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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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소득수준으로 나눠보면 절대 빈곤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거의 모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지리적 위치 때문일까? 문화적 요인 때문일까? 아니면 빈곤한 나라의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렇게 일차원적인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 실수와 무지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어떨까.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밤과 칠흑 같은 북한의 밤을 보라. 북한의 평균 생활수준은 남한의 10분의 1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들의 수명까지 이쪽보다 10년가량 짧다는 점이다. 이러한 극명한 격차는 20세기 중엽의 경제 운용 방식 차이에서 벌어졌다. 북한 주민의 사유재산은 불법화되었고 시장 역시 금지됐다. 그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자유를 제한받은 것이다. 사유재산이 없다는 것은 투자하거나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현상 유지를 해야 할 인센티브를 느끼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p.116) 남북한이 왜 이토록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는지를 문화적 요인, 지리적 요인, 혹은 무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있다. 1980년부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짐바브웨를 철권으로 다스려왔으며 자신과 장관의 월급을 200퍼센트로 인상한 바 있는 무가베 대통령이, 정부가 일부 지분을 보유한 짐바브웨 뱅킹 코퍼레이션(짐뱅크, Zimbank)이 과거 한 달 동안 5,000짐바브웨달러 이상의 잔고를 유지한 고객을 대상으로 연 복권 추첨 행사에서 10만 짐바브웨달러에 당첨된 일화는 그가 마음대로 복권까지 당첨될 수 있다는 것과 짐바브웨를 함부로 좌지우지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의 착취적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세계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일부 사회가 왜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짜여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나라는 무지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 때문에 잘못된다.

ㅡ 본문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를 볼까.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주장 말이다. 그는 좌파를 축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좌파의 손에 축출되기도 했었지만 훗날 농업에 손을 대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물론 정치제도를 비롯한 사회전반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기존의 틀을 깬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그 분기점은 바로 마오쩌둥의 사망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를 둘러보면 생활수준의 엄청난 격차를 목격할 수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착취적 정치 · 경제 제도와 포용적 제도의 차이, 그런 차이가 왜 일부 지역에서만 태동하는가에 대해 다각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착취적 정치 · 경제 제도가 경제성장과 늘 어긋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도하의 성장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지속되지 못한다. ①지속적 성장은 혁신이 있어야 하는데 혁신은 반드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한다.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어쩔 수 없이 단기에 그치고 만다. ②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이들이 사회 전체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착취적 제도하의 정치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아져 수많은 집단과 개인이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착취적 제도하의 사회에는 정치 불안을 초래할 만한 강력한 요인이 많아진다.(p.608) 한편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의 태동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베네수엘라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우고 차베스와 같은 독재 성향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도 그런 지도자만이 기성 엘리트층에 맞설 수 있다고 믿는 탓은 아닐까. 어쨌거나 가난한 사회가 부유해지려면 뭔가 근본적인 정치적 환골탈태가 필요한 법이다. 텍스트는 성공적인 정치 변혁을 향한 이양 과정이 전개되는 바로 그 시기와 이유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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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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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을 적에 도쿄 역에 있는 초밥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 거기에 야스다(安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깨진 유리잔에 손을 다쳤을 때 「뭐! 세 바늘이나 꿰맸다고!」 라며 우울한 얼굴로 걱정을 해주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천성이 착했으며 약간 어눌한 기운도 있었다. 『점과 선』에서의 야스다는 정반대다. 이쪽은 철두철미한데 내가 아는 야스다 씨는 일일결산을 볼 때 계산을 틀리기도 하는, 말하자면 영락없는 사오십 대의 사람 좋은 아저씨였다. 도쿄 역 야에스(八重洲) 북쪽 출구께 있는 누마즈 우오가시즈시(沼津魚がし寿司)에 가면 야스다 씨를 만날 수 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여간에 『점과 선』의 야스다는 그야말로 '시간의 천재'로 등장한다는 것. 하루 중 단 4분의 틈을 찾아낸 기막힌 우연은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이 양반은 소설 첫머리부터 등장하는데, 이때부터 그에게서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독자들도 느끼게 된다(거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읽는 쪽은 그렇다 쳐도, 도리카이와 미하라라는 두 형사의 분투는 정말이지 끈질기기 짝이 없다. 끊임없이 열차가 드나드는 번잡한 도쿄 역 ㅡ 하루 종일 북새통인 13 · 14 · 15번 플랫폼을 무대로, 어떻게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열차가 보이는지 그 4분간의 매직을 밝혀내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라. 뭐, 하긴 미하라는 좀 '안락의자 탐정'처럼 보일만도 했지만 말이다. 긴자의 단골찻집과 노면전차에서 비로소 머리가 번뜩이는 이 사람은 참 한가한 형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을 정도다 ㅡ 내가 뜨악한 것은, 위키피디아에서 '점과 선(点と線)'을 검색해보면 심지어 미하라에 대한 설명으로 '긴자에 있는 단골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취미'라는 결과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점과 선』에 등장하는 특급열차 '아사카제'다. 15번 플랫폼에 들어오는 이 아사카제 ㅡ 두 남녀가 밀월이라도 떠나려는 듯이 열차에 오르는 모습 ㅡ 를 13번 플랫폼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둘은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도리카이 형사가 식당 칸에서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영수증에 '1인'이라고 써진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발상은 좋았다. 이야기는 도리카이에서 미하라로 그 추리 영역이 옮아가는데(둘은 협력관계) 그게 좀 어설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어설픈 줄거리가 볼만 하다. 미하라 ㅡ 그의 추리과정 ㅡ 는 너무 야스다에 집착한 나머지, 꼭 하나씩 빼먹고서 나중에야 '아차, 그게 있었지' 하며 뒤늦게 느려터진 제 머리를 때린다. 이것은 도리카이가 지적한 '인간이 빠지게 되는 맹점'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경찰이라는 이미지를 당시의 시대상과 묶어 보여줌으로써 배가된다. 사족을 좀 붙인다면 『점과 선』을 썼을 당시의 작가와 도리카이라는 인물의 나이는 얼추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러 이런 설정을 통해 그보다 다소 젊은 미하라와의 대비를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미하라가 한 발씩 늦는 것은 완전히 이해 못할 것도 아닌 듯싶다. 그가 수사 공조를 위해 타 지역 수사국에 보낸 전보의 회신만 해도 다음 날 돌아올 정도였으니까. 또 소설에는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나오질 않는다. 소설이 연재됐을 당시를 살펴보건대 아마도 군수 물자나 도쿄올림픽에 관련된 사안은 아니었을까 하고 추(억)측해볼 뿐이다. 아, 이 소설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해답편' 내지는 '해설편'이 나중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이게 편지라는 액자를 통해 밝혀진다는 점이다. 도리카이 형사와 미하라 형사가 주고받는 두 통의 우정 어린 편지로 말이다.





『점과 선』은 TV아사히 개국 50주년을 기념해서 2007년에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2부작인데 러닝타임이 4시간 정도 된다. 영상은 서로 나이가 들어버린 도리카이 형사의 딸과 미하라 형사의 재회로 시작되며, 약간 어설픈 감이 있어서 소설로 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비토 다케시 ㅡ 기타노 다케시, 도리카이 형사로 분(扮) ㅡ 특유의 '눈 찡긋거림'이 살아있고(허허……), 시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를 묻는 미하라의 질문에 「살고 싶다」고 대답하는 벙거지 모자를 쓴 이 노형사의 중얼거림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영상물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세이초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데, 희한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약간 의문이 드는 구석이 몇 있다. 의문이든 억측이든 일단 찔러보겠다. 여기서부터는 책을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ㅡ ①역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는 보통 대합실에 있지 않나? 그런데 '역 플랫폼이 아니라 대합실로 마중을 나오라고 한 까닭'에 대해 미하라가 생각하는 이유가 나옴으로써 문제는 그의 추리가 아니라 세이초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②초반부에 야스다가 레스토랑에서 나와 도쿄 역까지 5분 만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설명하며 5시 35분에 레스토랑에서 출발했더니 도쿄 역에는 6시 조금 전에 도달했다는 부분. ③당시를 생각해볼 때 가시이 역(어디라도) 앞의 과일 가게가 밤 11시까지 영업했다는 것도 약간 미심쩍다. 자, 이것들을 상쇄할만한 크나큰 충격이 있을는지? 어쨌거나 나는 범죄의 완성도나 틈 없이 몰아가는 일련의 추리 과정이 매력적인 이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철도(망)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다.



각설하고, 시간을 해결했더니 사망 장소가 달라지고, 사망 장소를 해결하려니 시간상 범인의 알리바이가 완벽해지는 이 두 번 세 번 꼬아지는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조차도 '4분간의 트릭'을 깨려고 책과는 별도로 아예 시간표를 따로 만들어볼 정도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점과 선』이 어떻게 사회파 소설일 수 있는가 하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트릭 외의 이야기가 있으니 어떻게 봐도 좋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트릭에 더 비중이 있다 보니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오히려 여기서의 것이 '알리바이 깨뜨리기'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왜 살인이 일어났는지를, 살인 계획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왔는지를, 모든 것이 해결된 후 괴상한 현실의 양태를 봐야 할 것이다 ㅡ 그리고 맙소사, 나는 범인조차 동정해버리고 만다……. 음, 세이초 얘기를 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멘트도 이제는 식상하군) 중의 하나는 발군의 '제목 짓기'이다. 『点과 線』은, 악마의 시간이 무너져 떨어져 있는 두 개의 点이 비로소 線으로 이어지려는 찰나 또 다른 点이 발견되고 먼저 존재했던 다른 線과 맞닿아 새로운 線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우라질!). 부추기는 건 아니지만 혹 이런 식의 범죄를 기획하고 있다면 하지 않는 게 좋다. 머리가 아플 테니까. 내가 알기로 도리카이 · 미하라 콤비는 '점과 선 2탄' 격인 『시간의 습속(時間の習俗)』에서 재등장한다던데, 이 『점과 선』이 소세키의 '선생님의 유서'(나쓰메 소세키, 『마음』)의 형태인 것에 비해 또 얼마나 멋진 소설일까를 기대하게 한다.



덧) 일본 문예춘추사의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을 본떠, 2012년 한국어판 『점과 선』에도 삽화와 열차 운행표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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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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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산(産) 우울록의 정점을 찍은 오아시스 曰, 「지난 일은 후회하지 마(don't look back in anger).」 ㅡ 노엘 갤러거가 최악의 작사가에 이름을 올렸건 말건 간에 일단은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을 테지만, 어디 삶이 그러한가. 만약 온 지구인이 후회 없는 삶을 착실히 살아가고 있다한들 또 어딘가의 철학자들이 그럴듯한 구실을 들어 우리로 하여금 시험대에 오르게 했을 것이다. 『숲』은 첫 문장이 아주 가관이다. 「삽을 든 아버지가 보인다.」 그렇지, 작가가 할런 코벤이고 장르가 스릴러라면, 과거의 진실이 될 만한 뭔가를 묻거나 파헤치고 있는 중일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미 죽였거나. 삽을 든 아버지가 보인다, 라. 그저 어떤 남자 하나가 삽을 들고 서있을 뿐이다. 이 문장 하나로는 어떠한 두려움이나 음습함도 표현해내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는 날이 맑은 어떤 날 정원을 가꾸기 위해 양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리는 중일지도 모르며, 혹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을 갖다드리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가는 주인공의 시선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야기를 아우르는 단어가 '숲'이라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라. 숲에서 삽을 쓸 이유가 대체 얼마나 있을지를. ……일단, 시작은 여름 캠프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처럼은 안 보이는 흉측한 살인마나 오로지 금요일에만 활동하는 제이슨이 나타나서, 우리가 공포물을 보는 이유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왕가슴 언니들 혹은 친구들 중 가장 까불대는 녀석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버릴 것만 같은 할리우드의 캠프. 어느 정도 예상했듯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여동생을 포함한 네 명의 아이들이 사라진다. 단, 두 명은 시신으로 발견되지만 나머지 둘은 어디에도 없었다. 20년 후 그들 중 하나가 성인이 되어 나타나기 전까지는. 게다가 『숲』에는 이것과는 별도로 흥미진진한 법정 드라마까지 마련되어있는데 분명히 재미있다고만 느끼기에는 주인공이 받는 협박의 강약이 짜증날 정도로 심각하다. 협박의 당사자는 주인공인 검사의 반대편인 피고의 아버지이다(맙소사, 또다시 '아버지'로의 회귀군). 그는 사건이 종결되어갈 때 주인공에게 말한다. 「난 당신 아이를 노리고 달려든 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당신 과거만 파헤쳤을 뿐입니다. 당신 동서도 흔들어봤지만 당신 아이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선만큼은 확실히 지켰단 말입니다.」 어쩐지 이 말에서 묘한 기시감 같은 것이 든다. 리암 니슨의 돌주먹을 볼 수 있는 무지막지한 영화 《테이큰》에서 여자들을 납치해 팔아버리는 파트리스 상 클레어 역시 납치된 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개인감정은 없다고, 그건 다만 사업일 뿐이라고. 그리고 아버지는 맞받아쳤다. 「내겐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야.」 이 소설에서 주인공 검사 폴 코플랜드는 그 피고의 아버지에게 뭐라고 응수했을까? 「성인군자이시군요.」




스릴러다. 확실히 그렇다. 주인공 코플랜드 검사의 여동생은 차치하더라도 그녀와 함께 사라졌던 길 페레즈는 실종된 지 20년 만에 나타나자마자 죽어버렸다. 코플랜드는 외모와 숨길 수 없는 흉터로 길 페레즈를 확신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페레즈의 부모는 시체공시소에서 아들의 시신을 보고는 자신들의 자식임을 부정한다. 20년의 시간을 감안한다손 해도 오히려 진실을 덮으려는 이 가족, 뭔가 미심쩍다. 게다가 코플랜드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밀, 이와 맞물리며 동시에 진행되는 법정 공방, 20년 전 숲에서의 계획과 거짓말,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는 수감자, 캠프장 주인이었으며 과거 여자 친구 루시의 아버지까지, 다종다양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건들이 즐비하다 ㅡ 물론 발단은 단 하나의 거짓말에서 비롯되지만. 읽다 보면 코플랜드의 아버지의 전력(前歷)에 대한 부분이 좀 핀트가 어긋나 보여 꼬투리를 잡으려면 무리도 아니겠으나 이것마저도 어느 정도(백 퍼센트라고는 못하겠다) 그럴듯하게 반죽되어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도무지 스릴러의 냄새가 나질 않는다는 거다. 조여 오는 느낌이 없었는데도 읽는 속도를 늦출 수 없는 건, 스릴러가 아닌 스릴러라는 건가 아니면 이게 '코벤 스타일' 스릴러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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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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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厭魅): ①가위 누르는 귀신. ②짚으로 만든 인형(제웅)을 매개로 삼는 주술의 일종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병에 걸리게 하려고 귀신에게 빌거나 방술을 쓰는 행위.



민속학습서쯤 되려나. 이미 '도조 겐야 시리즈'가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 번역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이 시리즈의 첫 작품이긴 하지만 시간상 나중에 국내 출간됨으로써 그렇게 느껴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거듭되는 작품에서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부분을 줄여나간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호러와 미스터리는 대립항처럼 보이기도 하고 융합의 접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은 후자의 매력을 양껏 포함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다른 작품들은 『염매...』에 비해 다소 긴박감이 잘 드러나 있으므로. 소설은 마을의 이름과 유래부터 신앙까지, 독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발을 들이게끔 하는데 당연히 이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배경지식이 쌓임으로써 우리는 일본어로 '기리(霧)'를 음독하면 '무'인데 몸을 나타내는 '미'의 고어는 '무'이므로 이름에 항상 '霧'가 들어가는 것은 산신(山神)에게 몸을 빌려준다는 의미로 작가가 이런 이름을…… 라는 것까지 연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ㅡ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용은 (내가 보기에)어디까지나 미스터리인데 호러의 색이 짙다. 호러나 미스터리나 그게 그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으나 '민속학습서'라고 한 데에서 느낄 수 있듯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게다가 역시 시리즈의 첫 작품이니만큼 그 독특함이랄까, 투박함이랄까 하는 것들이 어색하면서도 그것만의 매력으로 읽힌다.







처음부터 생각해보지도 않고 괴이를 받아들이는 건 인간으로서 한심한 일이야.

그렇다고 인지를 뛰어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건 인간으로서 오만한 거고.


ㅡ 본문 p.266




분명 호러의 느낌이 강하다보니 추리소설로서의 의미나 필연성이 옅어진다는 감상 또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것'이다(교고쿠 나쓰히코의 특정 시리즈가 그만의 매력을 지닌 것과 같이).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약이 여기서도 등장한다는 건 무녀의 위엄과 마을의 존속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운명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을까? 인습타파를 주장하는 인물이 적어도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 저들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반론이 아니었을까? 그런 와중에 근친상간이나 혼외정사라는 엮임이 있다면 또 얼마나 복잡한 관계와 갈등이 빚어질까(이게 주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의문들을 품고 있으면, 막연하게 중첩되던 농무를 조금은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둑어둑한 무신당 안에서 삿갓에 도롱이 차림으로 목을 매고 입안에 빗을 문 수험자의 시체를 미치광이 여자가 즐겁게 흔들고 있다…… 이런 광경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괴사부터 역시 같은 차림새로 손에 자신의 목을 딴 낫을 들고 펼쳐진 부채를 입에 물고 죽어있는 시체까지, 편벽한 마을의 특성과 작가가 주물거린 민속학적 이야기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반부까지 어리둥절했다가도 끝에 가서는 불만이 없어지는 ㅡ 다시 말해 무턱대고 복잡하게만 써서 독자에게 반칙을 가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잘 따라간 자에게는 느껴질 것이다.



덧) 지금까지 번역된 작품들의 표지를 보면 검은색 일색이었는데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은 하얀 바탕이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패턴을 사용하려는 건가, 하는 억측을 잠시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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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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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을 누면서 물을 마셔본 적이 있는지…….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나도 (아직) 해보지 않았다. 오줌이 나올 때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이 책도 인정하고 있다. 너무도 황당한 느낌일 거라는 걸. 나는 이걸 실행에 옮기지 않았지만 몇 초 만에 아주 기이한 현실과 조우하리라는 예상을 한다. 「당신의 몸은 안이 훤히 보이는 것 같고, 물이 안과 밖을 부드럽게 순환하는 것 같다. 우주의 흐름 같기도 하고, 전자동 세탁기 같기도 하다.」(p.57) 왜 이런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저자의 말대로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하는 정신적 혼란을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서? 한 가지만은 자명하다. 이 책에 나온 대로만 하면, A라고 인식했던 것과의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정말로 누구도 너무나 이상하고 너무나 그럴듯하지 않은 생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런 생각은 이런저런 철학자들이 이미 다 했나?(데카르트) 글쎄,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대체 누가 오줌을 싸대면서 물을 마신단 말이야!



철학에 대해 ㅡ 누구는 아무런 체계를 갖지 않은 채로 체계적인 정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한 방식이라 했고, 누구는 우리가 아직 적절하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탐구라 했으며, 또 누구는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 했고, 또 다른 누구는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 전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철학은 생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거라고. 이런 얘기를 하자면 '이 나라의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시국이 어쩌고저쩌고'까지 가므로 과감하게 버린다. 철학의 이미지는 어렵고 난해하다는 것이 지배적인데 이것은 편견에서 사실로 변했다. 현대(현재)를 보면 철학이 그렇게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니까. 하여간에 철학은 행동하는 거다. 행동해야 비로소 '느끼고 인식한다.'



보편적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야말로 철학은 때로 용이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개개인의 철학자들이 중요하고 우리 각자의 인식이 중요해진다. 새로운 시선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에 나온 것들 중에 나에게 가장 어려운 ㅡ 뭐 이것만 어렵겠냐마는 ㅡ 것은 '손목시계 벗어 던지기'다. 밖에 나갈 때 손목시계를 차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렇다고 3분에 한 번씩 시계를 들여다봐야 불안한 마음이 억제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뭔가 찜찜하다. 내가 원할 때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갑갑한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시계는 보기조차 어렵다. LED의 점멸보다 바늘이 움직이는 쪽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디지털시계를 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내가 만약 시계를 버리고 휑한 손목으로 외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기증이 날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긴장상태에 놓여있을지도 모르고. '숫자판과 시곗바늘이 행사하는 구속과 폭력'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주안점인데, 나는 이것만은 해보지 않을 작정이다. 오줌을 누면서 물을 마시는 것 정도는 한번쯤 시도해볼 수 있어도(이게 더 이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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