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지고한 목적들이 창궐하여 영혼을 살리겠다며 육신을 죽이는 특권을 부여받은 시대가 도래했다네. ㅡ바이런


2차 세계대전 후 공산주의 세력과 프랑스,영국,미국의 감시 아래 혼란한 정치 상황에 놓인 베트남. 여러 세력 간의 이권 다툼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폭격과 살육이 난무하는 가운데 영국에서 파견된 종군기자 토머스는 파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파일의 약혼자인 베트남 여인 후엉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데 사실 후엉은 죽은 파일과 약혼하기 전 토머스와 연인 사이였다. 이 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남들에게 가져다주는 고통을 감지할 능력이 없었던 그는 스스로에게 닥칠 고통이나 위험을 상상할 능력 또한 없었다.142



시간을 거슬러 파일이 죽기 전. 영국에는 토머스가 두 번째 바람을 피우고 있음에도 가톨릭 신자인 이유로 이혼해 주지 않는 아내가 있다. 게다가 그는 이제 젊지도 않고 가진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후엉과 함께 하는데 익숙해진 토머스 앞에 혈기왕성한 미국인 파일이 등장한다. 파일은 함께 한자리에서 첫눈에 후엉에게 반해버린다. 토머스보다 자신이 후엉에게 더 해줄 것이 많다고 자신하면서. 이 삼각관계에서 토머스와 파일의 실랑이가 시대 상황과 맞물려 블랙코미디처럼 펼쳐진다. 파일의 저돌적인 면모는 그의 이상주의와도 닿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베트남의 제3세력인 테 장군을 돕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결국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어린아이까지 희생당한 참혹한 현장 앞에서도 구두에 묻은 피를 걱정하는 파일의 모습에 토머스는 경악한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직업적 가치관에서도 방관자를 자처했던 토머스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레이엄 그린의 책이 신간으로 나왔다고 해서 반사적으로 사 두었는데 시간이 조금 더 흘러도 후기가 많이 올라오지 않아 기대하지 않았다.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얼른 읽고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이럴수가...너무 재밌게 읽었다. 요즘 이스라엘 전쟁으로 관심이 쏠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싸움은 언론에서 잊히고 있다. 언론이 조명하든 하지 않든 전쟁은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전시상황을 목격하면서 어디까지가 그들의 전쟁이고 어디서부터 목격자들의 책임인지 분간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을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이념전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토마스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순진함으로 비롯된 광기든 악의적인 폭력이든 결국 다수의 침묵 아래 가능한 것 같다.



일주일처럼 길게 느껴지는 밤을 함께 보냈건만 그는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차라리 날 그냥 내버려 뒀어야 해요."

"그랬다간 후엉을 볼 면목이 없어지잖아요." 그가 말했고, 후엉의 이름은 은행 독촉장처럼 내 마음에 걸렸다.249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는 시각을 반영하고, 그것은 고상하게 왜곡된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셈이었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명예의 속성을 상실하고ㅡ용감한 행위는 겨우 두 명의 관객을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고 그냥 추억에만 매달리는지도 몰랐다.250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11-30 17: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재밌죠?! 근데 표지가 잘못한 책 같기도…. ㅋㅋㅋㅋ

미미 2023-11-30 17:20   좋아요 2 | URL
네!! 이거 읽고 <코미디언스>바로 주문했어요ㅋ 그러고 보니 표지 때문에 많이 안 읽는 것 같아요ㅋㅋㅋㅋ

새파랑 2023-11-30 18: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혹시

토머스가 파일을 죽였나요? ㅡㅡ

이 책 좋군요. 저도 표지 때문에 안샀습니다 ㅋㅋㅋ

미미 2023-11-30 19:00   좋아요 3 | URL
너무 티났죠? ㅋㅋㅋㅋ
재미,감동,슬픔,통찰,... 이 소설에 담기지 않은 게 없었어요.

제가 올해 읽은 소설 중 탑3 안에 듭니다.ㅜ.ㅜ

새파랑 2023-11-30 19:05   좋아요 1 | URL
오호 그정도시라니~!! 저 이사가야되서 요즘 책을 안사고 있는데 요건 사야할까 봅니다~!!

다락방 2023-12-01 10:21   좋아요 1 | URL
올해 읽은 소설 탑 쓰리 중 한 권이라고요?????????????????????????????? 아 또 흔들리는 내마음.

그러면 그 세 권 모두 공개해주세요!! >.<

미미 2023-12-01 13:04   좋아요 0 | URL
네!!ㅋㅋㅋㅋ12월에 올려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소설 토머스의 기만적인 사생활이 좀 꼴보기 싫긴 했어요. 후엉의 캐릭터도.. ‘소설이니까‘하면서 별5개 주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훌륭한 소설!

페넬로페 2023-11-30 2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만 보면 인문학적인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소설이군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미미 2023-11-30 21:02   좋아요 1 | URL
요즘 상황에도 대입해 볼 수 있어서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독서였어요. 그레이엄 그린은 말이 필요없는 것 같아요^^

stella.K 2023-11-30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안정효 번역가 올해 타계했는데 마지막 유작이었네요.
7월에 타계했으니 출판된 건 보고 돌아갔네요.
이분 소설도 잘 써는데...ㅠㅠ

미미 2023-11-30 22:31   좋아요 1 | URL
그랬군요!ㅜㅜ 번역 너무 매끄러웠습니다. 안그래도 오늘 독후감 쓰다가 번역자님 궁금해서 찾아봤었는데 돌아가신건 몰랐습니다. 소설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스텔라님 정보 고맙습니다.

달자 2023-11-30 22: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리뷰 보니 읽어야 할 것 같네요 정말 표지가 ㅋㅋㅋㅋ 지정학책같은 것일 줄 알았어요 표지만 보고... 새삼 표지의 중요성을 느끼네요

미미 2023-11-30 22:34   좋아요 2 | URL
달자님 요즘 글 안쓰셔서 아쉽습니다. 지난번 글 좋았고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
앞서 그레이엄의 소설을 두권정도 읽어봤거든요. 그래서 신간이 나왔을때 고민없이 사두고 표지의 문제는 뒤늦게 깨달았어요ㅋㅋㅋㅋ

달자 2023-12-01 23:11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에 계신 분들은 어쩜 그렇게 책을 읽고 리뷰를 잘 쓰시는 지 모르겠어요... 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ㅜㅜ

2023-12-02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01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잠자냥님 글 보고도 표지 보고 사회과학 책인 줄 알았다고 댓글 달았던 것 같아요 ㅋㅋ 표지가 잘못했네요 ㅋㅋ 표지와 달리 아주 재미있군요! 현 시국에 더욱 어울리는 독서 하셨군요 미미님

미미 2023-12-01 12:59   좋아요 1 | URL
묘한 삼각관계라 남자 둘이 주고받는 대화가 특히 재밌었어요. 전시 상황도 그렇고 여러 감정을 남겨주어 애정이 남는 소설입니다. ㅋㅋㅋㅋ표지땜 저평가된거 맞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12-01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글을 보니까 갑자기 지름신이 오네요... 사놓고 못 읽은 책이 너무 많은데 어쩌면 또 긁을지 모르겠네요.. 미미님 덕입니다 흑...

미미 2023-12-01 16:42   좋아요 1 | URL
베터님도 밀린 책이 많으실것 같아요!ㅋㅋㅋㅋ
그레이엄그린의 글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신념과 거기에 따르는 해악, 선과 악의 경계적 모호성을 여러각도에서 조명하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