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입학식 -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키워드 한국문화 4
김문식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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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가 그의 스승인 대제학 남공철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왕세자: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남공철: 저하, 이 물음은 참으로 종묘사직과 신민들의 복입니다. 세자께서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 성인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하는 뜻이 있으니......요임금도 될 수 있고, 순임금도 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왕세자: ......효도를 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남공철: ......다만 덕을 닦고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또한, 수신은 제가, 치국, 평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효도하는 큰 근본으로는 이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13p)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아홉살바기 어린 아이가 그 꼬물대는 입으로 저런 말을 했다니 그것을 상상하는 나로선 대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나인들 스승에게 저렇게  질문할 수 있겠으며, 스승이 저리 대답하시는 바를 다 알아 들을 수 있었을까? 책을 다 읽고나니 새삼 조선시대 입학례는 성대하기도 했거니와 엄숙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사람들 일생에 있어 평균 3~4번의 입학을 한다고 치면 과연 저런 입학식을 단 한번이라도 치뤄 보겠는가? 싶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책의 저자가 중국의 입학례와도 비교하는 글을 썼는데, 확실히 우리나라가 중국 보다 조금 더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배움을 중하게 여겼다. 그중 특이한 건, 왕실과 관련된 모든 행사는 다 궁안에서 치르되 이 왕세자의 입학례만큼은 궁이 아닌 성균관에서 치뤘다고 한다. 그런 것만 봐도 왕세자의 귀한 몸이라고 해도 배움에 관해서는 엄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저자는 이책을 통해 조선 왕실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줬다. 왕세자의 입학례는 주로 10세를 전후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물론 조선 왕실을 거쳐간 모든 왕세자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수한 사례도 있어 20세를 훌쩍 넘겨 입학례를 거행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광해군은 23세 때, 효종은 27세, 영조는 29세가 되어서야 입학식을 거행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광해군은 전쟁을 치르느라, 효종은 형의 사망으로 후에 왕위 계승자가 되느라 늦어졌다고 하니, 이 왕세자의 입학례도 역사의 부침을 타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 핍궁한 궁안의 살림에 왕세자의 입학례를 두고 의복 조차도 갖출 수 없어 이를 두고 중국에 도움을 받을까를 의논했어야 했다는 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라 안팎의 사정을 고려하여 그 사안은 없던 것으로 했다고 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거창한 형식 보다는 입학례의 정신을 더 뜻깊게 생각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고 왕세자의 입학례가 거창하고 화려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의식이 거행되는 중 왕세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예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퍽이나 소박해 보인다. 제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예물은 술과 육포 정도였다고 하니 소박하지 않는가? 그래도 입학례가 끝나면 그 배움의 길이 가히 고행이다 싶다. 무엇보다 아무리 왕세자란 고귀한 신분이라도 그 신분이 스승 보다 높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왕세자는 스승의 말에 절대복종 해야 했다.  

사실 왕세자의 스승이란 신분은 왕 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어찌보면 절대성역이란 생각도 든다. 오죽했으면 그 시대는 제자의 책이 스승의 그것과 같은 높이에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즉 스승은 책상에 책을 놓고 볼 수 있어도, 제자는 책을 바닥에 놓고 볼 수가 있었다. 이에 몇 세대에 걸쳐 몇몇의 왕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생각하여 이 부분을 개선해 줄 것을 건의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관례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켜야할 예법이라며 왕의 건의도 묵살했다는 것이다.(키워드 속 키워드6)  

이것은 확실히 명암이 있어 보인다. 사실 처음에 나는 뭐 이런 걸 가지고 왕과 왕세자를 가르치는 선생 사이에 마찰이 있는 것인가? 좀 더 큰 대의를 가지고 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국회의 당파들의 싸움이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던가?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면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도 크게 보고 부풀리고, 이슈화 하는 것 알고 보면, 이런 것은 그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역사에서부터 나온 것은 아닌가? 그래서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닌가, 혼자 씁쓸해 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 책상 없는 공부를 감히 생각해 볼 수나 있는가? 그러나 그 시절엔 그렇지가 못했을 것이다. 역사란 오늘의 시각해서 새롭게 해석은 할 수 있지만, 또 가급적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태도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즉 왕세자의 스승들이 반대했던 건 그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지 않는가? 조선시대는 특별히 유학의 시대로, 군신간의 예의, 사제지간의 예의를 귀중히 여겼다. 이런 것은 오늘 날의 후대 사람들이 배울만한 덕목이 아니던가? 

스승의 권위가 얼마만 했는지는 <예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거기에 보면,  

   
  모든 사람이 국왕이지만 국왕이 신하로 대접할 수 없는 경우가 두 번 있다. 하나는 제사를 지낼 때의 시동인데, 제사에서 시동은 조상의 신주를 대신해 앉아 있기 때문에 조상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다른 하나가 바로 국왕의 스승인데, 스승은 국왕의 신하이기는 하지만 함부로 대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를케면,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에는 국왕에 필적하는 지위가 있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절을 올려도 왕세자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승에 대해서는 반드시 답례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대리청장을 할 때에도 스승에 대한 예우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04p)        
   

 그러니 왕은 차마 왕명으로도 아들에게 책상 하나 놓아줄 수 없고, 스승 또한 왕의 말이라 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 시절 제자된 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닐 성 싶다. 

또한 조선 시대는 장유유서의 윤리가 강했던 시대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배우는 자리 역시 나이순으로 서로가 자리를 양보해서 나이 많은 사람이 좀 더 좋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여기엔 왕세자나 왕세손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역시 배움에 있어서 특권 의식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청개구리는 있게 마련이다. 선조 때 이해수란 한 유생이 이에 반기를 들었다고 한다. 장유유서가 아닌 성적순으로 앉자고. 이에 그 이름도 유명한 이이 선생께선 "장원을 높이는 것은 동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에서나 시행하는 하는 것입니다. 성균관은 인륜을 밝히는 곳인데 어떻게 장유유서를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장원이 어떻게 왕세자 보다 높겠습니까? 옛날에 왕세자가 입학하면 나이 순으로 앉았으니 장원은 따질만한 것이 못 됩니다."(105p) 라며 그 의견을 묵살하였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이 이해수란 사람 장원을 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이런 교묘한 의견을 냈던 건 아닐까? 그가 만일 오늘 날, 우리나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실정을 본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그런데 이렇게 왕세자의 입학례도 순종의 입학례를 끝으로 그 전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한일합방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앞서도 말했지만 전통적인 우리나라 교육은 전인교육에 바탕을 둔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라고 입신양명을 위해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왕세자 입학식만 봐도 옛 조선시대 학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것은 오늘 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린 과연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할만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왕세자 입학식은 읽기만 해도 진지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나라 교육은 열의는 있어도 진지함은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교육에 장유유서의 윤리가 어디 있으며 예의와 법도가 어디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이렇게 얉은 책으로 나마 옛날의 입학식의 의미를 되새겨 봤다. 하지만 앞으로 100년, 200년 후, 우리는 후손들에게 지금의 입학식과 교육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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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3-0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인 성'이라는 한자에 귀이가 들어가는 것은...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랍니다.
아래 삐침이 몸을 기울이는 모양이라고 해요.
남에게 귀기울일 줄 알고, 말을 조금만 하는 사람...

stella.K 2010-03-05 11:16   좋아요 0 | URL
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