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3억엔을 준비해라. 안 그러면..."

 

  다이호대학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해고당한 직원이 앙심을 품고, 비밀리에 실험중이던 K-55를 훔쳐 협박장을 보냅니다. 연구소에서 소장과 주임연구원은 조금 깎아달라고 할까 하는 중인데, 범인이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제 문제 낸 사람이 없어졌으니,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상황을 맞은 셈입니다.

 

  단서는 테디베어가 나무에 걸린 눈 덮힌 산을 찍은 사진 한 장. 그런데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문제의 K-55는 그냥 놔둘 수 없는, 탄저균의 유전자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생물학적 병기입니다.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만,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아들이 스키를 좋아했었지, 혹시... 스키를 좋아하는 아들이 알아낼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펑 하고 불이 붙자, 그 즉시 새로운 박테리아를 찾으러 간다며 아들을 데리고 문제의 스키장으로 떠납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급하고, 뭐 하나 잘 되는 게 없습니다.

 

  스키장에 갔으니 바로 찾아낼 것처럼 재촉하는 연구소장, 막상 가보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어 찾아 헤매는 주임 연구원, K-55의 비밀은 이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새어나갑니다. 갑자기 나타나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은 늘 그렇듯 조금씩 수상해보이고, 그래서 진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도 다 말해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큰 일이 터졌는데, 해결해줄 사람이 나서지 않는다는 것. 속이 시꺼멓게 타는데도 어디가서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답답합니다. 네, 여기엔 명탐정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천재적인 두뇌로 사건을 파악해내어 우리에게 설명해줄 사람도 없고,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정신 좀 차리라면서 다음 과제를 넘기는 범인도 없습니다. 그런 반면 연구원, 스키장 직원, 스키타러 온 사람들이라는 평범한 시민들이 문제를 찾고 해결해야 하는, 감당하기 어려울만한 과제가 떨어진 셈입니다.

 

  발신기를 들고 테디베어를 정신없이 찾지만, 사실 테디베어를 찾는 것은 보물을 찾기 위해서이지, 테디베어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건 마치, 포장지에 표시해두었으니까 그 표시를 찾으라는 거지, 내용물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소리는 아닌 거죠. 기가막힌 추리와 명탐정의 설명이라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포장지의 표시와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의 우리는 거의 대부분 갑자기 닥친 사고에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특별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누구 말처럼 그냥 놔두면 안될까, 하고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요.

 

  한 사람의 슈퍼 히어로가 악당과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것으로도 해낼 수 있다면! 하나 하나는 보잘것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아는 것을 모아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단서만으로도 조금씩 퍼즐이 맞춰집니다.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어느 순간엔 목숨도 걸 듯이 불의와 싸우는 모습까지 더해집니다. 첫번째 악당의 하차 후 두번째 세번째 악당이 나타나긴 하는데 그럴 수록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악당과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이 비교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면 마음이 회복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또한 그 어려움을 내가 겪는 동안, 오직 나만 그런 일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일까요. 인플루엔자로 아이를 잃은 엄마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하는 작가의 메세지가 와 닿습니다.

 

... 유키, 이것만은 알아주렴, 자신이 불행하다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길 바라는 건 인간으로서 실격이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마저 행복해지길 바라야 해. 그러면 분명 그 행복이 넘쳐흘러 우리에게도 돌아올 테니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불행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들도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힘껏 행복을 만들어서 그 가엾은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돌아가도록 애쓰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건 믿어주면 좋겠구나. " (페이지 350)

 

  초반에는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스키나 스노보드에 관해 잘 알지 못해서 계속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읽어갈 수록 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사이로 들어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서로 속고 속이는 트릭이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신했던 일들이 계속 어긋나는 것을 보면서 참 마음대로 안 되는 건, 현실이나 소설이나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구요. 그러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키장의 제다이가 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치아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이 그나마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 하루 감당하기 힘들 때도 많이 만나지만, 그래도 잘 버틸 수 있는 올해를 보낼 수 있기를. 지금은 다들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기운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