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은 왜 변기에 사인을 했을까? - 명화로 배우는 즐거운 역사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 지음, 안토니오 밍고테 그림, 김영주 옮김 / 풀빛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미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에 관한 책이라고 불러야 옳다. 수백년의 미술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제목에 「뒤샹은 왜 변기에 사인을 했을까?」을 붙였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미술은 자연이나 사물을 혹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작업 흔적일 뿐이라는 정의에서 봤을 때 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은 고대, 그 이전 선사시대부터 자유롭지 않았는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탐구하고 갈구해서 무지에서 벗어나 두려움 없이 스스로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미술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자유롭게 세상을 탐구하고 분석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으로 쓰일 뿐인 것이다. 과거 중세 시대나 르네상스 시기에 초상화는 권력자들의 신분과 지위를 표시하기 위한 방법이 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미술가를 존재케 하는 방법으로서의 미술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이 말에 나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처음에 이 책을 봤을 때는 단지 미술사적인 초등학교용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단순히 선사시대의 벽화에서부터 크레타 섬에 있는 크노소스 왕궁의 화려한 벽화 , 그리스의 조각상과 로마의 초상화, 중세의 고딕양식이나 혁명가 조토, 원근법의 창시자인 브루넬레스키, 우리가 흔히 아는 라파엘로, 미첼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르네상스 화가들과, 바로크의 벨라크케스, 북유럽의 베르메스, 플랑드르의 루벤스, 인상파의 마네, 모네, 드가, 야수파의 반 고흐, 마티스, 세잔,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 뒤샹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만 따라가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사실의 나열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책도 첫인상만 보고는 모르다더니, 정말 그런 미술사적인 사실도 물론 담겨져 있지만 그보다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바탕에 깔고 있어서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였다. 분명 읽었는데 눈은 읽고 있는데, 책장은 넘겨졌는데,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온 것은 없는 듯한 느낌... 이 느낌이 줄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나를 따라다녔다.

 

글을 쓰면서 조금 정리가 되고 있는데, 작가를 보니 더욱 확실하다. 머리말에서도 '미술사를 살펴보자'란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고 뜬금없이 인간의 '창조력'을 깨워야 한다느니 하는 말로 나의 방향을 모호하게 했는데, 역시나 글쓴이는 미술가가 아니였다. 그저 철학자이자 작가, 교육자로서의 이 책을 썼던 것이었다. 어쩐지 말하는 뉘앙스가 이상야릇하더니만~ 책의 마지막을 보면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해서 미술관에 출품을 했고, 비평가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대중들도, 풍조들도 변기가 예술품인 것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만약 그 변기가 마네의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과 같이 결렬한 구설수에라도 오르내렸다면 뒤샹의 변기는 과연 예술품이 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과거처럼 예술품이 단지 눈에 보이기에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되고 누가 제일 처음 시도를 했는가에서부터 그 예술적 가치를 평가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쩌면 놀라울 만큼 인정하지만, 우리 인간이 선사시대에는 자유롭지 않았고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다소 현대인의 오만한 발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기본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증명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와, 인간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기본 개념 자체가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선사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인간들이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히려 과거가 훨씬 더 단순하고 살기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세식 화장실이나 스마트폰, 인터넷과 같은 문명의 이기는 없었겠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훨씬 덜 범죄하고 훨씬 덜 외로워하고 훨씬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싶다. 청소년들이 하루 24시간 중에 16시간을 스마트폰을 보면서 산다고 우려를 표명하는 신문기사를 봤는데, 그런 삶이 과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인류의 '자유'를 말하는 책이긴 하지만 선사시대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도, 더 많이 갖고도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미술사의 껍질을 덮은 철학이야기를 만나본 느낌이다. 나랑 생각하는 기본 방식은 달랐지만, 깊지 않게 미술사를 조망하는 데는 괜찮을 성 싶다.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딱 손에 잡을 듯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는 표현보다 모호하게 두리뭉실하게 뭉뚱그려서 설명하는 표현으로 내용이 채워져 있어서 그다지 썩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로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ㆍ단편을 발표해 문제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등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70~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 박범신 소설가의 수필이 발간되었다. 이는 2011년 7월 명지대학교 교수직을 비롯해 맡고 있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고향 논산으로 낙향해서 틈틈이 SNS ‘페이스북(FACEBOOK)’에 썼던 일기를 모은 것인데, 이 책의 끝자락 쯤에 이 책을 내게 된 경위도 담겨있다. 

 

논산에 훈련소만 있는 게 아니야. 조선 사대부의 기개를 지켜온 곳도 논산이고, 금강문화권의 중심도 따져보면 우리 논이었어. 사람들 참, 이리 오해가 깊으니 책을 낸다면 더욱더 지명을 꼭 제목에 넣어야겠네!

 

솔직히 나 또한 '논산'일기라고 해서, 훈련소가 있는 그곳에 무슨 문학적 감수성을 담아낼까 생각했다. 아마도 글쓴이가 박범신, 그이가 아니였다면 읽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렷다. 그러나 그이기에, 으레 사람들이 평가해대는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 서사가 어우러진 화려한 문체'로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소설가 박범신이기에 나도 읽어볼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책이라곤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촐라체』『비지니스』이번에 영화로도 등장하는 『은교』정도일까. 그러나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했다. 『은교』는 영화로도 보지 말아야겠단 마음을 먹은지 오래고, 다른 산악소설정도는 읽어볼까 망설이고 있는 수준이니, 아마도 그의 이야기를 읽어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한 독자일게다. 그래도 그 유명한 '논산'에서 문학적인 감수성을 뿜어낼 작가 한 사람을 알고 있는 것도 내 정신건강상으로도 좋지 않겠느냐며 나 스스로를 위안한다.

 

생각해보면 내게 책 읽기란 사회를 비판하거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아는 통로이거나 호기심 충족, 혹은 재미를 느끼기 위함 그 이상은 아니였다. 그가 페북에서 40번째 작품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생각을 갈무리할 때, 혹은 앞으로의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한 글쓰기를 고민할 때 나는 무척이나 많이 안일한 생각으로 책을 읽을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소설가를 '동경'하며, 다른 편으로는 세상에 뛰어들기보단 세상을 '관조'하는 그들의 비겁함을 조롱했던 것은 아닐런지. 뭐, 그래도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인간은 그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오롯이 그 상황을, 그런 처지를 이해할 순 없는 종족이니까 말이다. 내가 작가가 되어보지 않는 한, 항상 작가들의 고독과 고통을 가벼이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한번쯤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을 좀더 원숙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작가 군단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는 있다. 그들이 아니였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이 이 지구 땅에 살아 숨쉬고 있었는지도 영영 알 길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소소한 삶의 일상과 문학적인 갈망이 어우러진 글이 처음보다는 많이 재미있고 쉽게 다가오긴 했지만, 한 가지 불만인 것은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이니 이렇다고 말할 계제는 아니지만,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내적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작가' 종족들은 아니, 넓게 말해서 '영혼이 자유로운 종족'들은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운 영혼을 드러낼 수 없고, 심각하게 현실에 대해 토로할 수 없고, 문학에 대해 교류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의문을 가져본다. 요즘 세태는 이상한 표현을 통해, 예를 들면 '취중진담'이란 표현을 통해 취해 있을 때가 더 자유롭고 진실한 내면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만, 나는 아니라고 확언한다. 술에 기대야만 할 수 있는 말 정도로면, 그 정도의 자신감밖에 없다면 평생 입 밖에 내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예술을 논한답시고 흥청망청 혹은 적당하게 취기가 올라올 정도로 취해있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맨 정신으로는 사람을 혹은 예술을 사랑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혹은 맨정신으로 바라봤을 때 상대가 아름답지 않아서, 보아 넘겨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교류하는 것이야 기쁨이 넘치는 일이지만, 그 사이에 왜 술이 끼어야 하는지는 정말 이해해줄 수가 없다. 좀 까다로워 보이지만, 페북에 한 장 걸러 한 번씩 '술'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첨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전남 편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이지누 지음 / 알마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정말 편견이 무서운 듯 싶다. 폐사지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듣고서 이 책을 선택한 것도 난데, 이 책을 보자마자 지은이의 말이나 행동이 너무 감상적인 것 같아서 짜증이 났었다. 그래서 책을 한동안 못 읽고 있었는데, 웬 심경의 변화인지 다시 펴들고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과 운치있는 절터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오롯이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참 변덕이 죽 끓듯 하다. 이번 책은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 전남편」이다. 전라도는 나와는 한 번도 인연이 닿지 않아서 갈 기회가 없었던 곳이고 그런 연유로 인해 항상 가고픈 고향이다. 이렇게 책으로나마 접해보는 전남편이지만 그 풍경과 향취가 그립다. 책 표지에도 표기되었듯이, 글과 사진이 모두 지은이 이지누 씨의 작품인데, 다른 여행서와는 다르게 적재적소에 사진이 등장한다. 그런 책을 읽다가 제일 짜증났던 때가, 글로는 맛깔스럽게 묘사해놓은 부분에 대한 사진은 항상 빼먹는 책들이다. 특히 해외여행서들은 그런 경향이 다분한데, 아마도 이 책은 단순한 여행안내서나 여행기라기보다는 꼼꼼한 눈썰미가 필요한 답사기이기 때문에 달랐던 것 같다. 답사기에는 어디로 갈지 어떤 절을 먼저 이야기할지 등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정서도 분명히 반영하겠지만, 문화유적에 대해서는 사진과 글로 꼼꼼히 기록해놓은 듯하다. 그래서 내 맘에 쏙 들었다. 앞부분에는 탑이나 부도탑, 혹은 탑의 한 부분인 귀부나 이수와 같이 아주 자그마한 유적일지라도, 그것이 그곳에 절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니 무늬나 기법까지 세세하게 묘사해놓으면 뒷장에는 어김없이 그것에 대한 사진이 등장한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방향에서 문외한이 이해할 수 있는 각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진도 금골산 토굴터, 장흥 탑산사터, 벌교 징광사터, 화순 운주사터, 영암 용암사터, 영암 쌍계사터, 강진 월남사터, 곡성 당동리 절터, 무안 총지사터로 총 아홉 개의 절터를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자연과 항상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던 절이란 곳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해본 적조차 없던 내게 이 책은 절도 사람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 살아숨쉬는 이야기가 그리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징광사터의 이야기에선 조선시대에 와서 각 절마다 종이 만드는 부역을 과도하게 강제로 시키곤 할당량을 못 채우면 돈으로 거둬가는 일들이 많이 벌어져 결국 중들이 그 부역을 이기지 못해 도망가고 폐사된 절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중들의 삶이 그리 만사형통하지는 못했을 것이란 생각은 했어도 이렇게 강제 부역에 동원될 정도로 배려가 없었단 사실이 정말 놀랍고도 안타까웠다. 모든 절의 행정이 시주로 이루어지는데 그들이 무슨 돈이 있으며, 또한 속세를 떠나 도를 닦으러 들어왔지만 오히려 속세에 이용만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자행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유학자들의 속내가 정말 추악하게 느껴졌다. 물론 고려 시대에 승승장구하던 불교가 변질되어 정말 추악하게 변해버린 많은 중들도 있었을 줄 상상되지만 힘없다고 아예 깔아뭉개는 짓은 정말 아니올시다다. 게다가 용암사터에서는 중들이 일개 종들처럼 절에 놀러오는 유학자들의 가마꾼 역할까지 해야 했다니 정말 끔찍하다. 오히려 먹는 것이라도 든든하게 먹고 살고 팔자 늘어지게 살아가는 유학자들은 제 발로 산에 오르면 다리에 뿔이라도 나는가 싶다. 아무리 유학자들이라도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른단 말인가. 

어쨌거나 여러 사연들이 구비구비 들어가는 절터에는 항상 생동감이 넘칠 수 밖에 없다. 언제 절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여염집으로 바뀐 구슬픈 사연도 있지만 분명 절터였으나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인해 절터가 아닌 절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사연도 있다. 그곳이 바로 화순 운주사터인데, 황석영 소설가의 《장길산》으로 인해 절터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이상하게도 법당이 없고 그저 중간 중간 탑들과 더러 더러 깨지고 목이 잘린 혹은 목만 남은 돌불상만 군데 군데 위치할 뿐이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운주사터는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었다. 부처님께 공양하러 온 절이 아니라 민중들의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장소라서 그런지 이 운주사터는 초파일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추석 5일 전후라고 한다. 그것도 신기하고 새로울 뿐이다. 절이나 절이 아닌 그런 곳이라니, 아름답지 않은가. 이런 책을 보고 어디론가 가보고 싶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장길산》을 읽고 운주사터로 떠나가볼까 싶다.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전라도이니, 겸사겸사 기회가 참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산주유소 - 가격보다 확실한 감동
문성필 지음 / 시간여행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회사가 아닌 주유소가 성공적인 마케팅의 사례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이런 류의 책은 많이 읽었고 재미도 있었지만 계속적으로 읽기 싫었던 이유는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만 같은 결과, 혹은 비슷한 결과라도 나올 수 있는데 그 선을 넘기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그런 책은 한두 권만 봐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 책은 사회적 인식조차 너무나 낮은 주유소에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10원, 20원에 연연해하는 석유값을 버리고 서비스를 택할까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중졸이나 고등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많이 하는 일개 주유소직원을 아르바이트가 아닌 정직원으로 해줄 수 있었을까. 일단 사장의 마인드가 정규적이고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직원들인데 직원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궁금했다.


실제로 열심히 살았고 그런 이유로 높은 수익을 올리다가 점차적으로 우후죽순 생기는 다른 주유소와의 경쟁에 밀려 수익성이 떨어질 때쯤, 자신이 그저 밥벌이의 도구로 생각했던 주유소 사업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를 임대해서 돈 벌라는 제안을 받았기에 생업의 기로에 서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다 엎고 다시 할 생각을 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탓에 지금 하고 있는 주유소를 다시금 바꿔보자는 마음을 먹고, 잘 된다는 다른 주유소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강남의 여럿 주유소를 답사하고 나서 하나씩 적용해보기에 이르렀는데, 사람이 많으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쉽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파격적인 사은품 행사에, 정량 왁스와 세제를 쓰는 5만원 이상 주유시 제공하는 무료 세차는 인기리에 사람을 불러모았고, 인사를 하는 것부터 응대법부터 하나씩 교정해가는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4번 인사하는 것이었는데, 손님이 오면 그제서야 부리나케 달려나가서 사람을 맞고 시동을 끄고 나서 다시 더 오라고 하기도 하는 등의 불편함을 초래하지 말고 이미 입구에서부터 인사로 손님을 맞이하면서 주유기까지 인도하고 얼마큼 넣을 것인지 물어보면서 또 인사하고 돈 받으면서도 또 인사하고 나가는 길을 호위하듯이 모시면서 뒷꽁무니에 또 인사하는 식의 4번의 인사를 정착시키는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서비스 업종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생각하면 친절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얼마나 직원들간의 호흡이 맞느냐, 얼마나 직원 스스로 그 일을 즐기느냐에 따라 그 서비스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육체적 노동이 중심이 되는 주유소에서는 아무리 사장이 잘 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하고 호흡이 맞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두 명씩 팀을 정해 먼저 사장이 솔선수범을 하면서 시범을 보이면서 직원들의 마음을 얻으니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 이런 독특한 인사가 고객의 마음을 얻어 고객에서 진심 어린 칭찬을 유발하니까 더욱 더 힘을 더하게 되어갔다. 이 때부터는 다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순풍에 돛 단듯 잘 이루어졌다. 계속적으로 능숙한 고품질의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근속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규직을 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말해놓고 그렇게 월급을 올려주기 위해 수익비용을 나누어서 직원에게 공개하고, 적어도 25만원씩은 더 줄 수 있을 것이란 소식이 들리자, 모든 직원들은 즐겁게 스스로 일하기 시작했다. 장기 근속자로 채워진 이후에는 독특한 유니폼을 구비해서 소속감과 흥미성을 주었고, 그 이후에는 비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자발적으로 모든 사업장 비품은 돈이고, 비용임을 인지하지 스스로 절약하는 효과까지 볼 수 있었다.


휘발유가 단지 돈 벌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생계와 사랑과, 우정을 전해주는 도구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아낌없이 베풀기 위해, 또한 지역사회와 같이 소통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니 충분히 성장가능한 모습이 그려졌다. 이를 시작한 사장님도 대단하지만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같이 흥겹게 일해가며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그의 직원 또한 만만치 않게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 사장은 직원의 마음을 움직여, 고객의 마음까지도 훔칠 수 있었기에 진정한 리더가 아닌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앞부분에서 보았던 헬렌 켈러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룰 수 없던 사랑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것이 성인으로 남아있길 바라는 어머니의 반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물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 수 없었을지는 몰라도 충분히 이성에게 사랑받으며 사랑하며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닌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반복하며 읽었던 짤막한 어린이용 위인전이 헬렌켈러에 대해 읽었던 책의 전부여서 이번에 읽은 평전은 정말 그 의미가 크다.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학을 졸업했고 좋은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는 것, 수많은 강연을 통해 장애인들에 대해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고 후원금을 모으며 다녔다는 것, 여러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시각-청각 장애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 책은 헬렌이 난폭했던 어릴 때 갑자기 얌전한 학생이 되어 배움에 목마른 학습자로 바뀐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쳐질 것을 두려워했던 것 때문이고, 어릴 때 썼던 동화로 인해 표절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고, 앤 설리번 선생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과, 헬렌 켈러가 마르크스 사상에 동조했고,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 다양한 일도 알게 되었다.

헬렌 켈러의 인생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라면, 앤 설리번 선생님이 펌프에서 쏟아지는 물을 만지게 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 책에도 그 장면에 그런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데, 실제로 헬렌 켈러는 그 장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지 멀쩡한 나도 어릴 적 사건들이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어릴 적 경험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헬렌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내 경우와 그녀의 경우는 뭔가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어가 있어서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인지, 생각이 있어서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뭔가 고차원적인 의문이랄까. 헬렌이 어릴 적에 아무것도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을 때에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그저 '무'의미한 것이 되었지만 그녀가 어떤 것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생각과 같은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언어가 있어야 사고가 가능한 것인지, 사고를 먼저 하고 나중에 언어가 생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일화를 통해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역설해주었다고 본다.

요즘에는 시각장애인이든 청각장애인이든 시각-청각 장애인이든 헬렌 켈러만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며 살아야 하지는 않는 것으로 안다. 뒤에도 나왔듯이 헬렌은 평생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다른 시각-청각 장애인 즉, 로버트 스미더스나 레너드 다우디는 소리를 정상적으로 낼 수 있어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만약 헬렌이 일곱 살이 아닌 좀 더 일찍 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서 어릴 적에 사물의 '이름'을 깨닫고 좀 더 빨리 소리를 내는 법, 즉 발성하는 법부터 배웠다면 헬렌의 삶이나 앤의 삶이 그렇게까지 고독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헬렌에게는 앤 설리번 선생님이 있었기에 그녀가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고, 앤 설리번에게도 헬렌 켈러가 있었기에 그녀의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에도 사회생활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앤이 헬렌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려고 했다거나 성인(聖人)으로 만들려고 조작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성격적으로 원만하지 않았던 앤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런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그 시대는 정상적으로 장애인을 교육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던 때였기에 헬렌의 경우에 앤 설리번이 아니였다면 그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할 것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어떠한 평가를 하더라도 헬렌의 경우에는 앤 설리번의 기여와, 그리고 앤 설리번 선생님의 사후에 헬렌을 돌보았던 폴리의 헌신을 빼고는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이면서 그렇게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신체를 가진 사람은 없었기에 헬렌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장애를 가졌다고 하면 독특한 집착이나 행동을 보이면서 외형적으로도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헬렌은 어릴 때부터 너무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이였기에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소녀로 만들어져온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 앤과 폴리가 죽은 후에 위니가 보살피면서 밖에서 핫도그를 사먹으며, 의사가 먹지 말라고 한 마티니도 홀짝거리면서 자그마한 자유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남긴 것은 누구의 도움을 받았건 위대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녀가 책을 13권이나 쓰고 영화도 두 편이나 찍은 것을 알고 있는가. 짤막한 2시간 동안의 강연을 하기 위해 강연원고를 쓰고 다듬는 데에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데, 책을 무려 13권이나 쓰다니. 정말로 헬렌은 천재가 아니라 노력의 대가였던 것 같다. 워낙 영문학에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앤도 글쓰기에 재주가 있었다) 그런 노력을 했던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싶다. 물론 처음이나 계기는 협회나 앤의 권유가 있었겠지만 스스로 글을 쓰지 못한다면 길고도 고통스러운 그 일을 서슴없이 하려고는 하지 못했을 텐데, 정말 대단한 노력가이다.

말년에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장애인과 반핵을 위해 세상에 호소하는 강연을 쉬지 않고 했던 것은 그녀 안에 있는 에너지가 결코 한 사람의 분량이 아니였기에, 이 세상 전부를 감싸안아도 될 만한 것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이 장애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베풀라는 말이 큰 울림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사람마다 얼굴에 생기가 있고 표정이 풍부하지만 뭔가 하나가 빠져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본연의 더러움, 악이 아니었을까. 선천적으로 누구가의 배려와 도움을 구해야 하는 입장에서 교만함이나 이기심이 만들어지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말이다.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왕 일어난 비극적인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평생을 그렇게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헬렌이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