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 톰스 캐빈 아셰트클래식 2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그림, 마도경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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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제도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오긴 했지만, 지금도 인간을 사유 재산으로 본다는 게 충격적이긴 하다. 어떻게 인간 고유의 가치를 사유화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노예를 다룬 이야기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학교에서야 그냥 지식으로 들어 넘기고 실제로 노예를 다룬 이야기는 영화 <뿌리>를 접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서구에서는 노예제도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엔 오랫동안 '노비제도'가 있었다. 어린 시절 <뿌리>를 보면서 과연 서양의 노예제도와 우리나라의 노비제도가 무엇이 다를까? 인간을 사유화하기는 똑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나쁘기로는 서양의 그것이 나쁜 것일까? 우리나라 노비제도가 더 나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더랬다. 모르긴 해도 서양의 노예제도가 조금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서양은 적어도 자기 동족을 노예로 삼지는 않지 않으니까.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양반과 천민이 구분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민중 대다수는 그렇게 노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랄하기로는 서양과 우리나라 중 어디가 더 악랄할까? 그때 내 옆에 누워 자던 언니는 그야 당연 서양이 더 악랄하지라고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언니의 비논리적이면서도 팔은 안으로 굽는 막연한 애국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누가 감히 가늠해 볼 수 있을까? 그것은 그 시대를 몸소 겪어 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억압 받고, 착취 당한 것은상처 그 자체이므로 정도의 차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의문은 정말 우문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묘한 반감이 있는가 보다. 아주 오래 전,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영화라 기억엔 거의 없지만, 백인 소년 영웅 만들기? 뭐 그런 것쯤으로 기억이 되는 것 같다. 처음엔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인간 승리의 영화는 다 감동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백인 소년 하나가 승리함으로 인해서 주위의 흑인들이 더불어 복을 누린다는 그런 식의 설정이 다시 생각해 보니 꽤 못마땅했다. 그것을 알고는 당시 이 영화를 보고 열광했던 사람들에 대해 나는 냉소하다 못해 조소를 날리곤 했다. '영화를 볼 줄 모르시는구만. 쯧쯧.'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바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결국 이 책이 노예해방에 도화선이 됐다곤 하지만, 그래서 결국 그것을 이루어냈지만 하지만 백인들에 의해 노예제도가 만들어졌으며, 백인에 의해 그것이 폐지가 된 것이 아닌가? 나름 클러어한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왜 흑인에 의한 해방은 없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신들의 치욕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미국의 역사는 아니 흑인의 역사는 다시 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흑인의 역사는 지금도 베일이 가리워져 있다는 게 좀 아쉽다. 

이 책이 성경을 토대로 씌어졌듯이, 성경에 의해 노예제도가 만들어지고 성경에 의해 노예제도가 폐지가 됐다는 것은 확실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두고 '몽학선생(?)'이란 말을 가끔 하곤 하는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한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다. 성경, 그 거룩한 책을 두고 누구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 하지만, 누구는 거기서 진리를 발견하고, 사랑과 평등을 발견하지 않는가? 결국 성경으로 인해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책은 참 착하게 씌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황은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평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개인의 성향이기도 하겠지만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도덕적 가치나 연민의 태도 등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사실 난 톰의 삶에 대한 태도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노예가 됐다고 다 불행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향 아프리카는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라고 했을 때도 톰만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사실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귀속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보면 불명예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톰은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거기서도 인간의 사랑과 정의를 꽃피웠다. 그런 삶의 태도가 비난 받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하겠는가? 바로 톰은 실제인물이며 저자로 하여금 영감을 줬다고 하지 않는가? 기억할 일이다. 나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며 어떻게 세상을 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노예해방은 백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느 작은 흑인 노예로 부터 시작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이제 200년이 흘렀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해방은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노예는 폐지됐을지 몰라도 인간의 착취와 억압은 지구 어디선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종차별에서도 자유하지 못하다. 200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 또 나와 줄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 내용은 달리하지만 그 형태는 반복된다. 그래서 우린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진정한 인간해방의 노력은 여전히 펜 끝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인간의 정신을 갈고 다듬는 노력은 계속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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