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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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는 어떤 남자는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으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고 했다.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란 제목의 이 곡은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칠레 민중의 저항 가요로 널리 불린 노래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발음하기도 힘든 노래 제목을 들은 이후, 나는 줄곧 이 곡을 mp3플레이어에 넣어서 듣곤 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새로이 읽으니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인텔리겐치아나 혁명 따위의 단어를 늘어놓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실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 칠레 민중의 노래가 반증하고 있으므로. 더군다나 여기에 시종일관 간섭하는 것이 바로 '송어(낚시)'의 정체와 의미인 것인데, 어쩌면 이탈로 칼비노가 만들어낸 크프우프크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문장 하나하나도 올무 같다. 브라우티건도 이에 대해 밝힌 것이 있다. 「내 소설 속에서 송어는 사람으로, 장소로, 때로는 펜으로 변하는 등 일정한 모양이 없는 프로테우스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일 수도 있다.」 칼비노의 그것이 시각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것처럼 브라우티건의 송어 또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엇'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누구나의 문제다. 내 정체를 추적하려고 열어 본 마트료시카가, 알고 보니 와해되어만 가는 통발 속의 외눈박이였다든지 하는, 뭐 이런 자질구레한 각론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살아가는 대로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 책이라면, 지금은 반대로 그 책에 나오는 것을 발췌해 인용하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니. 그러니 따옴표 역사인 거다(원 웨이 미러의 이편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마그마굄, 브라우티건은 그런 것을 찾고 있던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민 K가 뭐라고 했었나? 「선생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서울의 달」의 홍식은? 「Boys, be ambitious!」 알다시피 삶은 팩시밀리로 재단되고 세련된 고급 실크로 꿰매지며 뱀이 허물을 벗듯 짤막한 잔상만을 남긴다. 진드기가 식어 가는 숙주의 몸에서 그 죽음을 알아차리고 홀연히 빠져나가듯이. 「넌 좆 됐어!」라고 말하면서도, 매번 홍식이 외치던 것을 그는 송어를 통해 현현되게끔 계획했을지도 ㅡ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는 조금 다르다 ㅡ 그래서 『미국의 송어낚시』는 무척이나 이중적이다(이상야릇한 아이디아뜨iDEATH처럼?). 그가 가장 관심이 많다던 죽음, 폐허, 상실이란 측면에서. 물론 반드시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제 손으로 망친 것을 회복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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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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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표창원의 『보수의 품격』이나 지승호가 쓴 다수의 인터뷰집을 비롯한 『강신주의 맨얼굴...』 등을 읽어 보았다면 표창원이라는 자의 생각, 인터뷰어로서 지승호가 가진 능력을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사법부는 전문성이 없으며 동네 아저씨들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비공식적이며 사적인 자리에서는 연예인이나 대통령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별다른 호칭이 필요 없으므로. 그러나 이것이 표창원이라면, 경찰이었던 그의 입에서 나온 사법부에 대한 비수라면 어떨까. 그는 올곧은 인사이더이고자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 우리는 영화 《인사이더》의 제프리 위건드를 보아서 익히 알고 있질 않나.

여기, 표창원의 일화가 하나 있다. 영국 유학을 끝낸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영국 경찰은 여고생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근방에 살았던 표창원의 DNA가 필요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자,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수많은 미제 사건과 측근을 사면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용하는 대통령을 보며 그들은 정의를 우습게 본다고 했다. 그까짓 것, 그 정의 지킨다고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이며 이익이 얼마나 될 것이냐, 하는 생각. 정의에 비용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에서는 정의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고 동시에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나는 표창원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범죄나 정의를 대하는 관점에서라면 얼마든지 손을 들 수 있는 것이다. 『공범들의 도시』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지만 주요한 축은 범죄를 통해 본 한국 사회를 진단해보고자 하는 것일 게다. 이를테면 ‘대문을 열지 못하는 한국 경찰’에 대해 언급하며 시스템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이나 영국 등지에서는 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땐 가차 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고 했다. 만약 허위 신고이거나 오인이었다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이 난다. 그럼 그 뒤는? 시에서 보상하게끔 되어있는 것이다. 경찰은 법 집행에 대해 수행 의무가 있고, 피해에 대해서는 손실보상을 하지만 고의나 과실이 아닌 한 법의 보호 하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우리의 경찰은 친절하게 열어 달라고 부탁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사람이 노상 ‘아, 예, 그렇군요’ 하며 지시에 따를 리 없다. 문을 부수면 그 행위의 주체자인 경찰에게 책임을 묻고 형사, 민사상의 소송을 당하니까. 손실보상 제도? 지금은 제도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글쎄, 앞으로도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경찰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극적이어야지 소극적이게 되면 도루묵이 될 테니 말이다 ―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목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데다가 그 사건에는 플러스알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미묘한 생물체라서 섣불리 유형화시키고 예단할 수 없다. 나는 모든 시스템이 적절하다고는 보지 않으나, 다종다양한 환경과 변수가 시민들을 위협하게 내버려두고 또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사람을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니 반드시 그들을 도와줄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사후관리랄까. 재범률을 낮출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조치와 무조건 괘씸죄를 들먹여 징벌을 가하려는 것보다도 예방에 힘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한국 사회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한 번 범죄에 발을 들였던 사람들이 다시 손을 대는 경우는 무척이나 많다. 비슷한 맥락으로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매한가지. 보자. 떠들썩한 범죄가 발생하면 흔히 그 가해자 이름으로 사건의 파일명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조두순 사건’처럼. 미국을 보면 메건법과 제시카법이라는 성범죄자 관련법이 존재한다. 메건법은 성범죄와 관련해 기소된 적이 있는 자의 이름, 나이, 주소 등을 공개하고 그 거주 사실을 알려주는 법이다. 그런가하면 아동 성폭력범에 대해 최하 25년형을 받게 하고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발찌를 착용해 감시하는 제시카법이 있다. 이 이름들은 모두 피해자의 이름을 딴 관련법이다. 표창원은 말한다. ‘사회적 태도’가 다른 것이라고. 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피해자임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피해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 주변으로부터 이상한 시선과 멍에가 씌워지기 때문에 피해자를 노출시키지 말자는 것. 그에 따르면 그러한 상처를 당한 피해자에게 가장 좋은 치유책은 점진적 노출이다. 조금씩 피해자의 피해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고 스스로 직면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피해자를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시티즌 인 유니폼(citizen in uniform). 제복 입은 시민. 경찰은 시민의 일부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표창원이 아웃사이더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역시 국정원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를 조직 밖으로 내보내 외려 온당한 목소리를 내게 만든 것은 그가 인사이더였을 당시의 조직이었음에 틀림없다. 권은희 수사과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직을 보호하지 않는 인사이더는 그 조직 내에서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조직이라는 체계, 사회라는 시스템이 유독 한국 사회에서만 이다지도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다시 ‘시티즌 인 유니폼’이다. 우리 스스로도 견고한 조직들을 염려하지 않고 있다. 겉으로는 진실과 정의를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조직에서 튀어나와 입바른 말을 하는 자들을 사회부적응자 취급하거나 멸시해버린다. 그런 결과 발생하는 것은 의심과 경계, 피해의식뿐인 것이다. 공범들의 도시? 맞다. 나도 공범이고 당신도 공범이다. 우리가 이 사회를 제로섬게임에 끌어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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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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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익히 알고 있다. 저 유명했던 ‘본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기억상실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일어나보니 벌거벗은 채였고 해변이다. 그는 무척이나 추웠고, 이상스러우리만치 곁에 BMW 한 대가 있다. 차 여기저기를 뒤져 차량등록증을 보니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대니얼 헤이스란 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트렁크에는 더러운 옷가지들이 있었고 그것은 그의 몸에 꼭 맞았다. 인생은 빗방울이라고? 그것들은 제각기 모여 홍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가 되면 본래의 방울로 돌아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여겨라. 나라는 인간은 어차피 과거의 것들로 이루어져 지금의 이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일 뿐일 테니까. 그는 미친 게 아니고 그저 정신이 약간 흐릿해졌을 뿐이다. 기억상실. 아마도 차량등록증에 적힌 대니얼 헤이스가 자신인 것만 같다. 메인 주 체리필드에서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까지 횡단해 온 보상은 무엇일까. 경찰은 물론이거니와 이름도 모르는 악랄한 자가 자신을 쫓고 있고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제이슨 본이 그랬던 것처럼 단서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다. 살해 혐의. 그는 아내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왜 도망을 쳤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왜 널 뒤쫓는 걸까?
넌 누구지? 그 해변에서 정신을 차리기 이전의 넌 누구였지?
대니얼 헤이스의 지난날들은 어땠을까?



그는 차주로 여겨지는 대니얼 헤이스의 집을 찾아간다. 딩동! 경찰이다! 문 열어!(물론 경찰이 친절하게 초인종을 눌렀을 리는 없겠지) 간신히 노트북을 하나 들고 나와 열어보지만 패스워드를 풀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제기랄. 그는 패스워드를 알아낼 수가 없다. 물론 나중에는 알게 되지만 당장에는 그렇다. (작가가 패스워드를 ‘NO’라고 설정했다면 진부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꽤나 심오한 개똥철학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드러난 패스워드는 ‘NO’가 아니었다. 제기랄) 이제 그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그러모아 자신의 직업을 알게 되고 고문변호사라는 여자도 만나게 된다. 이대로라면 자신을 알아가는 이 여정은 쉬이 끝맺음될 것만 같다. 그러나 어디 기억이란 것이 순순히 우리는 놓아두던가? 우리의 과거란 놈팡이가 언제나 지금의 우리와 드잡이를 하려는 것을 막을 수가 있던가? 그는 자신의 과거란 패스워드를 찾으려 전전긍긍한다. 헤겔은 정신의 힘이 역사를 만든다고 했다. 지금 땅을 밟고 서 있는 나라는 현실적인 존재는 과거의 내가 쌓은 역사가 실현된 하나의 결과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철학적 역사가 말하는 개인이란 세계정신이다. 철학이 역사를 다룰 때 대상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구체적 형태로 그리고 필연적 진화를 통해 포학되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이것을 우리 입맛대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발전된 혹은 더 바람직한 모습의 나를 그리고, 나아가 이 현실의 나는 또 다른 새로운 나라는 존재로 실현될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이다.



Q. 패스워드를 잊으셨나요?
A. BMW.
Q. 패스워드를 잊으셨나요?
A. 엿이나먹어라개자식아.
Q. 패스워드를 잊으셨나요?



끝으로 푸념 하나를 늘어놓겠다. 나는 이런 스릴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답시고 본래의 텍스트에서 맛보았던 긴장감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졸작들을 셀 수 없이 목격해 왔다. 어울리지도 않는 편집으로 중무장한 채 영상에만 급급한 나머지 플롯은 온데간데없고, 끝날 때면 어김없이 흐르는 홀가분한 컨트리풍의 느린 노래와 함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까지. 부디 이 작품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한다. 대니얼 헤이스는 제이슨 본이 아니다. 후자는 기본 설정부터가 ‘전문가’였다. 그것은 외려 영상물 쪽이 어울린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오락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바보 같은 대니얼 헤이스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라서 특출한 액션이 필요 없는 것이다. 대니얼 헤이스는 나도 될 수 있으며 당신도 될 수 있다. 누구나 제이슨 본처럼 날아오는 총알을 요리조리 피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대니얼 헤이스처럼 ‘두 번’ 죽을 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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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서영은 지음 / 비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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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없이 하나의 시상식이 떠오른다.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올림픽 육상 경기 시상대에 섰던 세 명의 청년들, 그리고 블랙 파워 살루트.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으나 안주한 세속에의 정복이란 측면에서는 돈 키호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라 만차 파워 살루트!). 첫 장 <높이 쳐든 오른손>이란 제목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시위’를 보자면 더욱 그러하다. “저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토지도 저당 잡혔습니다. 안락을 버리고 자신을 운명의 팔에 맡기어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저는 지금 사라진 편력기사도를 다시 부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여기서 넘어지고 저기서 쓰러지며, 이곳에서 떨어졌다가 저곳에서 다시 일어나며, 과부를 구원하고 처녀를 보호하고, 유부녀와 고아를 도와줍니다.” 어찌 보면 산초는 그에 비해 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녹슨 칼과 창, 투구를 쓴 돈 키호테에게는 그가 반드시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할 터다. 성스럽고도 성스러운 로시난테도 매한가지. 돈 키호테가 처음 공격한 사람은 마부인 듯한데(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책에 나온 표현을 옮기자면 ― 그런 성스런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겨우 짐 실어 나르는 용도로나 부리는 사람, 즉 마부들과의 싸움은 곧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면 좁힐수록 현실에서의 삶은 평안해진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자꾸만 꿈틀거리는 이상을 향한 부딪침은 쉬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눈을 비비고 보니 내가 잠이 들었던 게 아니라 기실 깨어 있었다는 걸 알았어. 하여튼 거기 있는 게 정말 나인지, 또는 가짜 허깨비인지 알아보려고 머리와 가슴을 만져 보았더니, 촉감이나 느낌이나 스스로 자문자답하여 보아도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과 똑같이 내가 거기 있는 것이 확실했어.” 예의 그 ‘동굴 탐험’이다. 이상과 현실의 폭을 좁혔다면 애초에 밧줄 따위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드시 밧줄이 필요했다. 동굴로 내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한 밧줄이. 풍차를 향한 대립에서도 역시 돈 키호테의 이상과 산초의 현실이 대립한다. 둘시네아 쪽도 다를 것은 없다. 왜소한 현실에 현현된 가공의 인물인 그녀가 진실로 현실이겠는가, 이상이겠는가? 모든 위대한 것은 광장이나 명예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또한 어디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 “이쯤에서 그만합시다.”는 안온함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날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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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걷자, 둘레 한 바퀴 - 한국산악문학상 수상 작가의 북한산 둘레길 예찬!
이종성 글.사진 / 비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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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의 옛 이름은 삼각산이라던데 백운, 인수, 만경, 이 세 봉우리가 아름답다고 하여 명성이 높단다. 사실 나는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반감 아닌 반감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내려올 것을 굳이 왜 오른단 말인가 하는 알량한 사고에서는 아니고, 도처에 널린 건물들만 보아도 다 같은 모습뿐이니 산이라고 한들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실은 이쪽이 더 조야한 생각이건만). 어릴 적 내게 있어 산에 오른다는 행위는 뭐랄까, 일종의 마라톤 시청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그때는, 한 발짝 한 발짝씩 발을 떼며 여유로운 상념을 가지지 못했다. 이를테면 ‘얼른 올라갔다 와서 쉬어야지’ 하는 마음 일색이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약간은 지겹기도 한 마라톤 경주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산을 오르는 내내 발등에만 눈을 두며 걸었으니. 북한산 둘레길을 예찬한 『다 함께 걷자, 둘레 한 바퀴』를 읽으면 어서 그쪽으로 이사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다. 나처럼 산에 대해 마비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 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북한산은커녕 동네 뒷산에도 오르지 않을 사람들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하루에 한 구간씩 찾으면 총 스무하루 동안의 여정이 이어진다. 이 둘레길이라는 명칭은 최근 들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러나 그저 자연경관에만 눈을 두며 올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의 등산과 다를 바가 없다. 좇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일 거다. 이준열사의 묘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저 옛날 백사실계곡에는 누가 있었는지, 고국으로 돌아온 비석에는 어떠한 연유가 있었는지, 여기소(汝其沼)라는 못은 왜 지금의 여기소가 되었는지 등등. 요즈음 아웃도어가 유행을 타며 너나없이 몸에 걸쳐 대고는 있으나 실제로 그것을 입고서 산을 맞이하러 가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적절치 않은 비유이지만 내가 보기엔 체호프의 발사되지 않은 총이나 다름없다. 이참에 그 다락같은 것들은 집어치우고, 외려 마음을 다락같이 채워 올 수 있는 순례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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