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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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애초 한 번 읽어서는 텍스트의 혼란스러움에서 허우적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세상에는 슬쩍 한 번 눈길을 줬는데도 무궁무진한 흥미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을 수 없는 책과, 쥐며느리가 곱송그린 몸을 펴듯 느릿하게 읽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눈을 대고 싶은 책이 있는데 『하자르 사전』은 양쪽에 끼인 샌드위치의 꼴로 보인다. 각설하고, 하자르 민족을 이주시킨 것은 동쪽의 수컷 바람이라 해도 그들(의 역사)을 촘촘히 활자로 엮은 것은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사실 <하자르의 얼굴>처럼 이쪽의 텍스트가 저쪽의 텍스트로 변모하는 양상을 곳곳에서 ― 자의든 타의든 ― 엿보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 『하자르 사전』을 읽은 날 밤이 유난히 얇아서 화요일에 서 있는 사람과 수요일에 서 있는 사람이 서로 악수를 할 수 있을 정도(p.66)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아는 어느 노랫말에는 <당신의 하루는 당신이란 배우가 주연으로 연기하는 무대이고 오늘은 어떤 배우가 조연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며 또 지구, 우주, 어디까지가 그 무대의 끝인지도 모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게다가 책의 옐로 북에는 아테 공주가 꿈 사냥꾼들의 수석 사제에게 바쳤다는 시 하나가 등장한다.


깊은 밤, 잠이 들면
우리는 모두 배우로 변합니다.
우리는 매번 다른 무대에 올라서서
자신의 배역을 공연합니다.
그렇다면 낮에는?
낮에 깨어 있을 때에는 그 배역을 연습합니다.
때때로 자신의 배역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을 때에는
감히 무대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다른 배우들 뒤에 숨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보다 대사도 더 잘 알고
동작도 더 훌륭한 배우들 뒤에.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기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찾아옵니다.
부디 내가 연습을 잘 한 날에
당신의 두 눈이 나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내내 현명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오로지 내가 당신에게 불어 넣고 당신에게서 가지고 오는 것에서 비롯될 뿐인가? 왜냐하면 진실을 열어 보면 언제나 우리가 그 안에 집어넣은 것만큼만 들어 있기 때문에?(p.244)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2인3각 혹은 3인4각을 하며 다리를 절고, 목을 삐끗하고, 결리는 어깨를 부여잡고서 책을 읽을 따름인 것? 인간은 자신의 어제와 내일을 너무나 뒤늦게 발견하기 때문이고 현재는 그 사이에 끼어서 숨을 거두는 중이라서…… 라고밖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이 희한하고 괴상한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간파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 책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두브로브니크에 살던 유대인인 사무엘 코헨이라는 자가 어느 전기에 달아놓은 주석에서 말했듯, <해석하지 않은 꿈은 읽지 않은 편지와 같긴> 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편지는 아직 꾸지 않은 꿈과 같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하자르 사전』에 잊힐만하면 출몰하는, 그래서 이름도 다 외울 수 없는 인물들은 원주상의 어떤 지점에서도 만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의 이야기는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의 기기묘묘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아직도 이 악마 같은 사전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성기에 입을 갖다 댈 수 있을 만큼 몸이 굽은 야곱 탐 다비드 벤 야히아(요하네스 다우브마누스)처럼 뇌 속의 회로가 굽어 있다 ― 물론 그는 <Verbum caro factum est(말이 곧 육신이 된다)>라는 구절을 읽고 죽음을 당했지만 이쪽은 아직 살아있다……. 분명 『하자르 사전』은 <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결정적으로 백색왜성이 초신성을 조우하게 하는 마력의 구절을 감추어 놓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수요일의 카페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아브람 브란코비치가 세상을 떠난 해와 이스탄불의 킹스턴 호텔에서 도로시아 슐츠 박사가 연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해는 293년이란 으스스한 간극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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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과 흥정의 기술 - 절대 손해 보지 않는 마력의 흥정 테크닉 50
스티븐 바비츠키 & 제임스 맨그래비티 Jr. 지음, 유지연 옮김 / 타임비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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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라는 단어를 조금은 가깝게 접하게 됐던 것은 과거 1998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네고시에이터(The Negotiator)》였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협상가가 등장하고,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는 <협상>과 <흥정>이라는 두 개의 명제가 공존하는 동시에, 서로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서 한 손에는 물과 한 손에는 불을 들고 서로 대립한다.

 

 

 

『협상과 흥정의 기술』의 원제는 <Never Lose Again>이다. 제목대로, 거시적이고 큰 범주의 주제가 아니라 저자의 글대로 하면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실전공략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게 또 흥미롭고 재미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란 속담과 꼭 맞을 정도니까. 고로 가슴팍에 단도 하나를 지니고서 상대방의 의표와 허점을 찔러 실제로 이기는 방법(never lose again)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여긴 정가제인가요?」나 「할인되나요?」라는 질문에는 Yes와 No밖에 나올 대답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얼마까지 해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에는 어떨까. 이 말에는 이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첫째, 나는 흥정을 할 겁니다, 기브앤테이크니까 당신이 따라줘야 이 거래를 시작할 겁니다, 라는 의사를 정확히 전달해준다. 둘째, 상대로 하여금 얼마간이라도 할인의 여지가 있다고 즉각 인정하게 만든다. 그럼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상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보자. 첫째, 대답을 피할 방법이 없네. 둘째, 못 깎아준다고 하면 안 살 텐데. 셋째, 사실 한 푼도 못 깎아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저 사람도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넷째, 안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하면 오히려 불신만 초래하는 셈이야. 다섯째, 제일 좋은 전략은 정직하게 대답하는 거야……. 그래서 이 『협상과 흥정의 기술』은 거시적인, 그러니까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 간의 협상이나 옷 한 벌을 살 때도 흥정을 하고, 또 회사원들이라면 연봉 협상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인생은 협상과 흥정의 연속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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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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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눈치 받는 임신한 여사원처럼 가슴에 주홍 글자를 안고 사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딤즈데일 목사와는 달리 놀라운 정신력을 유지한 헤스터의 마지막은 ‘그럼에도 살아간다’이다. 

 

어른이 되면 그런 게 저절로 가슴에 달라붙지 않을까? (펄의 대사, p.243) 

 

발칙하게만 보이는 펄의 이 한마디는 『주홍 글자』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의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처럼 아름답고 쓸쓸한 결말은 아닐지라도 ‘모든 인간의 주홍 글자’를 보여주기 위해 호손은 소설 속의 헤스터에게 분주하고, 강하며, 신비스러운 사명을 부여했다. 이러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사명은 다시 한 번 펄의 대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말장난처럼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주홍빛 A는 폭력적 사회를 대변하는 이미지에서 아서(Arthur) 딤즈데일의 A를 거쳐 아우라(Aura)의 A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로저의 역할이 보여주는 딤즈데일에의 가히 악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멸적 시선으로 인해, 그와 헤스터의 불륜에서 다소간 동정과 연민의 분위기가 연출된다는 점에서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조금은 억지스런 미화도 엿보인다. 로저가 영화 《밀양》의 신애(전도연)처럼 기막힌 일을 당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인가? 그의 시선으로는 헤스터와 딤즈데일의 작태가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나는 로저의 시선으로 해석되는 『주홍 글자』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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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1.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직설』(한겨레출판, 2011) : 소설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책으로 선정되었던 소설이 인문 분야와 바뀌어 오배송되는 바람에 받은 책이다. 그러나 반송하고서 선정된 소설을 다시 받아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한겨레 연재 당시부터 <직설>이란 꼭지를 빼놓지 않고 읽어보았고 언젠간 책으로 엮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가 생각한 대로 출간이 되었기에 반갑기도 하고 또 다시 한 번 읽어보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왠지 난자하고 난자당하고, 까발리고 까발려지는 느낌. 9기 신간평가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 원래의 소설 분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간평가단을 통해 읽었던 모든 소설보다도 나는 이 『직설』을 최고로 꼽는다. 

책을 읽는다는 건 언제나 즐겁다. 거기에 무상으로 읽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때로는 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책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재미없는 책'은 있지만 '나쁜 책'은 없다는 생각 하에 또한 즐겁게 받아들였다.

 

 

 

2.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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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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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에 <직설>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신문 오리기를 중단했다. 분명 책으로 묶여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당연히, 기어코, <직설>은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걱정이 생겼다 ㅡ 판금 당할까 봐이다. 이런 걱정 자체가 걱정인 건가? 한겨레도 이젠 그렇고 그렇다는 비판(혹은 비난)이 극에 달해 있을 때 생긴 꼭지라서 그런지 처음부터 굉장히 관심이 많이 갔던 게 사실이고 또 흥미롭게 읽었었다. 물론 초반엔 '놈현 관 장사'로 한 대 얻어맞긴 했지만 일단 이만큼이라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벌써부터 <직설> 이후를 기대한다. 한겨레 <직설> 차기 버전이 나온다면 <세치 혀>가 좋겠다. 어디서 세치 혀를 놀리느냐, 할 때 그 세치 혀. 그러면서 자꾸 세치 혀 놀리지 말라고 말 못하게 하는 꼴*들에게 발기된 페니스처럼 그 혀로 찌르는 거다 ㅡ 그 때도 책으로 나온다면 판금만 당하지 말기를. 어쨌든 고상한 척하지 않고 저잣거리 말로 풀어냈기에 직설이 완성될 수 있었고 진행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직설>이라 할 수 없겠지. 목 뻣뻣한 계몽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헤게모니의 당사자들도 아니니. 뭔가 업그레이드된 난장판과도 같다. 어쩌면 『호모 레지스탕스』(해피스토리, 2011)의 구어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리뷰란 형식을 빌려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그 <곧은 혀>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할밖에. 기득권에 반항한다고 해서 모든 게 곧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그물 국가>이기에 이것은 충분히 곧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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