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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추천 [서평] 강상중, 현무암 저, 이목 역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엇는가>를 읽고 / 2012. 09., 350쪽, 책과함께
홍익표 의원의 '귀태(鬼胎,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 발언 논란으로 '귀태'라는 단어와 이 책에 대해 관심이 생킨 데다가 페이스북에서 이정희 대표가 소개하여 읽게 되었다.
괴물 같은 독재자로 최후를 마친 마사오 다카키, 즉 박정희한테서는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쇼와의 요괴'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권세의 정치가로 불렸던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이라는 어두운 과거가 지워지지 않는다.
국가의 재건과 총력안보라는 외형적 '돌격적 근대화'를 달성한 박정희는 한국의 노년층과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민족중흥의 기수'로 변함없이 살아 있다.
끝없이 권력을 추구한 마키아밸리스트 기시 노부스케야말로 전쟁 전에는 국가개조의 핵심관료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전후에는 보수합동을 낳은 주인공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름과 동시에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의 틀을 만들고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주도했다.
이처럼 두 사람에게는 반대의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며, 두 사람은 많은 부분 공통점을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제가 전쟁에서 패망하고 해방이 이루어진 후 68년이 지난 후, 박정희의 딸이 한국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가 일본 수상이 된 2013년에 두드러진다. '독재자와 요괴의 자식들'로...
그렇다면 두 사람, 그리고 두 가계의 공통점은 뿌리는 무엇일까?
저자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가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뿌리를 만주국에서 찾는다. 일제가 대륙을 침략하면서 괴뢰국으로 세운 만주제국.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훗날의 '독재자'와 '요괴'의 요람의 땅이었던 만주였다.
만주괴뢰국, 만주제국은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게 어떤 경험이었고 그들은 어떻게 연결되었나? 왜 그들은 '귀태'라 불리우는가?
이 책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젊은 시절의 박정희의 맨얼굴, 지금까지 이름 이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시 노부스케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조선인들에게 만주가 어떤 땅이었고, 일제가 만주땅을 어떻게 강점하고 어떤 방식으로 괴뢰국을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두 사람은 모두 냉전이라는 조건에서 미군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었고, 한국전쟁 후 미군의 필요에 의해 집권한 후 만주제국의 경험을 자국에서 실험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박정희의 통치방식, 근대화 방식과 기시 노부스케의 전후 일본 재건 방식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통점은 만주제국에 뿌리를 두고 만주인맥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계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다시는 재발해서는 안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의 표현 그리고 홍익표 의원의 주장처럼 그들은 '귀태'가 맞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주제는 '귀태'가 아니라 '만주제국'이다. '귀태'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조사와 설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책 속에 단 한 번인가 나올 뿐이다. 홍익표 의원 역시 저자처럼 기본적인 한국현대사 속에서 일반적인 인식을 문장 속에 표현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홍 의원의 표현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와 새누리당, 극우보수언론은 쌩난리를 첬고 민주당 지도부는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정치권을 주도하는 인라들의 역사인식이 초라한 것을 떠나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이 한국사회를 주도하는 기득권자들이 귀태를 귀태라 주장하지 못하고, 친일파를 친일파로 부르지 못하고, 다까끼 마사오를 다까끼 마사오로 부르지 못하고, 쿠테타를 쿠테라라 부르지 못하고, 친미사대주의를 친미사대주의로 부르지 못하고, 작전권이 없음을 굴욕으로 느끼지 못하고, 경제 예속을 예속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문화 종속을 종속으로 느끼지 못하고, 학문 식민지화를 식민지화로 느끼지 못하고, 분단과 정전체제를 전쟁위기로 느끼지 못하고, 극우세력 콤플렉스를 '국민의 눈높이'로 생각하고, 반북 세뇌를 보편 상식이라 느끼고, 재벌의 착취를 착취로 느끼지 못하고, 비정규직화를 분열책과 노예화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 사회와 민족은 대를 이어서도 친일파가 득세하여 식민사관이 국사를 대체하는 것을 멍청하게 지켜보게 되고,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해외에서는 미국의 식민지라 손가락질 하는데 독립국가로 자위하고, 극우파시즘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북의 '위협'이라는 공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NLL과 같은 종북공세에 끌려다니고, 하루 4~5만원 벌어 재벌과 극우세력에게 5~6만원을 갖다 바치고, 알량한 기득권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성공과
출세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어차피 저 성공과 출세의 꼭대기 자리는 1%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2013년 9월 1일 현재 한국인들은 '귀태'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고 있다. 부정선거와 유신회귀와 정치공작으로...
참고로, 박정희(다까끼 마사오)가 귀태(鬼胎)인 이유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내용과 페이스북 친구분의 글을 일부 인용한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만주군관학교 지원서류에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쓴 혈서에 첨부되었던 박정희의 각오 내용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고, 2년만에 수석 졸업, 일본 육사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하고 1944년 4월 졸업한다. 이 후 1944년 7월 만주군 보병 제 8사단에 배속되었고,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박정희의 보병 제8사단은 중국 항일 팔로군부대와의 전투가 주 임무였다."
"해방 후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 단기과정을 마치고 한국군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인생활을 시작한다.
1948년에는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사건이 발발하고 한국군 내의 남조선로동당 조직책이었던 박정희도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2심에서 징역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 집행정지 선고를 받고 강제 예편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다시 현역 소령으로 복귀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선배 인맥의 지원에 힘입어 군부 내에서 인맥을 확보하였던 박정희는 1961년 5.16일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장면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정원은 박정희가 군부쿠테타를 일으킨 직후 본격적인 군사정부수립 이후 설립하였던 비밀정보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급기야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해 기존 헌법을 전면 중단 폐기하고 대통령 명령에 의한 초법적 긴급조치권, 국회의원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할 권리, 대통령 간선제 및 6년 연임제 등을 포함하는 유신헌법을 발효시킨다. 이 과정에서 국회는 무력화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은 금지된다."
[ 2013년 9월 0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