, 국가보안법 총비판 4가지 핵심쟁점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담고 있다.

그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근거로 밀의 <자유론>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 어떤 생각과 사상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경우 어쩌면 그 사상이 진리일지 모른다. 다른 말로 우리는 진리를 억압함으로써 진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효용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둘째, 설사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통상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할 문제이다. 셋째, 진리라고 널리 인정되는 사상의 경우도 그것에 대해 진지하고 활발하게 논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치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힌 것처럼 생각하여 그 사상의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기 어렵다.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교설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거나 약화되어 그 사상이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동하는 영향력이 상실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즉 누군가에게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인정한다고 그것이 곧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문장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한 말로 한국사회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의 권리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나의 의사를 표현하고 또 표현하지 않을 권리,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법과 제도뿐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경제 학술 문화 생활 영역에서도 통제를 받는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이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조국 교수는 민주국가라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이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의 수준은 소수자의 양심과 사상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햇볕정책,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애써 일궈놓은 북한과의 평화적 흐름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경색되었고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공과 안보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북한을 '한 민족'과 ‘한 나라’가 아닌 적국,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비롯한 인권 관련 국제법규에 따라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할 것을 주장한다. 좌 또는 우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에 충실해서 완고하게 정립된 고정관념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하자고.

조국 교수의 2010년판 개정판을 끝까지 읽으니 책의 끝 부분에 아래와 같이 결론을 스스로 요약해 놓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법조계, 학계, 정치계, 언론계, 시민운동,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진보적' '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1.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비전향 사상범에게 추상적인 미래의 재범 위험성을 이유로 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내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 보안관찰법 비판
2. 양심적 병역거부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리로 인정하고 있고 국제법도 승인한 인권의 문제다. 국가는 이를 강제해서는 안되며,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한다.
3. 사상의 자유는 사회 진보의 필수요건이며, 진리는 사상의 충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사상 간의 경쟁을 봉쇄하는 '빨갱이 콤플렉스'는 사라져야 한다.
4. 체제를 비판, 부정하는 사상의 표명과 실천도 그것이 폭력과 파괴 행위를 수반하는 등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한 사상의 자유의 하나로 보장해야 한다.
5. 국가보안법은 통일의 한 주체인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통일 지향을 가로막는 법률이며,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하여 시민의 정치적, 시민적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침해하는 법률이므로 페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더라도 국가안보에 구체적이고 실질직어니 위험을 주는 행위는 형법 기타 다른 법률로 제재할 수 있다.

결론과 관련하여 보충하는 몇 개 문장도 소개한다.

"양심수란 폭력을 주창하고나 직접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여타 양심에 따라 형성된 신념을 이유로, 또는 인종적, 성적, 피부색, 언어, 민족적, 경제적 지위 때문에 투옥, 구금, 육체적 제약이 부과된 사람들이다" - 국제사면위원회

"기존의 제도와 통념, 다수의 목소리를 무조건 추종하기 보다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공비판적이며 전복적인 사상을 만들고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회는 모순이 조기 잘견되고 해소되어 지금만큼이라도 진보할 수 있었다"

"시민이 자신의 양심과 사상을 지니고 실현하는 자유에 대한 국가의 제약은 가능한 한 억제되어야 하며, 제약할 때는 엄격한 요건에 따라, 자유를 최소한도로 침해하는 범위와 정도로 해야 한다."

"다를 수 있는 자유의 실체는 기존 질서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안에 대하여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검증되는 것이다." (미국 대법관 스톤)

"진리 여부를 가리는 최고의 검증 방법은 그 사상이 시장의 경쟁 속에서 수용되는 힘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 대법관 홈스)

[ 2013. 11. 11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0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를 읽고 / 2012. 2., 303쪽, 돌베개)

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지나서도, 한국전쟁 종료 후 65년이 지나서도, 1987년 6월 항쟁 후 26년이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외형적인 민주적 절차와 경제규모는 OECD 10위권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내실과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권의 안하무인을 목격하면서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까지 다룬 한국현대사 1편은 2013년 한국사회의 뿌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기존의 편견과 상식과 제도권 정보에 의존했던 기억과는 달리 해방 후 5년간 한반도에서는 아주 잠깐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5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탄압과 파괴가 이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기초자료와 언론기사, 증언과 인터뷰 등을 취합하여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친일파 출신의 국사편찬위원회, 제국주의자 미국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한민족과 민중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건과 사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했다.

저자의 결론은 한민족과 민중 스스로의 일제로부터 해방과 통일된 자주독립, 평등평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군화발과 친일파들의 부역 아래 아래 한민족과 민중의 염원은 처절하게 꺽여나갔던 것이다. 한민족과 민중은 해방 후 5년 동안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친미파 앞잡이들과 끝없는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덮은 후 저자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과 사대주의,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오래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고,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 1편을 읽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된다. 좀 더 자세한 정리내용은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조하면 유익할 것이다.

1. [일제의 강제 공출과 징용]
100년~70년 전의 일이지만 다시금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식민지 침략 후반부터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내륙과 동남아,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에 보내 노동력을 갈취하고 학살하였다.

"일제는 군량미 조달 목적으로 조선 전역에서 강제적인 공출을 실시하였다. 이 공출제도에 의하여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가 강탈되었으며 1944년에는 63.8%에까지 이르렀다."(p.17)

2. [일제 강점기 국내외 항일 투쟁]
8.15 해방이 '외세에 의한 일방적인 해방'만은 아님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다. 억지 논리와 자기세뇌가 아니라 드러난 수치와 기록과 흐름으로... 저자가 전해주는 식민지 시대의 각종 수치와 통계는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이 땅의 민중들과 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과 생존권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했음을 알려준다. 한민족은 일제와 싸운 전세계 민주진영의 한 축이었다.

"1945년을 맞이하여 중국의 중경에서는 김구가 지도하는 임시정부의 하부 조직으로서 '한국광복군'이 조지괴어 한반도 진공을 위한 맹훈련에 돌입하고 있었고, 만주 일대에서는 소부대 항일 무장단체가 계속적으로 국경 주위에 출몰하여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또한 중국 연안에서는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어 화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항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역시 국내 진공을 꾀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1944녀누8월 여운형의 지도로 서울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국외에서 독립을 꾀하는 조직과 연락을 계속 취하면서 해방을 맞을 날을 적극 준비하였다.[한국의역사, 조선사연구회 엮음]"(31~32)

3. [8.15 해방을 준비한 한민족의 활동]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약은 한민족과 민중에 대해 굉장히 놀랍고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21세기가 도래한 현재에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던 수준을 해방 후에 한 달 만에 달성했다는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한민족과 민중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굳이 예건하지 않더라도) 비밀리에 엄청난 의식화와 조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여 총독부로부터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가운데에서 극히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건국준비위원회가 도처에서 결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8월 말 경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수준에서부터 인민위원회로 신속히 전환하여 갔고, 북측의 상당 부분과 남측의 일부 지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해당 지역의 민중의 손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민위원회는 남쪽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에서도 대부분 소련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민중들의 자발적인 건국사업을 바탕으로 하여 드디어 1945년 9월 6일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민중 대표들이 서울에서 회합, 역사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p.34~37)

4. [해방 후 미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그간 한국의 제도교육과 주류 학계,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던져주던 정보와 달리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 특히 미군은 일제의 총독부를 대체하겠다는 입장이 명확했다. 즉 미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를 대신한 점령자, 군사통치였던 셈이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합병은 강박에 의한 '강점'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선택은 한민족, 민중 스스로 하는 것이지, 일제의 식민지를 미국이 양도받겠다는 것 그리고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이자 분노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의 8.15 항복 선언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어낸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였다. 이 명령은 모든 작전지역에서의 일본군은 연합국의 항복 접수에 협력할 것과 무엇보다도 (조선, 필리핀 등)해당 지역의 승인받지 못한 무장 저항단체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즉 맥아더가 선정하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력에게 이양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한국현대사의재조명, 조이스 콜코/서대숙]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였으며 16일에는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공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당시 미군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향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소련에 제의하였고,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서울에 진출한 소련군은 그 즉시 38선 이북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미국 의회에서 국무성 딘 러스크 대령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한 것은 '서울을 미군의 점령 하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증언했다."(p.42~43)

5. [해방 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행보]
미 군정은 애초부터 한반도 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괌이나 필리핀을 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취득한 것처럼 일제와의 전쟁의 전리품으로 한반도 남단을 자신들의 식민지 확충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다만, 괌이나 필리핀과 한반도 남단이 다른 것은 한반도 북단에 존재하는 소련 때문에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과 한반도의 민족과 민중들이었다.
미국 내 군국주의, 제국주의 세력들의 식민지에 대한 탐욕과 삐뚤어진 태도와 불합리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매카시즘이 한반도에도 확장된 셈이다. '반공주의'에 눈이 어두워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바라보지 못하는 태도는 21세기 한국에서도 똑같은 '반공주의'와 조금 다른 '종북'이란 이름으로 여전하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24군단의 하지 중장과 아베 총독이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때맞추어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는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그대로 인수하였다.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도 상당 기간 그대로 유임되었고 이후에는 자문역할로서 미군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항복 조인식은 일본 식민 통치의 근본적 해체가 아니라 통치권을 일본에서 미국의 손으로 이양하기 위한 절차라고 해도 조금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미군정은 그 즉시 자신만이 한반도 남단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한민족과 민중이 스스로 구성한) '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미군정의 무력에 의해 분쇄되었다."(p.47~48)

6. [한반도 점령 후 미 군정의 통치방식]
미 군정이 한반도의 해방군,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 강점 지배를 이은 미제 강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다. 제도와 사람.
미 군정은 일제가 공포, 시행하던 식민지 법과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여 한반도 남단이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식민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고, 미 군정청과 경찰에 이어 국방경비대의 수뇌부에 일본군 말단 장교와 친일파들을 기용함으로써 한반도 남단의 민족과 민중들의 염원인 식민지 청산과 매국노, 친일파 청산을 가로막았다. 가로막기는 커녕 그들을 부활시켰고, 더 강력한 지원자와 배후로 버틴 셈이다.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보다 더 거대한 자산을 신한공사 명의로 탈취한 미 군정은 일제보다 더 거대한 식민지 통치자인 셈이었던 것이다. 일제든 미군정이든 한민족과 민중이 한반도를 점령해 달라고 식민지로 통치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몇십, 몇백 명의 매국노, 친일/친미파, 사대주의자들 말고는...

"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 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친일 경력이 분명한 자들이 미 군정의 주위에 포진하였고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관계는 근본적 개혁 없이 계속 온존되었으며 억압적 식민 통치 체계 역시 그 완교한 생명력을 유지해 나갔다. 미 군정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세력 중의 하나는 친일지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민당이었다. 또한 미 군정은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이었다.
우선, 미 군정은 치안유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 기구를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미 군정 정책의 결과 경찰 간부의 8할은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으며 특히 그 중에는 북의 친일파 처벌을 피하거나 ?i겨 내려온 친일파 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하였다. 경찰의 창설과 더불어 더불어 그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온갖 파쇼적 법령체계가 난폭스럽게 등장하였다. 1945년 11월 2일의 군정법령 21호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혹은 앞서 폐기된 것이 아닌 모든 현행 법과 과거의 총독부가 공포한 규정, 명령, 지시 및 각종 문서들 중에서 1945년 8월 9일까지 유효했던 것은 합법적 당국(미 군정)에 의하여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한다.'
이리하여 1908년의 군사법령, 1910년의 정치집회금지법, 1936년의 선동문서통제령, 심지어는 1907년의 치안유지법 등 악명 높은 일제 시대 법률들이 그대로 효력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경찰 총수 조병옥은 이러한 맥락에서 1912년에 제정된 일본 법률을 근거로 1946년 가을 무렵에 독립군과 애국자들에 대한 대량 예비검속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적어도 1948년 4월 8일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더욱 가혹해졌다."(p.61~62)

7.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실과 거짓]
한국인들은 해방 후 신탁통치 관련 내용에 있어서도 친일파 관료와 정치인, 교육자, 지식인들에게 철저하게 속았다. 미국과 친일수구세력의 언론 조작과 허위선동은 이미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당시 조건에서 한민족의 통일독입국가 수립에게 가장 최선의 방안이었고, 교과서와는 달리 대부분의 독립세력과 민주세력, 민중들은 환영했다. 모스크바 결정 과정과 내용을 왜곡,조작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민주세력을 공격한 자들은 미 군정과 한 줌 친일파였다.

"해방된 조선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신탁통치는 최초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구상되었다. 루즈벨트는 테헤란과 얄타회담 등 연합국 수뇌가 회동한 자리에서 한국(조선)에 대해, 최고 30년에 이르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제안하였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미국은 자신을 포함하여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정부)은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영국은 동아시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중국은 미국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소련이 반대하더라도 숫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신탁통치의 주도권은 미국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신탁통치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미국이 차지할 수도 있는 방안으로 등장했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소,영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이러한 기대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담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신탁통치 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조선을 미,소 양군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일정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조선인은 단지 행정관, 고문관, 조언자의 역할이었고 그 기간에 단일 민족정부를 수립한다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조선 민중의 공통된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긴급함을 밝히고 가능한 한 속히 장구한 일제 식민통치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귀절을 협정의 최종안에 삽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다음으로 미국은 미,소,영,중 대표들로 구성된 행정부가 신탁통치 기간에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도록 짜여져야 하며 그 기간을 5년으로 하되 10년으로 연장할 수 있고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이 기간에도 임시 조선정부가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4개국은 단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반 원조를 하는 후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하며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후견제 실시 여부도 임시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p.53~55)

8. [해방 후 미 군정 독재에 대한 민중항쟁]
해방 후 항일 투쟁세력과 민중들의 대중조직의 즉각적, 전국적 조직화를 살펴보거나 처음에는 미 군정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1946년 초부터 미 군정의 본질을 깨닫고 항거와 항쟁을 이어나간 남한 민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잘 조직되었고 민중들의 자유와 평등, 통일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미 군정은 일제 총독부의 관리를 군정청에 고용하고, 총독부 경찰을 미 군정의 보호 하에 경찰로 변신시키고, 일본군과 만주군 전력자를 군대로 변모시키고, 친일 부역자들에게 일제 자산을 불하함으로써 민족반역자들을 미 군정의 통치기구에 이용함으로써 민족반역자를 처단해야 하는 한반도의 과제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승만이나 한민당은 미 군정의 앞잡이이자 괴뢰일 뿐이었다.

"1945년 11월 초 전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결성되었다. 전평은 1946년 2월에 이르러 조합원 수가 57만명에 달하는 규모에 이름으로써 사실상 전국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곧이어 1945년 12월 8일, 당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을 조직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울에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농이 발표한 조직체계와 가입원 수는 전국 13개 도 연맹, 군 단위에 188개 지부, 면 단위에 1,745개 지부가 있으며 조합원 수는 약 330만 명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 다양한 대중단채들이 광범위하게 건설되었다.
청년단체는 1945년 12월 초 전국 13도의 2,397개 단체 72만 3,305명 회원의 대표 639명 중 602명이 참가, 결성했다. 부녀동맹도 1945년 12월 80만 명의 회원을 대리하여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성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성된 각종 민주적 대중단체들은 일부 정당과 손잡고 상설적인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1946년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를 가졌다. 주 구호는 '주장하자 인민의 권리, 건설하자 민중의 국가' 기본 노선은 1. 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세력의 공동전선 2.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하수인 격인 일체의 매국 도당에 대한 공동의 투쟁기관 3.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위한 공동의 준비기관[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이상과 같이 단기간 내에 광범위한 대중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숱한 고난 속에서도 꺽이지 않고 지속되어온 항일 투쟁의 뚜렷한 성과물이었. 또한 각 단체의 강령을 통해 표현되고 있듯이 당시의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국 민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하여 조직적, 의식적 준비를 해 나가는 가운데, 미 군정에 의해서 강요되어지던 온갖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P.72~74)

9.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민중들의 염원]
미 군정이 모스크바 협정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상황은 한반도만의 상황으로 전후관계를 분석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1947년 봄 '트루만 독트린' 등 미국의 대외 군사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 봉쇄'로 구체화되면서 미국 정책을 극우보수세력이 지배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으니까.
처음 한반도에 상륙한 미국은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 전쟁 전리품'으로 그냥 낼름 먹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하와이나 필리핀처럼. 그럼에도 미국측이 식민지 통치 -> 30년간 신탁통치 -> 10년간 신탁통치 -> 임시정부 선 수립 -> 일제 잔재 청산 등으로 계속 탐욕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반도 민중들의 가열하고 단결된 투쟁과 소련의 견제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스크바 삼상 협정에 의해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부터 3개월간, 1947년 5월부터 3개월간 진행되었으나, 모스크바 협정을 극렬 반대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단체를 한반도 사회단체에서 제외하자는 소련의 주장을 미국이 거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당시 남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이었으며, 미.소 양국이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여론조사는 이란 평가에 큰 시사점을 준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던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서울 시내 주요 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통행인 2,495명에 대해 임시정부의 형태와 방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결과, 시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한민당과 한독당을 배척(72%)해야 하고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70%)으로, 정권형태는 인민위원회(71%)로,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68.3%)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민중은 모스크바 협정 실현을 촉구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여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7년 7월 27일 남한 전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개최된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였다. 전국적으로 수백 만명이 미소 공위의 성사와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했다."(p.95~97)

10. [미국의 남한 단독선거 강행과 2.7 구국투쟁]
한민족과 민중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에 한반도의 운명을 떠넘긴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거셌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북측과 소련이 반대할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강행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의도는 한반도 남북에서 점증하는 민족해방세력의 위세로 인해 한반도 전체를 속국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남쪽에서만 자신들의 군사력과 친일파를 동원하여 친미 식민지 또는 위성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모든 정당성과 규약을 무시하고 유엔이라는 명의를 도용하여 강제로 한반도 남단에 자신의 뜻에 맞는 허울뿐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국토 양단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한국 민중의 의지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의 불길로 치솟았다. 전평 산하 30만 명의 남한 노동자들은 일제히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함으로써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신, 철도 등 노동자의 파업은 미 군정의 손발을 마지시켰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고무되어 전국의 각급 학교도 일제히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에 발맞추어 일부 미 군정 관리들까지 포함하는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미국의 단독선거 방침에 반대하며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농촌에서의 투쟁은 미 군정의 야수적인 탄압에 대항하려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미 군정과 친일 군경은 야수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100여명이 무참하게 학살되고 8,500여 명이 투옥되었다."(p.104~107)

11. [망국적 단독선거의 강행 :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1945년에서 1948년까지를 살펴보면, 1948년 8월 제정된 헌법과 이승만 정부(?)는 한국인이 선출하거나 승인한 정부가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가 선출하고 승인한 정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 유권자가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 선관위가 선출한 것처럼... 물론 1948년 8월까지 미군정이 식민지를 군사,정치적으로 점령통치하기 위해 직접 또는 친일파 군경을 동원해 학살한 민중들의 숫자는 수천~수만 명에 이른다.
5.10 단독선거 실시의 결정 주체와 과정, 5.10 선거를 위한 투표등록 과정, 선거 전후 자유의 박탈과 폭력의 난무, 강압적인 투표 강요, 투표율, 투표 및 개표 관리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5.10 선거 자체가 무효이고 따라서 현재 기득권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제헌국회와 이승만 초대 정부 자체가 원천무효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보편적 민주주의 관점으로도 정당성이 없는 집단인 것이다.

"한국 민중이 성스러운 3.1 운동을 기념하고 있던 1948년 3월 1일 유엔 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이전에 남한 단독선거를 치르겠다는 모욕적인 발표를 단행했다. 이렇듯 미국의 강요에 의한 민족분열의 징후가 명확해져 감에 따라 조국을 수호하시 위한 한국 민중의 투쟁은 보다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미 군정과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던 남한의 애국적인 인사들과 정당, 사회단체들도 망국적 단독선거 강행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드디어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 56개 정당 시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석회의는 26일까지 공식회의를, 30일까지는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여 남한 단독선거 분쇄와 통일조국 건설의 방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였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 군정은 미군을 한반도에 증파하고 전 미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려 철저히 무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심으로 선발한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경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경찰과 별도로 그들이게 한국 민중을 구속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당하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경찰(총독부 경찰 출신이 대부분인)로 하여금 중무장한채 요소요소를 지키도록 조치하였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을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무차별 살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미 군정청은 온갖 부랑 악질 청년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는 경찰을 도와 민중 탄압에 나서도록 조치하였다. 미군정은 5.10 투표 당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장총을 든 경관, 곤봉을 든 우익청년단원을 길목마다 배치하였고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는 미군 군함을, 하늘에는 공군기를 띄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전국위원회는 선거 보이코트를 위해 한국 민중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거기관 공격, 매국적 선거 입후보자에 대한 처단, 지서 등 미군정 행정기관에 대한 타격 등 단독선거를 분쇄히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세차게 타올랐다. 남한 전역에서 파업과 동맹휴학, 철시가 진행되었고 군정관리들과 경비대원의 일부도 단독선거 반대에 동참하였다.[이상 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5.10 선거는 대다수의 애국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민중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건만 다분히 과장했을 것이 뻔한 미 군정의 공식집계조차 전체 남한 인구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숫자만이 투표에 참여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최초 형태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유엔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p.118~124)

12. [이승만 정권의 정체]
 탄생 자체가 정당이 없고 폭력으로 점철된 이승만 정권이니 탄생 직후 온갖 폭력기구와 파쇼악법을 제정한 것은 필연일 것이다. 21세기인 현재 미국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대부분의 협정과 합의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과 제도는 이미 일제가 강요한 조약과 협정 그리고 미군정이 강제한 조약과 협정에서 시작된 셈이고...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당성,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엎고 친일파 매국노들을 편에 서서 애국자, 독립투사, 민중들을 끝없이 학살하고 고문하고 빼앗고 짓밟으며 거짓과 폭력으로 세운 헌법과 정권이 무슨 정당성이 있을까...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속적 지배는 각종 조약과 협정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합법화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군의 철수 여부와 관계 없이)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예속 조약에 의해, 미국의 이해에 따라서 국정 전반을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였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본다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이라는 형식을 갖춘 8월 15일 이후 9일만인) 1948년 8?r 24일 남한 땅에서의 미국의 계속적인 군사지배권을 보장하는 다음과 같은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와 함께 1948년 9월 1일에는 '한미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을 제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인과 미국 회사들이 그때까지 누려오던 온갖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도록 보장되었고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 내의 재산을 점유할 수 있도록 용인되었다. 또한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은 미 군정 시절 자신들의 과도한 통치비용으로 인해 말생한 모든 부채를 이승만 저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위한 토지공여 및 시설유지 비옹을 전부 한국 정부가 부담하도록 할 수 있게 만들었다."(p.124~126)

13. [단독선거를 저지시키려는 남한 민중의 무장항쟁]
1948년 여순 봉기를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비교됩니다. 여순 봉기는 동포와 민중에 대한 학살을 거부하여 군인들이 일으킨 의거였고, 광주항쟁은 군인들이 전두환 살인마의 학살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비록 여순 봉기로부터 시간도 많이 경과되었고 미군과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군인들을 집요하게 세뇌한 점,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하나회'를 주축으로 사설 군대조직을 가동했던 전두환의 책임이 분명하지만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꺼리낌없이 앗아간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민중에게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직도 초급 장교와 하사관, 병사들 중에서 대다수가 학살의 범죄를 참회하거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ㅠ
저자는 4.3 제주 항쟁과 여순 봉기 그리고 기타 광범위했던 당시의 무장항쟁을 자연발생적이고 불가피한 측면으로 분석, 평가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적 결과는 당시의 무장항쟁이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지만...)
1948년 8월 미군정이 한민족과 민중들의 염원과 요구에 반하여 이승만과 친일파 일부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은 역으로 미군정과 친일파가 야금야금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다고 포기하고 남쪽에만 괴뢰정권을 세우려 한 것이기에 한민족과 민중 전체에게 선전포고를 단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록 낫과 망치, 죽창 밖에 없지만 남북한 민중들이 끊임없이 싸웠던 것이다. 이미 한반도는 1948년 8월부터 '미군정+친일파'에 의해 분단된 채 정당성 없는 집단의 학정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한민족과 민중 전체의 힘으로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느냐는 기로에서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1946~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단독선거에 의한 민족분단 음모를 알아챈 후, 1948년 들어 2.7 구국투쟁과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경과하면서 남측 민중의 반미 반이승만 투쟁은 무장투쟁 단계로 발전하여갔다. 2.7 구국투쟁 이후 한반도 남단 각지에서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야산대는 광폭한 탄압을 헤치고 효과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한 민중의 자위조직으로서 정치활동을 위주로 낮은 단계의 무장항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4.3 제주 민중항쟁 등 지역적 봉기라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급속히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불길을 당긴 4.3 제주 민중항쟁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여순 봉기 그리고 계속되는 군대 내의 항쟁 등은 당시 해당 지역과 군 내부의 불가피한 사정에 따른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은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한반도 남단의 민중들을 학살하다시피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탄압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을 직접 지휘하여 제주 민중과 여수, 순천 일대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민중들을 엄청나게 학살하였다.
미 군정과 이승만 친일 군경은 제주의 경우만 해도 8만6천명 살상, 1만5천호 방화, 7만8천 두의 소와 2만2천 필의 말 그리고 2만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5천 석, 고구마 4백2십만 관, 면화 9만7천 관, 소채 9십만 관 소각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제주 민중들에게 안겨주었다.[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또한 여수, 순천 봉기를 탄압, 학살한 결과는 이승만 정권이 축소 발표에 따르더라도 6천명의 사망에 달하였다. 2만3천 명의 민중을 체포 투옥되고 5천호의 가옥이 미군정과 친일 군경의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다.[잠들지않는남도, 노민영] 여순 봉기 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군대 내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에 착수하여 1949년 7월까지 4,700명을 총살시키거나 투옥시켰다."(p.135~160)

"농촌에서 출발한 전국적인 야산대와 여순 봉기로 비롯된 군인들의 유격대 전환으로 한반도 남단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유격전 수행을 위한 준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대거 입산함에 따라 야산대는 유격대로 전환되어 갔다. 이들 유격대는 대체로 1945년 5월까지는 생존 및 횔동에 필요한 지반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유격전구를 창설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유격전구는 한반도 남쪽 지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달했다. 요컨대 남한 지역 내 대부분이 무장투쟁의 도가니로 변화된 것이다. 남한 내 유격대의 활동은 1949년 6개월 동안에만도 수십 만명의 인원이 친일 군경과 수천 번의 교전을 치렀다."(p.161~167)

14.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쟁전야]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어느날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미군정이 1948년 한반도 남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시점이 전쟁의 개시 시점이고, 조금 멀게는 1945년 9월 35년간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정이라는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한 때가 전쟁의 개시 시점인 것이다. 아주 멀고 크게 본다면 19세기 말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이후 5년간 한반도, 특히 남단에서 전개된 상황만 보더라도 5넌 내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위한 대다수 한민족과 민중 대 미군정과 친일파와의 전쟁으, 연속이었다.

저자가 제시한 자료와 근거를 살펴보면, 저자의 논리는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남치 유도설'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저자도 자주 인용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다. 올해 커밍스 교수는 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과 한국전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는 “1940년대 후반의 미군정 기록들을 열람했다”며 “이는 한국의 고위급 관료들도 볼 수 없는 자료로서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 전쟁동안 미국이 한국에서 한 일들은 매우 끔찍하고 중대한 전쟁범죄“라며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에게 막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이 둘로 나눠지고 2개의 다른 정부가 나타나면서부터 본격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6·25 발발 20여년 전인 1930년대에 있었던 충돌도 얽혀 있다. 김일성 등 북한 게릴라와 게릴라를 쫓던 일본군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 "남침을 감행한 것은 김일성이 남측 경찰과 군에 있는 과거 일본군 협력자를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 "한국전쟁은 20여 년에 걸친 오랜 기원을 가진다. 내전이 일방의 침략 감행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1949년 상반기까지 남한 전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결성된 유격전구의 유격대는 하반기 동안 수십 만명의 병력으로 친일파 군경과 7천 여회의 전투를 치뤘다. 유격대는 한겨울에 친일 군경 토벌대의 보복공격을 버텨낸 후 1950년 3월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4월 한달 동안 전투회수 3천 여회에 참가인원은 6만5천 명에 달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불과 30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대미 자주노선와 평화적 협상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들은 130여 명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으면 이승만 정권은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즉시 미군의 대규모 군사개입이 진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p.167~169)

"1949년 한 해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미국의 앞잡이 장개석이 ?i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에게 외교와 무역을 금지시키고 중국의 유엔가입도 막았다. 동시에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자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전략방침을 수립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1950년 6월 초 일본의 병참기지화를 반대하는 일본공산당을 불법화 조치했다. 뒤이어 동경 시내에서의 모든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24명의 공산당 간부와 당 기관지 편집인을 추방했으며, 1만2천명의 노조원과 공무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시켰다. 미군정은 한국전쟁 발발 9일 전인 1950년 6월 16일 전 일본 지역에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고 전시동원체제에 착수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p.176~183)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북의 준비상태를 알려주는 사례로서, 미군 정보팀이 북의 문서를 입수하여 연구한 끝에 밝혀낸 사실은 '노동당 상임위원회의 일급 비밀 작업계획이나 북의 고위 장교들은 전쟁이나 공격에 대해 전쟁 전까지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한국현대사, 로버트시몬즈]
또한 1950년 7월 맥아더 사령부의 보고 과정 중 한 장교가 특파원에게 '전쟁이 시작된 6.25 당시 북은 동원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6개 부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전투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 수행에는 13~15개 부대가 필요함에도...' [비사한국전쟁, 스토운]"(p.184~190)

15. [한국전쟁의 발발과 초기 상황의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개 양상은 '남침-북침'이 그다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남침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의 문제제기나 인용된 책들에서 제기된 사항들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에 대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군 관료나 정치인, 기득권자들은 항상 '전쟁불사'를 외치지만 정작 위기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제 몸과 재산을 들고 36계 줄행랑을 치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들임을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대에 이어 전쟁 중에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승만과 친일파 도당의 남침설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진실이 보여주는 바는 대통령과 군대의 간부로서 경계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당한 이승만과 군 간부들은 처형되고 숙청되고 감옥으로 가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은 경계에 실패한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서 주요 관련 지휘관들이 징계, 투옥되지 않고 승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별개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미국 내 극우보수세력과 군군주의자들은 유엔을 내세우면서도 유엔의 결의와 절차를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자국 내 헌법과 절차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범법자, 무법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희생다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미국+친일파 분단세력 : 독립군+민중 통일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 군대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미 국무성의 한 관리 역시 1950년 4월에 "38도선은 실질적인 전선이다. ...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아마 1,2천 명의 전투원이 실제 교전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현대사, 로버트 시몬즈]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생 보고를 받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 대통령 트루만은 고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그래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백악관을 진두지휘하며 지체없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고 지시했다.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에치슨이 무슨 권한으로 이렇듯이 난해한 문제를 그토록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군의 한국전쟁에 대한 최초의 개입은 미국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시도되었다. 미군의 개입에 대한 미국 의회와 동맹국들의 사후 승인은 남측 군대가 형편없이 패전만을 거듭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적절히 이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미군은 군사 개입 직후부터 공군기와 군함을 동원하여 남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맥아더는 폭격함에 있어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 남-북 군대의 구별,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 등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정확성이 없더라도 38선과 서울 사이의 좁은 회랑지대를 폭격할 것'을 결정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6월 30일 맥아더는 북측에 대한 폭격 명령을 내려 평양 비행장을 급습, 폭격하였다 
7월 1일 미 지상군의 선발대의 부산 도착을 시작으로 13일까지 대부분이 도착하자, 7월 14일 맥아더는 이승만으로부터 '한국군의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른바 '대전협정'이라 불리는 이 통고는 조약이나 협정에 의한 문서화도 없이, 국회 비준도 없이 곧바로 7월 17일부터 실시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한국전쟁, 조지프 굴든] 작전권의 이양과 함께 주한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6. [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왔다. 특히 240만 명의 죽음에서 군인이 수십 만명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며, 대부분은 미군과 이승만 친일 군경의 행위였다고 본다. 미군의 경우 무차별 폭격, 미군 리지웨이 중장의 '몰살작전', 미군과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가장 큰 피해를 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군의 전쟁 범죄는 이 책에 나오듯이 황해도 신천군의 민간인 학살, 원주/홍천지역 등의 네이팜탄 사례, 세균전, 민주정부 때 밝혀진 노근리와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저의 아버님이 직접 경험한 익산역 500여 명 폭탄 투하 몰살사건 등이 드러난 사례일 뿐이다.(북측이 주장하는 미군과 친일 군경의 황해도 민간인 학살 숫자만 18만 명에 달한다.)
이승만과 친일 군경의 학살은 무수히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학살된 사람이 최소한 수십 만명에서 거의 백여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 사과할 정도였다.

"1950년 7월 미군은 한반도 남,북을 가리지 않고 소위 '융단폭탄'을 퍼부었다.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남쪽 주요 철도를비롯하여 길목, 터널, 집하장, 창고 등 일체의 보급 연관시설과 민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61만채의 주택, 1만5천동의 학교, 1만7천개의 공장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민족과통일, 노중선]
1951년 1월 15일 '런던 타임즈'는 원주지역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추구하면서 22개 마을을 불태웠고 300개의 건초더미에 방화했음을 보도했다. 2월 5일자 '뉴욕타임즈'는 미군이 F-80 공군기를 동원하여 철원, 금촌, 춘천, 춘천리 근처의 마을 공격에서 로케트, 네이팜탄뿐 아니라 폭탄으로 강타당했음을 보도했다. 또한 24대의 F-51 무스탕 비행편대는 홍천 지역에 5천 갤론의 네이팜탄읓 퍼부어댐으로써 일대의 모든 마을과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3년간애 걸친 전쟁은 쌍방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4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이 기간에 한반도 전체에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각종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한국전쟁, 고지마노보루]"(p.295)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국가를 세웠고 아직 장개적 국민당 잔당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그며 수십 년간의 전쟁 참화를 딛고 경제를 전설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어한 시기에 터진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이같은 과제 해결을 극히 곤란하게 만들었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지연시키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원하지 않은 시기에 원하지 않은 형태로 발생함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이런 기대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훨씬 이전에 미 공군기가 만주지역읓 폭파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 명단을 제시하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항의하였다. 그러나 11월 16일에 워싱턴에서는 압록강 철교를 폭파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현대조선사, 콩드] 이렇게 하여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쟁개입은 최초의 38선 원상회복에서 시작하여 38선 돌파, 만주 폭격이라는 단계적 확대 과정을 거치기 되었고,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참전은 자국 영토가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미국의 개입과 서로 다른 측면일 것이다."(p.220~222)

"한국전쟁은 붕괴 직전의 이승만 친일 정권이 되살아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 하에 60만 대군으로 급성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격전의 형태를 띠고 있던 남한 민중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수 있었다.
또한 범람하는 군수물자는 이승만에게 풍부한 정권 유지 비용을 공급해주는 원천이 되었다. 전쟁 중 자금확보를 위한 수많은 불법행위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석유, 자동차 부속품, 식품 원로 등과 간이 상품가치가 있는 전쟁물자를 공공연히 팔아먹는 일이었다. 보다 교묘하게 거금을 남기는 방식은 60만 대군의 부식비를 유용하는 일이었다. 또한 계약을 맺을 때뿐 아니라 불량품이 검사를 통과할 때 뇌물이 공공연히 요구되었다.[1960년대, 김성환 외]"(p.261~267)

[ 2013년 9월 0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추천 [서평] 강상중, 현무암 저, 이목 역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엇는가>를 읽고 / 2012. 09., 350쪽, 책과함께

홍익표 의원의 '귀태(鬼胎,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 발언 논란으로 '귀태'라는 단어와 이 책에 대해 관심이 생킨 데다가 페이스북에서 이정희 대표가 소개하여 읽게 되었다.

괴물 같은 독재자로 최후를 마친 마사오 다카키, 즉 박정희한테서는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쇼와의 요괴'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권세의 정치가로 불렸던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이라는 어두운 과거가 지워지지 않는다.
국가의 재건과 총력안보라는 외형적 '돌격적 근대화'를 달성한 박정희는 한국의 노년층과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민족중흥의 기수'로 변함없이 살아 있다.
끝없이 권력을 추구한 마키아밸리스트 기시 노부스케야말로 전쟁 전에는 국가개조의 핵심관료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전후에는 보수합동을 낳은 주인공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름과 동시에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의 틀을 만들고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주도했다.

이처럼 두 사람에게는 반대의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며, 두 사람은 많은 부분 공통점을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제가 전쟁에서 패망하고 해방이 이루어진 후 68년이 지난 후, 박정희의 딸이 한국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가 일본 수상이 된 2013년에 두드러진다. '독재자와 요괴의 자식들'로...

그렇다면 두 사람, 그리고 두 가계의 공통점은 뿌리는 무엇일까?
저자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가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뿌리를 만주국에서 찾는다. 일제가 대륙을 침략하면서 괴뢰국으로 세운 만주제국.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훗날의 '독재자'와 '요괴'의 요람의 땅이었던 만주였다.

만주괴뢰국, 만주제국은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게 어떤 경험이었고 그들은 어떻게 연결되었나? 왜 그들은 '귀태'라 불리우는가?
이 책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젊은 시절의 박정희의 맨얼굴, 지금까지 이름 이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시 노부스케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조선인들에게 만주가 어떤 땅이었고, 일제가 만주땅을 어떻게 강점하고 어떤 방식으로 괴뢰국을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두 사람은 모두 냉전이라는 조건에서 미군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었고, 한국전쟁 후 미군의 필요에 의해 집권한 후 만주제국의 경험을 자국에서 실험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박정희의 통치방식, 근대화 방식과 기시 노부스케의 전후 일본 재건 방식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통점은 만주제국에 뿌리를 두고 만주인맥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계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다시는 재발해서는 안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의 표현 그리고 홍익표 의원의 주장처럼 그들은 '귀태'가 맞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주제는 '귀태'가 아니라 '만주제국'이다. '귀태'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조사와 설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책 속에 단 한 번인가 나올 뿐이다. 홍익표 의원 역시 저자처럼 기본적인 한국현대사 속에서 일반적인 인식을 문장 속에 표현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홍 의원의 표현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와 새누리당, 극우보수언론은 쌩난리를 첬고 민주당 지도부는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정치권을 주도하는 인라들의 역사인식이 초라한 것을 떠나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이 한국사회를 주도하는 기득권자들이 귀태를 귀태라 주장하지 못하고, 친일파를 친일파로 부르지 못하고, 다까끼 마사오를 다까끼 마사오로 부르지 못하고, 쿠테타를 쿠테라라 부르지 못하고, 친미사대주의를 친미사대주의로 부르지 못하고, 작전권이 없음을 굴욕으로 느끼지 못하고, 경제 예속을 예속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문화 종속을 종속으로 느끼지 못하고, 학문 식민지화를 식민지화로 느끼지 못하고, 분단과 정전체제를 전쟁위기로 느끼지 못하고, 극우세력 콤플렉스를 '국민의 눈높이'로 생각하고, 반북 세뇌를 보편 상식이라 느끼고, 재벌의 착취를 착취로 느끼지 못하고, 비정규직화를 분열책과 노예화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 사회와 민족은 대를 이어서도 친일파가 득세하여 식민사관이 국사를 대체하는 것을 멍청하게 지켜보게 되고,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해외에서는 미국의 식민지라 손가락질 하는데 독립국가로 자위하고, 극우파시즘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북의 '위협'이라는 공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NLL과 같은 종북공세에 끌려다니고, 하루 4~5만원 벌어 재벌과 극우세력에게 5~6만원을 갖다 바치고, 알량한 기득권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성공과
출세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어차피 저 성공과 출세의 꼭대기 자리는 1%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2013년 9월 1일 현재 한국인들은 '귀태'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고 있다. 부정선거와 유신회귀와 정치공작으로...

참고로, 박정희(다까끼 마사오)가 귀태(鬼胎)인 이유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내용과 페이스북 친구분의 글을 일부 인용한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만주군관학교 지원서류에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쓴 혈서에 첨부되었던 박정희의 각오 내용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고, 2년만에 수석 졸업, 일본 육사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하고 1944년 4월 졸업한다. 이 후 1944년 7월 만주군 보병 제 8사단에 배속되었고,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박정희의 보병 제8사단은 중국 항일 팔로군부대와의 전투가 주 임무였다."

"해방 후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 단기과정을 마치고 한국군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인생활을 시작한다.
1948년에는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사건이 발발하고 한국군 내의 남조선로동당 조직책이었던 박정희도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2심에서 징역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 집행정지 선고를 받고 강제 예편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다시 현역 소령으로 복귀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선배 인맥의 지원에 힘입어 군부 내에서 인맥을 확보하였던 박정희는 1961년 5.16일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장면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정원은 박정희가 군부쿠테타를 일으킨 직후 본격적인 군사정부수립 이후 설립하였던 비밀정보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급기야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해 기존 헌법을 전면 중단 폐기하고 대통령 명령에 의한 초법적 긴급조치권, 국회의원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할 권리, 대통령 간선제 및 6년 연임제 등을 포함하는 유신헌법을 발효시킨다. 이 과정에서 국회는 무력화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은 금지된다."

[ 2013년 9월 01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