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김정일 - CEO Of DPRK,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그 모든 것을 밝힌다
정창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김정일을 새롭게 이해하기 <CEO of DPRK 김정일 :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정창현 , 2007. 10., 446, 중앙북스


 책은 2007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에 한창 준비하고 있을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북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정창현 교수가 노무현 정부 관계자와 독자들에게 김정일  김정일의 북한 정권에 대한 실체와 권력 수립 과정을 분석하여 내놓은 것이다. 남의 최고 지도자와 정부 관계자가 북의 최고지도자와 정부 관계자와 국가 대 국가로 협상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당연히 어설픈 정보나 편향적인 정보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분석 정보, 수십년 동안의 상대방 국가와 지도자의 권력 형성과정, 상대방의 철학과 정책과 비전을 알아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북한의 최고지도자로서 지낸 기간이 수십 년이고 북한에서는 여전히 김일성 주석과 더불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자, 지도자 인정받고 있고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은의 ‘혁명전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  김정일 집권시 북한 체제를 아는 것은 지금의 김정은 체제와 북한을 이해하는  도움이 것이다.


당시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저자 역시 단순히 방송언론의 상업주의적 가십 거리나 호기심, 정보 차원의 '무지와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국가 경영 리더십에 주목할 시점이 되었음에 주목했다. 

그의 리더십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개인 김정일'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운영하는 'CEO 김정일' 주목해야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김정이 국방위원장을 'CEO' 표현하는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 것이다. '철권통치자'에게 무슨 리더십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북에서는 어떻게 위대한 영도자 ‘CEO’ 지칭할  있느냐고 거부감을 드러낼 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정보 차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접근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할 때가 됐다고 본다. 또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 변호하는 북한 사회를 읽는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방송이나 언론이 북한과 북한 지도자에 대해 일관되게 폄하하고 편향적으로 기사화하지만, 국내외 일부 전문가들은 남북 협상이나 북미 협상, 북일 협상이나 6 회담 테이블에서 북한은 항상 주도권 아닌 주도권을 갖고 간다고 평가한다. 북한은 협상 일정을 뒤바꾸기는 예사이고, 어젠다를 한순간에 바꾸기도 한다. 아예 협상 자체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북한으로 하여금 이러한 파워 지니게 할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북한의 국력은 대한민국과, 미국과, 일본과, 그리고 6 회담 당사국들과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데도, 북한이 이처럼 항상 협상의 주도  쥐게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김정일 시대의 북한은 현재처럼 핵무기나 장거리미사일도 개발하기 전이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근대 이후 대를 이어 권력을 이어받은 마지막 후계자라는 비판을 뒤로 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 지도자로 자리 잡을  있었던 전략, 10 넘게 붕괴한다 외교가의 분석을 무색케 하며 김정일 체제로 완전히 정착할  있었던 전략, 전방위로 압박해오던 미국과 일본을 핵실험 하나로 관계 정상화로 돌아서게 하는 전략의 요체는무엇일까? 

2000 1 남북 정상 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서방  평가는 크게 왜곡됐다 토로했다. 방북   전부터 각종자료와 정보를 섭렵하며, 정상 회담을 준비해온 김대중  대통령조차 이러한 평가를  정도면 일반 시민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2000 10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회담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도 2003 출간한 회고록(<마담 세크레터리, The Mighty & The Almighty>에서  위원장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 지적인 인물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를 확인할  있었다. 그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미몽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경제의 계획을 얘기할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그는 회담에 대비한 준비를 아주  했다고 느꼈다. 그는 똑똑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고 북한의 노동당, 군대, 정부, 대남사업을 장악해가는 과정이다. 

김정일의 초기 성장은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특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닐 때, 그는 대학 당 위원회 소속이면서도 노동당 중앙의 주요 회의를 방청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그 과정에서 당시 북한의 사상투쟁을 대학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엄청난 특혜와 특별 학습을 통해 김정일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후계자로 육성되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대학 졸업 후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배속되었다.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는 핵심 중의 핵심부서라 한다. 그가 중앙당에 배속된 직후인 1967년 북한에서 ‘갑산파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김영주의 주도 하에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비판과 숙청이 이어졌다.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가 중앙당 전원회의를 조직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 숙청과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김정일은 1968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옮겼다. 선전선동부는 조직지도부와 함께 노동당의 핵심 부서라 한다. 그 직후 북한 군부에서는 김영주의 후계 추진에 반발한 ‘김창봉, 허봉학 사건’이 일어났고, 노동당은 군 전반에 대한 검열을 진행했다. 김정일은 이 사건과 관련해 인민군 당 전원회의 일정을 준비하고 보고서 작성, 토론 준비, 결정서, 문건 작성을 직접 준비했다. 또한 예술분야에 깊이 관여하며 영화예술론을 서술했고, 북한에서 강력한 선전 수단이던 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빨치산 원로들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을 맡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노동당, 군대, 행정기관, 대남사업기관에 대한 지도검열을 강화하면서 1970년대 중반까지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김정일 후계 문제는 1970년 처음 빨치산 원로 세대인 김일, 최용건, 건최현 등이 제안했지만 김일성이 보류했다. 이어 1971년 하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2차 전원회의 직후 개최된 당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두 번째로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병환으로 조직비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김영주가 김정일을 노동당 조직,사상비서 자리에 앉히자는, 후계자로 선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김영주의 제안은 빨치산파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김일성이 “조금만 더 두고보자”며 다시 보류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자 또는 당 비서로 선출하자는 빨치산 원로들의 제안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의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김일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김정일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였다.

결국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하부에서 올라온 결의서에 기초하여 김정일을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빨치산 1세대의 내부 논의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회의는 김정일에게 당 정치위원회 위원 자리를 주는 동시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안겨주었다. 김정일은 이미 조직지도 비서와 부장, 선전선동 비서와 부장을 포함한 1인 5역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한 언론은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  했다. 당시 김정일은 만 33세였다. 

그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났던 시기는 후계자가 된 지 2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났던 김정일에 대해 술회하고 평가한 내용들은 가식이나 허풍이 아니었던 셈이다.


저자는 김정일 위원장을 항상 파격 행보라고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 행보 받아들여야 하며, ‘두려운 전략가 아니라 예측가능한 CEO’ 면모에 주목해야 7  남북정상 회담의 충격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교수는 이와 관련 김정일의 외교 형태에 대해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벼랑  전술이라고 규정해 왔다, 그러나 김정일의 외교술은 6 회담에서  드러나듯이 단순히 막무가내 버티기 아니라 결단의 타이밍을 중시한다 말한다. 특히 적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유리한 결단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마지막까지 준비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위원장이 자신에게 보고되는 최종 문건이 나올 때까지 실무 부서와 관련 부서들 간의 끝장 토론 거치도록 하며, 그래서 최종 입장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했다.그렇지만 일단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위원장의 결단이 내려지면 일사불란하게 집행되는데,  위원장의 결단과 추진력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인다. 


 책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리더십을 읽을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증언과 자료가 담겨 있다.  중에서도 조선노동당의 고위인사를 지내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신경완 씨의 증언이 뼈대를 이룬다. 신경완은 1998 사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신분 노출을 우려해 일부 증언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모양이다.  월간지 기자가 그의 실명을 거론하자 여러 북한 연구자들도 그의 실명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책에서는 그가 의도적으로 다르게 구술했던 내용을 바로잡고, 저자가 잘못 기술했던 사실들을 바로 잡았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 회담 녹취록, 방북 언론사사장단과의 대화록,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구 전권대사와의 대화록을 실어  위원장의 정치관, 외교관, 통일관, 경제관, 문화관 등을 엿보게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2 남북 정상 회담 365 막전막후 이야기도 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김정일 위원장의 족적을 세밀하게 추적했으며, 기쁨조 등에 대한 오해와 진실도 실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 2016년 10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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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김용진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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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김용진 저, 2012. 01., 400쪽, 개마고원


작년(2016년) 10월 경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위키리크스가 2010년 가을 폭로한 미국 국무부의 기밀 문서 중 한국과 관련 내용을 파헤친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된 이상 읽어야 했다.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의 기밀문서 25만 건을 <가디언>, <뉴욕타임즈>, <슈피겔>를 통해 폭로했음을 알게되었을 때, 필자는 당연히 대한민국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및 한반도와 관련하여 미 국무부와 주한미대사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국내 주요 정치권이나 언론, 학계 어느 곳에서도 미 국무부 기밀문서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정보만 기사로 내보낼 뿐, 한국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도 적었고, 언론으로서 자세한 내용을 파헤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뒤 김용진 기자에 의해 기밀 문서 중 한국 관련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었지만, 도서 정보를 자주 접하는 필자도 알지 못했다. 다행하게도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것 또한 SNS의 힘이면 힘이라고 할 것이다.)


‘KOREA’란 단어가 들어간 미 국무부 비밀전문이 1만4,165건이고, 주한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것만도 1,980건에 이른다. 이 책은 바로 그 주한 미 대사관 작성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권력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한 비밀들, 미국은 알지만 정작 우리는 모르는 ‘대한민국의 실체’에 대해 심층분석했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과 아프간 파병, UAE 원전 수주, 독도 문제, 론스타, 한미 FTA 등 한국 사회를 격동시킨 사건들의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들만의 밀담과 비밀협상들이 그 대상이다. 비밀문서에 기록된 충격적인 내용들은 ‘공식적인 발표’ 뒤에서 굴러가는 ‘진실’을 보여준다.


미국은 이명박이 서울시장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유력 대통령 후보로 보고 주시하고 있었다. 대선 과정에서도 다른 후보들보다 이명박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미 대사관이 작성해 보고 가운데 정동영 관련 문건이 9건인데 반해 이명박 관련 문건은 26건이나 된다.

이명박은 미국 입장에서매우 유용한 존재이기도 했다. 미 대사관은 MB를 “매우 친미적인 스탠스”를 보이는 유일한 후보로 평가하고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이명박의 당선을 매우 반기며, 자신들의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2008년 2월 21일 전문, 366쪽)


하지만 미국은 MB를 좋게만 바라본 것이 아니다. MB의 모든 측면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미 대사관은 이명박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라며, “휴고 차베스의 보수파 버전”으로 간주했다.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747 공약은 ‘포퓰리즘의 산물’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MB가 복지에 대한 요구를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한 것과 대조적인 부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자질과 배경을 “국법을 느슨하게 해석하는 삶을 살았다”며 냉철히 적시하면서 그의 당선은 “어떤 특별한 정치 기술이나 정책 비전보다 일차적으로는 좋은 운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렇게 몇 년간 정보를 모은 ‘MB 사용설명서’를 가지고 MB정부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한국 내 친미 사대주의 성향의 인사들은 미국의 개입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 미국의 편에 서서 적극 협력했다. 대통령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부끄러운 친미 사대주의 행동을 일삼았다. 2007년 대선이한창일 때 이명박캠프의 유종하 선거대책위원장이 버시바우 대사를 찾아가 BBK 스캔들의 핵심인 김경준의 한국 송환을 연기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명박 후보가 미국의 요구에 철저하게 따를 것임을 약속했다.(2007년 10월 31일 전문, 255쪽)

이명박 진영의 불법부정 행위는 대선 운동 기간 중에 미국에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스스로 미국의 먹잇감, 놀잇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명박정권의 주요인사들도 강한 친미 성향을 내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미국 대사관의 오랜 정보원”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는 1997년 대선 때는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에 미 대사관에 조사 결과를 알려주기도 하고, 2007년에는 MB의 최측근으로서 선거 동향을 알려주고 차기 정부의 인선 정보를 미리 흘리기도 했다. 또한 그 밖의 여러 정보원들이 고위관리의 인사나 주요 정책들을 미국에 줄줄 흘리고 미국 입장에서 조언해준다. 예컨대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론스타에 대한 금융위 결정사항을 미리 미국 대사에게 알려주고 대응 방법을 조언해주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와 정부 각부처의 인사들만이 친미 사대주의자이고 미국의 간첩과 정보원은 아니었다. 한국의 주요 권력층 주변과 정계, 정부관료들부터 NGO나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의 간첩이었고 정보원이었다.

저자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주한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 전체를 대상으로 미국의 정보원들을 검색한 결과, ‘청와대 정보원’이 가장 많았다. 이외에 국회,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순이다. 국정원이나 기무사쪽은 CIA나 국방정보부쪽의 정보원이 다수일 것이다.

예를 들어, 2007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제15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해 조지 부시 미대통령과 회담할 당시, 회담 사흘전 청와대 경제담당 비서관은 미 대사관 참사관을 만나 노무현 대통령이 회담에 응하는 대책을 미리 알려주었다. 청와대의 통일안보전략 비서관은 2007년 남북회담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였다. 외교통상부 북미1과장은 대통령 신년연설 내용도 사전에 미 대사관에 제공하였다. 또한 2007년 대선 당시 청와대는 정동영 후보를 지원하지 않았고 ‘이명박이 당선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손을 놓았다.(그랬던 사람들이 국민들을 속이고 지금도 야당에서, 정부조직에서, 연구소와 언론에서 비열하게 애국자인 것처럼, 진보적인 것처럼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정보원들은 노무현 정부가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는 데 별다른 열의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대신 노무현 지지자들은 무소속 문국현 후보를 위해 일하고 있거나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의 2012년 대선 캠페인을 이미 시작했다고 한다. 노사모 남동지부 수장이자 현재 청와대 행정관인 김태환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모두 각자의 길로 갔다’며 ‘아무도 자발적으로 정동영의 캠프에 합류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애석해 하며 인정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artid=201109201734421&mode=view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1111100009


한국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이렇게 미국에 ‘알아서 기었으니’ 미국이 한국에서 원하는 목적을 얻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 이상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 정부를 ‘꼭두각시’라고 조롱해도 대꾸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관철시킬 목표를 설정하고, 치밀하고 철저한 정보 수집과 관리를 바탕으로 개입 작업에 나섰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부터 ‘한국 대통령 당선자에게 개입하는 위한 게임플랜 Game Plan for Engaging the ROK President’(50쪽)를 수립하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대사관이 선거가 끝난 직후 본국에 발송한 전문은, 이명박정권의 출범을 맞아 쇠고기 시장 개방과 이라크 파병 연장, 한미 FTA 비준을 한국 정부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몇 년 뒤 상황은 미국의 목표가 거의 대부분 달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미국산 쇠고기는 2008년 4월 시장이 개방됐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의 파병도 무리없이 연장됐다. 한미FTA는 미국에 더 유리해진 재협상을 거쳐 날치기 통과됐다.


미국의 계획대로 진행된 것은 이것들만이 아니다. 미국은 2008년 3월에 “훈련 및 장비 지원을 위한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을 한국 관련 우선순위 목록에 올려놓고, 9월에 5억 달러를 지원해줄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또한 2009년 4월에는 각 동맹국가에 아프간 지원금을 할당했는데 한국에는 5억 달러가 배정됐다. 일본에 이어 가장 많은 액수였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2011년 4월에 아프간에 5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위키리크스 공개 문서에는 미국의 끈질긴 지원 압박과 그에 굴복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미국이 2008년 2월 설정한 목표 중 하나인 5년 동안 지속되는 방위비분담협정(그전까지는 2년 정도 기한이었음)도 2008년 말 호놀룰루에서 미국의 뜻대로 타결됐다.


MB정부가 미국에 끌려 다닌 것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는 쇠고기 시장 개방 문제다. 2008년 4월 이명박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시장 개방을 결정하자 한국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선물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그런데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문서들은 정말로 그런 ‘빅딜’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MB의 측근인 현인택 전 통일부장관은 1월 18일에 버시바우 대사와 만나 한미 정상회담 장소로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말했으며, 버시바우 대사는 다음날인 1월 19일에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 위원장 등과 만나 “이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미 등을 보장받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할 때에 맞춰서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 시장 개방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고 못을 박으며 쇠고기 시장을 개방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MB측은 정말로 국민들의 눈을 피하면서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약속한다.(2008년 2월 21일 전문, 124~125쪽)


미국의 요구에 따라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약속했으면서도, 총선 전 여론을 의식하여 공식적인 사인은 하지 않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둔 뒤 곧바로 쇠고기 시장 개방에 나섰고, 이명박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돼 부시 대통령과 미국산 스테이크 만찬을 즐겼다.

한미 재협상 문제에서도 미국에 굴복하며 국민들을 속이기는 마찬가지였다. 2009년까지만 해도 이명박정부는 FTA 재협상은 절대 없다며 확언했고, 2009년 11월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내 얼굴을 걸고서라도 재협상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미국측에 재협상 의사를 내보이고 있었다.(2009년 2월 21일 전문, 267쪽)


그리고 결국 한국 정부는 미국과 재협상에 들어가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다. 한미를 빨리 비준하기 위해 미국에 양보를 거듭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 역시 한국과의 체결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미국 비밀전문 기록이 있다.

“한미 FTA는 다음 세대에도 한국을 미국에 묶어둘 핵심 요소이며, 또한 미국이 동북아시아에 정착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상호 간의 본질적인 교역 이익에 더해서 동북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시기에 한국을 더욱 미국에 묶어놓는다는 측면에서 한미 FTA의 상징적 효과는 막대한 것이다.”(2009년 11월 5일 전문, 272~273쪽)


미국은 한미 FTA가 자신들에게 막대한 실질적, 상징적 이득을 준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재협상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얻었다. 반면 한국측은 미국이 FTA를 원하고 있는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지 못하고, 조속한 비준에만 매달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런 무대 뒤에서의 밀약이 여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각종 포장을 했다.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그런 ‘포장술’ 내지 언론 회피 꼼수를 미국측에 설명하기까지 한다.(2008년 12월 18일 전문, 108~109쪽)


미국의 요구에 따라 아프간을 지원할 계획이지만, 그렇게 여론에 비춰지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모른 척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간 지원이 워싱턴의 정치적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아프간의 상황과 아프간 국민들을 염려하기 때문에 나왔다고 보이게” 해야 한다고 포장 기법을 조언해주기까지 했다. 이 전문을 보고받고 미 국무부는 한국 정부가 언론을 상대하는 방식에 대해 통찰력을 얻었다며 극찬했다.

정부는 이렇게 있었던 논의를 없던 것처럼 숨기는 것 말고도, 원전 수주나 자원외교 성과를 마구 부풀리면서 다른 식으로 국민들을 속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한국이 수주하기로 돼 있던 UAE 원전을 치적으로 치장했으며 별다른 실익도 없는 볼리비아 리튬 개발과 쿠르드 유전 개발 사업을 몇 억 달러짜리 자원외교 성과라며 포장해왔다. 하고도 안 한 척, 안 하고도 한 척, 끊임없이 국민을 기만해왔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기밀문서를 통해 본 한국 정부와 대통령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비굴하고, 부끄러우며, 한심하다. 미국의 요구와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고서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갖은 꼼수를 쓴다. 정권의 부끄러운 치부는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고, 있지도 않은 성과를 치적이라며 크게 부풀린다. 국민들의 안전과 이익보다, 정권의 체면과 자신의 보신을 우선시하는 모습은 분노를 일으킨다. 한국인들이 5년여 동안 익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을 이 책은 확실하게, 있는 그대로의 증언으로 확인해준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대통령 한 명, 한 정권의 문제로만 축소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미국 영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들 모르게 중대한 결정을 해온 것은 어느 정권, 어느 권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권력은 기본적으로 기만·위선·은폐의 습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파적 시각을 떠나서 권력이 감추려 하는 진실들을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알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번에 공개된 위키리크스 문서와 그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의 발간은 정보의 민주화에서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만 알고 우리는 모르게’ 한국 사회를 움직여왔던 권력자들은 그 부끄러운 알몸을 까발리게 됐다.


[2017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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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 민족21 통일이야기 2
정창현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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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장성택 사건을 통해 본 북한체제 <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

정창현, 2014. 1, 180쪽, 선인


북한 김정은 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아마 유교적 문화가 강한 북한사회에서 최고지도자의 매형인 장성택을 처형한 것이다.

장성택은 2013년 12월 전격 처형된 것으로 국내 언론은 보도했다. 이 책은 장성택이 처형된 지 한 달만에 출간되었다.


북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반당반혁명 종파행위’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집행된 것은 2013년 12월 12일이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가 나왔다.

당시 북한이 장성택에 대한 조선노동당 정치국 결정서와 판결문을 전격적으로 공개했지만 아직까지 ‘장성택 숙청’의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장성택 사건은 당시 북 내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많은 숙제를 던졌다. 북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고, 남북대화를 복원한 상호 신뢰를 마련하는 조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장성택 숙청과 관련해 북이 공개한 정치국 결정서와 판결문을 분석하고, 최근 북 내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을 모았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많지만 이번 사태를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향후 북의 정책방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책을 펴내며 中)


저자는 국내외에서 정확성이 높은 북한전문가로 알려져있다. 주류 언론이나 학계 전문가들이 ‘소설’을 써대고 있을 때 가장 사실에 가깝고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균형잡힌 논지를 오랫동안 일관되게 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도 북한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 보도 내용과 특별군사재판 판결문, 김정은 제1위원장의 노동당 제4차 세포비서대회 연설문 등 1차 자료에 충실히 근거해 역사적 맥락과 다양한 정보들을 추가해 이 사건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 장성택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와 관련 장성택이 2012년 12월 ‘은하 3호 장거리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의 3차 핵실험에 대해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장성택 핵실험에 반대했나?, 65쪽)

“두 전언의 내용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장수길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자금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당 행정부 간부들에 대한 내사가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한 달여 동안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아, 69쪽)

“노동당 중앙당 과장급 이상의 간부 중에서 장성택 사건과 직접 관련돼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은 국내 전문가나 언론의 예상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이른바 장성택 라인은 없다, 74쪽)


뿐만 아니라 “장성택은 누구인가”, “김정은 시대 북의 ‘경제와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장성택은 ‘내각책임제 원칙 위반’을 위반했나”, “김정은 시대 북은 어디로 가나” 등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사안들을 하나하나 짚고 있다.


장성택이 김일성 주석의 딸 김경희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승낙받은 이야기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학생간부직을 도맡고 “동서고전을 읽어 이색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한 편”이었다는 인물평, 73년 ‘70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지만 76년 평양주민 소개작업 때 비판을 받은 이야기 등은 북한에 대해 거의 무지한 우리들에게 낯설지만 흥미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김정은 시대의 ‘핵-경제 병진노선’에 대해서도 “1990년대 초반 김일성 시대에 제시된 마지막 노선을 대외적 정책의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라며 경제노선으로 ‘3대 제일주의’와 대외노선으로 요즘식 표현으로 ‘포괄적인 대외전략’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성택 사건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김정은 시대 북한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해주는 셈이다.


북한에 대한 단편적인 ‘첩보’들이 마치 사실인 양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우리 언론과 학계의 현실에서 저자의 북한 문헌 분석 작업과 최선의 정보취합 및 가공작업은 학자이자 기자인 저자만의 단연 돋보이는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장성택의 측근들이 실제로 ‘1번 동지’라는 말을 했는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불확실하다”거나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전언이다” 등 모르는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미덕까지 갖추고 있다.


북한에 대해 궁금한 이들에게, 북한의 정책과 움직임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장성택 사건이 여전히 궁금한 이들에게, 아니 김정은 시대 북한의 향방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의 일독을 권한다.


[ 2016년 1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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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박병엽 증언록 2
박병엽 지음, 유영구.정창현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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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담: 박병엽 증언록2> 2010. 11., 382쪽, 선인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를 읽으며 시작된 북한 인물 평가와 기록에 대한 관심이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 정창현 교수의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에 이어 박병엽의 증언록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기존 한국현대사 기록이나 연구에 드러나지 않았던 겜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담이 소개되어 있다. 증언록을 제공한 박병엽은 1980년초 북한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역임하던 중 월남(탈북)했고, 1998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는 1922년 전남 무안출생으로 1930년대에 가족을 따라 함경도로 이주했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평양에서 공청, 북로당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그후 조선로동당 사회부와 대남연락부 등에서 지도원, 책임지도원, 과장 등을 거쳤다. 조선로동당 3호청사의 자료실에서 일한 적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부국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했으며, 마지막 직급은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이었다. 

박병엽의 경력과 활동상황을 고려해보면, 해방 후 한반도 정국에서 남북의 주요 인사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동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그의 증언록은 1990년대 초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되었다. 통일부 전직 공위간부는 그의 ‘존재’를 확인해주었다고 하며, 이 증언록을 엮어낸 유영구와 정창현은 그의 증언 대부분을 신뢰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 책의 증언내용을 활용하고 검증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는 필자에게 지난 북한 현대사와 남북관계사 속에서 발생한 사건,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남겼다. 그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웬만한 조선로동당 문헌은 줄줄이 외고 있었다. 그 많은 당대회, 당 전원회의, 당 정치위원회 회의 등에서 이뤄진 보고와 토론내용을 빠짐 없이 기억했다. 곡절 많았던 북한의 정치사 속에서 계속된 사상투쟁과 검열 과정을 견뎌낸 결과라고 생각된다. 1990년대 초 그의 증언이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됐을 때 한 현대사 연구자는 그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증언이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사실과 상세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그의 경력과 증언이 과장됐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일부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증언에는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과 문헌을 읽어 알게 된 부분이 간혹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1980년대 초반 서울에 왔을 때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통일부 전직 고위간부로부터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부에서 나온 「북한 인명록」에도 그가 1960년대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가명이다.”(7쪽)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중앙당의 대남부분의 연락원으로 배치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은필, 최광호 등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서울에도 몇 차례 내려왔다. 1949년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중앙당 사회부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1953년 박헌영·이승엽사건'이 터지면서 대남연락부가 재편될 때 대남연락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책임지도원, 과장으로 승진했다. 한때 남조선문제연구소(현재 조국통일연구원)에서 일하기 도 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로 대외정보조사부에서 활동했다. 남조선문제연구소에 있을 때 그는 로동당 고문헌실에 있는 당 문헌과 남북관계 비밀문헌, 남쪽 출신 월북자들의 경력파일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업무상 과오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한 공장의 지배인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경험도 있다.”(9쪽)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느끼겠지만, 특히 <박헌영 트라우마>의 내용과 ‘박헌영’이라는 인물, ‘박헌영 등 간첩사건’, 그리고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큰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증언록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에 대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한국현대사나 남북관계,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당, 남로당과 북로당에 대한 내용들이 많은 부분에서 재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후 남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와 좌파라 할 수 있는 박헌영, 여운형(조선중앙일보 사장, 건국동맹 및 건국준비위원회 창립자, 조선인민당 당수, 서울에서 피살), 백남운(남조선신민당 당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북한 초대 교육상, 최고인민회의 의장), 홍명희(소설 <임꺽정> 작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월북) 등이 공산당 활동과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일제시대에 비슷한 생각과 투쟁을 해왔던 이들이 해방 후 한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자주 만나고 도모해야 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예측’을 그동안 하지 못했었다.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남한에 오래도록 집요하게 구축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기초적인 상식과 합리성마저 무디어지게 만들었던 탓이리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은 5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장의 내용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에 관해서다. 제2장은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동, 제3장은 백남운과의 비밀회동, 제4장은 홍명희 작가의 월북과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 제5장은 "박헌영. 이승엽사건"의 전말이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의 체포령에 의해 남한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을 때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여섯 차례의 비밀회동에는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 및 북조선노동당 포함) 정치위원회나 집행위원회 등과 공식적, 비공식적 회의에 참석한 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후자는 남한과 북한에 대부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비밀회동은 모두 제3자가 배석하여 이루어졌다. 제3자가 배석한 덕에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박병엽은 비밀회동의 참가당사자로서 그리고 참가당사자들이 나중에 작성한 ‘자술서’ 등을 그가 읽었기 때문에 여섯 차례의 비밀회동에 대한 증언을 남길 수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여섯 차례 비밀회동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0월 이후 그가 북한으로 월북할 때까지 이루어졌다. ‘비밀회동’이 진행된 것은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정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여러 정치세력은 한반도 전체에서 단일하고 유기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 인위적으로 38도선이 그어지고 외국군이 주둔하면서 한민족의 자치활동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주의 좌파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은 미군정이 한반도 남단에 주둔한 미군정의 반좌파, 반민족주의적 정책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한반도에는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항복 직전에 이루어진 미국, 소련, 영국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인 3국은 모스크바에서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와 조선의 문제를 한민족과 조선인 스스로에게 맡기지 않은 채 자신들이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신탁통치를 통해 자치국가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민족 스스로 해방을 달성하지 못한 것 그리고 하나의 국가로 세계대전에 참석하지 못한면서 발생한 것이다. 한민족과 조선인의 운명이 타국에게 맡겨진 불행하고 원통한 상황이었고, 21세기 한반도 분단의 원초적인 출발점인 셈이다.

명망가 중심의 우익, 우파 세력의 활동방식과 달리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은 조직적, 집단적 활동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한국독립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을 결성하였다. 각 당은 북쪽 지역에서도 지역당 조직이 존재했으나 미군정의 감시와 방해, 그리고 남북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활동의 자유나 정치적 활동에 의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특히 북쪽에서 정치적 조직적 영향력이 대폭 확장된 반면 남쪽에서는 미군정의 방해와 탄압을 받았던 조선공산당의 입장에서는 38도선이 정당활동에 치명적인 조건이었다. 북쪽에서 조선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소련군정의 지지와 지원을 받던 김일성과 조선공산당의 공식적인 당수이자 남쪽의 활동에 주력했던 박헌영이 비밀회당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비밀회동이 자주 필요했던 이유는 긴박했던 해방 직후 한반도 상황과 더불어 김일성과 박헌영은 해방 직후 정세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한 평가가 달랐고 38도선이라는 조건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 정세 인식이 다르니 정치노선과 조직노선 또한 다르게 판단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정세인식이 한국전쟁 기간까지 이어진 것이다.

 

박병엽의 증언은 두 사람이 해방 이후 5년 동안 주요 정세인식과 정치,조직노선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 미군정에 대한 평가, 미소공위의 결정에 대한 판단,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방안, 다른 민족주의 정당이나 좌파 정당에 대한 평가, 농지개혁 방안, 주요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 좌파 3당 합당 방식에 대한 전략, 미군정의 탄압에 대한 전술적 대응, 조선혁명과 통일 수행방안 등에서.

그증언은 해방 이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과 정치조직 노선이 상당 부분 부적절하고 그릇되었다고 말한다.(물론 그가 1980년대 말까지 이북 정권에서 정치적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인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 이북을 버리고 이남에 정착한 그가 일부러 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노동당)의 정세 인식과 정치조직 노선을 후호적으로 평가하려고 애썼을 것이라는 평가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저자(역자)는 박헌영과 남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정세인식과 정치조직 노신이 달랐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분단 이후 한반도 정세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또한 김일성과 조선공산당(노동당) 북조선분국이 해방 이후 이북에서 보여준 완벽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이나 정책수립이 미군정의 의혹, 즉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제공한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린다.

제5장은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전말이라는 제목으로 박헌영의 월북 이후 활동상황이 소개되어 있고,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과 ‘박헌영,이승엽 사건’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박병엽의 증언은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전개과정과 사건의 실체 등을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박헌영과 이승엽이 국가전복음모 혐의로 사형이 언도된 것과 이승엽이 해방 이전부터 간첩행위를 한 것, 박헌영의 행동 중에 간첩행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점들이 설명되어 있다.

 

이로써 완벽하지는 않지만 손석춘의 <박헌영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박헌영에 대한 공부가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추가 자료나 정보가 나오면 박헌영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소위 ‘박헌영, 이승엽 사건’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냐, 아니었냐’는 이분법적 판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박헌영과 박헌영 사건을 다룰 때 우선 견지해야 할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 보통 일반인을 보는 시각이 아니라 공산당 당원, 그중에서도 공산당 당수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점. 둘째, 일정한 평가원칙이 필요한데, 그것은 공산주의적, 혁명적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 간부의 평가원칙에 입각해 사건을 규명해야 한다는 점. 셋째, 사건을 평가할 때 역사적 과정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넷째, 역사주의적 관점, 객관적 시각에서 규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저자는 박헌영, 이승엽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특히 사건의 배경 내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서 월북 이후 박헌영의 활동을 보여 준다.

박병엽은 월북 이후 남로당의 활동을 지휘했던 박헌영이 무모하고 조급한 투쟁을 지시한 것으로 증언한다. 자기 주위에 과거의 정치경력이 깨끗하기 못한 사람들을 우대하는가 하면 독선적 행동으로 인해 이남의 다른 당 출신은 물론 남로당 출신의 일부 간부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헌영은 북로당 지도부와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남북간의 대립이 격화되던 한국전쟁 직전에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남한 내 남로당의 정치활동 수준과 조직역량에 대해 과도하게 내세우면서 혁명전쟁(한국전쟁)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로당 지도부와 박헌영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특히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당,정 고위간부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박헌영이 당 정치위원이라는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후퇴를 제대로 조직하기는 커녕 단독으로 내뺀 사실이 드러나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 일부 간부, 당원들의 국가전복행위 음모와 간첩행위는 전쟁 기간 중에 발각되었다. 박헌영, 이승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범죄사항으로 다뤄진 것은 무장폭동에 의한 국가전복음모였다.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간첩죄, 남조선혁명역량 파괴죄가 덧붙여졌다. 박헌영과 이승엽에 대한 사형언도는 무장폭동 음모가 원인이었다. 

 

“전쟁 기간 중 박헌영에 대한 의혹이 날로 커가고 있을 때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몇몇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말 이래의 김영식 배철의 다툼, 이송운의 연락부 내부상황 보고, 조옥래 윤병삼의 다툼 등 일련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로당 지도부는 박헌영과 그 측근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차제에 ‘뭔가 음모가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특히 임화, 조일명, 박승언, 이승엽 등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에 대한 사회안전성의 치밀한 감시가 시작되었다. 이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이남 출신끼리 모여 연회를 열고 당에 불평불만을 갖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왔다.”(324쪽)

“1952년 조선노동당 제5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내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적 경향, 그리고 개인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어 1953년 1월~9월, 11월~1954년 5월까지 전원회의 보고서, 결정서, 붉은편지 등 3가지 문헌을 토의하는 ‘문헌토의사업’에 들어갔다. 토의는 문헌에 기초하여 자신의 당 사업을 총화하는 것이었다. 1월 중순부터 전당적으로, 세포단위로 진행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문헌토의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헌영, 이승엽의 과거 비리와 문제점이 하나둘 폭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전에 발각된 미국의 정보원들과 이승엽, 임화 등이 관계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미국의 정보공작라인이 여럿 침투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다.”(331쪽)

“1953년 3월초 이승엽 등의 국가전복행위 음모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사회안전부장 방학세는 3월 3일 박헌영을 제외하고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보고하였고 토의가 이루어졌다. 정치위원회는 우선 임화, 조일명, 박승원, 이승엽 등을 체포하여 종합된 자료에 따라 음모를 밝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30명이 체푀된다.”(340쪽)

 

[ 김일성과 박헌영이 여섯 차례 비밀회동 상세내용 ]

 

1.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1차 비밀회동은 조선공산당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1945년 10월 10일)을 이틀 앞둔 10월 8일~9일 사이에 개성 북방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고 이남에 미군이, 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남북은 서로 판이한 정세 아래 놓이게 된다. 당시의 정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서로 달랐다. 박헌영의 ‘8월 테제’에는 38선이라는 특수한 정세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세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일치시켜 조직적 행동통일을 꾀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차 비밀회동은 김일성과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남측 핵심과 북측 핵심의 노선 차이로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비밀회당에 배석한 이들은 로마넨코 소련군 민정사령관과 김일성 측의 주영하, 장순명, 이주연, 박정애 등이었고, 박헌영 측은 권오직, 이인동, 허성택이었다. 박병엽 역시 그전까지는 1차 비밀회동에 대해 몰랐다가 이승엽 등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는 권오직과 주영하의 ‘자술서’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에서 제기된 과제로는 북조선분국 창설문제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혁명의 참모부인 조선공산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생각이자 소련군정의 생각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소련측은 일본이 공산당을 탄압했는데 같은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라 해서 큰 차이가 날 리 없다, 이남에서 공산당에게 정세의 주도권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인 당지도부 를 어디에 둘 것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다음 과제는 북조선만의 중앙기구, 즉 특수환경에서 이북만을 지도할 수 있는 북조선 지도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지도기구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운영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이 이북의 지방당 조직과 연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서북5도당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의에서 박헌영의 서울중앙을 지지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중앙의 승인을 받아야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 그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결국 김일성은 비밀리에 박헌영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예비회의에서 김일성측의 입장에 반대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10월 10일부터 열성자회의를 개최하자니 김일성은 박헌영과 사전협의라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16쪽)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의 합의에는 북조선분국 결성에 대한 문제,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에 대한 결정서를 따로 채택하는 문제, 분국 결성 뒤에 사후승인을 받는 문제, 그리고 열성자회의에서 서울 장안파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채택하는 문제 및 정세변화와 관련해 서울중앙과 북조선분국이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협의하는 문제 등이 포함되었다. 대여섯 시간 논의 끝에 새벽녘에야 합의를 보고 이들은 헤어졌다. 박헌영과 함께 참석했던 권오직과 이인동은 열성자회의의 옵서버로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올라왔다. 이것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번째 만남의 전모이다.”(24쪽)

“권오직은 ‘자술서’에서 ‘새파란 젊은이가 불같은 정열로 뿜어내는 논리에는 박헌영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했다.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 위한 협의 자리였으나 이미 이때 실제 주도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고 느꼈다’라고 썼다. 결국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중앙이 1946년 10월에 이르면 이북으로 옮겨지고 마는데 박헌영은 이러한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고 김일성과 소련군정 측은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의 시점에서 이러한 정세를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역사를 달리 가정해보는 일은 의미가 없겠지만, 박헌영이 이 무렵 정세를 제대로 파악했거나 김일성의 의견에 동조했더라면 박헌영이 뒷날 중앙을 차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 비밀회동에서 김일성과 로마넨코 소장은 공산당의 중앙을 이북에 둘 것과 박헌영이 이북에 올라와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일설에는 훗날 서울의 소련영사도 박헌영에게 이를 권유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공산당 중앙의 위치문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만남에서 의견교환에 그쳤을 뿐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22쪽)

 

2.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2차 회동은1945년 12월 29일~ 46년 1월 1일까지 박헌영이 평양의 김일성의 사택에 머무는 동안 공산당 북조선위원회 사무실과 회의실(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12월 27일에 끝난 모스크바삼상회의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조선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에서는 28~29일 반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서울의 대세에 따라 반탁 입장을 내놓았지만 서울의 소련영사관이 본국 훈령이 아직 없다며 함구하는 데다 이북에서는 신탁통치에 관한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의구심을 갖고 답답하여 평양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다. 29일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방 북조선분국 확대집행위원회가 진행되었다.

 

“박헌영의 월북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 즉 ‘조선문제에 관한 의정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남북의 좌익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정세였기 때문이었다. 남북의 공산당 세력이 기본원칙이나 방향에서 동일한 투쟁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남과 북의 형편이 달랐기 때문에 전술적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에서 공동보조가 필요했던 것이다.”(25쪽)

“회의에서 주로 논의한 것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결정 내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 지지할 뿐 아니라 그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도록 전당적·군중적으로 민주역량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제가 논의되었다.”(30쪽)

“주영하의 ‘자술서’를 보면 박헌영이 김일성과의 제2차 회동 때에는 당 중앙을 이북에 넘겨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고 씌어져 있었다. 이북에 당 중앙을 넘겨준다는 것은 김일성에게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것을 뜻한다. 어찌 보면 1946년 2월 이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이남에서도 인민위원회 정권창출, 토지개혁 실시의 구호가 등장함으로써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가 사실상 당 중앙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헌영은 이처럼 김일성과의 제2차 비밀회동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대책을 받아 가지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1일 평양에서 신년연회를 가진 뒤 평양을 떠났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1일 밤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2일 서울에 도착해 조선공산당 중앙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이 날짜로 이북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찬탁),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34쪽)

 

3.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3차 회동은 박헌영이 1946년 4월 2일 밤에 38선을 넘어 3일 오후에 평양에 도착해서 6일 오전 11시경 점심을 먹기 전에 평양을 떠나 서울로 향하기 전까지 이루어졌다. 박헌영의 3차 월북 때 동행한 사람에는 박치우와 박문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3차 김 , 박 회동을 갖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본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2주일 이내에 남북에 주둔하고 있던 미·소 군사령관이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1월 16일에 소련 대표가 이남으로 내려가 예비접촉을 가졌다. 일주일 정도의 예비접촉을 거쳐 본격적으로 예비회담을 가진 것은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였다. 이 예비회담을 마친 뒤 3월 20일부터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본회의를 개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비회담의 결정에 따라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임시정부 수립 현안으로 부상 미소공위가 순조롭게 개최되어 1호, 2호 성명이 나오고 위원회가 열린 지 채 열흘도 지나기 전인 3월 29일에 3호 성명이 나왔다. 3호 성명은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담고 있었다. 이에 따른 대책이 필요했다.”(38쪽) 

“3차 회동시기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개별적으로 밀담을 내용에는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인민당을 분열시키고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려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사주해 사회민주당을 만들도록 공작하였다. 김일성은 “사회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공작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자 박헌영도 동감을 표시했으며, 김일성이 이 사실을 폭로하여 여운형을 도와주자고 하자 박헌영도 동의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또 박헌영에게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여운형, 백남운, 김원봉, 홍명희, 김창숙, 장건상, 김성숙 등 좌파 인사들도 만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처음에는 견제 심리에서인지 꺼리는 태도를 보였던 박헌영도 결국 동의했다고 한다. 이 밀담이 계기가 되어 박헌영이 4월 6일 서울로 돌아간 지 열흘 남짓만에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 이것은 박헌영이 "여운형에게도 소련군정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김일성의 제안에 일단 동의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추진시키지 않자 김일성이 여운형의 월북을 위해 직접 사람을 파견한 결과였다. 아무튼 4월 5-6일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밀담에서는 통일전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좌익계 인사들과 접촉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중에 박헌영이 쓴 ‘자술서’를 보면 김일성이 이남 좌익계 인사들의 인적사항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되어있었다. 이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2차 회동 이후에 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에서 대남 연락실과 연구실을 두고 정보수집과 분석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연락실 성원은 7명쯤이었고 연구실은 이보다 조금 작았다. 연락실과 연구실 실무자들이 남조선신문 등을 깊이 연구한데다 김일성 자신이 사람 관련사항을 중시하니까 이남 지도자들에 대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52쪽)

 

4. 제4차 회동은 박헌영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약 보름간 평양과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당시의 월북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에 따른 대책, 조선정판사사건을 비롯한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 3당합작 문제 등에 대한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3당합당 문제가 가장 중심적인 현안이었다. 다만 완전한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3당합당 문제와 관련하여 일단 이남의 신민당과 인민당의 반응을 알아볼 필요성이 제기된 데다가 당시 이남에서 큰 수해가 났기 때문에 이북의 수재의연금을 이남의 공산당에 전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밖에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철수문제, 서울에서 일어난 화물자동차회사의 파업사태 문제 등 긴급현안이 생겨 박헌영은 일시적으로 다시 서울로 내려오게 된다 제4차 회동과 관련하여 우선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세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 4월 중순에 나온 미소공위 5호 성명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호 성명이 나온 이래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대상, 참가대상의 자격을 규정하는 문제를 놓고 숱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은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고 특정 조직을 대표해야 하며 운동 실적도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논의됐다. 최종적으로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서약을 하는 정당·단체들을 협의대상에 포함시킨다는 5호 결정이 나왔던 것이다.”(54쪽)

“김일성과 박헌영의 밀담에서 정판사사건문제, 좌우합작문제, 미군정과 경찰의 전면적인 탄압공세에 대한 대처 전술, 즉 ‘정당방위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고 들었다. 전술문제, 좌우합작문제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견해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 박헌영은 특히 최창익이나 한빈 등 신민당 측 사람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헌영은 김일성·허가이와 함께 모스크바에 갔다 온 것이다.(70쪽)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박헌영에게 서울로 가서 여운형 . 백남운 등 , 배나은 드 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그들이 협의차 이북에 오면 환영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미군정과의 투쟁은 필요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정면대결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박헌영도 파업으로 인한 미군 과의 정면충돌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수습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총비서로서 감당해야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박헌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73쪽)

 

5. 제5차 비밀회동은1946년 7월 16일경~ 22일경 박헌영이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박헌영은 허성택, 이태준, 박치우와 함께 평양에 왔다. 박헌영의 5차 월북 기간에 7월 18일과 20일쯤 두 차례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주로 3당합당 문제, 정판사사건 문제, 단독정부 수립문제, 좌우합작 문제,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합당사업과 관련하여 남북 공산당의 보다 긴밀한 협조와 연락을 위한 협의·연락기구 구성문제도 논의되었다.”(74쪽)

“남북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합당사업과 관련하여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 김일성과 박헌영 제5차 회동의 가장 큰 결실이었다. 박헌영이 서울로 돌아가 여운형과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한다는 것, 이남의 3당합당 문제에 대해 박헌영과 김일성이 긴밀히 협의해 나간다는 것, 이북의 신민당이 남조선신민당과 긴밀히 협의하도록 요청한다는 것 등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김일성이 이남의 여운형, 허헌, 백남운을 만나는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7월 중순경 서울에 있던 조선신민당 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으로 바꾸는 결성대회를 여는 것이 현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때 이미 이북의 신민당지도부와 공산당지도부 사이에는 내부적으로 합당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신민당의 한빈과 최창익이 비공개로 서울에 내려가 남조선신민당 결당을 촉진하기로 하였고, 한빈과 최창익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 가며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83쪽)

 

6. 김일성과 박헌영의 제6차 비밀회동은 1946년 10월 11일과 그 이후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6차 비밀 회동은 박헌영의 월북 권유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남의 9월 총파업과 관련하여 이북에서는 3당합당을 마친 뒤 통일된 역량으로 10월쯤에 가서 총파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10월이 되어야 농민들의 추수가 끝나고 노동자·농민들의 공동투쟁이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7월 박헌영의 평양방문 때만 해도 이북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합당을 마치고 총파업을 전개하되 노동자·농민들의 단결 아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을 진행한다는 전술이 확인됐었다. 이남에서 총파업이 예정보다 앞당겨진 것은 박헌영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남에서는 이북에서든 8월에 합당을 마치고 그 기초 위에서 농민들의 추수가 끝난 뒤에 노동자들과 연합해 투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총파업의 시기를 딱 10월로 못 박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합당 후 대투쟁을 통해 통일된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는 방침이 섰다. 파업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3당합당이 이뤄지고 또한 농민들도 총파업에 동조하는 투쟁을 전개할 만한 시기가 무르익어야 했다. 그러나 9월 총파업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 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다.”(94쪽) 

“조선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주도하자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된다. 이북 지도자들은 이남에서 합당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전되기보다는 3당 간에 갈등만 표출된 상황에 서 총파업이 일어나 합당사업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가 이남에 있다가 미군정에 체포 되기라도 하면 좌익세력의 기둥이 날아가는 판이라고 우려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연락원을 이남으로 급파해 박헌영을 이북으로 불러들이고 그가 이북에 머물면서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받은 성시백이 몇 차례 서울을 방문해 박헌영에게 이북 지도부의 뜻을 전하였다. 성시백뿐 아니라 한은필도 서울에 내려갔었다. 이렇게 박헌영을 이북으로 올라오도록 종용한 것 은 그의 신변보호 및 이남 공산당지도부의 극좌노선을 진정시킬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남 공산당지도부의 극좌노선에 박헌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헌영은 처음에 서울에서 계속 투쟁해야 한다며 월북을 거부하다가 10월 인민항쟁이 폭발하자 생각을 바꾸게 된다.(85쪽)

“이날 회의(1956년 10월 15~16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 이후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개별적인 대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려진 결론은 10월인민항쟁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말고 이를 수습한 뒤 합당사업을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박헌영이 이북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 간부들과 북로당 정치위원들의 합동회의를 소집해 구체적인 대안을 논의하자는 방침이었다. 대체로 이런 입장으로 정리된 만큼 박헌영은 합당이나 인민항쟁 문제에서 공산당 총비서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박헌영은 일단 이남에 내려갔다 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일성 측은 박헌영에게 이남에 가지는 말고 38선에서 가까운 해주쯤에서 지도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폈다.(97쪽)

 

[2016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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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김정일 - CEO Of DPRK,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그 모든 것을 밝힌다
정창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김정일을 새롭게 이해하기 <CEO of DPRK 김정일 :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정창현 , 2007. 10., 446, 중앙북스


 책은 2007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에 한창 준비하고 있을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북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정창현 교수가 노무현 정부 관계자와 독자들에게 김정일  김정일의 북한 정권에 대한 실체와 권력 수립 과정을 분석하여 내놓은 것이다. 남의 최고 지도자와 정부 관계자가 북의 최고지도자와 정부 관계자와 국가 대 국가로 협상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당연히 어설픈 정보나 편향적인 정보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분석 정보, 수십년 동안의 상대방 국가와 지도자의 권력 형성과정, 상대방의 철학과 정책과 비전을 알아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북한의 최고지도자로서 지낸 기간이 수십 년이고 북한에서는 여전히 김일성 주석과 더불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자, 지도자 인정받고 있고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은의 ‘혁명전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  김정일 집권시 북한 체제를 아는 것은 지금의 김정은 체제와 북한을 이해하는  도움이 것이다.


당시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저자 역시 단순히 방송언론의 상업주의적 가십 거리나 호기심, 정보 차원의 '무지와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국가 경영 리더십에 주목할 시점이 되었음에 주목했다. 

그의 리더십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개인 김정일'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운영하는 'CEO 김정일' 주목해야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김정이 국방위원장을 'CEO' 표현하는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 것이다. '철권통치자'에게 무슨 리더십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북에서는 어떻게 위대한 영도자 ‘CEO’ 지칭할  있느냐고 거부감을 드러낼 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정보 차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접근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할 때가 됐다고 본다. 또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 변호하는 북한 사회를 읽는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방송이나 언론이 북한과 북한 지도자에 대해 일관되게 폄하하고 편향적으로 기사화하지만, 국내외 일부 전문가들은 남북 협상이나 북미 협상, 북일 협상이나 6 회담 테이블에서 북한은 항상 주도권 아닌 주도권을 갖고 간다고 평가한다. 북한은 협상 일정을 뒤바꾸기는 예사이고, 어젠다를 한순간에 바꾸기도 한다. 아예 협상 자체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북한으로 하여금 이러한 파워 지니게 할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북한의 국력은 대한민국과, 미국과, 일본과, 그리고 6 회담 당사국들과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데도, 북한이 이처럼 항상 협상의 주도  쥐게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김정일 시대의 북한은 현재처럼 핵무기나 장거리미사일도 개발하기 전이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근대 이후 대를 이어 권력을 이어받은 마지막 후계자라는 비판을 뒤로 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 지도자로 자리 잡을  있었던 전략, 10 넘게 붕괴한다 외교가의 분석을 무색케 하며 김정일 체제로 완전히 정착할  있었던 전략, 전방위로 압박해오던 미국과 일본을 핵실험 하나로 관계 정상화로 돌아서게 하는 전략의 요체는무엇일까? 

2000 1 남북 정상 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서방  평가는 크게 왜곡됐다 토로했다. 방북   전부터 각종자료와 정보를 섭렵하며, 정상 회담을 준비해온 김대중  대통령조차 이러한 평가를  정도면 일반 시민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2000 10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회담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도 2003 출간한 회고록(<마담 세크레터리, The Mighty & The Almighty>에서  위원장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 지적인 인물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를 확인할  있었다. 그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미몽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경제의 계획을 얘기할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그는 회담에 대비한 준비를 아주  했다고 느꼈다. 그는 똑똑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고 북한의 노동당, 군대, 정부, 대남사업을 장악해가는 과정이다. 

김정일의 초기 성장은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특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닐 때, 그는 대학 당 위원회 소속이면서도 노동당 중앙의 주요 회의를 방청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그 과정에서 당시 북한의 사상투쟁을 대학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엄청난 특혜와 특별 학습을 통해 김정일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후계자로 육성되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대학 졸업 후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배속되었다.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는 핵심 중의 핵심부서라 한다. 그가 중앙당에 배속된 직후인 1967년 북한에서 ‘갑산파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김영주의 주도 하에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비판과 숙청이 이어졌다.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가 중앙당 전원회의를 조직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 숙청과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김정일은 1968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옮겼다. 선전선동부는 조직지도부와 함께 노동당의 핵심 부서라 한다. 그 직후 북한 군부에서는 김영주의 후계 추진에 반발한 ‘김창봉, 허봉학 사건’이 일어났고, 노동당은 군 전반에 대한 검열을 진행했다. 김정일은 이 사건과 관련해 인민군 당 전원회의 일정을 준비하고 보고서 작성, 토론 준비, 결정서, 문건 작성을 직접 준비했다. 또한 예술분야에 깊이 관여하며 영화예술론을 서술했고, 북한에서 강력한 선전 수단이던 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빨치산 원로들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을 맡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노동당, 군대, 행정기관, 대남사업기관에 대한 지도검열을 강화하면서 1970년대 중반까지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김정일 후계 문제는 1970년 처음 빨치산 원로 세대인 김일, 최용건, 건최현 등이 제안했지만 김일성이 보류했다. 이어 1971년 하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2차 전원회의 직후 개최된 당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두 번째로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병환으로 조직비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김영주가 김정일을 노동당 조직,사상비서 자리에 앉히자는, 후계자로 선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김영주의 제안은 빨치산파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김일성이 “조금만 더 두고보자”며 다시 보류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자 또는 당 비서로 선출하자는 빨치산 원로들의 제안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의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김일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김정일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였다.

결국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하부에서 올라온 결의서에 기초하여 김정일을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빨치산 1세대의 내부 논의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회의는 김정일에게 당 정치위원회 위원 자리를 주는 동시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안겨주었다. 김정일은 이미 조직지도 비서와 부장, 선전선동 비서와 부장을 포함한 1인 5역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한 언론은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  했다. 당시 김정일은 만 33세였다. 

그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났던 시기는 후계자가 된 지 2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났던 김정일에 대해 술회하고 평가한 내용들은 가식이나 허풍이 아니었던 셈이다.


저자는 김정일 위원장을 항상 파격 행보라고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 행보 받아들여야 하며, ‘두려운 전략가 아니라 예측가능한 CEO’ 면모에 주목해야 7  남북정상 회담의 충격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교수는 이와 관련 김정일의 외교 형태에 대해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벼랑  전술이라고 규정해 왔다, 그러나 김정일의 외교술은 6 회담에서  드러나듯이 단순히 막무가내 버티기 아니라 결단의 타이밍을 중시한다 말한다. 특히 적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유리한 결단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마지막까지 준비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위원장이 자신에게 보고되는 최종 문건이 나올 때까지 실무 부서와 관련 부서들 간의 끝장 토론 거치도록 하며, 그래서 최종 입장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했다.그렇지만 일단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위원장의 결단이 내려지면 일사불란하게 집행되는데,  위원장의 결단과 추진력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인다. 


 책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리더십을 읽을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증언과 자료가 담겨 있다.  중에서도 조선노동당의 고위인사를 지내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신경완 씨의 증언이 뼈대를 이룬다. 신경완은 1998 사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신분 노출을 우려해 일부 증언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모양이다.  월간지 기자가 그의 실명을 거론하자 여러 북한 연구자들도 그의 실명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책에서는 그가 의도적으로 다르게 구술했던 내용을 바로잡고, 저자가 잘못 기술했던 사실들을 바로 잡았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 회담 녹취록, 방북 언론사사장단과의 대화록,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구 전권대사와의 대화록을 실어  위원장의 정치관, 외교관, 통일관, 경제관, 문화관 등을 엿보게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2 남북 정상 회담 365 막전막후 이야기도 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김정일 위원장의 족적을 세밀하게 추적했으며, 기쁨조 등에 대한 오해와 진실도 실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 2016년 10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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