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기적의 질문법 - 작지만 큰 변화를 주는 엄마의 한마디
김연우 지음 / 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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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변화를 주는 엄마의 한 마디, 기적의 질문법!!!!!

 

잘못된 아이는 없다.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부모가 있을 뿐!!!!

 

이 책은 요즘 시대에 맞는 맞벌이를 하느라고 지친 엄마를 위한 양육책이다. 게다가 아주 얇고 짧은 쳅터식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부분이나 아무렇게나 펼쳐봐도 도움이 되는 구구절절 옳은, 그리고 유용한 말들을 적혀있는 책이다. 나는 평소 가벼운 책을 선호하는데, 어떤 좋은 책이라도 일단 읽기에 편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구구절절 유용한 내용들로 이루어진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겁거나 분량이 너무 과하다면 요즘 너무 바쁜 엄마에게 마이너스일 수 밖에 없다. 책을 사놓고도 읽지 못하고, 사용하지 못한 팁들을 그냥 버려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너무나 옳다. 총 174페이지밖에 안 되고, 글자 크기도 큼직한데다가, 글도 너무 빼곡히 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 그런 허술해 보이는 구성들이 별로였었는데, 읽다보니 글이 별로 없었던 것이 이 책의 중요한 핵심을 음미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실제로 적용시켜보는데에 중심적인 것만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다양한 육아서를 읽어본 나로선,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사실 책이라는 것에서 배우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기본적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읽긴 하지만 한편으론 이제 나올 만한 이야기는 다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내심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바쁜 엄마라도 이 책과 비슷한 유형의 책을 몇 권 보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책은 여러 권의 양육서를 읽었던 나조차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어쩌면 나도 내심은 생각하고 있었던, 내 머릿속의 어딘가에는 잠재하고 있었던 내용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언어의 형태로 바꾸어 표현해주었다는, 그래서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낸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감탄한 그 부분을 저자는 오랜 시간의 경험을 통해 얻어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니까. 역시 어떤 책이든 얻어낼 가치가 있는 정보는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질문만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가치는 그보다 더하니까!!

 

일단 ‘질문’의 가치는 나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게 육아에 관련되어서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또한 논술교사로 교육받으면서 ‘질문’을 뛰어넘는 수준있는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쯤은 익히 들어왔었다. 논술의 기본은 아이들에게 좋은 ‘질문’을 던져서 아이들이 나름 고민한 답변을 끄집어내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질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이에게, 자식에게 적용해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어쩌면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생각과 인격이 부족한 하나의 존재로 여긴 탓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몸집이 작은 아이는 어른이 보기에 그만큼 작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가 귀찮거나 힘이 들거나 아프면 그의 인격을 조금은 훼손해도 된다고 나름 생각해버리고 만다. 분명히 궁금한 것을 물어볼 권리가 있고, 나는 대답해줘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그것이 쉽지 않다. 아마 많은 엄마가 그럴 것이다. 밖에서 창조적인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집에 기어들어와서 아이에게 창조적인 활동을 해줄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주목한다. 이제껏 잘못 해왔어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여지는 많다는 이 책을!!! 질문을 바꾸기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 새롭게 해야할 엄마의 질문 뿐만 아니라 이제껏 잘못해왔던 엄마의 질문에 반응하는 아이의 답변에 대해서도 말이다. 부정적으로 몰아만 갔던 엄마의 질문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게 갑자기 바뀐 엄마의 긍정적인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리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절대 뻔뻔해져야 한다. 절대 당혹스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아이가 바뀐 엄마의 모습에 익숙할 수 있도록.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세상엔 다양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양한 엄마도 많다. 내 생각으론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아이를 대하는 엄마가 꼭 한 명은 있다. 다른 사람의 양육방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가족내력까지 알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쳐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아이의 창의성과 인격을 존중해주는 엄마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엄마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아이는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이가 너무 잘한다고 추켜세워서도, 너무 못한다고 무시를 해서도 안 된다. 아이는 엄마가 바라보는 방식대로 자신을 인지하기 때문에, 한두 번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이 말썽꾸러기야!!”라고 불렀던 그 말이 아이를 규정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이가 평범하다고 생각된다면 혹시 자신이 아이에게 평범한 질문을 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아직 하얀 도화지 같은 아이이다. 그렇기에 지금 아이의 모습이 엄마가 만들어간 모습이라는 것과, 지금부터 10년 뒤의 아이의 모습은 지금부터 10년 동안 아이에게 했던 질문의 합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가 하는 서투른 모든 일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뱉을 것이 아니라 한 마디라도 격려해주는 말을 해야 한다. 너무 소극적인 아이라도 엄마의 질문과 양육 태도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만약 집에 너무 수줍어 하는 아이가 있다면 엄마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한다. 혹시 아이에게 칭찬을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아이가 자신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만한 피드백을 해주었는지 말이다.

 

아이의 생각은 어른과 다르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아이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을 곰곰히 따져본 다음에 다른 반응을 해주는 것이 좋다. 아이가 컵을 깨뜨렸다고 해서 무조건 혼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유를 들어본 다음에 주의를 주는 것도 늦지 않다. 만약 무조건 컵이 깨진 것에 대해서만 혼난다면 그 아이는 다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혼날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면 아이의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결과과 과정을 동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무조건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과를 생각하고 한 행동인지 아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이도 점차 변하기 마련일 테니까. 모든 아이의 엄마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아이의 특별함을 깨달아주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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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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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 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을』~!

 

내게 있는 박솔뫼 작가의 유일한 정보이다. 그녀가 신인상을 탔으니 이제껏 정보가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 독특하기가 이를 데 없다. 소설의 주요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 배경의 소개도, 인물의 소개도 전혀 나오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저 ‘민주’와 ‘을’이 등장인물 중의 주축이고 배경은 한국은 아닌 어느 외국 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렇게 모호한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보통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의 성격을 재빨리 파악해내고 싶은 바람에 집중을 하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분을 읽을 땐 머리가 아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논리적인 흐름이 없는 이야기를 읽을 땐 왠지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버릇이 말도 못하게 힘들어진다. 순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재미나 논리적인 체계만 보여준다면 버스 안에서도 열심히 읽을 수 있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나를 힘들게 했다.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러웠으니까~! 물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민주’가 어떤 인물인지, ‘을’은 또 언제 만났는지, 또 다른 주인공 ‘씨안’은 또 어떤 인물인지 등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숨겨진 뒷이야기를 찾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하지만 처음을 읽을 땐 어지러움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여느 소설과는 다른, 정말 인물도 없고 배경도 없는 한 나라의 민족성이나 문학성을 뛰어넘는 그런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만 가득 담아냈기 때문이다. 특히나 처음부분는 너무 놀랐다. ‘을’이 실은, ‘노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나는 처음에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그 노을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왠지 그런 의미로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니까. ‘민주’는 ‘을’의 이름이 너무 쓸쓸하다고, 인간의 이름이 어떻게 ‘노을’이 될 수 있냐고 생각한다지만, 나는 충분히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쓸쓸하기는커녕 포근하고 아름답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을’은 아마도 21세기의 노마드적인 인물을 대표하기에 중심인물로 설정된 듯 싶은데 상당히 매혹적인 인물이었다. 나와는 생각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 다른, 정말 다르기에 매혹적인 인물... ‘씨안’의 질투심 어린 객관적인 평가에 의하면 마르고 아름답다고 하니까 금상첨화다. 하여튼 여기는 한국이 아닌 어느 외국 땅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을’은 장기투숙자를 위한 호텔에 묵으면서 하루하루 살다가 한국에서 만난 ‘민주’를 여기로 불러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주요 줄거리이다. 그러면서 다른 장기투숙자들의 이야기가 첨부되면서 이렇게 외국에서 몇 달씩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비단 ‘을’ 혼자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소설의 내용으로 봐선 ‘민주’와 ‘을’이 연인관계인지 아닌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열살 정도 더 많은 ‘을’이라지만 남녀관계는 나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연인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을’에겐 세상 사람들의 단순한 행동이 폭력으로 다가오지만 오로지 ‘민주’에게만 모든 것을 허용하고, 또 모든 것을 요구한다는 것... 수다를 떨고 상대의 의향을 물어보는 단순한 질문조차 ‘을’에겐 폭력인데, 오직 ‘민주’에게만 ‘을’이 매달려 폭포수같이 말을 쏟아놓는 것만 놓고 본다는 ‘을’에겐 ‘민주’가 유일무이한 존재일 수 밖에~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는 건가. 이 소설에선 사랑이란 상당히 모호한 존재이라 감히 ‘민주’와 ‘을’이 사랑을 하는지 마는지 말할 수가 없다. 어딘가 중요한 뭔가를 빠뜨린 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민주’, ‘을’, ‘씨안’은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감정에 충실하기보단 그 순간의 자신의 자유와 방황에 더 치중하는 듯이 보이니까 말이다. 단단해 보이던, ‘을’이 그렇게나 의하던 ‘민주’에게도 상실감이 존재하고,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보다는 단지 기호에만 열을 올리는 ‘을’도 어딘가 상실감이 배어나오고, 언젠간 돌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소박하고 허무한 삶을 즐기고 있는 ‘씨안’도, 걔 중에 가장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씨안’도 그리 멀쩡해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어딘가 멍하니 비워둔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가끔 신인상을 탄 작가의 소개를 볼 때, 먼저 눈이 가는 곳은 그의 생년월일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가, 적은가를 통해 그 작가가 살아온 환경을 유추해보는데, 일단 나보다 나이가 어린 작가라면 감탄을 금치 못할 수 밖에 없다. 글을 잘 쓰는 것만큼 부러운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 작가는 나보다 5년이나 어리다. 물론 나보다 5년이나 어리다고 해도 벌써 성인이 되고도 남을 만큼의 나이이긴 하지만 역시 부러운 것은 부럽다. 그런데 부러워하는 대상이 좀 다르다. 내가 보통 부러워했던 것은 글을 잘 쓰는 것, 묘사력이 끝내주는 것이었다면 이 작가에겐 좀 다른 것이 부럽다. 이렇게 삭막하고 모호하고 허무한 듯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 단지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을 말하지 않고 그저 현대인, 그저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사람들을 소설로 창조했다는 것... 그것이 가장 부럽다. 소설가들에게 나이란 숫자일 뿐,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깊이있는 사고를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에서 알 수 있었다. 결코 평생을 생각해도 이런 모호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나로선 그저 감탄하고 소설 속으로 묘하게 빨려들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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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 슈퍼 히어로를 읽는 미국의 시선
마크 웨이드 외 지음, 하윤숙 옮김 / 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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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화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중학생 때 처음 만화를 접하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만화를 사서 모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것은 어머니께서 만화를 사는 일만큼은 절대로 허용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만화를 뭐 종이 나부랑이 정도로만 취급하셨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도 어머니의 눈을 피해 만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소녀적인 감성이 뭉게뭉게 피어날 수 있는 공상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나도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만화란 바로 미국의 만화 같은 울퉁불퉁하고 우락부락한 영웅들이 나오는 만화다. 워낙에 생김생김이 큼직한 인종이기 때문인지 내가 좋아하는 감성적인 만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언제나 의아할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미국 만화에서는 항상 슈퍼 히어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웅적인 행동만 할 뿐이 아니라 원래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것이다. 배트맨, 슈퍼맨, 그린 애로우, 그 밖에 ‘저스티스 리그’가 활약하는 DC 코믹스나 스파이더맨, 엑스맨, 판타스틱 포가 활약하는 마블 코믹스 모두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거나 그런 능력을 훈련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잠깐, 그런데 정말 왜 초인이 등장하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만화책이 아니다 보니까, 내가 미국 만화에는 체질적으로 싫어하다 보니까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들의 만화엔 항상 슈퍼 히어로가 등장한다는 것을. 사실 판타스틱 포나 스파이더 맨, 하다못해 슈퍼맨까지 만화가 원작이었다는 사실을 별로 인지하지 못하고 영화가 있기 때문에 그저 어쩌다 본 것뿐이라, 그리고 그다지 그런 영화에 열광하지 않았던 터라 미국을 이해하는 키워드에 ‘슈퍼 히어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 그렇다. 미국은 슈퍼 히어로에 열광한다. 30~40년대에 만들어진 미국의 전원생활 속에서 어린 시절을 성장한 슈퍼맨부터 과학기술의 부작용으로 친구끼리 초인이 된 판타스틱 포까지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조합하고 연결해붙여서 재생산하기까지 한다. 한데, 대체 왜 만들어내는 걸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문에서부터 나온 슈퍼 히어로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총 19명의 저자들의 글을 묶은 것인데 실제로 있는 존재가 아니니 어디 대단한 전문가를 모셔왔다기보단 어릴 적부터 만화책에 코를 들이박았던, 만화에 대한 향수가 가득한 사람들이 집필했다. 그리고 대부분이 철학교수이거나 문학교수이거나 편집장이거나 프로듀서이자 작가이거나 만화가이거나 등등...

 

내가 철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생뚱맞은 제목을 가진 책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플라톤의 『국가』, 밀 스튜어트의 공리주의나 키에르케고르가 이렇게 많이 등장한 경우는 처음이다. 읽다보면 내가 책을 읽는 건지 책이 나를 읽는 건지 헤맬 때도 있을 정도로 멍한 어조로 쓴 저자도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과거를 캐느라고, 혹은 그의 선한 일을 하는 동기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재미있다. 한 번도 슈퍼 히어로가 선한 일을 왜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선 정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단순히 초인적인 능력이 있기에 슈퍼 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뇌의 선택을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안위와 행복을 제쳐두고 선을 행하기 때문에 슈퍼 히어로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과연 수긍할 만 했고, 엑스맨에 숨겨져있던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도 멋졌다. 만화는 본 적 없지만 영화로 나온 엑스맨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봤기 때문에 진 그레이가 1탄에서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장면이 그럴싸하게 설명될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설명해주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소극적이고 남자에게 의존적이던 진의 다른 자아가 각성하면서 자신의 염동력으로 온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진 모습에는 또 어떤 설명을 할지 자못 궁금할 정도다.

 

이렇게 단순하게만 봐왔던 하나의 문화 현상이 이렇게 신화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설명이 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신기하다. 그렇기에 문화의 힘은 강대하다고 하는 걸까. 우리도 아무것도 모른 채 만화나 영화로 이런 미국 매체를 받아들이면 이런 영향도 미리 예측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실은 여기에 나온 수많은 슈퍼 히어로 중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존재가 훨씬 더 많다. 저작권 문제가 걸리긴 하겠지만 미국사회에서나 많이 읽히는 만화 주인공에 대한 책을 이왕 내는 김에 사진이나 영화포스터라도 조그맣게 내주었다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했다. 수십 년을 이어져내려온 전통이기에 한 번에 다 이해할 순 없겠지만, 그렇게 그림이 조그맣게라도 있으면 이보다는 훨씬 더 쉽게 이해될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모처럼 신기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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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뇌에게 말을 걸지 마라 - 이제껏 밝혀지지 않았던 설득의 논리
마크 고울스톤 지음, 황혜숙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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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밝혀지지 않았던 설득의 논리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현란한 말빨로 상대를 홀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카리스마 넘치는 말빨로 상대를 휘어잡는 것이 좋을까?

학원에 있다보니 별의별 상담원장님을 만나게 되는데, 현란에서부터 카리스마까지 안 본 유형이 없을 정도다.

처음에는 화려하고 맛깔스럽게 상대를 설득하는 상담기술이 좋아보였었는데, 이제는 좀 다른 생각이 든다. 화려한 말빨에 홀렸던 고객이 곧 제정신을 차리고 환불을 요구할 수도 있기에 우선은 조근조근하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수준에서 그쳐도 확실하게 고객을 붙들어놓는 것이 제일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설득의 논리를 이야기해준다. 그것도 상대방이 화가 나거나 당황하거나 이성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을 때를 예를 들어서 말이다. 이성적으로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뇌를 ‘영장류의 뇌’라고 부르고, 공포심에 휘둘려 이성적인 반응을 하나도 끌어내지 못하는 뇌를 ‘파충류의 뇌’라고 하고, 그 사이의 뇌를 ‘포유류의 뇌’라고 하는데, 우리는 공포심에 휘둘려 있는 상태에 있는 상관이나 고객, 혹은 부모님이나 친구를 만날 수 있다. 그때 치명적으로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득이란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원하지 않던 행동의 촉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상대편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나오게 하거나 나를 승진 혹은 입사시켜줄 수 있게 하거나 내 말대로 공부를 한다거나 방청소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기술이란 정말 유용하고도 또 유용한 기술이 아닌가 한다. 아마 그렇기에 이 책을 두고 「출간과 함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비즈니스 리더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는 좀 생뚱맞게 정신과 의사이다. 실은 비즈니스에 관련된 책이라고 해서 뜬금없긴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과 노하우 덕에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이 분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니 한 번 믿어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특히 저자의 말로는 어디 강연하러 가서 처음에 정신과 의사라고 소개하면, 특히 영업사원들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거나 강의장이 썰렁해질 정도로 냉대를 받는다는데, 그 모습이 5분을 넘기지 못한다니까 정말 믿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마크가 알려주는 설득의 기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에는 도입부가 지나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9가지 기본 법칙을 설명한 다음에, 어디에서든지 자유롭게 응용해서 구사할 수 있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12가지 기술과 또 난감한 상황을 해쳐나갈 수 있는 7가지 기술을 따로 알려준다. 완전히 팁을 선사해주기 때문에 바로 실생활에 쓰일 수 있어 좋다. 예를 들어, 기분이 나빠진 고객이든 상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을 아무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상대방은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서 그런 형태로 표현되었던 것인데, 이 때 나한테 상처를 주는 것으로 오해해서 잘못 접근하면(변명을 한다던가 설명하거나 설교하려고 들면) 이성의 뚜껑을 완전히 날려보낼 수 있으니까 공감의 전략을 사용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인정해주는 화법을 구사하도록 하는 것이 좋단다.

 

우선 상대방이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해내는 것을 꼼꼼히 듣고(정말로 듣고!!) 한 템포 쉬면 더 없냐고 더 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나올 불만이 없을 때까지 듣는 것이 중요하다. 흥분할 땐 이미 뇌가 ‘파충류의 뇌’로 이전해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이성적인 설명이라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감정적인 요소를 다 뱉어내게 한 다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몇 마디로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 상처받았다는 표시니까. 그런데 이 때 주의할 점은 상대방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가 되는 공적인 사람이라면 나도 감정을 객관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지만, 상대방이 나랑 너무 친한 사람 즉 배우자, 자식, 부모, 형제, 자매, 친구라면 자신의 감정 처리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9가지 기본 법칙에 나온 것을 잘 숙지해서 자신의 뇌가 ‘파충류의 뇌’로 이전해버리지 않도록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소연이 다 끝날 때까지 절대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다 들어준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일단 고마움을 가지게 되고, 여기에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한다고 공감의 표시를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마술적 패러독스’ 전략, ‘감정이입 쇼크’ 전략, ‘역방향 플레이’ 전략, ‘정말?’ 전략, ‘합의문’ 전략 등 정말 쓸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 순간적으로 ‘욱’ 할 때, 감정을 환기시키는 주문만 알고 있으면 자신의 감정도 다스릴 수 있고, 상대방의 헛점을 이용해서 감정을 다스리게 할 수도 있으니 관계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지침이다. 그 외에도 자신이 유명한 사람을 멘토로 삼고 싶을 때 상대방에게 자신을 알리는 방법도 있는데, 참 역설적이다. 유명인사가 하는 공개 강연회에서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질문 말고 강연자가 하고 싶어하는 질문을 잘 생각해서 질문해준다면 바로 그 강연자의 눈에 띄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나를 잘 보이게 하고 싶다면 자신을 포장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집중하라는 이것, 이것이 바로 설득의 기본 법칙이다. 상대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표현을 해주는 것이, 점차적으로 바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유명인일지라도 언제나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니까 말이다. 여기서 이런 말이 떠오른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주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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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신 (DVD 포함 고급박스 세트) - 방황하는 영혼을 위한 희망의 카운터컬처
티머시 켈러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구세주 장로교회」의 담임 목사인 티머시 켈러란 분이 명쾌하게 살아있는 신에 대해서 조목조목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해설해놓은 책이다. 아마도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들이나 신이 있어도 기독교의 신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회의론자들에게라도 충분히 명쾌한 해설이 나올 정도로 탁월한 명징을 보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는 있지만 신앙의 깊이가 얕아서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거나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성경의 많은 지식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신을,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신을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신적인 존재에 비해 발톱의 때만큼의 가치를 지닌 인간이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건 일단 신을 뛰어넘어서야만 가능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보고 이래서 신이 없다느니, 저래서 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하는 순환논법에 빠진 이 세상의 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티머시 켈러 목사가 나서 주었다. 그도 물려받은 기독교 전통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먼저 잣대를 세워놓고 그에 맞게 하나님을 끼워맞추려고 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본인이 먼저 많은 방황과 회의에 빠져 지냈던 그 시간들이 뒤늦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고통이나 방황은 무언가 고결한 이유가 없이 진행되지는 않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기독교를 삶의 원리라고 받아들인 나에게도 너무 귀중한 책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무신론자들에게 설명하지 못했던 점들과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또 한 가지 감사한 일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서 기독교를 자신과 관계없는 하나의 종교로만 생각하고 있는 분께 이 책으로 전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든다는 점이다.

 

실은 내 주변엔 내가 눈치챌 정도로 무신론자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없다. 물론 내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심판의 신은 믿지 못하겠다느니, 지옥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느니, 과학이 기독교의 오류를 증명했다느니,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고통은 있을 수가 없다느니, 사랑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지만 심판의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느니, 성경에는 기적이 많이 나타나기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느니 하는 회의를 가진 사람들의 속내가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앞서 나온 회의론자와 무신론자들의 속내를 하나씩 들쳐내서 그것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짚어준다. 이것은 켈러 목사가 다양한 가치가 가득한 뉴욕에 세운 정통적인 기독교회를 세우고 나서 예배 후에 많은 사람들의 의문에 대답해주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내 귀로는 들어본 적은 없지만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공감은 갔다. 그것은 아마도 나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답을 잘 못했던 가장 큰 질문,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편협한 것아 아닐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상당히 고마웠다. 답을 미리 말하자면 유일신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좀더 고결한 이상 - 원수를 사랑하라 등 - 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편협하다고 말하는 것자체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다. 「A를 믿는다」고 편협하다는 꼬투리를 얻었다면 「A를 믿는 것은 편협하다」는 것도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하나의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은 스스로 인식하지 않으려하지만 실은 신이 있다는 것은 은연중에 믿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것을 기대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인간은 (신도 믿지 않으면서 도대체 무슨 근거로) 허무맹랑할 정도로 높은 도덕원칙을 정해놓았을까. 만약 세상에 신이 없다면, 그래서 모든 자연의 질서 - 진화론의 자연도태 - 에 따라 인간 세상도 진행된다면 우리가 약자를 공격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도덕원칙은 모두 개인이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인신매매나 아동성학대나 노예제도에는 반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기독교에서 나온 진리라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 우리가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권 보장은 아직까지도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곳에서 인권 보장은 말도 안 되는 일일 수 있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할 수 있고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비서구권의 사람들에게 서구권의 논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쩌면 폭력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여러 기구나 사람들을 통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무언가 고결하고 높은 이상을, 그러니까 신께 더 가까이 가려는 이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장 통쾌하게 느껴졌던 대목은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반박이다. 그의 저서에는 사람들이 무언가 선행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 사람의 생존률을 높여주기 때문에 진화할 때 그런 습성이 인간 안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행에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가 휩쓸려 아이는 구하고 자신은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나오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행동은 자신의 종족 본능과 정면으로 상치되는 이야기일진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같은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논리가 헛점투성이라는 것은 간파해내고 있다. 대중들에게는 인기있는 책을 낼진 모르지만 학계에선 이젠 받아들여지지 않는 학설이니 우리도 홀려선 안될 것이다. 심지어 같은 무신론자인 토머스 네이글은 도킨스의 접근방식 -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해명은 분자물리학이나, 끈 이론이나, 물질계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지배하는 순전히 외연적인 법칙에 들어있다는 것 - 을 부정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오류는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총 2부로 나뉘어져 앞 부분에는 우리가 은연중에 기독교에게 가지고 있었던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뒤 부분에는 왜 여러 종교 중에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나와있다. 사실 여기서 말한 ‘종교’란 단어는 기독교랑은 어울리지 않는데, 그 이유가 정확하게 제시된다. 다른 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선생이 종교의 창시자이지만, 기독교는 유일하게 그 자신이 구원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먼저 간 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믿어야 하기에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란 말로 설명되어야 한다. ‘복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값없이 얻어지는 선물과 같은 것!!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한없이 겸손해질 수 있고, 한없이 베풀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에. 또한 그 어떤 고통에도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예수님이 더한 고통 속에 자신의 몸을 ‘영원히’ 던지셨기 때문에!! 그러니 세상의 모든 신들 중에서 인간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 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바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이 영적으로 무감각해졌던 사람들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을 믿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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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4-2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