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누리 교수의 강연을 영상으로 보고 뼈아픈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이 드러났을 때 우리 국민들의 광화문 촛불시위는 전 세계에 울림을 주었다. 평화적이었지만 그만큼 더 강력했던 시민들의 민주적인 행동. 기존에 잘 알려져 있었던 기적과 같은 한국의 경제성장뿐 아니라 민주주의도 세계적인 수준임이 확인된 것이다.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이자 독문학과 교수인 김 씨에게 독일의 유력 언론사도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기쁘게 응했다. 4.19와 5.18등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싸웠던 우리 국민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그러나 인터뷰하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는 점이 사실상 모순적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제대로 성취되었다면 반복해 싸울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기적을 만들었지만 각자가 집에 돌아갔을 때 그 민주의식은 힘을 잃었을 거라고.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권위적인 선생님으로, 고압적인 상사로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처럼 그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을 애초부터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유할 필요 없는 기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의대 쏠림 현상이다.-근본적으로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미쳐있는]을 읽으며 페미니즘의 거듭된 물결도 비슷한 이유로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투표권도 생기고 정치계에도 발을 들이는 등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지만 여성들의 현실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끊임없는 백래시의 공격과 내부의 분열로 여성해방운동가들은 지치고 거듭 불의한 현실, 한계를 체감했다.
서른다섯의 오클라호마대학교 법학 교수 애니타 힐은 백인으로만 구성된 상원 법사위원회 앞에서,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평등고용기회위원회에서 그녀의 상사인 대법관 후보 클래런스 토머스가 그녀를 성희롱했다고 증언했다. 힐은 그의 제안을 거부했는데도 그가 집요하게 수간, 그룹 섹스, 강간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토머스가 일어나서 " 잘나가는 흑인에 대한 최첨단 린치 행위" 라고 하면서 이 증언을 비난하자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사법위원회의 공화당 의원들은 기이하게도 힐에게 반대하며 영화 [엑소시스트]를 상기시켰고, 그녀가 증언한 그의 빈정거리는 발언이 그녀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 틀림없다고 넌지시 주장하려고 그녀의 "성욕이상증"을 언급하기도 했다. 372
이 사건은 1991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은 33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일들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발은 미디어와 정치계의 비난으로 역공을 맞이해야 했다.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냈음에도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함부로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 애니타 힐은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성희롱에 맞서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여성들에게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분명 힘을 불어넣었다.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나도 감동을 느꼈다. 이후 많은 여성들이 더는 참지 않기를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안희정을 고발한 김지은,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2차 가해와 무고라는 비난, 갖은 인신공격을 당해야만 했다. 김지은 씨는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글로 당시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 선택했던 첫 번째 말하기가 극심한 고통을 주었기에 한참을 주저했다. 그러나 거짓이 횡행하는 상황을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김지은입니다.
이 모든 주장은 상식적으로 진위 여부의 확인이 가능한 허위 증언들이었지만, 재판의 증언들은 언론에 그대로 중계되어 대중에게 알려졌다. 사실 확인은 전혀 없었고, 일방 적인 주장이 사실처럼 전달되었다. -김지은입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여성들은 이런 일들을 보며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한다. 하나는 '저 봐. 저렇게 말해봤자. 소용없잖아? 오히려 마녀사냥이나 당하고. 나는 그때 참기를 잘했어.'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당당히 맞서다니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나도 저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생각이 모두 들 수도 있다. 적어도 '다른 대안'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중요하다.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침묵"과 대면했던 이 3주 동안 로드가 가장 후회했던 것은 그동안 침묵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개인적인 자각은 ("내 침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로 변형되었다. "눈에 띄는 일에 대한 두려움, 가혹한 시선과 어쩌면 비판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지만, 말의 자유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이 되어준다. 그것은 말이 "우리 사이의 차이들을 잇는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리고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나 많다. " 316 ,여전히 미쳐있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교육이 근본부터 바뀌지 않는 한 늘 위태로울 것이다. 능력주의와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때로 변화는 외부로부터 온다. 늦었지만 미국도 대학 입시제도를 바꾸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많은 대학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환경 역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앞으로의 세대는 기존 세대에 비해 환경의 역습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스스로를 계속해서 확장해왔다. 역사상 이런 운동이 있었던가? 인종차별, 반전시위, 강압적 이성애, 발전주의와 지구 온난화의 위협, 동물권에도 공감하고 페미니즘과의 교차점을 찾았다. 많은 문제가 실은 서로 얽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거듭된 투쟁과 학습의 결과다. 물론 불가능했을 테지만 만일 문제가 예전에 해결되었다면 여성운동가들이 이런 확장, 연대, 교차점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페미니즘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차고 넘치는 남성의 역사와 말하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여성의 시간들. 지워졌으나 결코 비워져 있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일부 살려낸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은 많은 여성들에게 대안의 지도가 되어주었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그 두 번째 책 [여전히 미쳐있는]을 통해 전작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와 이후의 시기 여성작가들의 삶과 투쟁, 연대기의 명과 암을 써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기만적인 '자기초월'보다는 '연대의 확장'을 거듭 시도한 이들의 역사는 무엇보다 희망적이다. 사람들의 의식을 흐리는 신자유주의의 파괴력 앞에서 자기 착취에 빠져 전쟁과 불평등을 키우는 현실정치의 대안은 페미니즘이다.
사진작가 신디 셔먼의 작품
*[여미쳐]에 언급된 작가들의 책인데 대부분 친숙한 목록들이고 (이게 다 '여성주의 책 함께읽기'의 리더이신 다락방님 덕분!) 누스바움은 이번에 신간이 나왔길래 넣었다. 내년에는 이 책들을 꼭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