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비즈니스의 미래 지도 - 세계적 기업가들은 녹색 황금시장에서 어떻게 부를 창출하고 성공의 기회를 얻었는가?
도미니크 노라 지음, 문신원 옮김 / 김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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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타이틀이 <그린 + 비즈니스>인가. <그린>하면 녹색 성장, 녹색 환경, 녹색, 환경, 녹색, 환경……. 이런 것들만 떠오르는데, 여기에 <비즈니스>가 더해져 있다. 저자 도미니크 노라가 주장하는 건, <에너지 경제>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집단 모두가 해야 할 일이며 어느 한쪽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ㅡ 개인은 영민하지만 집단은 우매하다는 논리는, 여기서는 접어두자.

-- 냉장고가 소비하는 전력량이 얼마나 되는지, 오래된 백열전구가 얼마만큼 쓸데없이 전력을 먹어 치우는지, 밤새 전원을 끄지 않은 VCR나 초소형 컴퓨터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는지, 또는 지나치게 큰 화장실 물탱크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낭비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본문

나는, 재생 에너지가 현재 세계 에너지 소비의 18%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또한 녹색 성장의 패러다임의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며, <탄소 거식증carborexic 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을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에너지 부족>이나 <이산화탄소 배출량>, <온실 효과>와 같은 말들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실제 이것들을 초래하는 것이 우리이며 그 피해자라는 것도 우리라는 것을 현실감 있게 자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ㅡ 조금 다른 맥락일 수 있지만 얼마 전 추석 즈음의 수도권에서의 수해水害나 4대강 사업으로 인한 범람은, 이러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미국의 45대 부통령이었고 환경운동가인 앨 고어albert arnold gore, jr. 하면,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주제로 우리에게 끔찍한 경고를 하지 않았던가.

국가를 막론한 기온 상승과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것은, 영화 타이틀처럼 우리에겐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왜 불편한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의 적敵이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된 인문 서적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를 읽어본 적이 있다면, 이 『그린 비즈니스의 미래 지도』 또한 우리에게 일종의 <딜레마>를 던져 줄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엔 할 수 있다고 믿고, 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당위성이 있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게 어렵거나 귀찮은, 그런 것 말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신문에서, 뉴스에서 지독히도 많이 들어왔던 <지속 가능한 경제>란 게 대체 무엇이고 그것이 정말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경제라는 관점에서 <시장 경제>의 차원이 아닌 <재생 경제>로의 길이 가능한 것인지, 기업들이 <경제시장>에서 눈을 돌려 <녹색시장>을 지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러한 명제들이 『그린 비즈니스의 미래 지도』에 담겨 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리기 전에 <우리>부터 사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 의문은 신경유전학 및 진화의학 박사인 샤론 모알렘sharon moalem의 저서 『아파야 산다survival of the sickest』에서 풀릴 수 있다.

위 의문의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그린 비즈니스의 미래 지도』라면, 『아파야 산다』는 후자다. 나는 위에서 <개인과 집단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언급했는데, 이것이 그 <개인>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인간 몸의 진화>와 <인간 세상의 진화>를 말한다. 친환경 녹색 경영을 이룬 기업들의 노력과 과정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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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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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운 일본만 봐도 설화나 민담을 가지고 일종의 <저주>라는 이름을 가진, 세련된 현대의 공포문학 집필이 활발하다. 우리나라는 글쎄,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종10년, 제주의 한 동굴에 수십 척이 넘는 큰 구렁이가 은거하였다.
오래 전부터 바람과 비를 휘둘러 사람들을 괴롭혔기에
마을에선 해마다 열다섯 살이 된 처녀를 제물로 바쳐 화를 달랬다.
신임 제주 판관 서련徐憐이 날랜 장사들을 대동하고 행차하여
제물이 된 처녀를 사경에서 건져내고 구렁이를 죽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붉은 기운에 변을 당해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ㅡ 제주 김녕사굴金寧蛇窟에 얽힌 설화



제주도에서 실종된 산악자전거 동호회 회원 중, 여자 한 사람이 9개월 후 돌연 죽어가는 몰골로 나타나고 여기에 퇴마사(법사) 신진명이 얽히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에 빙의된 원혼 ㅡ 과거 김金녕사굴의 영기를 받은 금金녀란 별호를 가진 무녀. 또 그 무녀의 외손녀 금金주. 다시 퇴마사 신진명.

소설 『무녀굴』은, 책에 적혀있는(▲) 과거의 설화를 현재로 가져왔다. 이것은 판타지와는 다르다. 과거의 설화를 근저로 하여 그것을 지금,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 ㅡ 물론 이것과 근본적인 작품비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제나 문제제기의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명제를 품고 있기 떄문이다. 나는 단지 소재의 특성을 말하려는 거다 ㅡ 에서도 원혼, 귀신, 빙의 등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결국 주인공은 박수칠 때 떠나지 못했다. 『무녀굴』은 어떤가. 김녕사굴의 무녀 역시 과거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단순히 <복수>의 차원을 넘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저주를 품고 있다.

소설 『무녀굴』은 저주를 품은 원혼, 무녀의 방울소리, 빙의된 자의 붉은 눈目, 그리고 퇴마의식과 주술을 공포라는 매력적인 장르로, 그리고 끈끈한 구성과 현실감 있는 묘사로 빚은 탁월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작품이 태어났다는 것에 반갑고 즐겁다.

p.s 소설 『무녀굴』과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위의 부연설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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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e혁명 - 개인과 조직, 시장과 사회를 뒤바꾸는
매튜 프레이저 & 수미트라 두타 지음, 최경은 옮김 / 행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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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msn, 구글, 아마존에서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 위키피디아, 유튜브, 트위터까지 ㅡ 물론 야후는 플리커를, 구글은 유튜브를 인수하면서 많이 변했다. 웹 2.0, 마켓 2.0, 엔터프라이즈 2.0, 데모크라시 2.0, 그리고 사람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고등학교 교장 수녀가 퇴학을 언급하며 학생들의 마이스페이스 이용을 금지했는데, 오히려 학생들이 마이스페이스를 통해 그 수녀를 비꼬았던 예는 소셜 네트워크의 파급효과(혹은 두려움)를 잘 보여준다 ㅡ 학생들이 시도했던 저항은 학교 복도의 게시판이 아닌 웹에서 이루어졌다.

-- 중세 기독교와 사이버 스페이스는 인체를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중세 시대를 지배한 것은 세속적 가치, 즉 물질 세계에 대한 경멸이었고 특히 '유한한 인간의 육신에 대한 경멸'이었다 (...)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글로벌 소프트웨어 산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애플의 마케팅 전략은 기독교 복음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다 -- 본문 pg.38 (나는 이 의견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소셜 네트워크 e혁명』은 이제 전도사가 되어버린 소셜 네트워크를 이야기한다.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우리는 외롭지 않으며(!) 전체주의를 타파할 수 있고 다양한 기회와 만남을 가질 수 있다. 물리적인 것은 과거가 되었고 이제 서로의 충돌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 '충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의미부여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각자의 신념과 존재가치를 더 이상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됐다. 무소부재無所不在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無所不爲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는 비즈니스를 바꾸었고 라이프 스타일을 변화시켰으며 엔터테인먼트 및 사회를 간질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를 달라지게 했다는 점이다(우리는 전자책과 mp3 파일을 다운로드한다. 그리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 e혁명』은 소셜 네트워크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우리 개개인의 아이덴티티, 그리고 타인과의 상호관계(혹은 상호작용)에 미치는 변화를 말한다. 이것은 실로 강력하며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온라인상에서의 자기표현self-exhibition과 창피주기shaming는, 지금, 이 시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ㅡ 현실의 '친구들'이 웹에선 'e지인'인 거다.

-- 현실세계에선 자기를 '표현'하지만 가상세계에선 '만들어'낸다 (...)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경구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선 '너 자신을 보여줘라'라는 말로 바뀐다 -- 본문 pg.68

이 구조는 수평구조도, 수직구도도 아닌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아니면 '가시덤불'이란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복잡다단한 구조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위와 권력, 그리고 나아가 시장과 경제, 사회와 정치까지도 한 묶음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예기치 못한 변화이자 혁명이다. 이제 웹의 영향력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구글은 거대한 신이 되었다). 그럼 남은 것은 당연하게도 신뢰와 참여, 협업, 교류, 윤리, 검증이다. 결국 이 글 처음에 언급했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게 문제이자 키워드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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