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운명을 믿습니까? 하고 묻는 것과 당신은 정해진 운명을 믿습니까? 하고 묻는 건 약간 다른 말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참 궁금하다. 그래서 큰 돈내고 점이나 사주를 본다거나, 아니면 재미삼아 본다는 말을 해가면서 카드를 보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돈이 안드는 인터넷이나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보기도 한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바꿀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좋은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전혀 좋지 못한 것도 올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미 오지 않은 것을 두고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건 듣는 것만으로도 가혹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 말 들었으니, 피해가면 되잖아."

 

 그런데, 피해 가면 참 다행이겠고 좋은 일이겠으나,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할 거다. 그 점이나 운세를 봐 준 사람을 돌팔이라고 욕을 해가면서 기분이 좋지 못함을 말하거나 생각하게 되겠지. 굳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나쁘게 말해서 심장 쫄깃해지는 느낌을 선사하고 금전적인 이득을 얻었다는 말을 가감없는 솔직한 언어로 표현해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미래를 예언한다면, 그건 피할 수 없는 미래라면, 그런 건 어떻게 될까?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을 검은 용을 예언하는 자는 확실한 예언을 할 수 있는 예언자의 수장 페라트이다. 이들 페라모어의 예언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세상은 불안과 공포로 술렁인다. 정확한 예언은 피해갈 수 없다, 그러기에 그 예언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예언을 이루기 위해 순응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의 예언이란 그 모든 것의 결과의 위치에 있을 뿐, 그  과정까지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미력함을 느끼게 하는 예언의 존재는 그래서 감당하기 힘들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작품이 있는 권교정님의 환타지를 소재로 한 만화, <청년 데트의 모험> 앞부분 <페라모어 이야기>이다. 청년데트의 모험의 프롤로그 격이 되는데,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을 약간씩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예언이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그들 페라모어들은 예언의 신빙성이라거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닌 또다른 누군가는 예언에 대해 강렬하게 반발하고 저항하면서 그 예언이 틀림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순응과 저항이라는 일치되지 않는 입장과 태도를 예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만을 간략하게 말한다. 결국 예언이라 불리는 그것이란, 때로 강렬하게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부제는 일과 인생이 술술 풀리는 자기암시법, 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실패로 이어지고, 이 실패는 다시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암시를 통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으로 슬럼프를 이겨내거나 좋은 성과를 얻은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반드시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여기 소개된 사례의 사람들은 노력을 열심히 하지만 방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던 사람일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자신감이 결여되었거나, 또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내용이 읽는 사람에게도 희망적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노력없이 긍정적일 수는 없고, 본래부터 할 수 있었던 것을 약간의 도움을 통해 바꾼 것이라면 역시 자기 몫의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긍정적인 방향이 중요하다는 거지, 그저 긍정만이 살길이다, 라고는 적어도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성과를 거둔 사람들의 예시를 보면서 기운을 얻고 다시 도전해보는 건 좋은 일이 될 듯 하다. 당신이 의기소침하여 있을 때, 누군가 당신의 미래에 비전을 밝고 건강하게 제시한다면 그래도 남은 힘을 전부 털어넣어 한 걸음이라도 더 갈 수 있지 않겠나.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내 미래 참 궁금하다. 잘 될 것 같았지만 살다보면 잘 안되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고 보면, 잘 안풀릴때는 언제쯤이면 나도 잘 될 것인지 정말 궁금해진다. 그런데, 우리 미래를 누가 그렇게 잘 알겠나. 날 처음 본 사람이? 아니면 날 매일 본 가족이? 아니면 거울에 비치는 내가? 사실 아무도 모르는 게 정답 아닐까? 늘 비슷하게 찾아와서 물어보는 사람을 많이 본 사람은 경험치로 비슷해보이는 내 입장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더라는 경험치가 있을테니까. 그리고 내 가족? 어느면에서는 잘 아니까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가족이다보면 객관적으로 말하기를 기대하기는 역시 어렵다. 나? 나 역시도 나를 입체적으로 보고 판단내리기는 어렵다. 하물며 객관적이기는 정말 쉽지 않다. 나 스스로 객관적이라 말할 뿐일 수도 있는 그런 사이 아닌가. 그렇다면 친구? 친구도 역시 잘 모를 수도 있고, 또는 잘 알더라도 말해주지 않을 수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서. 그 이유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니, 그건 상황과 개인차가 있을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미래를 알고 싶은 우리가 원하는 건, 부담없이 들을 수 있을만한 좋고 밝은 미래다. 내일이 오늘의 아픔을 씻어줄 거라고 믿고 싶은 거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더라도 미래라는 것을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이고 보면, 그런 면을 바란다는 점에서의 우리는 자기최면이든 뭐든 간에, 좋고 행복한 것을 희구하는 자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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